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핑계로 낡은 발코니가 있는 카페로 가서, 통유리창을 옆에 두고 붉은색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마하의 속도를 달리는 외제차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태양을 가진 도시는 호주의 멜버른만 있는 줄 알았다. 멜버른은 그만큼 기온과 날씨가 순식간에 변모하는 곳이다.
담뱃재를 으깨고 참기름을 가미한 쓰고 고소한 라떼(정확히 말하면 쓴맛이 99%, 약간의 고소함이 1%였다)를 한 모금 마셨을 때는 지구 멸망 10초 전 같은 날씨였다. 꿀렁대는 하늘이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오기 직전과 같이 불안했다. 우중충해서 차라리 비라도 쏟아졌으면 싶었다. 나무천장에 달린 자그마한 보석 모양의 전등 몇 개로는 칙칙한 분위기가 반전되지 않았다. 결국 눈이 침침해져 자리를 옮겼다.
참빗보다 세세한 햇살에 의지해 한 문장 한 문장 글을 완성하는 찰나, 시공간이 바뀌었다.
유리창을 통해 접한 바깥은 1월의 멜버른이었다. 태양이 잠깐 낮잠을 잤다며, 머쓱하게 다가와 하품을 했다. 그의 쩍 벌린 입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빛은 놀라울 정도로 눈부셨다. 밝은 햇살 속 꿋꿋하게 젖는 발코니의 나무테이블이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걸 말해주었다. 쨍쨍한 날씨에 내리는 얇고 수많은 빗방울.
층수 중 유일하게 발코니가 있던 15층의 셰어하우스에서 더위에 지쳐 누워있을 때 목격한 그 빗방울들이었다. 신기해서 처음으로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도 올렸던 날이다. 3개월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멜버른이기에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요즘에도 여전히 멜버른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다. 1년 전에 보았던 그 물방울들이 나를 찾아온 것 같고, 반가웠다.
영국인들도 맑은 날에 일광욕을 하러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눕는데, 빗방울이라고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늘로 올라가 구름으로 합쳐져, 줄 서서 이동하는 갈매기들보다 질서정연하게 단체로 이동해야 하는 그들이다.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이 과포화되어 지상으로 내려가는 순서가 되었을 때, 이왕이면 화창할 때 가는 게 좋을 테니까. 일조량이 늘어나면 비타민 D도 합성되고, 우울증도 예방할 수 있고 좋은 점이 여러 가지다. 치기 어린 아이들을 제외한 물방울도, 삶의 목표 1순위가 건강일 것이다.
맑은 날에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질수록, 건강한 빗방울은 늘어나고 있다.
누구에게는 무병장수를, 누구에게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맑은 날의 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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