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한 구애인  06








이 개떡 같은 분위기는 뭐지?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성호의 눈동자가 백현에게 향했다가 경수에게로 향했다. 나 방금 혼자 어디 갔다 왔어? 요 몇 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졸거나 한 거 아니지? 성호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느닷없이 경수에게 만나는 사람 생겼냐고 묻는 백현에 1차로 놀라고, 만나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답하는 경수에 2차로 놀랐다. 백현의 질문도 뜬금없었지만, 그에 대한 경수의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니...? 누구랑? 언제부터?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성호는 경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마구 쏘아댔지만, 경수의 시선은 이미 백현에게 고정되어있어 눈치 챌 리 만무했다. 어째 분위기가 지금 저가 끼면 안 될 것 같고.... 성호는 일단 옆에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 


백현은 입을 달싹였다. 설마 하고 묻긴 했지만, 저런 답변이 되돌아 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러면 안 돼?’ 냐니..... 저를 도전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에 백현은 겉으로 티는 못 내도, 꽤 당황해버렸다. 경수가 저렇게 적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백현은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그래. 이제 헤어진 지 1년이나 됐고, 언젠가 경수에게 다른 사람이 생겨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제 눈에 아직도 이렇게나 예쁜 도경수인데.... 다른 사람 눈에 안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대쉬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경수는. 백현은 이따금씩 생각했었다. 만약 경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면.... 그것을 막을 권리가 제게 있을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결국은.... 보내줄 수밖에 없겠지..... 싫어도 어쩔 수 없겠지. 잡지 못 하겠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이런 슬픈 가정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바닥을 치고, 우울해졌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상상만으로도 그랬을 정도인데.... 막상 경수의 입으로 직접,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고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고, 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사람.... 혹시 아는 형이라는 사람이야?”

“...어. 맞아.”

“어떤....사람인데...? 뭐하는 사람이야...? 직장인이야? 어떻게 알 게 됐어? 잘 알아보고 만나는 거야?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야, 변백현-,”

“다음에 나도 같이 만나. 어떤 사람인지 나도 한 번 보,”

“야. 너 진짜 웃긴다? 네가 뭔데 같이 만나? 네가 내 보호자야, 뭐야?”


경수는 기가 막혔다. 사실 이런 식으로 백현에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갑자기 훅 들어온, 다소 도발적인 백현의 질문에 안 그래도 소개팅 때문에 속이 시끄러운 와중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욱해서 대답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 경수의 마음도 모르고, 바보 같은 백현은 마치 호구조사를 하듯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묻기나 했으니... 경수가 화가 나버린 것은 당연했다.


“아니.... 나는 걱정 되서-”

“네가 왜 내 걱정을 해? 내가 누굴 만나든 말든 신경 꺼. 그렇게 남 걱정이 하고 싶으면, 오늘 소개팅 한 그 사람 걱정이나 하던가.”


경수는 말해놓고 곧장 후회했다. 제가 생각해도 방금 발언은 좀 많이 찌질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 없었고, 뱉고 나니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다. 화가 났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저는 소개팅도 하고, 착실하게 새사람 만날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지가 왜 궁금해 해? 지가 뭔데 걱정을 해? 


“...뭐? 소개팅...? 무슨 소개팅?”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백현이 경수를 쳐다보았다. 그 눈을 마주한 경수는 더욱더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허- 방금 내 앞에서 당당하게 전화까지 받아 놓고, 시치미를 떼시겠다?


“아아... 혹시 너 설마,”

“됐고, 소개팅을 보든 선을 보든 네 마음대로 하시구요, 앞으로 난 네가 하는 일에 터치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너도 그렇게 해줘.”

“...도경수.”

“어차피 이제 우리, 그럴 사이 아니잖아.”

“.......”


무언가 말하려고 벌어졌던 백현의 입술이 그대로 멈추었다. 경수는 떨려오는 손을 감추려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맞잡았다. 수없이 연습했던 말이다. 언젠가 백현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왔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몇 번이고 주입시켰던 말이기도 했다. 경수는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주문처럼 되뇌었다. 변백현과 넌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까 기대하지 마. 상처 받지 마. 더는 좋아하지 마.


“경수야....”


제 이름을 부르는 백현의 목소리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꾹 참아내다 겨우 뱉어낸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빛이 경수를 향했다. 경수는 그 눈을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마주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너는 내가 이 말을 하기 까지, 어떤 감정으로 너를 마주하고 살아왔는지 알기나 해? 방금 내가 던진 그 한 마디가- 그래, 너한텐 서운할 수도 있겠지. 친구로든 연인으로든 그래도 7년을 알고 지내왔는데, 함께한 시간을 생각하면 섭섭할 수도 있겠지. 그럴 수 있어. 근데 나는... 나는 우리가 헤어지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편히 잔 적이 없어. 네가 자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누운 채로, 매일 밤 눈물을 흘렸어. 너와 함께 있어보겠다고, 이렇게라도 곁에서 바라만이라도 보겠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다 끊어진 동아줄인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붙잡고 살아왔단 말이야. 그랬던 나를, 내 슬픔을, 내 상처를.... 네가 알아?


“왜? 왜 못 해?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럼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야, 변백현. 네가 어디 한 번 말해봐. 헤어지고 나서도, 이렇게 한 지붕 아래에서 구질구질하게 붙어 살고 있는 우리가, 그럼 무슨 사이인데? 어? 나는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네가 한 번 말해보라고!!”


경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추기 위해 아랫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차오를 것 같은 눈물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줬다. 눈가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경수를 쳐다보던 백현의 시선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수많은 생각과 말들이 백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게.... 경수와 나는 무슨 사이지? 전애인? 아니면 동거인? 둘 다 내키지 않았다. 두 가지 중 하나로 정의하기엔, 둘 사이가 너무 멀어보였다. 그보다는 가깝고 싶었다. 복잡한 머릿속이 계속해서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다 백현은, 저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떠올려냈다. 제가 경수에게 어떻게 상처를 줬었는지를 기억해냈다. 저는 지금 무얼 하려고 한 건가.... 그냥 옆에 있기로만 했잖아. 바라지 않기로 했잖아. 네가 지금 누구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네 주제에, 왜 서운해 하고 있는 거야. 너한테.... 그럴 자격이나 있어?


“우린.....”

“......”

“우리는.... 친구....잖아......”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백현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공기를 조용히 갈랐다. 가게 안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음악 소리로 꽤나 시끄러웠지만, 백현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경수의 귀에 꽂혀들었다. 백현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정말이지, 최악의 답변이었다. 그것은 백현 자신도 넘치도록 자각했다. 하-..... 백현의 정수리 위로 뱉어진 한숨 섞인 헛웃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진짜 웃기고 자빠졌네.”

“......”

“친구? 내가 왜 네 친구야?”

“......”

“너 혼자 하고 싶다고 했지, 난 동의한 적 없어.”

“......”

“친구?”

“......”

“씨발, 좆까고 있네.”


드르륵-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가 크게 났다. 백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경수가 일어난 것을 알면서도- 뜨인 눈을 깜빡이지도, 숙인 고개를 들지도 못 했다. 경수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소리로 듣고 알았다. 이윽고 가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들어온 찬바람이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


백현은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옆에서 또다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자기. 친구 많아서 차암- 좋겠다.”

“......”

“...등신 새끼.”


그 말과 함께 또 하나의 발걸음 소리가 백현에게서 멀어져갔다. 





“도경수!”


뒤에서 확 하고 저를 덮쳐오는 무게에 경수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깨를 감싸 안은 온기와 향기가 익숙했다. 경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비집고 나오려던 눈물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애를 썼다. 이미 그렁해진 눈을 알면서도 성호는 모르는 척 했다.


“야. 아쉬운데 우리끼리 2차 가자.”

“...꺼져. 난 집에 갈 거야. 니네 자기랑이나 마셔.”

“에헤이~ 나 오늘은 도경수랑 마시러 온 건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자기는 술 좆밥이잖냐. 가자! 형이 쏜다!!”


막무가내로 제 어깨를 잡아 이끄는 성호에 경수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아, 진짜....! 힘은 무식하게 세가지곤. 경수는 성호를 밉지 않은 눈으로 흘겼다. 사실 경수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저와 백현이 사는 둘만의 공간에 발을 들이기가 싫었다. 처음이었다. 그만큼이나 오늘은 백현이 밉고 야속했다.


“...형은 개뿔? ....뭐 사줄 건데....?”

“풉- 일단 따라오셔!”


눈동자만 움직여 저를 힐끔 쳐다보는 경수가 귀여워, 성호는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곤 경수의 어깨를 껴안은 채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평수의 실내 포차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테이블이 세팅 되자마자 소주잔을 부딪쳤다.


“요게 요게, 며칠 좀 못 만났다고 그새 빠져가지곤? 만나는 사람 생겼으면 즉각 나한테 보고를 했어야지!”

“뭐래-. 내가 왜 너한테 보고를 하냐?”

“몰라서 물어? 내가 네 ㅅ,”

“생명의 은인이라고? 이제 레파토리 좀 바꿔라, 진성호야. 식상하다 못해 질린다, 이제.”


경수는 얄미운 표정을 해보이며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허, 이것 봐라? 야, 어쨌든 사실이잖아. 내가 그날만 생각하면 진짜-!”


오랜만에 떠오른 그날의 일에 성호는 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진절머리를 쳤다. 5년 전 겨울이었다.





극심한 추위가 오랜 기간 계속 되었다. 약 먹고 며칠 쉬면 금방 떨어질 줄 알았던 감기가 한 달을 넘어서고 있었다. 경수는 매일 고열과 심한 기침에 시달렸다.


‘콜록콜록-’

‘어떡해.... 오전에 병원은 다녀왔어?’

‘응.... 아까 약도 먹었는데....콜록-, 곧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긴? 너 지금 한 달도 넘게 이러고 있는 거 알아?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고만 있잖아.’


침대에 누워 쌕쌕 뜨거운 숨을 내뱉는 경수를 백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센 약으로 바꿨어... 콜록...! 진짜 괜찮으니까 얼른 나가봐. 너 약속 있다며. 콜록콜록-!’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던 날이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백현을 경수가 힘없는 손으로 밀어냈다. 백현은 난감한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다 같이 오랜 만에 모이는 자리인데다, 동창 중 한 명이 청첩장까지 주기로 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이긴 했다. 하아..... 백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갔다가 밥만 먹고 바로 돌아올 거니까, 나 돌아올 때까지 자고 있어. 알았지?’

‘응.’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바로 전화하고.’

‘알았다니까-. 얼른 가. 늦었어. 콜록...!’


오늘따라 유독 더 파리해 보이는 안색이 끝까지 백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빨리 가라며 손을 흔드는 경수에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눈앞이 어질어질 했다. 숨이 가빠오고 온몸에 열이 들끓는데, 살갗에 닿는 공기는 또 너무 차가웠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경수는 마치 안개가 낀 듯 뿌예진 시야에 몇 번을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헛손질을 두어 번 반복한 끝에 겨우 손에 넣은 핸드폰을 경수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눌렀다.


‘Rrrrr....’


신호음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다리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윽고 안내음성으로 넘어가버렸다. 머리가 몽롱하고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경수는 두 번, 세 번 다시 걸었다. 네 번째 안내음성이 들려왔을 땐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때였다. 눈이 자꾸만 감겼다.


‘하아.....하.....배....백현아......’


경수는 마지막 힘을 짜내 통화목록을 열었다. 그리곤 길게 쌓인 백현의 이름 바로 아래에 있는 어느 이름을 눌렀고,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경수야!’


 마치 깊은 물에 잠겨있다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무거웠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병원 특유의 알콜 냄새가 났다.


‘정신이 들어? 나 보여?’

‘....응.....’


뻑뻑한 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깜빡이자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씩 제대로의 형상을 되찾아갔다. 경수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저를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성호의 얼굴이었다.


‘...나....물 좀.....’


목이 까끌까끌해서 그런지, 바짝 마른 쉰 소리가 튀어나갔다. 응! 잠깐만? 버튼을 이용해 침대 위쪽을 들어 올려, 상체를 반쯤 일으킬 수 있게 해준 성호가 곧바로 물 컵을 경수의 입술에 갖다대주었다. 꿀꺽꿀꺽- 물에 쓸리는 목이 따끔했지만 그래도 전부 다 마셔냈다.


‘하아..... 살 것 같다....’


‘야, 이 등신아! 아프면 119에 전화를 해야지! 너 내가 안 받았으면 어쩔 뻔 했어?!’


제정신이 들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내는 성호에 경수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유난은-. 그렇다고 설마 죽기야 했겠....냐.....?’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던 경수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기어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잔뜩 일렁이는 성호의 눈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너 죽을 뻔 했어.... 알아? 조금만 늦었어도 진짜 위험했다고....! 이 바보야!!’


흐엉엉엉...!!! 차마 경수의 품으로 뛰어들지는 못 하고, 허벅지 옆 침대에 고개를 묻은 성호는 대성통곡을 했다. 1인실이 아니었기에 주위의 시선이 몰리는 건 금방이었다. 경수는 저희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손을 들어 성호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주었다. 그러자 울음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그런데.... 백현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성호가 건네준 과일 주스를 받아들며 경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성호가 입술을 감쳐 물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네 얼굴 못 보겠대. 미안해서.’

‘...왜?’

‘왜긴 왜야. 전화 못 받은 것 땜에 그러지.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응급실에 뛰어 들어오자마자 넘어지고 엎어지고-, 쌩쇼를 다했어, 걔.’

‘그래...?’

‘나 백현이 그렇게 우는 거 처음 봤어. 다 자기 탓이라고.... 의사 샘한테 무릎까지 꿇고는 우리 경수 살려 달라고 싹싹 비는데, 진짜 그런 난리가 없었다.’


직접 본 것도 아닌데, 어쩐지 절로 상상이 가 경수는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리고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그 바보가 얼마나 또 자책을 했을까.....  


‘그래서...? 백현이는 지금 어디....’

‘어디 있냐고? 있어봐.’


대뜸 그러더니, 성호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선 닫혀있던 문을 확 열어 재꼈다.


‘......’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 서있던 백현이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는 게 보였다.


‘뭐야....? 언제부터 거기 서있던 거야?’

‘언제부터긴. 어젯밤부터 쭉- 문 앞에서 저러고 있었지.’


고개를 푹 숙인 백현을 대신해 성호가 대변인처럼 대답했다. 백현은 정말 그러고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지, 나갈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몇 시간 안 잔 것 같은데, 하룻밤을 넘기고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이었다. 경수는 수액이 꽂혀있지 않은 손을 들어 백현을 향해 까딱까딱 움직였다.


‘백현아... 이리 와.’


낮게 깔린 힘없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백현을 불렀다. 그러자, 푹 숙여있던 조그마한 얼굴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경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주춤하는 발걸음으로 제게로 다가오는 얼굴은 보기 드물게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잔뜩 부어 있었고, 코끝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으며, 입술은 계속 씹어댄 탓에 까만 피딱지가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난 잠깐 뭐 좀 사올게.’


성호가 눈치껏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성호가 나간 것을 확인한 경수가 제 옆에 우물쭈물 선 백현의 손을 스윽 하고 붙잡았다. 하루사이에 까칠해진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많이.... 놀랬지...?’


안쓰러운 마음에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그러자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또다시 왈칵 터져버렸다.


‘미안해.... 끕- 미안해.... 경수야.....’


벅차오르는 숨에 끅끅 거리면서도 백현은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아니, 아픈 널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다 내 탓이야, 경수야.....


‘이게 왜 네 탓이야....? 몸 관리 제대로 못 한 내 탓이지.... 네 탓 아니야.....’

‘흐으윽....흑.....’

‘바보야.... 그만 울고, 나 안아줘.... 얼른. 응....?’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백현이 경수의 작은 어깨를 와락 하고 껴안았다. 독한 약품 냄새를 뚫고, 제가 좋아하는 경수의 살 내음이 코끝에 닿아왔다. 백현은 더욱 그 냄새를 갈망하듯 경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다신.... 다신 너 아플 때, 혼자 두지 않을게.... 네 옆에만 꼭 붙어있을게.... 사랑해, 경수야.....’

‘나도.... 나도 사랑해.....’


둘은 성호가 돌아올 때가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때부터잖아. 변백현 스마트 폰 중독자 된 거. 아무튼 넌 진짜 나 아니었으면 이렇게 마주 앉아서 술도 못 마셨을 거라고. 알아?”

“늬예늬예~ 생명의 은인님. 한 잔 더 드시지요~”


경수가 깝죽대며 성호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서. 진짜 그 아는 형이란 사람이랑 만나보려고?”

“......”


성호의 말에 경수는 제 잔에도 술을 가득 채워 넣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어. 그냥.... 일단은 친한 형 동생으로 만나보자고 해서 알겠다고는 했는데.... 사실은.... 마음이 불편해. 많이....”


그렇게 말하는 경수의 눈이 무언가를 회상하듯 술잔을 멍하니 응시했다.


“백현이가 처음이었어서 그런가...? 백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게 사실, 좀 겁도 나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어. 내 자신한테.”

“......”

“내가 과연 다른 누군가와 또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직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고?”


툭 던지듯 성호가 목소리를 내었다.


“......”

“너 지금도 많이 좋아하잖아. 백현이....”


저를 꿰뚫어보듯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호의 눈빛에 경수가 입술을 감쳐 물었다.


“나 지금까지 너네 연애에 참견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그건 너도 알지?”


성호의 말에 경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이 연애를 시작하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끝을 내는 것도 전부 옆에서 지켜봐왔어. 그럼에도 내가 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너 알아?”

“......”

“너도 백현이도... 내가 많이 좋아하니까.”

“......”

“그리고, 곧 다시 너희 둘이 붙을 거란 확신이 내게는 있었으니까.”


언제나 경수와 백현 사이에 껴서 장난처럼 놀리기만 했던 성호다. 하지만 경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벼움을 빙자한, 우리 둘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성호 나름의 배려이자 노력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성호의 입으로 속마음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눈엔 다 보이는데. 너넨 왜 그렇게 서로를 보질 못 하냐?”

“......”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님, 그냥 병신인거야?”


성호의 말에 경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뭘 모른다는 건데....? 내 마음을? 아니면, 백현이의 마음을?


“내가 볼 땐 존나 쉬운 길인데, 왜 그렇게 굳이 돌아돌아 먼 길을 가는 건지, 난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만 속 썩이고 둘이 빨리 화해해. 알았어?”


호통을 치듯 눈을 부라리더니, 기세 좋게 잔을 들어 원 샷을 했다.


“크으...! 우리 자기는 지금쯤 혼자서 외롭게 땅굴을 파고 있을 텐데... 불쌍해서라도 이만 일어나야겠다.”


성호가 코트와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경수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내가 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상담비용으로 네가 쏴라. 알았지? 나 먼저 간다?”


그러면서 경수를 홀로 남겨둔 채,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아, 맞다.”


무언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우뚝 멈춘 성호가 경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소개팅 그거. 백현이가 한 거 아니야.”

“.....?”

“백현인 주선자로 나간 거라고, 이 바보야.”


그러니까, 청승 고만 떨고 퍼뜩퍼뜩 집으로 들어가라~ 성호는 다시 등을 돌리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


경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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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지체할 수 없어 열심히 달려보는 사이다를 향한 급행열차.....;;;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gongs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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