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소설은 픽션입니다.

* 초고완성 : 2005년 

copyright © 2021 Sanare 사나래 / tmiill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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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동안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습한 소금기를 머금고 지나쳐가고 있었다. 귓가를 어지럽게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부드럽게 흘러갔다. 아니 그 부드러움은 바람이 아니라 마루의 목소리다.

“제가 찾는 건 물건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갑자기 붙들려서 당황하셨을 텐데. 이렇게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선배.”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는 마루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바다의 목소리로 주위가 시끄러운데도 마루의 작은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후회라는 걸 할 테니까, 그렇게 계속 뒤에서만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만약 선배가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더 늦어졌을지도 몰라요.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선배가 전학을 가게 되어서 제가 결심을 할 수 있게 된 거니까, 저한테는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아, 그,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도 선배와 멀어지게 된 건 너무 슬펐으니까. 그래서 더 용기가 생긴 건지도 몰라요. 그 방법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긴장해서 줄줄이 말을 늘어놓는 마루의 모습이 새로웠다. 진지한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마루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있어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직 모든 걸 말한 건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사랑스러움이 강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동아리 선배한테 선배가 전학 간 학교 이름 알아내서 기다렸어요. 선배 볼 때까지요. 보면. 보면 말 걸 수 있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워서. 정말 아까 선배를 붙잡은 건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놀라셨죠? 죄송해요.”

폭 숙인 고개를 들 생각을 못 하는 귀엽고 안쓰러운 후배를 지켜보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렇게 계속 고개 숙이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난 사과받고 싶지 않은데.”

그러자 마루가 후딱 고개를 들고 낭패에 젖은 얼굴을 해 보인다.

아. 그 모습이 매우 마음에 들어 큰일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 진짜 울리겠다.

“괜찮아. 난 좋았거든. 갑작스럽긴 했지만, 마루를 만날 수 있어서. 그리고 나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 너랑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았고 말이야.”

사실이었다. 마루와 대화를 하고 얼굴을 마주 볼수록 기시감이 생겨났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잔잔히 불어오는 녹진한 밤바람 속에서 어두웠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계속 쭉 다로 선배를 지켜봐 왔어요. 제가 다니는 중학교와 선배의 고등학교가 가까웠기 때문에 전 항상 등하교하는 선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1학년 때 처음 봤을 때부터.”

마루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무언가 기억나는 듯했다. 잘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따뜻한 눈이 항상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 눈은 크고 커다래서 마치 검은 바다처럼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배와 마주친 적도 있어요. 선배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선배가 다니는 학교에 가면 선배를 더 많이, 곁에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저 고등학교 문형으로 가려고 했거든요.”

그러면서 마루는 아쉬운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선배가 갑자기 전학을 가는 바람에, 물론 이렇게 다시 쫓아오게 됐지만, 이런 건 기분 나쁘게 생각하실 것도 같고 많이 망설여졌어요. 선배가 있는 동아리에도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연락하기가 쉽지 않고,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꼭 말하고 싶었어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렇게 여기로 오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루가 말 할 수 있도록 바다가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크게 울던 파도와 바람이 어울리지 않게 어느새 산들거리며 조용해져 있었다. 단단히 나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줄곧, 조심히 나를 쫓던 얼굴. 작고 귀여운 게 흘깃 쳐다보던 것도. 서로 말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언제나 스쳐 지나가던 예쁜 눈을 가진 중학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간은 너무나 빠르고 혼탁해서 그 간절함과 설렘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눈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아니, 알고 있었어.”

마주 보는 눈 속에 놀라움이 깃들여졌다. 하지만 이제 곧 내가 원하고 붙잡아 두고 싶든 따뜻함으로 변할 것이다.

“네가 날 붙잡았을 때도 그 눈이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에 뿌리치지 못했던 걸 거야. 알고 있었어. 그런데 잊고 지냈던 거지. 이렇게 가깝고, 그렇게 쉬운 장소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는데. 말만 하면 됐을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네 덕분이야 마루야.”

나의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감싸 안았다.

“다로 선배, 정말 좋아해요.”

마루의 눈가가 설핏 일그러져 엄지로 살짝 문질러주니 붉게 물들며 예쁘게 빛났다.

그제야 조용했던 바다가 다시 말을하기 시작했다. 바다 자신의 목소리로 우리의 수줍고 따뜻한 감정을 감싸 안아 주려는 듯이 보였다.

바람에 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져 주었다. 이 손짓 하나로 모든 불안이 사라지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길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60분이 지나서 비로소 서로의 빛을 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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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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