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 형 후배인 정우랑 서현이 처음 만났는데, 그 이후로 연애하는 이야기 입니다

돌발 리퀘로 받은 주제에요!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응급실 서현쌤이 너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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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를 처음 만난 건 형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물론 그날 그 자리 가서 얼굴을 처음 봤다. 하긴 형이란 사람은 단 한 번도 동생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일정이라도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불문율. 서현은 그런 집안 분위기를 싫어하면서도 단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꾸역꾸역 살았다. 갑자기 외국으로 오라는 소리도 아니고 그저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는 통보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 귀찮다.’



속으로 몇 번이나 욕을 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밖으론 티를 내지 않았다. 응. 알았어. 주소 알려줘. 몇 시? 영업 미팅도 이것보단 감정적으로 대할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늘상 그랬던 둘째처럼 대하는 통에 서현은 자신이 짜증을 부리는 것조차 지쳐가고 있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봤자 가야 하는 일이었고, 거부해도 결국 남은 것은 잔뜩 지친 몸뿐이었다. 일단 부르니 가서 밥만 빨리 먹고 오자.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도대체 뭘 입어야.”



서현은 제 옷장을 열어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죽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 레지던트 3년 차인데, 꿀 같은 휴식 시간을 한 번에 날리게 되자 짜증이 절로 밀려왔다. 여태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궁금해하지 않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다. 아니면 또 집에 무슨 일이 있나. 결국 생각은 이쯤에서 멈추고 말았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응급실 생활이 바빠서 제대로 된 옷을 산 기억이 언제쯤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꾸미는 것보다 잠이 좋은 시기라고 하지만, 적어도 깔끔하겐 하고 다니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옷장을 열어보니 꼴이 가관이었다. 어쩜 이렇게 옷이 한 벌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지. 서현은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면서 겨우겨우 옷 한 벌을 꺼내 들었다.



“…….”



엉망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짜증을 가득 품은 채 부지런히 움직였다. 몇 달째 방치한 머리카락도 마음에 안 들고. 피곤이 켜켜이 내려앉은 얼굴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꾸미기라도 해야 한다. 간신히 준비를 마친 서현이 급하게 밖으로 나온다.



“…강 기사님이 어쩐 일로?”

“큰 도련님께서 보내셨습니다.”

“…….”

“작은 도련님 피곤하실 것 같다면서 모셔오라고 하시더군요.”

“중요한 자리랍니까? 갑자기 왜 이런 호강을.”

“전 그것까진…….”

“뭐야…기분 이상하게.”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어 그냥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형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어지간하면 제 동생을 밖으로 소개하는 일도 꺼리는 남자가 대놓고 서현을 데리고 오라며 기사를 보냈다. 사실, 이 집안에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



현은 가만히 뒷좌석에 앉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이 익숙한 차에 기대니 절로 긴장이 풀렸다.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조는 서현을 슬며시 넘겨다보던 남자는 곧 운전에 집중한다. 그래도 서현이 독립하기 전까진 제법 살갑게 지냈는데, 오랜만에 본 얼굴은 어쩐지 낯설었다.

 


 

*

 

 


“도련님.”

“…….”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아, 미안해요. 잠깐 잠이 들었네.”

“요새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늘 그렇죠. 조금만 더 버티면 편해지려나.”

“…….”

“고마워요. 그래도 편하게 왔네.”



형이 보냈다고 해서 일단 경계는 했다. 하지만 몸이 편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매일 잠이 모자라는 생활을 하다 보니 머리만 대면 기절하듯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런 나른함도 차 밖으로 나오니 금방 사라진다.


서현은 덩그러니 혼자 남은 상황을 늘 낯설어했다. 일단 오긴 왔는데 막상 들어가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은 더 싫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잠시 문 앞에서 망설인다. 하지만 그런 서현의 고민은 늘 타인에 의해 정리된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매니저가 아는 체를 했고, 서현은 모른 체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네.”



결국 가장 먼저 도착해서 테이블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천이 서현의 다리 위에 무겁게 떨어진다. 한번 앉고 나니 이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그냥 내내 가만히 있었다. 핸드폰을 슬쩍 들어서 봤지만, 연락은 없었다. 형이 늘 그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기대하고 만다. 적어도 연락은 줄 수 있을 텐데, 그런 배려는 없었다. 늦으면 괜히 욕을 먹으니까 이십 분 정도 일찍 도착했을 뿐이었다. 서현은 괜히 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내내 한숨을 쉰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고 싶어지는 자리였다.



“안녕하세요.”

“…….”

“서현 씨. 맞죠?”

“그런데…누구.”

“…….”

“절 어떻게…….”

“내가 불렀다.”

“…….”



그 순간 서현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눈앞에 보이는 낯선 사람이 누군지 알기도 전에 바로 뒤에서 익숙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린다. 숨이 확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절로 목에 손이 간다. 물론 그런 서현의 얼굴을 본 것은 낯선 손님뿐이었다. 형은 늘 그랬던 것처럼 현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지나쳤다. 그 손길이 중력보다 무거워서 서현은 약간 움츠린 채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정우도 앉아.”

“…….”

“현이는 요새 좀 어때?”

“…….”



늘 주인공 같은 형은 말을 거는 것에 스스럼이 없다. 누군가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해서 대화를 이끌어간다. 아마 그게 서현과 다른 점일 테지만, 전혀 단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와서 너무나 당연하게 행동했다.



“현아. 오랜만에 봤는데, 계속 가만히 있을 거야?”

“아니. 괜찮아, 요새 좀 피곤해서 그래.”

“…….”

“형이 나한테 연락도 다 하고…갑자기 무슨 일이야.”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

“…….”



그게 누군지는 불 보듯 뻔했다. 형과 함께 등장해서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저 남자겠지. 현은 시선만 슬쩍 옮겨서 낯선 얼굴을 바라본다. 사실 형이 소개해주는 인연은 모두 서현과는 관계없는 쪽이 대부분 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서현은 지금 의사 준비를 하고 있고, 형은 전문 경영인이었다. 직업만큼 다른 두 형제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형은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아는 후배다. 이름은 박정우고.”

“안녕하세요. 형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



날 언제부터 봤다고 아는 척이지. 현은 부드럽게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면서 신사가 배배 꼬였다. 하지만 억지로 웃으면서 손을 잡았다. 가벼운 안수가 끝나자 불에 닿은 것처럼 후다닥 손을 뗀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저 모르는 곳을 돌아다니고 있을지. 이걸 생각하면 절로 머리가 아파져 왔다.



“서로 얼굴 익혀두면 나중에 다 필요한 인연이 되는 거라서, 자리 마련했다. 너도 슬슬 이리저리 얼굴 좀 비추고 살아야지.”

“…….”

“언제까지 그렇게 틀어박혀서 있을 거야.”

“레지던트 생활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

“이런 말 하려고 부른 거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식사하시죠.”

“서현. 손님 있는데 말조심해.”

“…….”

“미안하다. 정우야.”

“아니에요. 의사 되기 힘든 거 다 아는데요. 그래도 저 보러 와주셨다니 고맙네요.”

“…….”



저 짧은 대화에서 벌써 속이 메슥거린다. 제 기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끼리 건네는 대화. 사실상 이 자리에 없어도 되는 사람은 꾸역꾸역 앉혀놓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보기 좋아지라고. 형제끼리 재산과 이권 다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현을 불러내는 의도야 뻔했지만, 그걸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맞았다. 박정우. 박정우. 현은 애써 시선을 낯선 이에게 돌리면서 그 이름을 속으로 말해본다. 저런 남자가 어떻게 형과 아는 사이인지. 도저히 짚어낼 수 없었다.


형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은 고압적으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태도였다. 태어난 집에서 도망친 것도 그런 숨 막히는 상황이 싫어서 그랬는데, 독립하고 난 뒤에도 서현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낯선 이가 하나 더 얹히니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서현 씨는 지금 레지던트라고 하셨죠?”

“네. 그렇네요.”

“아직 많이 남았네요. 제 친구들도 레지던트 생활하면서 죽으려고 하던데, 많이 힘들겠어요.”

“아…의사 친구가 있으신가 봐요?”

“네. 몇 명 있죠. 다른 직업도 많고.”

“…….”

“저야 서현 씨랑은 정 반대 일을 하고 있지만.”



도대체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짚어낼 수 없었다. 현이 일부러 가시가 돋친 말투로 대꾸하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오늘따라 많이 참아준다. 박정우야 형의 동생이고 초대받은 입장이라 애써 잘해준다고 쳐도, 형이 저런 태도를 참을 리 없었다. 겪어봐서 더 잘 알았다. 서현에게 형이란 존재는 언제나 어려울 뿐이라 단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나이 차가 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것부터, 성격 외모, 체격. 뭐 하나 닮은 곳이 없었다.


그런 형과 비슷하지만 다른 정우는 서현의 속도 모르면서 자꾸 말을 건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면서 서현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거려주는데 깜박 속을 뻔했다. 이런 부드러움 따위 그저 꾸며낸 것인데 따뜻하다고 막 집어삼켜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곧 현실이 된다. 서현의 빈 잔을 보던 정우가 익숙하게 손을 들고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했다.



‘설마 나 진짜 치우려고 하나.’



이쯤 되면 이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의사가 되겠다는 서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다른 집에선 집안에 의사가 나오면 좋다고 하던데, 서현은 자신이 왜 이렇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얼굴이라도 보지 않으려고 억지로 독립을 했다. 그런 자신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시키는 것을 보니 또 자기 몰래 일이 진행된 모양이었다. 늘 집안의 결정은 서현에게 닿는 속도가 한 발짝 느렸다.



“어, 그래. 나다.”

“…….”

“…….”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은 형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또 중요한 일이 있나 보지. 현은 익숙한 듯 시선도 주지 않았다. 둘 다 편히 있으라고 손을 두세 번 흔들어준 남자는 곧장 밖으로 나가버린다. 하긴 이 식사 자리는 공식 행사는 아니니까. 서현은 괜히 포크로 샐러드만 쿡쿡 찍어댔다.



“…….”



숨이 막혔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형이 데려온 사람은 사양이었다. 입이 붙어버린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 서현을 부드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절로 눈이 움직이고 말았다.



“불편해요?”

“네, 많이요.”

“형과 아는 사이라고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죠.”

“…….”

“그렇게 말하지만 제 모든 행동은 결국 집안에 들어가게 되니까. 흠 잡힐 말은 별로 하고 싶진 않네요.”

“…….”

“물론 이 말도 흘러 들어가겠지만.”

“안 그럴 건데요.”

“네, 그러시겠죠.”



정우는 내내 웃기만 한다. 서현은 뾰족하게 세운 가시를 내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정우를 노골적으로 뜯어보았다. 사실 정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저쪽은 형이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을 텐데, 정작 당사자인 자신은 들은 정보가 없었다. 이런 것 하나하나 쌓이니 뭔가 억울했다. 사람 구경하려고 여기 풀어놓은 것도 아니고. 그러니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었다.



“그쪽은 무슨 일을 하죠?”

“예?”

“어차피 나에 대해선 형한테 들었을 텐데, 난 아는 것이 없어서요.”

“…….”

“서로 이야기를 하려면 주고받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아…….”

“…….”



솔직히 이 정도로 대놓고 말하면 곧 질린 표정으로 일어설 것 같았다. 형이 데려온 수많은 사람은 모두 그런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우는 조금 달랐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박정우라고 합니다.”

“…….”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이런 자리가 뭐가 좋겠어요.”

“그런가요.”

“…….”



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서현은 그 생각뿐이었다. 사실 형이 만든 자리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생각은 서현뿐인지. 정우의 집요한 시선은 옮겨갈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서야 형이 돌아왔다.



“불러놓고 미안해. 일이 생겨서.”

“…가봐. 뭐 언젠 안 그랬다고.”



서현에게 정우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정우한테 서현을 부탁한다.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인데 이렇게 무시당하나 싶어서 서현은 눈을 찌푸렸다. 형이 사라지자 그래도 숨은 쉴 만했다. 정우야 알 바 아니었고, 어차피 이날 이후로 만나지 않을 사람이었다. 빨리 식사만 마치고 나가자 싶었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서현 씨? 왜 그래요?”

“…….”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갑자기 피곤해져서 입맛도 싹 달아났다. 새우가 들어간 메인 접시를 바라보던 서현이 짜증을 내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냥 일어선다고 할까. 그러면 또 이야기가 어떻게 들어가려나. 어차피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하면서도 서현은 이래저래 신경 쓰고 있었다. 괜히 말이 잘못 들어가서 죄인처럼 불려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제 머릿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으면 그냥 관심을 주지 마시죠.”

“…….”

“별로 알고 싶지 않으니까.”

“…….”

“그리고 형한테 연락 오면 내가 너무 엉망이었단 소리만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

“너무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제법 쌀쌀하게 말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일어섰는데, 정우도 따라 일어선다. 불안한 마음은 왜 가시질 않는지. 서현은 어떻게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마땅한 차가 없다는 사실과 정우가 자신을 데려다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됐어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형이 시켜요? 나한테 잘해주라고?”

“아니요. 그저…….”

“우리 형이 늘 그러거든요. 뭘 해도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모으는 취미가 있죠. 박정우 씨도 그중 하나인가 보네요.”

“…….”

“나까지 끌고 나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어…….”

“그건 아닌데요.”

“…….”

“서현 씨가 참석한다는 사실은 모른 채 온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서현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에요.”

“…….”

“서현 씨가 말하는 하우라인과 형님보다 더한 가치를 찾았으니까요.”

“…됐어요. 난 생각 없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서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결국 정우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차를 얻어 탔다. 이번 한 번 뿐이라고. 형 얼굴에 먹칠이나 하지 않을 정도로 해두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서현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한다.

 


 

*

 


 

“…죽을 거 같아.”

“아직 안 죽었잖아요.”

“진짜 죽을 거 같아. 왜 이렇게 힘들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 번 일정이 엉키기 시작하니 도저히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일정을 바꾼 탓에 서현은 며칠째 오프도 없이 응급실에 붙어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집안 행사에 불려갔더니 아주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잠은 대충 구겨져서 눈만 붙였고, 머리는 언제 잘랐는지. 집에 갔던 마지막 기억이 언제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만 버티자고 하던 사람도 지쳐 쓰러질 때쯤이었다.



“…서현 쌤.”

“왜. 죽었다고 전해.”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뭐? 누가 와,”

“모르겠어요.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서현쌤 찾으셔서 일단 안쪽에서 쉰다고 했는데.”

“…….”



서현은 푹 쓰러져있던 몸을 간신히 일으킨다. 그러더니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자꾸 자신을 찾는다고 했다. 간신히 얻어낸 꿀 같은 휴식 시간을 방해받은 짜증이 울컥 올라왔지만, 그 짜증을 바깥으로 내보낼 힘도 없었다. 도대체 누구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올 사람이 없었다. 비척비척 일어난 몸이 강제로 움직인다.



“내가 뭐 치료를 잘못했나.”

“…글쎄요.”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누가 날 찾아와.”

“…….”



궁시렁 궁시렁. 이럴 때만 되면 말이 많아진다. 조금만 더 자면 이 피곤이 풀릴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엉망인 꼴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끝내고 다시 들어와서 좀 자야지. 이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밖으로 걸어 나가다 문득 제 모습을 본다.



“이런 꼴로?”



머리야 대충 감았다 쳐도, 피곤함에 찌든 얼굴부터 잔뜩 구겨진 옷까지. 붙박이처럼 병원에서 살고 있다고 아주 완벽히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을 쓰고 사는데. 꼴이 말이 아닌 것을 알아채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빨리 얼굴만 보고 돌려보내자. 차마 병원에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서현 씨.”

“…….”

“다행이다. 병원에 있었네요?”

“뭐야…어떻게.”

“핸드폰으로 몇 번이나 전화해도 안 받고, 알음알음 알아보니 계속 병원이라고 하고.”

“…….”

“걱정되어서 왔어요.”

“아…그건 고마운데. 내가 지금…좀.”

“…….”

“말이라도 하고 오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이 간다. 하긴 레지던트 생활을 끝내고 펠로우가 될 때까지 응급실 동료들은 서현이 연애를 하는 것도 몰랐다. 정확힌 레지던트 기간에 박정우를 만났으니 사귄 지는 제법 오래됐다. 하지만 이렇게 정우가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말을 하려고 했는데…안 받았잖아요.”

“오늘 엉망인데.”

“그래도 예뻐요. 내 눈엔 늘 같은 서현 씨인걸요.”

“…….”

“하도 연락을 안 받고, 집에도 없는 거 같아서 걱정이 되더라고요.”

“아니 집에도 갔었어요?”

“그럼요.”

“…….”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오는 건데.”

“아니…말을 해줘야. 머리도 엉망이고…그러니까.”

“잠깐 시간 괜찮아요?”

“갑자기?”

“네.”

“…….”



아. 어쩌지. 잠깐 망설인다. 물론 시간은 빼면 되는 일이지만, 며칠째 미어터지는 응급실을 보니 잠시 자리를 비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곤함이 먼저라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한 줌 남은 양심이 서현을 붙들고 늘어졌다.



“잠깐만. 말하고 올게.”

“알았어요.”

“…….”

“밖에서 기다릴게요.”

“…….”



서글서글 웃으면서 자신을 놔주는 정우를 가만히 보다가 돌아섰다. 어딜 가더라도 말을 하고 가야지. 금방 말만 하고 올게.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비척비척 걸어가는 뒷모습이 조금 말라보이다. 정우는 괜히 가슴이 아파서 심장 부근을 그러쥐었다. 얼굴이 저렇게 상할 때까지 무엇을 했는지. 정우가 슬픔에 젖어갈 때쯤 서현은 이미 응급실에 도착해있었다.



“나…나갔다 와도 돼?”

“서현쌤. 밖에 누구예요?”

“아니…그런 거 묻지 말고. 나 나갔다가 와도 괜찮아? 이번 주에 오프 한 번도 못 나갔어.”

“에이.”

“어떻게 돌려보내. 말아.”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오늘 쉬시고 내일?”

“너무한다. 알았어.”

“예. 퇴근하세요.”

“…….”



이걸 퇴근이라고 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옷을 갈아입을까 했는데, 그것도 너무 귀찮았다. 실내용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가니 정우가 보인다. 민망하다. 이렇게 형편없는 꼴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렇게 엉망인 꼴로 정우네로 간다. 우리 집으로 갈래. 그 한마디를 못 해서 그냥 얌전히 실려 갔다.

 


 

*

 


 

“씻고 나와요.”

“옷 없는데.”

“적당한 거 가져다줄게요.”

“아니…그 옷 말고.”

“저번에 두고 간 거 있는데.”

“미쳤어. 진짜.”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요. 저녁 준비해둘 테니까.”



이렇게 능글거리는 남자일 줄 알았으면 애초에 깊게 만날 생각도 안 했다. 박정우 집에 남아있던 제 속옷의 존재가 민망해지기 전에 후다닥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만에 씻는 것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찬물로 후다닥 씻고 나와서 버티던 몸이 따뜻한 물을 만나자 갑자기 노곤해진다. 뭉클 올라오는 피곤함에 한숨을 쉬었다. 정우가 쓰는 샴푸에 바디 워시까지. 하나하나 박정우와 같은 것을 쓰면서 괜히 코를 킁킁거린다. 따뜻한 물이 생각보다 더 기분이 좋아서 한참 물을 맞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서 급하게 수건을 낚아챘다.



“옷…….”



살짝 문을 열어보니 곱게 접힌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뭉클하고 따뜻한 수증기가 가득한 곳에서 옷을 입어 나오니 온몸이 개운해진다. 따뜻하고 포근한 정우 집을 괜히 이리저리 돌아본다. 거울을 보고 몇 번 얼굴을 정돈한 뒤에 겨우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



“다 씻었어요?”

“…이게 다 뭐야?”

“서현 씨. 먹이려고 준비했죠.”

“…….”

“바빠서 제대로 못 챙겨 먹고 다녔을 거 같아서.”

“…….”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어디서 음식을 만들어 왔는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이 정도로 요리를 준비해줄 만한 것은 한군데니까. 다만 그곳 음식 맛을 서현이 너무 잘 아는 탓에 말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굿 수프 갔다 왔어요?”

“네. 간 김에 특별히 메뉴 주문도 했고요.”

“…….”

“서현 씨 잘 먹던 거 골라서 도시락으로 만들었어요. 빈속에 먹지 말고 이것부터 먹어봐요.”

“…….”



정우가 따뜻하게 데운 수프를 건네준다. 수프에서 풍기는 냄새에 코가 먼저 반응한다. 얌전히 숟가락을 들고 한참 수프를 바라본다. 맛있는 걸 아는데, 어쩐지 시키는 대로 먹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배고픔과 피곤함에 졌다. 따뜻한 양파 수프를 겨우 한번 떠먹던 서현이 곧 조용해진다. 이거 잘 먹었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은 정우는 물도 마시라면서 자꾸 컵을 밀어준다.



“천천히 먹어요.”

“…맛있어.”

“다행이네요. 응급실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대충 시간 될 때 이것저것 먹고 말았지.”

“…….”



그 말 한마디에 정우 눈이 촉촉해진다. 손에 쥐면 날아갈 것 같은 애인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내내 기다리기만 했다. 물론 서현이 티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성격을 배려한다는 이유였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무심했던 것 같았다. 그런 정우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현은 수프 그릇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렇게 허겁지겁 밥을 먹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귀여웠다. 이미 박정우의 눈엔 서현이 뭘 해도 예쁘고 귀여웠다.



“이것도 먹어요.”

“거기 셰프는 별걸 다 하네.”

“저번에 좋아했잖아요. 파인다이닝 음식을 그대로 가져오진 못하지만, 좋아하는 걸 다시 만드는 기분이었어요.”

“…만들어?”

“…….”

“정우 씨가 이거 만들었어?”

“얼마 정도는 같이 했죠. 그래도 제가 준비하는 건데 남한테 다 시킬 수는 없잖아요.”

“…….”

“잘 먹고 푹 쉬고 가요.”

“여기서요?”

“그럼요.”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요.”

“정우 씨가 날 여기서 얌전히 재울 리 없다는 걸 잘 아니까.”

“…….”



이번엔 박정우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서. 오히려 반응하기 어려웠다. 정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가거나 말거나. 서현은 포크로 샐러드를 쿡쿡 찍었다. 고기도 맛있고, 샐러드도 좋았다. 수프야 워낙 좋아해서 정우가 종종 가져다주기도 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햄스터처럼 볼이 부푼 채 오물오물 밥을 먹던 서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벌겋게 변해서?”

“서현 씨. 정말 너무해요.”

“내가 뭘…….”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사실인데. 뭐.”



서현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모른다. 나른한 표정으로 밥을 먹던 서현이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정우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피곤함에 찌들었던 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추운데 따뜻한 곳으로 갈까요? 달콤한 유혹이 들린다. 사실 정우의 집은 어디도 춥다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지만, 이럴 때마다 좋아서 속아주는 것도 맞았다.



“그래요.”



새침한 한마디가 끝나기가 무섭게 정우가 서현을 덥석 안아 들었다. 이거 내려놓으라고 발버둥을 치려 했지만, 정우의 표정이 너무 잘생겨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다 큰 남자가 이렇게 안겨 다니는 거 웃긴다는 말을 겨우 뱉어낸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 우리 둘뿐이란 소리를 듣자마자 서현의 얼굴이 익은 토마토처럼 변해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우가 그런 서현의 귀에 입술을 댔다.



“좋아해요. 서현 씨.”

“…몰라. 정말.”

“정말 좋아해요.”



이 목소리가 좋아서 내가 그때부터 마음에 뒀지. 늘 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던 형이 자신한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믿었다. 서현이 조심스럽게 정우의 목을 껴안았다. 켜켜이 쌓였던 피로가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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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둘이 레지던트 쯤 만났다가 펠로우 될 때까지 사귀면 좋겠습니다

물론 펠로우 되고 헤어진다는 소리 아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리퀘 받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서현이랑 형은 10~12살 정도 차이나서 현이 찍소리도 못하고 어른처럼 대접했고 그나마 정우랑은 5살 차이나서 형보단 나은 기분에 조금씩 치대는 게 좋습니다





쩜오 연성 창고 트위터 : @hwanwol_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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