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슙진] 그 시절, 그 마을에서-中

W.돼진잇진



"으, 춥다"


 윤기의 뒤를 따라 옥상으로 나온 석진은 매서운 칼바람에 넓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넌 안 추워?"

"딱히"


 저는 두꺼운 패딩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정작 코트 한 벌 덜렁 입은 윤기는 아무렇지 않아 하자 신기한 듯 윤기를 바라보는 석진이다. 그런 석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윤기는 으어-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기대앉았다.


"추우면 반 가고"

"싫어"


 다급히 윤기의 옆으로 가 앉은 석진은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하아- 하는 석진의 숨에 하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 흩어진다.


"여기서 자고 입 안 돌아간 너도 참 대단하다."

"많이 추워?"

"내 귀 안 보여?"


 석진의 말에 귀를 쳐다보니 정말 빨갛다. 춥긴 정말 추운지 벌게진 코끝으로 훌쩍이는 석진을 보며 슬며시 웃은 윤기.


"다음엔 음악실 가자"

"음악실?"

"응, 거기도 열려있던데"


 가면 안 되는 건가. 물어오는 윤기의 말을 석진이 덥석 잡는다.


"돼, 어차피 점심시간은 애들 없으니까. 히터 틀고 거기서 자자"


 활짝 웃으며 위아래로 고개를 흔드는 석진의 모습을 본 윤기가 입을 가리고 크게 웃는다. 그런 윤기를 이상하다는 듯이 석진은 곧이어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쳐다본다.


"그나저나 하늘 예쁘네"

"그러게. 예쁘다."


 석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을 채로 대답하는 윤기. 석진은 하늘을, 윤기는 석진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


"근데 윤기야,"

"...어"


  깜짝이야.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석진에 놀란 윤기의 어깨가 약간 들썩였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왜 전학 온 거야?"


 석진의 질문에 대한 의중을 찾기 위해 잠시 아무런 대답 없이 석진을 바라보던 윤기는 곧이어 뜻을 이해하고 대답한다.


"부모님 일 때문에, 이번엔 여기로 발령 받으셨나 봐"


 아아- 부모님 일 때문에. 석진이 생각한 사유 -같은 반 친구 누구를 때려서- 가 아니라 전형적인 부모님의 착한 아들이라 할 수 있을 사유였다. 윤기의 대답에 하품을 쩍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석진.


"그래서 네가 좀 고맙더라, 내가 성격이 좀 그래서 친구 사귀기 힘들었거든. 맨날 혼자였는데 처음으로 누가 옆에 있어 줘서.."




 툭- 한번 말하니 말문이 터진 윤기의 어깨에 작은 묵직함이 전해진다. 정말 어이없는 타이밍에 어이없게 잠이 든 석진의 작은 머리통이 윤기의 어깨에 올려졌다. 아깐 뭐 입돌아간다며 툴툴거리던 애가 지금은 잘만 자고 있는 게 웃기고 어이없어 아무 말 없이 석진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는 윤기. 두어 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더니 큰 손을 들어 올려 석진의 눈을 비추는 햇살을 가려주는 윤기의 귀가 붉다.





*




 춥다. 누가 창문 안 닫았나. 아 바람 들어오잖아, 누구야 누가 문 좀 닫아!!!!


 츄읍- 아 꿈이다. 입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석진은 낡은 학교 옥상을 보고 몸 위에 놓인 윤기의 코트를 끌어 올린다.


“큽……. ㅋㅋㅋ…. 풉...”


 옆에서 입을 막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윤기의 모습을 본 석진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받았다. 귀가 홧홧한 걸 보면 분명 귀는 새빨개졌을 거다. 개쪽팔려. 통통한 아랫입술을 꽉 깨문 석진이 셔츠만 입은 윤기를 째려본다. 어,


"야 민윤기"

"어?"


 아직도 웃긴 지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윤기.


“너 코트 왜 벗었어 안 추워??”


 석진의 말에 머쓱한 웃음을 짓는 윤기. 석진은 그런 윤기의 표정에서 환멸을 느끼며 얼른 자신의 몸 위에 놓인 코트를 윤기의 어깨에 걸쳐준다.


"네가 너무 벌벌 떨면서 자길래. 난 괜찮아서"

"미쳤구나, 네가. 오늘 영하야 윤기야."


 저저 코 빨개진 것 좀 봐라. 추웠을 텐데. 옷까지 벗어주는 윤기의 따뜻함에 석진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 열불이다. 석진의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안 되겠다. 지금 몇 시야?? 얼른 따뜻한데 들어가자"

"6시"

"어?"

"6시라고. 학교 끝났어."


ㅈ됐다. 이 추위에 여섯시간이나 방치된 민윤기는 분명 감기에 걸릴 것이고, 난 분명 대학에 못 갈 것이다. 유일한 자랑이라곤 개근이었는데. 망했다.






**






엣취-!!!!


“어제 추운 데서 너무 오래 있었나”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운 석진은 자꾸 흐르는 코를 훌쩍인다.


똑똑-


“석진이 어디 아파?”

“아니요, 그냥 감기 좀 걸린 것 같아요”

“많이 아픈 건 아니지??”

“네, 멀쩡해요”


  멀쩡하단 말에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에 석진은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다.


“저 산책 좀 갔다 올게요”

“몸 괜찮은 거 맞지?”

“그럼요”

“아들, 따뜻하게 입고 나가!”


 어머니가 챙겨주신 목도리까지 야무지게 챙겨나온 석진은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섬을 여몄다. 끼익하는 낡은 대문의 세월의 소리와 함께 문밖으로 나온 석진은 문득 과자가 먹고 싶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슈퍼로 향했다.


“3,900원-”

“네, 잠시만요…. 어”


  아 망했다. 백팩에 지갑 넣어두고 그대로 까먹었다. 롱패딩 깊숙한 곳에 오천 원짜리라도 없을까 싶어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보는 석진이다. 싹싹한데 가끔 덜렁일 때가 있는 석진이 고등학교 때부터 가끔 마트에 올 때면 지갑을 깜빡하고 오는 경우가 있는지라 그저 여유롭게 석진을 바라보는 주인 할머님.


“할머니 세 번째 줄 두번째꺼랑 같이 계산해주세요”

"이거??"

"네"

“8천 400원-”


 울상인 석진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만 원짜리가 내밀어진다.


“민윤기?…”

“넌 맨날 지갑 두고 다니냐”

“아니거든”


 성질 부리면서도 과자와 젤리를 품에 안는 석진에 윤기는 소리 없이 웃는다. 그때, 계산대 위에 놓이는 담배 한 갑과 거스름돈. 석진은 담뱃갑을 자연스럽게 챙겨 드는 윤기를 바라본다.


“..너 담배 피워?”

“응”

“언제부터?”

“글쎄, 스무 살 되자마자?”

“왜??”

“그냥, 아는 형한테 배웠어.”

“어떤 아는 형??”

“뭘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그냥 작업 같이하던 형 있어.”

“그래?”


 석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엄청 의외다. 그냥... 그냥 민윤기는 담배를 안 필 것 같았다. 10년 전 고등학생의 민윤기도 어제의 민윤기한테서도 언제나 그랬듯 좋은 냄새만 났었다. 잠시 내려앉는 침묵. 이어 석진이 입을 뗀다. 근데 윤기야...


“우리 술 마실래?”




*




 석진의 손엔 신쫄이, 윤기의 손엔 소주가 담긴 작은 종이컵, 그리고 가운데 포장지를 활짝 펼친 새우깡 한 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둘은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자 말없이 건배한다.


“근데 신기하다.”

“뭐가”

“너랑 술 마시는 거. 예전엔 왜 있잖아. 넌 맨날 우유 마시고 난 밀키스 마셨는데. 아 근데 넌 왜 이렇게 안 컸냐"

“야”


 장난스레 웃는 석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에 잠시 울컥한 윤기도 웃음이 터진다. 한두 잔 투닥거리며 마시다 보니 어느새 6시가 넘었다. 네 병쯤 깠을 땐 석진은 이미 잔뜩 취한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넌 이상형 같은 거 없냐”

“갑자기?”

“뭐가, 그냥 궁금하잖아. 잘생긴 게 연애도 안 하고”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쑥스럽네”

“말 돌리지 말구, 우-”


 석진의 재촉에 난감하다는 듯이 웃는 윤기. 그런 윤기의 반응은 상관없다는 듯이 석진은 손까지 휘적이며 윤기를 재촉한다.


“넌?”

“나?”

“응, 너부터 말해봐”

“나... 나는...”


석진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윤기를 바라본다.


"나느은.. 까만 머리.. 까만 머리가 좋아. 까만 머리에 하복이 잘 어울리는, 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하얀 남자애."






**




“내일 졸업사진 찍는다고?”

“어, 점심시간에 찍는다고 하던데 그래서 내일 밥 같이 못 먹어”

“먹고 찍으면 안 돼?”

“찍고 먹으래”

“쓰레기 같은 학교. 무슨 밥도 안 먹이냐”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자기가 더 화를 내는 석진을 보며 웃는 윤기. 한참 뒤, 윤기는 직진을 석진은 왼쪽으로 꺾어야 하는 갈림길에서 석진은 윤기를 바라본다.


“아니면 내가 너 기다릴까?”

“너 배고플걸”

“매점 빵 먹으면서 기다리지 뭐”

“맘대로 해”

“대신에 끝나자마자 바로 뛰어와. 배고프니까”


 뒤돌아 윤기를 보며 신신당부를 하는 석진에 윤기는 알았다며 손을 휘젓는다.


“앞에 보면서 가. 넘어지니까”

“안 넘어 ㅈ...”


 뭐, 넘어지진 않았다. 발을 좀 삐어 웃긴 몸개그를 했을 뿐이지. 몸을 크게 휘적이던 석진은 중심을 잡자 온 얼굴이 빨개진 채로 윤기을 바라본다. 웃음을 참느라 윤기 얼굴도 빨개져 있었다.


“웃지 마”

“안 웃어”

“웃잖아, 지금.”

“빨리 가기나 해, 또 넘어질라”

“넘어진 거 아니거든!”

“아 알았다고오- 가 얼른. 추워”


 끝까지 콧바람 씩씩거리던 석진은 더이상 윤기와 있어봤자 놀림이나 당하겠단 생각을 하고 얌전히 뒤돌아 집으로 간다. 부러 삐진 티를 내겠다는 건지 팍팍 걷는 석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윤기는 그 자리에 웃으며 서 있다.




*




“민윤기 왜 안 와”


 다음 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윤기에 이러다 점심시간 다 끝나겠다 싶은 석진은 윤기를 찾기 위해 반을 나선다.


“아우 추워”


 어떤 놈이 창문을 열어놨는지 칼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바람의 출처를 찾는 대신 석진은 셔츠 위에 걸친 얇은 학교 가디건의 앞섬을 여민다.


“석진아!”

“야, 너 왜 이렇게 늦게 와!..”


 이러다 배고파 쫄쫄 굶어 죽겠다!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석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까만 머리에 흰색 하복 셔츠를 입은 윤기가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석진의 귀가 뜨겁다. 아니, 온몸이 더워졌다. 아무래도 누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복도 창문을 닫은 게 분명했다.


“...너 왜 하복 입고 있어?”

“학주가 하복 입은 것도 안 찍었다고 같이 찍으라 해서”

“샀어?”

“아니, 반 친구 거 빌렸지”


 그래서 그런데- 답지 않게 말을 길게 잇는 윤기의 표정이 아주 약간 울상이다.


“나 추운데 체육복 좀 빌려주라”

“내꺼?”


 많이 추운지 오들오들 떨며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에 석진은 제 몸이 망가진 것 같았다. 난 엄청 더운데, 지금.


“잠시만”


 석진이 느린 발걸음으로 언제 넣어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체육복이 짱박힌 사물함으로 다가간다. 얼마 전에 체육 해서 땀 냄새 쩔 것 같은데.


“싫어”

“아 장난치지 말고. 나 추워”

“옷 갈아입으면 되잖아”

“점심시간 다 지날걸. 배 안 고파?”


 배 안 고프냐는 윤기의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배고팠는데, 오늘 돈가스 나오는 날이라 꼭 먹어야 하는데. 속이 울렁였다.


“안 먹어”

“오늘 돈가스야”

“배불러, 안 먹을 거니까 너 가”

“...아파?”

“아 그냥 가라고-!”


 걱정스레 바라보는 윤기를 교실 밖으로 내보낸 석진은 문을 꽝 닫곤 책상에 엎드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절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생겼다.




**




“근데 없더라, 내 이상형. 하긴 졸업하니까 교복 입을 일도 없고. 아, 딱 한 번 봤다. 왜 있잖아. 우리 고3 겨울에, 그때 봤어.”

“진아”

“넌? 연애 안 해?”

“..응”

“왜?”

“그냥, 부질없는 것 같더라”

“안 해보고 그걸 어떻게 아냐-”


 말꼬리를 늘리며 새우깡 한 개를 입에 넣는 석진. 윤기는 말없이 과자 한 봉지를 더 뜯어 석진의 앞에 부어준다.


“해봤어”

“어?”


 윤기가 부어준 과자에 다시 한번 뻗던 석진의 손이 멈춘다.


“그냥, 관심은 없는데 같이 작업하던 형이 소개받아보라 그래서,”

“그 담배 알려준 형?”

“응”


 꼬북칩, 저거 새로 나온 맛이래서 먹어보고 싶었는데. 입맛이 떨어진 석진은 입술을 깨문다.


“근데 그냥 그렇더라. 깊은 감정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뭐.”

“얼마나”

“어? 어, 야 너.”


 술김에 고개를 숙이고 말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석진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 같다. 과자 부어줄 땐 오히 려 웃고 있던 것 같았는데. 윤기의 머릿속이 하얘진다.


“얼마나 만났냐고”

“..1년 정도. 근데 석진아, 진짜 깊은 감정도 아니었고-”

“깊은 감정도 아닌데 1년이나 만나?”


 윤기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닮았었다. 석진과. 처음 만났을 때 윤기는 석진이 여장하고 나온 줄 알았다. 자기한테 장난치려고 가발까지 쓰고. 근데, 대화 몇 번 해보니 금방 석진이 아닌 걸 알았다. 확실히 달랐거든. 그 뒤로 몇 번 만나다 수민이 먼저 고백해서 사귀었다.


‘너 나 사랑하긴 했어?’


 인터넷 소설 같은 데서 자주 본 것 같은 대사와 함께 이별을 고하는 수민을 윤기는 아무 말 없이 놓았다. 수민의 절절한 이별의 순간에도 윤기는 우는 수민의 모습에서 석진을 보았으니까.


“나는... 나한텐.. 어떤 감정인데?”


 그래, 딱 저 얼굴. 윤기의 입이 바싹 마른다. 석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윤기의 가슴이 쓰렸다. 당장이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다. 울지말라고.


“추웠는데.. 새벽에 혼자 기다리기 힘들었는데,”

“석진아”

“나, 갈래”

“잠깐만 김석진”


 벗어놓은 패딩도 안챙기고 급히 현관으로 걸어가는 석진을 윤기가 잡는다.


“...자고가”

“싫어”

“너 취했어”

“멀쩡해”

“고집 부리지마 김석진”

“너나”


 3초, 딱 3초 동안 눈을 마주쳤다. 석진의 눈은 빨개진 채로 젖어있었다. 쇼파에 올려둔 석진의 롱패딩을 가져와 석진의 어깨에 걸쳐주는 윤기.


“데려다줄게”

“필요없어”

“...미안해”


 사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석진이 왜 화가 났는지도. 만약 석진이 뭐가 미안한데? 라고 물어봤다면 윤기는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미안했다. 윤기가 손을 들어 석진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준다.


“윤기야”


 윤기의 손을 잡아 내리는 석진.


“늦었어”


 석진이 윤기의 손을 놓았다. 다급히 뻗어 석진을 붙잡는 윤기의 가엾은 손을 석진은 모른 척 떠나갔다. 또 놓쳤다.


슙진 메인 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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