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쩌다가 일이 꼬이게 된 것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백안의 끝으로 비춰진 풍광은 그야말로 종말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처지였다. 매서운 공기, 흩뿌려대는 먼지마저 방황한다. 갈 길 잃은 떠돌이 고양이 한 마리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자리에 멈추어 선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불씨들이 보여 거대한 기둥을 세우고 널브러진 콘크리트 조각이 흙바닥에 꽂혀 하나가 되었다. 위태로운 철근에 매달린 건물 외벽은 마지막 낙하를 준비했으며, 그 아래로 널브러진 따듯한 형상 하나가 보였다. 다섯 개의 손가락을 유지한 채, 한 팔만을 뻗으며 신음 소리를 내뱉는 사람. 한쪽 팔은 힘없이 주저앉아 본인의 몸에 깔려 찌그러져 가고 있었다. 결코 눈 뜨고 볼 수 없는 혈이 식은땀처럼 흘러내리기를 반복했고, 다리는 이미 붉게 물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푸른색이 상징이었던 전투복은 순식간에 붉게 변질되어만 갔다. 그들 주위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주라도 한 것일까, 확신하지 못할 가설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생각은 그것 뿐 이었다. 대전투 지역에서 감겼던 눈을 뜨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게, 마치 이 상황은 전부 허상이라는 것처럼 고요하기 그지없다는 게 왜인지 모를 소름이 온몸을 뒤집어씌웠다. 허나,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무언가 뒤틀렸다. 보이는 현상마저 뒤틀렸다. 상황을 설명하고자 말하던 혼잣말들도 바닥에 떨어져 늘어져버린다.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누군가가 반쯤 먹은 듯, 한 입 크게 베어 문 흔적이 보이는 권총 하나가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로 뚝, 떨어졌다. 먹힌 권총. 푸른색이었던 것이 분명한 권총 하나가 그이의 발끝으로 떨어졌다. 나무도, 건물도 없는 공활한 하늘 위에서 그저 갑자기. 손으로 집었는지, 그저 보고만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이 행동을 했음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이는 검은색 손이었다. 짙은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보통 인간의 팔이라면 완전한 검은색일 수는 없는 법이다. 본인의 검은 얼굴이 비추어질 정도의 검은 팔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었다. 검은, 팔. 순간적으로 권총을 떨어트렸다. 잡았던 사실조차 몰랐던 그이가 권총을 떨어트렸다. 이유는 불명. 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번뜩이는 백안이, 자신을 원망한다는 투로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백안이, 흰자가 없는 동공만이 그를 먹어 없애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으니까. 거대한, 사람보다 거대한, 큰!


“…형.”

“아, 잭아. 잘 잤어?”

“…형.”

“잭?”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잠깐의 침묵. 그것을 깨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단순해서, 그뿐이었다.


“…누구세요?”

“…응?”

“누구신데, 왜 이곳에… 저는 왜 여기 있어요?”

“잭, 제발 정신 좀 차려주면 안 돼…? 잭, 제발….”

“대체 누구신데, 저는 잭이 누군지도 모른다고요! 좀, 비켜주세요.”


선행성 기억상실증

현재의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하고 과거의 시간만이 흘러가는 병.


몽롱했다. 기분도, 느낌도 그저 몽롱하기 그지없었다. 중력이라는 것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붕 뜨는 느낌은 아직까지 잊혀 지지 않을뿐더러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축 늘어진 팔 사이를 움츠리게 만드는 거칠한 촉감과 발끝을 건드리는 부드러운 촉감이 빈약한 구멍 사이로 빠져나왔다. 자신이 베고 있는 베개의 들썩거리는 움직임은 심기에 거슬리지 않는 면에서 탁월했다. 울렁거리는 곳. 지극히 돌출되어 연약하기 그지없는 몸 사이사이에 화를 불러일으키는 흰색 천이 특히나 불에 태워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귀 옆으로 흘러 들어오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괴음으로 가득했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그에게, 청각은 더욱이 발달되어 있어서 그랬을까. 다채로운 음색을 가진 이들의 열띤 토론은 방 안에서조차 관람이 가능할 정도였다. 누군가 일어나지 않는데, 언제 일어날까, 에 대한 걱정부터 많이 다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디도 아닌 머리를 다쳐 최대 기억상실증에 걸릴 확률이 많다는 내용까지. 인자한 목소리, 다만 중간 중간 거슬리는 떨림을 소유한 누군가가 설명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두 명 정도의 목소리가 끼어들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화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능한 한 위로해주고픈 이야기가 아니지 않을까,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내뱉었다. 


몽롱함은 차마 가시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이 빙빙 돌아버릴 것만 같아서.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아다닐 것만 같아서 아직까지도 눈을 뜰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본인의 몸이 왜 푹신한 침대 위에 놓아져 있는 것인가가 궁금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손으로 움켜쥔 천이 엉거주춤 빠져나오려 애를 쓴다. 목이 조인다는 듯 그의 손을 툭툭 치며 당장 놓을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그는 그저 한쪽 입 고리만을 올렸을 뿐이다. 사실, 본인의 정신이 완전히 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분명히 일어나야할 것 같은데, 꼭 그러지는 못하겠어서. 푸하, 산소로 가득 채워져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 폐를 살리기 위해 벌려진 입 밖으로 이산화탄소를 뱉어냈다.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순간적인 힘 풀림 현상으로 인해 천의 목 조름을 멈추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순전히 본인의 감을 믿었다.


“잭 형! 아직도 자?”

“조용히 하자. 우리는 잠깐 상태 체크하러 온 거니까 굳이 깨울 필요는 없어.”

“…평소에는 잘만 우리 깨웠으면서.”


철컥, 다정하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감싸 안는다. 누구였더라, 그들에게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장가로도 사용 가능한 부드러운 목소리 옆에, 천방지축 장난 거하게 칠 것 같은 활기찬 목소리 옆에, 무덤덤하나 은근 누구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분명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다만 그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져만 가고 있었다. 둔탁하기 그지없는 발자국. 무엇에 의해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라고 의심을 품을 정도의 거센 발걸음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던 그에게로 최대한 가까워질 무렵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몸이 떨림을 자아냈다. 용기라고는 없는 가벼운 몸이 덜덜 떨리며 포근하게 덮고 있던 이불 또한 움직임을 보였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몸이 덜리고 있음을 인지했을 때에 이불을 덮고 있었으니 그것 또한 움직이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어… 형?”

“왜? 어디 안 좋아 보여?”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아니 그것보다 형 움직인… 건가?”


움직였다고? 진짜? 얇은 숨소리마저 피부로 느껴질 정도에 서 있는 이가 나지막이 읊조리자 갑작스레 활발한 목소리가 소리를 키웠다. 생각 외로 어지러워진 상황에서 어지럼증을 방지하고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제는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상황을 정리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지, 더욱이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이 고통스러워져만 갔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침대로 추측되는 곳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세 명의 사람이 들어오더니 얼굴을 들이대며 본인도 모르는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차마 말로 이룰 수 없는 충동적인 행동을 실행했을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뒤틀리듯 움직이도록 만드는 행동과 가만히 누워 눈을 뜨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 뿐. 상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후자가 나았기에 단지 눈을 떴을 뿐이다. 결코 익숙해지지 못할 조명이 두 눈을 찌르며 본인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시야에는 오직 붉게 바래버린 빛이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서 그저 바라만 보고는 있다만,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모락모락 김을 피웠다. 허나, 그의 몸은 생각보다 변화를 잘 받아들이는 몸이었다. 빛의 자리가 줄어듦과 동시에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단색. 그 무엇도 아닌 칙칙한 푸른빛이 도는 천장이, 자신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색, 바다와 하늘을 연상시키는 색이 아닌 마치 벌레를 가를 때 흘러내리던 푸른 혈이 생각나는 듯한, 왜인지 모르게 어정쩡한 푸른색이 그를 잡아 삼키려 했다. 그저 눈만 떠보였는데, 벌써부터 색에게 잡혀 먹힐 듯 이기적인 공포심을 주입 당한다. 결코 후회할 만한 일이라 생각하는 바였다. 다시금 그의 왼손은 이불의 겉면을 움켜쥐며 울음을 터트렸다.


다만 약간의 반항을 부리기로 했다. 일자의 형태로 뉘어져 있던 오른손을 공중으로 뻗어본다.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지는 것보다도 한 대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처지에 제 몸임에도 불쌍함을 느꼈다. 햇빛 하나 보지도 못했는지 온통 흰색 바탕에 삐죽 튀어나온 뼈. 다섯 개의 손가락들도 뼈의 모양을 그대로 따라가 근육이 붙어 있었기에 마디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다. 공중으로 떠오른 손이 지긋지긋한 빛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전혀 좋다고 웃음을 보일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떡하라고. 입 고리가 서서히 올라가며 기쁨을 토로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입을 벌린 채 유심히 그의 행동을 살펴보던 이들의 행동이 기름 붓지 않은 로봇처럼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말 하나 못하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두 눈을 깜빡이다 못해 그들의 푸르른 눈을 응시하더라도, 제 손도 간수하지 못해 바닥으로 낙하했다. 이 와중에 그들의 눈이 얼마나 개성적인지. 그저 아름다웠다.


“…형? 형, 일어난 것 맞지, 그치!”

“우리 말 들리면 뭐라도 해봐. 손을 흔든다던지, 눈을 깜빡인다던지.”


주황머리에 희색 후드 티를 입은 남성이 본인의 팔을 흔들며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활발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어린 아이와 같이 앳되어 보이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제 발로 나타나 명령한다. 본 지 몇 초도 되지 않았다고 친화력을 뿜어내는 모습이 왜인지 거슬렸지만, 그에게는 권력이 없었다. 이미 공중으로 올라갔던 팔을 일자 형태로 뻗어 그대로 흔들었다. 삐걱거리며 자꾸만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팔 또한 거슬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들리는 바였다. 몸을 웅크리며 눈물을 훔치는 소리도, 침대 가까이 다가오려 했지만 발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아 멍하니 숨만 뱉고 있는 소리마저 귀로 똑똑히 들려왔다. 무엇 때문에 난리인지는 나중에 물어봐야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잠자코 있어야 하는 처지란, 절로 한숨이 흘러내려 침대보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한 번의 한숨으로는 거친 무언이 빠져나가지 않자 다시금 폐를 부풀게 만들다 내보내려 했다. 분명 한숨이라는 것이 내보내졌어야만 했고, 조약돌 같이 거슬리는 심정들조차 빠져나가야 마땅했다. 다만 그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정반대였다고 말해도 무방했다. 저절로 아래를 향해 힘없이 낙하하는 오른손과 입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것. 그저 질퍽한 촉감이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을 뿐, 별 타격은 없었지만 그이를 바라보는 세 명의 시선은 결코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불을 지폈다.


“형, 괜찮, 아?”

“제미나, 빨리 휴지 좀!”

“아 씨, 잭 형은 휴지가 없잖아. 내 방 다녀올게!”

“…콜록.”


잭 형 기침해! 기다려, 제미니한테 무전으로 의료단원 데리고 오라 했어. 왜 이리 늦게 오는 건데! 형 지금 죽을 것 같다고! 류, 기다려.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두 명의 대화. 잭과 제미니와 류라는 사람의 이름이 첨부된 알 수 없는 내용의 대화. 이곳에 기침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던가, 혹은 저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으로만 머리를 굴렸다. 이곳에서 말을 더 이어나간다면 더욱이 피곤해질 것 같았기에. 피곤하다. 눈을 뜬지 몇 분도 되지 않는 때에 벌서부터 피로가 몰려들어왔다. 이 와중에 거추장스럽게 그의 주변으로 몰려있는 두 사람 덕에 다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좋을 선택이라고 말할 정도로 위축되어만 갔다. 휴지를 찾고 있는 갈색 머리 남성이든, 초조함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기만 할 뿐, 도움 되는 행동 하나 하지 않는 빨간 머리 남성이든 하나 같이 눈에 거슬렸다. 그저 포근한 침대에서 누워 있겠다는 사람 앞에서 예의라고는 없는 행동들 아닌가. 심지어 아는 사람들도 아닌 초면의 사람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장면 하나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결코 긍정적인 감정이라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검은 것의 등장이었다. 몸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침대에 누운 상태로 입을 열었다. 미끈한 액체가 흘러나오길 반복하였지만 상관은 없었다. 철을 씹는 비릿한 향도, 움푹하게 파여 들어간 볼 끝의 촉감도 그저 그러려니 넘어갈 뿐이었다. 제멋대로 붉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입에서부터 그들에게 그동안 내뱉고 싶었던 원한 섞인 감정을 조용히 토해낸다.


“…대체 다들 누구신, 콜록, 데.”

“…뭐? 아니, 잭….”

“잭이라는 사람도 모르겠고요. 사람 잘못 보신 것 아닌가요.”


갑작스러운 침묵. 그들의 목소리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착잡하게도 늘어져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모두 그의 탓이 되어버린 것 마냥 두 명의 붉고 푸른 시선이 그에게로 꽂힌다. 이불은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발버둥을 치며 요란한 소리를 자아내려 해도, 이불은 조용했다. 이불뿐만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 줄줄 새어 나오던 혈조차 조용하게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상황이 맞느냐, 라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라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기괴했다. 눈, 코, 입이 급속도로 뒤틀렸다.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에 붙어버리기를 자처했다. 팔은 꺾여 돌아가고, 부드러웠던 녹안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기나긴 행렬을 묘사한 적안은 바닥을 향해 떨어져 요리조리 주변을 구경한다. 그저 두려운 마음에 몸이 움직였다. 급히 상체를 일으켜 침대 끝으로 두 다리를 굴렸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방 안에 수십 장의 종이들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춤을 추는가 하면, 창밖으로 들어온 푸른색 천이 두 명의 입을 막아버렸다. 기괴했다. 심히 기괴했다. 그저 꿈이기를 믿고 싶었기에 뼈로 이루어진 주먹으로 이불을 잡고 있던 왼손을 내리쳤다. 아팠다. 피부 속 혈이 고여 퉁퉁 부은 손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동그랗게 그려진 붉은 점이 요란하게 그의 손등을 돌아다닌다. 뭐야, 뭐지, 대체, 이게 뭐야. 제대로 이루어진 생각들은 버린 지 오래. 와중에도 다리마저 반대로 꺾여버린 이들의 모습이 기억의 남는 한 순간을 반영한 것 같아서. 무슨 기억인지는 기억하지 않지만, 왜인지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잠시 눈을 감고자 덧없이 투명했던 백안은 세상 뒤로 숨겼다.


“잭…!”

“또, 또야. 또라고. 또-”

“나 왔… 는데, 흠. 상황을 짐작하니, 잭 형 또 쓰러졌어?”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해한 중화포격대 부대장은 오늘도 고개를 무심하게 끄덕였다. 처음에야 그들의 리더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 상황을 파악하는데 몸이 앞섰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야만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똑같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데, 갈피를 잡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각 없는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고. 잭은 오늘도 어김없이 입 안 가득 혈을 머금은 채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왼손에는 이불보를 꼭 움켜쥔 채. 목이 꺾일 듯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에 괜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단순히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잭이 불쌍해서일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 불쌍해서. 살아서 돌아오자는 전투에서 분명 살아서 온 것이 분명했지만, 정신만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것이 안쓰러워서. 그리고 두려워서. 두 손을 허리 위로 올리며 그의 녹안과 맞닿은 녹안을 바라보자 정보지원대 부대장은 천천히 입을 떼어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류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기에 그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 자체로 쉽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물어볼 확률은 극히 적었다.


“…응.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를 못하네. 아직은… 그보다 이상이 있는 건 맞았어. 잭이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

“선행성 기억상실증 아니었어? 과거를 기억하는데 현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응. 맞아.”

“그런데 왜, 우리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거야? 그 전투는 미세하게 기억한다고 쳐. 그래도 전 과거들은 기억해야 마땅한데, 우리도 사라졌잖아. 잭 형 기억 속에서.”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광대의 필수 소지품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에서야 주머니에서 빠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장소에 머물렀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나도 잭의 상태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니까.”

“**, 그럼 형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야?”


잭의 몸을 원상태로 돌려놓은 류가 천천히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순간에 찾아온 당혹감과 믿을 수 없는 현실이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는 죄. 제미니와 오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붉게 반짝이는 그의 적안을 응시하였다. 몽글거리는 것에 역류하는 무언가. 결코 좋지 만은 않은 감각이었다. 실로 최악이지,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혁명군의 리더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상생활은 물론 눈을 뜨자마자 각혈을 하며 죽어가려는 모습까지, 결코 살아있는 사람이라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심지어 본인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남처럼 말하는 처지이니, 그의 가족과도 다름없었던 세 명의 부대장들은 그저 무너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기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혁명군의 리더는 금이 간지 오래. 영원토록 그들의 기둥은 혁명군의 리더이자 은밀기동대 부대장인 잭이어야만 했으니까. 오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결단은 혁명군 리더의 역할이었다만, 지금은 그가 없으니 혁명군의 머리가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 인정한다는 듯 광대와 드래곤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를 내리라는 신호. 며칠 동안의 난리로 인해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오뉴의 눈이 잠시 잭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더 이상 혈의 향연도 그의 코를 녹이려 들지 않았으나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 리더, 리더를 보고 있는 본인조차 불쌍해져서.


벌써 이십 번이 넘어갔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그의 방에 들어간 것은 물론, 항상 그가 발작을 동반하여 입에서 흘러내리는 혈을 침대 위로 흩뿌릴 때조차 그는 리더의 곁에 있었다. 그래서였다.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


“…우선,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면, 본능적으로 기억이 사라지게 될 거야.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순간에는 더욱 빨리 사라져.”

“그래서?”

“약간의 연기를 하자. 혁명 전에 제미니와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다 적어놔야 해. 조금 친근한 말투로. 너는, 이런 식. 그 대신, 해가 될 만 한 내용들은 다 제외하고.”

“붉은 눈의 아이 죽은 거, 단원들 죽은 거, 부상, 납치… 이정도?”


오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마음에 내뱉은 막내의 발언에 긍정적인 표시를 남겼다. 제미니는 이미 이해를 마쳤다는 듯 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우리, 공책 하나가 필요할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두꺼운. 어쨌거나 그는 혁명군의 리더였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들은 잭이라는 자에게 과거의, 하지만 새로운 기억을 넣어보기로 했다. 그에게 해가 되었던 일들은 구멍으로 남기고 오직 행복했던 일만을 기억시키기 위한. 그들에게 있어 한 번의 전투마다 자신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지니고 우울해하던, 심지어 과거의 일들을 생각해냄으로써 비이상적인 행동을 자아내던 그를 새롭게 고칠 수 있는 때였다. 그들은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아무리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혁명을 지속하고 있더라도 그들의 리더 만큼은 행복한 꿈속에서 지내기만을 바랐다. 비록 꿈이라는 것이 거짓이어도. 지금 이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는 개조된 기대감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가자. 형 다시 깨어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어.”

“확인.”


“….”


몽롱했다. 기분도, 느낌도 그저 몽롱하기 그지없었다. 중력이라는 것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붕 뜨는 느낌은 아직까지 잊혀 지지 않을뿐더러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축 늘어진 팔 사이를 움츠리게 만드는 거칠한 촉감과 발끝을 건드리는 부드러운 촉감이 빈약한 구멍 사이로 빠져나왔다. 자신이 베고 있는 베개의 들썩거리는 움직임은 심기에 거슬리지 않는 면에서 탁월했다. 울렁거리는 곳. 지극히 돌출되어 연약하기 그지없는 몸 사이사이에 화를 불러일으키는 흰색 천이 특히나 불에 태워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귀 옆으로 흘러 들어오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괴음으로 가득했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그에게, 청각은 더욱이 발달되어 있어서 그랬을까. 다채로운 음색을 가진 이들의 열띤 토론은 방 안에서조차 관람이 가능할 정도였다. 누군가 일어나지 않는데, 언제 일어날까, 에 대한 걱정부터 많이 다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디도 아닌 머리를 다쳐 최대 기억상실증에 걸릴 확률이 많다는 내용까지. 인자한 목소리, 다만 중간 중간 거슬리는 떨림을 소유한 누군가가 설명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두 명 정도의 목소리가 끼어들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화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능한 한 위로해주고픈 이야기가 아니지 않을까,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눈을 떠 보인 것은, 본인 또한 몰랐다. 그저 떠야할 것만 같았다. 비록 자신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그저 떠보고 싶었다.


“이게… 뭐야.”


과도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때에, 순간적으로 그의 왼손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지만, 거친. 다만 그 무엇보다도 포근한. 얇은 손으로 무언가를 쥐어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왜 무겁게 느껴졌는지 알기까지 몇 초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눈을 떠 처음으로 바라본 것은 갈색 표지를 가진 노트였다. 빼곡하게도 적었는지 벌써부터 앞장이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잡은 흰 색의 뼈밖에 남지 않은 손. 그는 남은 한 손을 이용해 몇 백 쪽도 더 되어 보이는 노트의 앞장을 펼쳤다. 정갈한 글씨체였다. 급하게 쓴 것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글씨. 그저 아름다웠다. 글씨가 담은 내용을 보기 전, 한 번을 쭉 살펴본다. 모든 것이 글씨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은색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자국이 남아 있는 노트의 종이. 그 사이사이로 붙여져 있는 다양한 색의 종이들 위로 정갈한 글씨체라기보다는 어린 아이가 쓴 것 같은 삐뚤빼뚤한 글씨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괜히 웃겨서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다시 앞장으로 넘겨서. 한 글자씩 천천히 읽어보기로 했다. 물론, 머리 사이를 오가는 어지럼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읽었다. 읽고 싶었다. 몸이 그렇게 시켰을 뿐이다.


너는 잭이라고 해. 올해 스물다섯 살이야. 네 생일이 지난다면 스물여섯이 되겠지. 너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맡고 있어. 현재 난동을 부리고 있는 정부군들을 내려 보내고 새로운 정부를 만드려는 혁명군 집단 소속에 리더지. 그리고 은밀기동대 부대장.


간단하게 네 주변 사람들을 설명할게. 어렵게 설명하면 기억하기 어려우니까 옷과 생김새로만 구분해. 갈색 머리에 녹안, 녹색 전투복을 입은 사람은 너보다 한 살 형인 정보지원대 부대장 오뉴라고 해. 혁명군의 머리를 담당하고 있어.


주황 머리에 녹안, 주황색 전투복을 입은 사람은 너보다 한 살 아래 동생인 중화포격대 부대장 제미니. 너를 데리고 혁명을 처음 시작한 동생이야. 너를 가장 많이 괴롭히고 있지.


빨간 머리에 적안, 빨간색 전투복을 입은 애는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야. 그래도 인간 나이로 따지면 스무 살 정도 된대. 이름은 류. 선봉타격대 부대장이야. 이 사람들을 만나면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인사해줘. 너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니까.


한 쪽의 담긴 내용들을 읽어나갔을 무렵, 자연스레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비스듬하게 바라보니, 노트에 적혀져 있던 이들과 닮은꼴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난 것에 대한 놀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저 입 고리를 약간씩 올리기는 했다만, 석연치는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초면이지만, 친절했다. 너무도 친절해서, 그들이 주는 손길조차 따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노트에 적혀 있는 사람들 이라면, 노트 속에는 그들이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면.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믿어도 되는 걸까.


“잭,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형?”

“좋은 아침!”


짧은 침묵. 허나, 그것 또한 오래 가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야. 형, 그리고 동생들.”

404 ERROR 《에러 뜬 종이의 혁명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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