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등교였다. 남준이 형이 본인이 알아서 처리해준다더니, 다행히 빈말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형이 내밀어놓은 서류가 효과를 발휘했나 보다. 평소 처방전이나 진단서를 낸다 해도 봐주지 않겠다던 교수님들도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갈 정도였다. 당연히 혼내실 거로 생각하고 바짝 긴장한 게 무안할 정도였다. 간간이 지나가는 말로 몸 잘 챙기고, 성실하게 다니라는 언질을 하는 게 전부였다.

책상과 의자가 붙어있는 불편한 책걸상에 몸을 욱여넣었다. 전정 국도 같이 듣는 전공수업이었다. 사실 같은 수업이고, 아니고를 따지는 게 무의미했다. 애초에 전정국과 내 시간표는 몇 개 빼고는 그대로 갖다 붙인 듯 똑같았다. 그도 그럴 게 과 조교인 석진이 형을 통해 알아낸 뒤 그대로 따라 한 탓이었다. 이렇게 마주하기 민망한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 걸 그랬다. 괜한 짓을 했다고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날 그렇게 입원을 하고, 이틀 내내 병실에 누워 있다가 드디어 퇴원한 거였다. 그리고 다시 등교하는 지금까지 전정국에게서 온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 연락을 잘하는 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함에 초조한 마음으로 보낸 날들이었다. 마주치면 어쩌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날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고 싶으면서도, 혹여나 정국이가 내 말을 끊고, ‘그만 해요’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구질구질한 내 모습과 지긋지긋했을 이 관계를 다 밀어낼까 봐 전정국을 피하고 싶었다.

뒷문 바로 옆에 앉아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튀어가야지. 계획은 단순했다. 남준이 형이 데리러 오겠다고 미리 말하긴 했다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일단 학교를 빠져나간 뒤 연락해도 큰 무리는 아닐 테니까. 남준이 형이라면 이해해줄 게 분명하기도 했고.

 

“그럼, 이걸로 오는 강의를….”

 

교수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엉덩이를 뗐다. 한 10분 전부터 의자에서 반쯤 떨어진 채 들썩거리던 참이었다. 책걸상에서 몸을 빼내고, 문고리를 돌리려는 찰나 전정국이 내 가방의 한쪽 끈을 잽싸게 낚아챘다.

 

“우리 얘기 좀 해요.”

 

두 눈을 끔벅였다. 싫다는 말이든 좋다는 말이든 뭐든 내가 선수 쳐야 하는데, 말이 목구멍에 콱 걸리기라도 한 건지 좀처럼 나오질 못했다. 마음만큼이나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말없이 앞장서서 걷기만 하던 정국이는 경상대 건물 뒤편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이마저도 혹 누가 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난 후에야 열린 입이었다. 위치가 캠퍼스 내인지라, 이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했다.

 

“애인이에요? 아니면 새로운 섹파인가?”

“…응?”

“선배님 집에서 봤던 그분 말이에요. 직장인 같던데. 연하랑 놀아보니까 연상 만나보고 싶었나 봐요?”

“…….”

 

정국이는 굳은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물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조소를 짓는 거로 보아 내게 짜증 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쳐다보기만 하자, 전정국은 답답한 모양인지 말을 덧붙였다.

 

“섹파 만들 거면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왜 사람을 바보 만들고 그래요.”

“정국아.”

“나는 선배님이 서운해할까 봐 줄 서서 기다리는 애들 다 돌려보냈는데. 선배가 이렇게 즐기고 있는 줄은 난 또 몰랐네.”

“그게 아니라….”

“되게 좋은가 봐요? 본가 간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면.”

 

무슨 말을 하려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좀처럼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쏘아대는 전정국 탓에 결국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녀석은 제가 할 말을 다 토해내고도 답답한 모양인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왜 거기 있었는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 안 나왔다. 정국이가 애인도 아닌 날 못 믿는 게 당연한 걸 알면서도 괜스레 서운했다.

내가 서운함에 잠식한 사이, 전정국은 나만 이곳에 둔 채 걸음을 옮기려 했다. 황급히 정국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내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어디선가 빠앙- 하는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어찌나 힘차던지, 둘 다 동시에 클락션이 올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바라봤다.

 

“데리러 온다니까.”

 

남준이 형은 뚜껑만 빼고 온통 붉은색인 레인지로버 스포츠에 몸을 기댄 채 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 늦은 시각까지 재판 관련 서류를 읽다 잠들었을 거다. 그러기에 피곤하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기어코 차까지 끌고 달려온 모양이다. 형은 나와 정국이가 서 있는 곳까지 긴 다리로 단숨에 걸어왔다.

 

“또 보네요.”

“네.”

 

형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정국이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우리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파악한 것인지, 내가 붙잡고 있는 정국이의 소매를 곁눈질로 내려다봤다.

 

“태형아, 혹시 아는 동생이랑 선약 있었어?”

 

남준이 형은 일부러 ‘아는 동생’이라는 부분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정국이나 후배 등의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졌지만, 어떤 제재를 취할 수는 없었다. 그저 형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러자 전정국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허-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형은 그런 전정국을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평소와 같은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태형아, 혹시 할 얘기 있으면 간략하게 하고 와.”

“응.”

“배고프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하는 말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저 눈빛을 백이면 백 오해한다지만, 남준이 형은 기본 디폴트가 다정인 사람이었다. 아마 신이 남준이 형을 만들 때 ‘다정함’을 넣는 수준이 아니라, 실수로 콸콸 들이부었을지 모른다.

주차해 놓은 차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정국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정국은 제 눈썹을 긁적이더니, 메고 있던 가방에서 신경질적으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도 지체 없이, 한 까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정국이가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 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안 가요? 재미 봐야죠. 차까지 준비한 거 보니까….”

 

정국이는 말을 하다 말고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멈추자, 정국이 입에선 희뿌연 담배 연기가 또 한 번 길게 뿜어졌다. 녀석은 서늘한 눈빛과는 별개로 입꼬리만 주욱 당겨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선배님이 카섹스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무슨 소리야. 남준이 형은 그냥 아는 사이야.”

“선배는 저도 그냥 아는 사이잖아요.”

“…….”

“뭐라 하는 거 아니에요. 섹파 사이에 유치하게 무슨.”

 

전정국은 새하얀 담배를 깊게 빨아드리고, 내뱉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매캐한 담배 냄새만큼이나 전정국 입에서 뱉어지는 모든 말들이 쌉싸름한 맛이 났다.

서운했고, 답답했고, 속상할 뿐이었다.

 

“가요. 나도 재미 보러 갈 거니까.”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을 끝낸 정국이는 반이나 남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새까만 운동화의 앞부분으로 짓이겨 밟았다. 붉은 불씨가 사라지자, 이내 하얀색의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전정국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소매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일 궁금한 한 가지만 묻고 싶었다.

 

“이제 다시는 나 안 찾을 거야?”

 

구질구질하고 처량하기 짝이 없는 말이 자존심에 발목 잡혀 내뱉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그 관계가 끝났을 때 제일 아쉬운 건 전정국이 아닌 나였다. 그걸 잘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썩어 문드러지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푸르고 맑은 하늘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 대신 연신 소낙비라도 내려주면 좋을 텐데.

침울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자, 남준이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내게 할 말이 많아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찾아온 걸 알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위로받고 싶었다. 내가 안전벨트를 하고, 형이 차에 시동을 걸고, 그리고 운전 중인 차가 멈출 때까지 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끅거리는 내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그에 맞춰 클래식 음향을 키워줄 뿐이었다.

 

“킁.”

“넌 나이가 몇 갠데 코를 먹고 그러냐.”

 

소매 끝자락으로 벌게진 눈가를 벅벅 닦는 나를 향해 남준이 형이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 와중에 휴지를 쥐여주는 게 고마워서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까짓 눈물 좀 참아보겠다고 창문을 내린 채 덜덜 떨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유난스러워 보여도 허벅지도 꼬집고, 괜히 고개를 들어 천장도 바라보고 그럴 걸 그랬다.

눈물이 그치기는커녕, 좀 전에 열어놨던 창문으로 들어온 찬 공기 탓에 재채기와 콧물이 쉴 새 없이 나오는 중이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서야, 활짝 열어두었던 창문을 도로 닫았다.

그제야 차가 서울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린 지 꽤 지났을 텐데 이제야 알아차린 게 우스웠다. 대체 얼마나 훌쩍거렸길래, 서울을 벗어나는 줄도 몰랐을까. 코맹맹이 소리로 입을 삐죽이며, 남준이 형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 가요?”

 

그러자 형은 빨리도 물어본다, 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제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정신 교육에 좋다는 병영 캠프에 가는데?”

 

호석이 형도 군대에 처넣는다느니 하더니. 이 두 형이 어쩌다 군대, 군대 외치는 꼰대가 되었나 모르겠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설움도 잊고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자, 남준이 형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턱 빠지겠다, 인마. 병영 캠프는 무슨. 밥이나 먹자.”

 

남준이 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드럽게 움직이던 차가 드디어 멈추어 섰다.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조용한 식당이었다. 차가 있어야 오기 좋은 위치인 탓인지, 규모에 비해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굳이 룸이 아니어도 주변 신경 쓰지 않고 대화하기에 편한 그런 곳이었다. 보나 마나 남준이 형이 제 의뢰인들을 모시고 자주 오는 곳일 거다.

 

“밥 나오기 전에 얘기하자. 무슨 말 할지 생각하면서 밥 먹으면 체해.”

“형….”

“말 안 하면 두고 갈 거야. 오면서 봤지? 여기는 택시도 안 들어올걸?”


남준이 형은 웃는 낯으로 협박이나 다를 거 없는 말을 했다. 내가 입을 삐죽이거나 말거나.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린 이상 말은 해야 했다.

 

“무슨 사이야?”

“그게 좀 애매한데….”

“뭐가 어떻길래 애매하대? 말해봐. 형 직업 알잖아. 애매한 상황 많이 봐와서 익숙해.”

 

형은 이 와중에 직업병이 발동한 모양이다. 기록을 위한 수첩이나 녹음기를 안 꺼낸 게 다행이었다. 얼결에 의뢰인의 입장으로 앉아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걜 좋아해, 근데 걔는 아니야.”

“뜸 들일 땐 언제고 뭘 그렇게까지 간단하게 말해. 딱 보니까 단순히 짝사랑하는 거 같지는 않던데. 걔도 알지? 너가 지 좋아한다는 거.”

“무슨… 걔는 몰라. 그냥….”

“그냥 뭐?”

“그냥 섹파 사이야. 걔는 내가 지 두고 다른 섹파 만들었다고 생각해서 짜증 난 거고.”

 

내 말에 형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에피타이저로 나온 양송이 수프와 샐러드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도, 형은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긴 당사자를 앞에 두고 우리 사이를 섹스 파트너 관계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셈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아마 내가 그런 말을 들은 입장이었다면, 펄펄 날뛰었을지 모른다.

이런 남준이 형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닌지라, 그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괜한 말을 꺼내서, 바쁘게 정리 중일 형의 머리를 더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종업원이 빈 접시를 가져가고 나서야 남준이 형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어?”

“그만 본다거나, 열심히 꼬셔서 연애하겠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목표랄 게 없었다. 호석이 형이랑 말할 때는 그저 박박 우기기에 급급했던 게 사실이었다. 전정국이 좋아죽겠으니까. 그리고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나 역시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더 그랬다.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그것마저 안 하면 갈피를 잡지 못한 내 마음이 다 들통날까 봐.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까 봐 무서웠다.

연애는 진즉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애초에 전정국이 나 따위에게 넘어올 리가 없었다. 손만 뻗으면 나보다 괜찮은 애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올 텐데, 그런 애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외모는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성별과 타고난 호르몬을 바꿀 수 있는 해답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낮에 정국이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가요. 나도 재미 보러 갈 거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청하게 넋 놓고 있었으면서, 뒤늦게 떠오른 그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안 만나준다고 해도 괜찮았다. 언제든 괜찮은 오메가가 나타나면 떠날 거라고 말해도 괜찮았다. 그저 지금만큼은, 오롯이 나하고만 몸을 섞길 바랐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쩌지. 이게 대체 왜 이제야 생각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초조해진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이러다 손톱이 다 사라진다 해도 괜찮았다. 그냥 전정국이, 다른 사람과 몸을 섞고 있지 않은 전정국이 보고 싶어졌다.

팔을 뻗어 남준이 형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미친놈이라고 욕해도 좋으니 제발 나 버리고 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무교 주제에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들어달라며 마음속으로 황급히 기도를 올렸다. 잠시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뜨자, 남준이 형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왜 그래?”

“남준이 형….”

“…….”

“정국이한테 갈래요. 나 좀 데려다줘요.”

“…….”

 

또다시 터진 눈물은 쉴 새 없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요.”

“김태형.”

 

남준이 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계속해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 탓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만 같다. 숨을 쉬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헐떡거리자, 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붙잡은 채로 자리를 벗어났다.

손이 어찌나 덜덜 떨리던지, 차 문을 열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내 마음과 다르게 자꾸만 헛도는 손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빨리 가야 하는데. 얼른 보고 싶은데. 속상한 마음에 주먹을 쥐고 오른손을 내리쳤다. 그래 봤자 왼손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라, 원하는 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남준이 형이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보는 형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이래저래 최악이기만 했다. 먼저 차에 탔던 형은 도로 내려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차 문을 열어주고, 나를 태우고, 안전띠까지 해주고 나서야 다시 운전석에 탑승했다.

 

“어디로 갈까? 태형아 어디로 데려다줄까?”

“…….”

 

갈 곳이 없다. 전정국의 집을 아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이 자주 가는 곳이란 게 있지도 않았으니까. 캠퍼스에서 멀리서 바라보거나, 우리 집에서 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어딜 가야 전정국이 있을지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 시간 동안 난 뭘 했던 거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태형아, 형이 뭐라 할 위치가 아닌 건 아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잠시만요. 전화해볼게요. 전화하면….”

 

전정국이 내 전화를 받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심지어 내가 먼저 걸어본 적도 없었다. 전정국의 번호는 그저 다른 학생들한테 조별 과제를 핑계로 물어물어 알아낸 번호에 불과했다. 게다가 핑계로 이용된 그 조별 과제는 같이 한 적도 없었다. 한 마디로 가지고만 있을 뿐, 써본 적 없는 번호였다. 어쩌면 전정국에게 내 번호가 없으니까, 그래서 모르는 번호라 받을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택배 아저씨로 착각하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희망만이 전부였다.

떨리는 손으로 저장하진 않았지만, 외우고 있는 11자리 번호를 꾹꾹 눌렀다. 컬러링 하나 없는 신호음이 들렸다. 이쯤이면 받아줄 때가 된 거 같은데 싶으면, 정국이 대신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친절한 멘트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4번쯤 반복하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여보세요.”

 

전정국이 받았다.

 

“…정국아, 어디야?”

“…….”

“응? 어디야? 정국아….”

“왜 전화했어요?”

 

싸늘한 목소리였다. 너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섹스 할까 봐. 그 솔직한 말이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딱 한 번, 정국이가 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쉬운 관계는 쉽게 만나서, 쉽게 끝내는 게 편하다고. 그 쉬운 결말이 내가 될 거란 게 느껴졌다. 하룻밤의 실수로 만났고, 만나는 내내 쉬웠고, 이젠 날 버리는 것까지 전정국에겐 내가 다 쉬울 거다.

전정국에게 있어서 그 무엇도 나보다 쉬운 건 없을 거다.

 

“보고 싶어서.”

“카섹스가 별로였나 봐요?”

“…정국아 보고 싶어.”

 

제발.

때마침 수화기 너머로 정국이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아 빨리 와. 나 다 씻었어.”

“알겠어, 잠시만. 선배 제가 지금 바빠서요.”

“…….”

“할 얘기 있으면 내일 해요.”

“…아니야. 오지 마, 이제.”

 

하나부터 열까지 쉽기만 한 거, 나 이제 그만할래, 정국아.

역시 나만 마음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부여잡고 한참을 목 놓아 우는 내게, 남준이 형이 말했다. 태형아, 그 집 빼자. 형은 내게 제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직 신입 변호사인지라 큰 집은 아니지만, 형에게는 잠만 자는 용이라 같이 사는 거에 큰 불편함은 없을 거라고 했다. 종강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건 아니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등교는 남준이 형이 차로 도와준다 했으니, 괜찮다며 거절할 핑곗거리도 없었다.

 

“형은 무슨 요리 좋아해요?”

“아서라. 살림살이 거덜 내지 말고.”

“그거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거 알죠?”

“…외식할 거야.”

 

우리 둘 대화를 보며 호석이 형은 혀를 끌끌 찼다. 저 형 만날 라면이나 햄버거 먹는 거 내가 다 아는데 무슨. 하여간 호석이 형이나, 남준이 형이나. 이럴 때 보면 둘이 왜 친한지 빤히 보였다.

 

“다음 학기 휴학은 안 하고?”

“암모나이트 소리 듣기 싫단 말이에요. 빨리 졸업할래요.”

“그래, 뭐. 불편하면 전정국이 군대로 꺼지겠지.”

 

호석이 형은 그제야 좀 맘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는 말로 출결을 이렇게 조져놓았으니 어차피 5학년 될 거 휴학하는 게 어떠냐고 뼈를 때리는 말을 했지만, 어쨌든 좋은 형이긴 했다. 입 삐죽이며 잔소리할 때만 빼고. 사내놈 혼자 자취하던 집이라 그런지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필기 하나 없는 전공 책과 추리닝 몇 벌, 그게 전부였다. 물론 그 외에도 더 있긴 했지만 전부 쓰레기통 행이었다. 전정국이 쓰고 두고 간 향수, 전정국한테 잘 보이려고 샀던 많은 옷들, 전정국 따라 산 운동화, 그리고 우리가 함께 뒹굴었던 침구 등등. 내가 무슨 마법사도 아닌데, 만지기만 했다 하면 전정국 얼굴이 아른거리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더 버리거나 지울 건 없었다. 번호는 애초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고, 약 두 달의 시간 동안 둘이서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조차 없었다. 그저 기억으로만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누가 내 머리 좀 세게 내리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영화 보면 대개 그런 식으로 기억상실증 걸리던데. 어디 부탁할 곳이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었다.

 

“집은 그냥 이렇게 두는 거지?”

“네. 집 보러 오는 사람도 없고…. 어차피 곧 종강이니까요.”

“월세 아깝긴 하네.”

 

대학가에 위치한 자취방이라 그런 건지, 역시 집은 안 나갔다. 종강을 앞둔 시점이라 어느 정도 예상하였던 탓에 그리 큰 실망을 안겨준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럼 그렇지, 하는 정도였지.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1230*. 사실 예전부터 하고 싶은 숫자가 있었다. 0901* 마음 같아서는 진즉에 정국이 생일로 하고 싶었는데, 녀석이 그걸 알면 오글거린다며 학을 뗄까 봐 내내 바꾸지도 못한 숫자였다. 어차피 남준이 형 집에 가도 못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번호를 바꾸고 싶어졌다. 뭐 딱히 찾아올 사람도 없는 집이니까.

막상 학교로 향하니 의외로 전정국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사실 그동안은 내가 어떻게든 눈도장 한번 찍어보겠다고 줄기차게 쫓아다녀서 그렇지, 이게 맞는 일이긴 했다. 아침에 남준이 형이 차로 데려다주면, 내내 도서관에 숨어 있다가 출석 부르기 3분 전에야 강의실에 들어갔다.

점심은 무조건 대학원에 있는 호석이 형과 그리고 하교는 콜택시를 타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택시 때문에 급속도로 비어가는 체크카드 잔액을 보면 눈물이 찔끔 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에도 100m 밖에 있는 전정국을 보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 형들이랑 있을 땐 괜찮은 척을 잘만 했으면서, 마음은 아직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허겁지겁 도망쳤을 리도 없으니까.

물론 혼자 오바 하는 거였다. 그날 곧장 휴대폰 번호부터 바꾸기야 했다만, 전정국에게서 온 연락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페북이나 인스타, 혹은 다른 누구에게 물어서라도 내게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 전정국에게 있어서 내가 그렇게나 공들일 사람이 아닌 건 잘 알고 있다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여나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준다면, 언제라도 다시 원점으로 기꺼이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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