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

 

 2014. 10. 10

 

 

1

꽤나 넓은 공간의 방, 커다란 책상과 그 뒤로 커튼처럼 늘어선 책장. 손때가 묻은 경영학 서적과 뭉쳐진 청사진들. 모두 오랫동안 건들지 않은 듯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그 위로 역시 하얗게 먼지가 내린 나무 모형 배 한 척. 16세기의 갤리어스를 정교하게 깎은 모형이었다. 그리고 갤리어스의 모형 옆에는, 책장 위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그 몸에 맞지 않은 것 같은 물건인 액자가 있었다. 액자에는 중년의 남성이 웃는 얼굴로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고, 액자의 시선을 따라가면 액자 안의 인물과 매우 똑같이 생긴 인물이 책상에 앉아있었다.

최 사장은 사장실 책상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와 심란할 법도 한데, 이미 익숙해진 그에겐 그런 것 따윈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경찰차 사이렌이 울리면 불안해하는 것은 모든 이의 추억의 편린이겠지만, 최 사장에게는 그것도 한 옛날. 사이렌 소리는 이 거리에서는 틈만 나면 울려 퍼졌고, 이미 그런 소음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전축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만큼이나 편안했다. 그가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기던 중, 노크소리가 울렸다. 휴식시간을 방해받은 최 사장은 잠시 짜증을 냈지만, 곧 기분을 풀고 대답했다.

“들어오시게.”

그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껏 서류들을 손에 들고 있는 그녀는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찾아왔습니다만….”

최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비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약속이 없는 걸로 아는데?”

“예…. 잡혀있던 일정은 아닙니다만.”

“누군가?”

“그게…, 현이라는 사람입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너머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비서는 말을 멈추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벽에 몸을 기대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젊은 남자 한 명이 사장실을 향해 걸어왔다. 남자의 구두굽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최 사장은 머릿속에 있는 인명록을 한 페이지씩 넘기며 그와 대조해보았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윽고 현은 사장실 너머로 들어왔고, 비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최 사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최 사장님.”

그 말에 최 사장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우리 구면이었던가?”

현은 그 질문에 정말 즐거운 듯, 그러나 처참하게 쿡쿡 웃었다.

“아무리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지만, 저를 잊으실 수 있습니까?”

“….”

최 사장이 머리를 굴리며 말을 고르는 동안 현은 허락도 없이 사장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당황한 최 사장은 그를 나무랄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현은 다리를 꼰 채 최 사장이 앉은 책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에 최 사장은 또다시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게…, 무슨?”

현은 또다시 처절하게 웃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아, 사이렌 소리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구요? 물론 당신을 체포하러 오는 소리죠. 죄목을 말씀드릴까요? 사기, 방화, 살인교사, 횡령, 뇌물, 불법 인수…. 이런 몇 가지 더 있는데 일일이 열거하려면 날 다 새겠군요. 10년 동안 참 이것저것 조사하고 증거 수집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 무거운 엉덩이 바닥에 내려놓으시고 쉬시죠.”

현의 말에 최 사장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져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현을 가리키며 최 사장은 소리쳤다.

“너…, 넌 누구냐!”

최 사장의 고함에 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쓰럽다는 듯 최 사장을 쳐다본 그는 입을 열었다.

“진, 현, 여름.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들어도 기억나시는 게 없으십니까?”

최 사장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진이라고? 진….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최 사장이 골똘히 생각하느라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현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 그럼 형사님이 올라올 때까지 옛날이야기나 해볼까요? 지금부터 15년 전쯤 진, 현, 여름이라는 세 친구는 한 자그마한 주식회사를 설립했죠.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었지만 세 사람이 유능했던 덕인지 뭐 나름 잘 성장했고, 세 사람은 행복했답니다.”

최 사장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 사실에 개의치 않고 현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젊은 사업자 셋이 열심히 회사를 꾸려나가던 중, 어떤 기업의 사장님께서는 그 회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회사를 인수하려고 했죠. 세 사업자들은 거절했고, 그래서 그 사장님은 화가 났답니다. 그 회사를 꼭 갖고 싶던 사장님은 아주아주 비겁한 수를 썼죠. 12년 전 일어난 선박의 사고는 세 사람의 회사에서 만든 부품 때문이다- 뭐 이런 말이었던가요? 아무튼 그런 말을 언론을 통해 흘렸고 덕분에 그 작은 회사는 참 큰 논란에 휩싸였죠. 참 난리도 아니었지요. 작은 회사가 기울어지는 건 순식간이었죠. 아, 또 이런 일도 있었던가요? 그럼에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 사장님께서는 작은 회사의 사업주로 있던 진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해버렸답니다. 어쩜 이럴 수가! 진이 죽자 그의 절친이자 동료였던 여름과 현은 좌절한 채 회사를 팔아버렸고, 그 사장님께서는 히죽 웃으며 최대주주가 되었고, 그 작은 회사를 낼름 먹어버린 거죠. 그 후 사장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짝짝짝!”

현은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쳤다. 최 사장은 얼굴에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현을 향해 소리쳤다.

“너… 너! 왜 이제 와서 이런 짓을…!”

현은 그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최 사장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다가 터질 것처럼 변했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은 표정이란 개념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넌… 그 진이란 놈의 무엇이기에…!”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친구라고.”

그가 즉답했다. 최 사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친구…? 단지 친구라는 이유로, 너에게 돌아가는 지위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이 10년이란 시간을 들여서 나에게 복수한다는 말이냐? 그런 아무런 이득도 없는 관계 때문에? 수익성이라고는, 투자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일을 벌였다고?”

현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한껏 빨아들였다가 내쉰 뒤 그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현이 말을 마치자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리고, 사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사장실에는 형사와 경찰들이 들어왔고, 최 사장의 손에 수갑을 채운 채 그를 데리고 나갔다. 방구석에 서있던 최 사장의 비서는 그녀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눈만 꿈뻑꿈뻑 움직이고 있었다. 현은 그녀를 무시한 채 책장으로 다가가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갤리어스 모형이 닿았다. 조심스럽게 모형을 끌어내려 품에 안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 끝났어.”

좀 전까지만 해도 쨍쨍하던 날씨는 온 데 간 데 없고, 잿빛으로 물든 거리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2

바람이 불었다. 모든 걸 녹슬게 만드는 차디찬 북풍은 눈꽃의 너울을 펄럭였고, 얼어붙은 대기엔 태양의 잔향만이 남았다. 구름은 겹겹이 하늘을 가리며 화산재 같은 눈 싸라기를 계속 뿜었다. 별빛처럼 무게도 없이 내려온 눈송이는, 붉은 체크무늬 목도리에 엉겨 붙었다. 목의 보온을 위해 태어난 목도리는, 사람의 따듯한 체온이 아니라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돌기둥을 감싸고 있었다.

묘비에 목도리를 두른 여름은, 추위에 감각이 무뎌진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숨이 내쉬어질 때마다 나오는 하얀 김은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고, 그 직후마다 다시 찾아드는 한기에 그녀는 몸서리쳤다. 저 멀리서 그녀를 향해 한 남자가 다가왔다. 사내가 그녀의 바로 뒤에서 멈추자, 그녀는 돌아보았고, 현의 모습을 확인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현의 말에 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은 듯 현은 그녀의 옆, 진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품에 안고 있던 갤리어스 모형을 내려놓았다.

“끝났어.”

갤리어스 선체에 눈이 쌓였다. 갤리어스는 눈 위를 항해하듯 바닥에 안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은 갤리어스에 하나 둘 쌓여갔다. 마스트에도 갑판에도 돛에도,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에도. 여름은 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현이 돌아보며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꿈틀댔다. 조금 슬픈 미소를 지은 여름을 보고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눈을 감았다.

 

청소년기의 기억을 헤엄치면서 현이 가장 강렬하게 느낀 감각은, 청각이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조각칼의 소리가 지배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어린 진은 항상 조각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현이 설계하고 진이 만드는 그들의 꿈이 담긴 배. 둘이 배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디선가 여름이 달려와서 잔소리를 했다. 되짚어보면,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마저도 그들 셋은 한 몸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현은 진에게 말했다.

“담임선생님이 너더러 공부 좀 하라더라. 너는 참 노력하면 잘 할 텐데 노력은 안하고 놀기만 좋아한다고.”

진은 집중하고 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현은 자신이 디자인한 그림과, 진이 깎아가고 있는 조각의 모습이 점차 배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을 보며 흐뭇함을 느꼈다.

“진 너더러 여름이를 좀 본받으래. 여름이는 이번 모의고사에서….”

“너, 여름이에게 차였다며?”

진이 현의 말을 끊었다. 현은 화들짝 놀라 진을 쳐다보았다. 당혹감을 지우고 다시 평정심을 가장한 현은 진에게 물었다.

“여름이가 말했어?”

“아니. 그냥 너희 모습을 보면서 짐작했지.”

“그렇군.”

“그 애가 뭐라 하든?”

현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친구라서 안 된대. 나와는 너무 옛날부터 같이 지내서 그런지 내가 그런 상대로는 보이지 않는다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대체 친구란 게 뭔데?”

현의 물음에 진은 조각칼을 쥐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진의 얼굴. 현은 고 얼굴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참 그리 생각하면 친구란 개념이 명시적이진 않지. 사전적 정의로는 ‘가깝게 오래 사귄 친구.’ 라니. 설명에 친구가 들어가서는 무엇도 설명되지 않잖아?”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말을 이었다.

“친구에 대한 듣기 좋은 미담이나 금언들은 많아도 정작 친구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말은 많이 없지. 무계약, 무질서, 무관계…. 혈연도, 이해도, 지역도, 나이도, 성별조차도 친구를 가르는 명료한 기준은 되지 못한단 말이야.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

“글쎄. 아가페의 승화?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합일에 대한 욕구의 발현?”

“결국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거지. 친구란 이름으로. 심지어는 대속자(代贖者), 복수자, 교사자(敎唆者)까지도 친구의 이름을 빌려 포장할 수 있다는 거지. 친구란 이름을 빌리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참 변명으로 쓰기 쉽지 않겠어?”

“대속(代贖)마저도 친구란 이름 아래 채무가 될 수 있다고?”

진과 현은 그 말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둘이 그렇게 웃고 있자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여름이 고개를 내밀었다.

“너희들, 뭐가 그리 재밌어서 키득거리니? 어서 와서 밥 먹으래.”

진과 현과 여름은 식당으로 걸어갔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한 뒤, 그들은 자그마한 사업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완성시킨 배의 모형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배를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모형에 투영한 것인지, 어찌되었건 그들은 자연스럽게 선박에 관련된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현이 설계하고 진이 프레젠테이션하며 여름이 경영한 그들의 회사는, 빠른 시간 안에 크게 성장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빴지만 그들이 흘린 땀방울만큼 고양감에 젖었다.

“…에서 항해하던 어선이 침몰하여 12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이에 현지 경찰은 수색 인원을 강화하여….”

눈이 내리는 12월. 뉴스를 보고 있는 현에게 진이 다가왔다.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말을 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입을 닫고를 두어 번 반복하던 그는, 뉴스에 집중하며 쉬고 있는 현에게 힘겹게 말을 꺼냈다.

“여름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현은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진을 바라본 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언제? 축하해.”

“그…, 12월 25일.”

진은 별다른 내색 없는 현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은 고등학생 때의 그들을 기억했고 그 때문에 계속 말을 힘겨워했다.

“그… 그러니까, 현, 너 말이야.”

“진. 너 혹시 우리 고등학교 때 나누었던 대화 기억해?”

진의 말을 끊고 현이 물었다. 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현은 미소 지었다.

“친구 또한 채무가 될 수 있다는 대화 말이야.”

“아? 아, 물론 기억해.”

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현은 만족한 듯 웃었다. 현은 말을 이었다.

“친구란 관계는 명시적으로 정립할 수 없다고 했지. 결국 그 말은 ‘자유’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겠지. 자유란 뭐지?”

“자유…? 글쎄, 선문답 같은 거야?”

“아냐. 동물원 울타리 안의 사자가, 묶여있는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먹잇감을 바라보며 자유를 느낄까?”

“상대적인…, 구속이 없는 관계라는 거야?”

현은 긍정하지 않았다. 미동 하나 없이 현은 말했다.

“너의 울타리는 뭐지? 이름과 돈과 회사, 그리고 네가 가진 재산 모든 것? 아니면 나에 대한 죄책감? 친구라는 이름의 구속?”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재산도 채무도 구속의 일부분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자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고?”

진이 현에게 되물었다.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나에게 아무것도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아무것도 요구할 필요도 없고.”

그 말을 마치고 현은 진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는 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미 관심을 잃었다는 듯 리모컨으로 다시 TV를 켰다.

“여름에게 그녀의 이름처럼 열음을 맺게 해달라고.”

 

 

3

현은 눈을 떴다. 이번 해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살갗을 뒤집어버릴 것처럼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 특히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묘지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북풍은 노래했고, 바람의 잔향이 지상 모든 것들의 콧잔등에 뽀얗게 쌓였다.

“에-취!”

여름이 재채기를 하자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목에 있던 스톨을 여름의 목에 둘러주었다. 눈을 내리깔고 코를 빨갛게 물들이며 훌쩍이는 그녀의 목에 스톨을 감아주며 현은 입을 열었다.

“이제 여긴 그만 와. 네가 매일 여기 오는 걸 모두들 알고 있어. 이렇게 몸도 돌보지 않고 여길 찾아오니까 주변 사람들이 걱정한다고. 오늘 내가 다 끝냈으니까, 뒤늦게라도 너 자신을 위해 삶을 살아.”

그녀는 코를 한 번 더 훌쩍거리고는 대답했다.

“…고마워.”

그 말을 듣고 현은 살며시 미소 짓고는 등을 돌렸다. 현은 눈 깊숙이 자리 잡은 발을 떼었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쌓인 눈은 현의 발을 잡아끌었지만, 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두세 걸음을 내딛었을 때 즈음 여름이 소리쳤다.

“현, 너 아직 나…!”

“그만.”

크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 그러나 힘이 담긴 현의 목소리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했다.

“나는 진에 대한 부채감이나, 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냐. 물론 나는 내가 선인이라든가 호인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신사나 기사 따위도 아닐뿐더러, 진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대속자나 복수자 따위의 영웅적인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야.”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여름의 눈동자에 박혔다. 검은 눈동자는 눈송이를 품었고, 눈송이는 조금씩 녹아내려 그 검은 호수에 윤슬을 피웠다.

“복수의 쾌감?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건 내가 바란 삶과의 괴리감을 낳을 뿐이야. 인간은 괴리를 느낀 순간 감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고.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냐. 나는 단지, 내가 설계하고 그가 깎았던 그 갤리어스의 모형을 다시 되찾아 그 녀석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여름은 그 말에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현은 힐끗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친구라는 이름은 우리의 아무것도 묶어놓지 않았어. 결국 울타리가 부서진 후에도 사자가 동물원에 남아있는 건, 사자가 울타리에 구속되어있기 때문이 아니야. 사자는 안락함과 편안함,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것들에 지배되어있기 때문이야. 뿐만 아니라, 울타리를 나가도 ‘자유’라는 것은 결국 허상일 뿐이란 걸, 울타리가 부서지고도 남아있는 자신을 통해 깨달았으니까.”

여름이 그 말을 들으며 어리둥절하고 있자, 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 난 나와 진과 네가 아주 옛날처럼 돌아가길 바랐고 그랬기에 여기 온 거야.”

그녀는 눈을 비볐다. 이미 추위에 감각을 잃어버린 손이 물기를 머금고 촉촉해졌다.

“친구?”

“그래. 친구.”

그 말에 여름은 환하게 웃었다. 눈물 젖은 웃음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없던 무언가가 포함된 미소였다.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이미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도 없게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 성탄종이 울려 퍼졌다. 전나무로 깎은 갤리어스는 조금씩 눈 속에 잠겨갔고, 마침내 커다란 마스트만이 눈 속에서 꼿꼿하게 서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아주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같다고 생각한 여름은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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