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다 카포(da capo) 41

W. 율이



CHAPTER 3. 공백 


미나야 잘 있어? 거기는 어때?

아, 그리고 말이야. 너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있어. 미나야, 이 모든 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 그러니까 부디 그곳에서는 온전히 행복하길 바라.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찬란하게 부서지던 가을 아침의 햇살이 백현을 향해 쏟아내렸다. 백현이 이 납골당에 매주 주말마다 꼭 한 번씩은 오게 된 지도 벌써 두 달이 흘렀으니, 지금은 미나가 이곳을 떠난 지도 두 달이 지난 10월 중순이었다. 

백현이 여전히 그녀의 죽음을 생각할 때면 가슴 한쪽엔 극도의 분노가 차오르고, 또 다른 한쪽엔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의 빈자리가 생생히 다가와 먹먹한 기운이 남곤 했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미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뒤에서야 쉬쉬하며 그녀의 죽음을 들먹거리는 일이야 어딘가에서 다분히 일어나고 있겠지만, 어쨌든 그 누구도 죽은 미나의 이름을 큰 소리로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그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다 보면 이따금 이러한 생각들이 들곤 했다. 처음부터 미나는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한 명, 두 명 그녀의 이름을 잊어갈 때쯤이면, 그녀는 완전히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육체도,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추억의 일말조차도 남게 되지 않는 그런. 하지만 백현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나도 원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매주 주말이면 미나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에 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 지속적으로 방문해 오는 것은 백현 뿐만은 아니었다. 백현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지만, 미나가 머문 재단의 유리창 너머에 작은 조화들과 미나의 조그마한 소품들이 그곳을 이따금 장식하던 걸 보아 하면, 그녀의 부모님이, 또는 민석이 형이, 도경수가 왔다 가는 것일 거라고.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여전히 경수와는 연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미웠다. 미나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도경수를 보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앉아, 또는 서서 자리를 지키는 도경수를 보며, 그리고 미나를 조금이라도 돌아보지 않았던 도경수를 보며. 어쩌면 미나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우리가 그 애를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백현은 기억한다. 어느 날, 빈 교실에서 미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며 추궁했던 그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치다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미나를. 그리고 그런 미나를 보며 더 이상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기로 선택했던 저를. 그때 더 물었어야 했나. 결국은 끝까지 추궁해서 미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했을까. 여전히 백현은 그때의 선택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제 선택이 어떠했든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경우의 수는 수없이 많고, 그로 인해 도출될 결과 또한 백현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아니, 조금 바꿔 생각해 본다면 경우의 수는 수없이 많지만 결과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듯 지금처럼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그 많은 경우의 수는 선택되지 않은, 그리고 흘러가지 않아 생기지 않은 일인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는 현재일 뿐이고, 후회해봤자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미나는 죽었고, 백현은 살아있다. 미나는 죽었고,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백현은 조금 웃었다. 아니, 울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백현은 미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백현은 더 이상 도경수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제가 경수를 원망할 자격 따윈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걸,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걸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엔.


오래도록 메아리치던 신호음 끝에 익숙한 듯, 하지만 어딘가 낯선 도경수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 여보세요?




*




아침엔 조금 비가 왔다. 우산을 가지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을 뒤로하고 경수는 현관에 앉아 운동화 끈을 고쳐맸다. 경수가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서자 어머니가 경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 다녀와.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보니 7시 35분을 막 지나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니 서늘한 공기가 경수의 주위를 맴돌았다. 학교엔 등교 시간에 맞추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이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이래로 도경수는 매번 이 시각에 맞추어 등교하기 시작했다. 이것 이외에도 도경수에게 또 다른 변한 점이 있다면 이런 것이었다. 도경수는 이제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방학 때부터 그러했던 거지만, 그땐 잠시 쉬었던 거라면 이제는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는 게 바뀐 점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경수는 꽤 오래도록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렇다고 음악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다. 도경수는 새로운 꿈을 찾았다. 노래를 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가수가 되고 싶다는 거야? 부모님이 이렇게 물었을 땐 조금 주저했다. 가수가 되고 싶은 거였던가. 티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 연예인?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굳이 연예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러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백현에게 먼저 연락이 와서 만났다. 학교 근처 카페에서 본 백현은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먼저 경수에게 사과해왔다. 길지 않은 대화를 조금 한 뒤엔 함께 미나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에 들렀다. 백현은 매주 주말마다 이곳에 오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말에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 나도.

도경수는 매주 주말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미나 생각이 날 때마다 이곳에 들리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딱히 전할 말은 없었다. 미안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을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왜 이렇게 미안한 사람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그만큼 잘못 살아왔던 걸까. 경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지만, 어찌 됐든 지금의 도경수는 덤덤히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찬열과는 여전히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 경수는 찬열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 너는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괜찮아?

그렇게 묻던 경수에 휴대폰으로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받던 찬열이 경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는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 이런 말이 있어, 매사에 감사하라.

그에 경수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응? 하고 대답했다.

- 내 인생 모토거든. 우리 집 가훈이기도 하고.

- ······.

- 그러니까 나는 이 순간만으로도 감사하려고. 결국은 이렇게 너와 친구라도 되었잖아?

찬열은 웃고 있었다. 처음, 그의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경수가 대답했다. 그래, 그러네···.



그리고 지금껏 이어져 온 도경수의 안부에 여전히 김종인은 없다. 그럼에도 도경수는 종인의 집 앞에 이따금 찾아간다. 언젠가 돌아오겠지. 언젠가 내 앞에 뿅 하고 나타나겠지. 언젠가 나를 웃으며 반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아직도 김종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공백이었다. 너는 어디서 뭘 하는지.

한 번은 도경수 혼자서 전에 종인과 함께 올랐던 남산타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종인이 걸어둔 자물쇠가 머물고 있었다. '도경수 좋아해' 그리고 하트 모양. 경수가 그곳에 서서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경수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종인아 보고 싶어. 보고 싶어.

- 너의 공백에 나는 이렇게나 지쳐가고 있어.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도경수였다. 도경수의 과오가, 도경수의 잘못이, 도경수의 선택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래서 도경수는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도경수는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김종인, 너는 지금 행복해? 내가 없는데도 너는 행복해?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인 또한 도경수가 없어서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오도록.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네가 나를 사랑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도경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새로운 챕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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