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이상만 보세요.


강남역 출구 바로 앞에 자리한 대형 베이커리 안에는 저 같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창 밖으로 인파의 물결이 끊기지가 않는다. 확실히 이런 번화가에서는 덜 한데 제 외관이 눈에 띄는 편인 듯 했다. 학생 때도 괜히 시비 걸린 적이 왕왕 있었지만.. 오전에 아라를 무사히 버스에 태워보내는 임무를 완수하고 뿌듯함에 젖어있는데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후다닥 흩어지는 눈동자들이 나와 아이의 관계가 꽤나 궁금했나 보다. 태섭은 경기가 아니고서야 집중 받는 일이 익숙지 않아 고장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오빠야 서울에 뭐 그리 구경할 것이 많습니까~?"


실내까지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와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제 동생의 요란한 말투에 고개를 세웠다.


"컨셉 잘못 잡으셨는데." 

"아, 뭘 모르네. 뺑뺑 노는 동안 영화나 보지."

"안 놀았거든?"


눈썹하나 깜짝 않고 선글라스를 벗어 내 머리 위에 걸어준 아라는 손바닥을 척 내보이더니 까딱까딱 두번 한다. 무슨 삥 뜯는 양아치도 아니고.. 지갑을 들려주니 꼼짝 말고 있으라는 엄명을 내리고 카운터로 사라진다. 대학 가면 뻔뻔함이 하늘로 더 치솟나? 그러고보니 대만이 저번에 극장에 데려가 보여준게 깡패 영화였는데. 왕년의 양아치가 골라온 영화 취향을 도통 알 수 없다 했더니 설마 그게 인기 많아서 본 거 였나.


수도권 여대에 다니는 아라는 계절학기가 끝났으니 얼굴을 보고 가라며 엄포를 뒀다. 태섭은 레모네이드를 들어 마시다 말고 아라가 내려놓은 트레이 위에 쌓인 빵 더미를 보며 질색했다.


"너 이걸 다 먹게?"

"왜? 좀 써."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 나 늦잠 자서 밥 못먹었단 말이야."


소보루빵을 커다랗게 한입 베어 먹는 아라의 표정이 행복해보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씰룩이다가 표정을 굳혔다. 예전에 언젠가 대만이 저와 아라의 먹는 얼굴이 똑같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멍청해보였다고? 


"그래서 왜? 무슨 일이야."

"헐.. 이 오라버니 미국물 너무 드셨네. 일이 있어야만 봅니까?"


정없다 진짜. 아라가 툴툴 거리며 크림빵 봉지를 북 찢었다. 이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정 타령이지 어디서 배워오기라도 하나. 왜 아주 밥도 초코파이로 먹지 그래.


"엄마한테 내가 오빠 실존하는지 확인 해보겠다고 했거든."

"음.."


송아라는 제가 할 말 없게 만들고 싶으면 자주 엄마를 써먹었다. 괜히 한마디 더 붙였다가는 감정 싸움이 될 거 같아 입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흥 염치는 있구만. 오빠 오늘 며칠인지 알아?"

"어? 오늘.."


휴대폰 위에 써진 날짜를 보니 7월...


"뭐 얼마나 바쁘길래 자기 생일도 까먹어? 바부."

"아. 맞네."


미국에서 따로 산 이후로 처음에야 생일이라고 전화도 주고받고 했었는데, 나중에 가선 그런 것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관두었다. 죽은 이의 나이를 세던 추모식이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만 선배.. 뭐 좀 도와주느라. 오래 걸리네."

"우와 둘이 아직도 연락해?"


이상한 건가? 제가 언제 티를 냈었나 턱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아라가 부러움이 섞인 기색으로 말한다.


"진짜 친한가 보다.. 나는 동창들이랑도 잘 안 보는데."

"이사 가서 그런거 아니야?"

"오빠가 할 말은 아니지."


아라까지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엄마는 인천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강원도로 터전을 옮겼다. 듣기로는 어렸을 적 살던 것과 비슷한 단독 주택을 장만했다 한다. 연고 하나 없이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힘으로 부대낀 세월 끝에, 저도 자리를 잡고 아라도 독립을 하고. 안정을 찾은 엄마는 끝끝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비슷하게라도 흉내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더니 저의 집이 딱 그짝이었다.


"...너 아빠 기억 나냐."

"갑자기?"

"어 갑자기."

"음 솔직히 말하면 잘 안 나지. 그냥 몇개 장면만 떠오르지."

"엥?"


예상과는 다른 말에 태섭은 따끔 놀란 기분이 들었다.


"흠... 뭐 둘 한테 딱히 얘기한 적은 없는데. 난 별로 생각 안 나. 

으음.. 나만 바다 못들어가서 우니까 목마 태워줬던 거랑.."


아라는 뜬금 없는 질문에도 꽤나 성실하게 답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기억을 더듬는 걸 보며 태섭은 심란해졌다. 아라는.. 그러니까 눈 앞의 아라가 마지막으로 아빠를 본 건 다른 아라보다 너덧살은 더 많았을 때다. 저랑 아라의 나이는 겨우 두 살차. 기억의 총량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는데.

태섭은 오후 늦게 만나기로 한 대만이 떠올라 입맛이 써졌다.





면세점에서 사온 선물들을 건네주니 동생은 강남 대로변에서 사람들이 보건 말건 폴짝폴짝 뛰더니 작작 놀고 기어들어오라는 황당한 소리를 인사랍시고 사라졌다. 


"애 생일 선물 산다면서 이런델 와요?"


대만과 만나기로 한 백화점에서 무슨 볼일이 있는가 했더니. 태섭은 주얼리 매장에 꿔다놓은 빗자루처럼 서 있다 인내심 있게 물었다. 대만은 아침에 입고 나간 양복 차림 그대로였기 때문에 꼭 무슨 결혼 예물 고르러 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 팔찌... 하나 해주게."

"...보통 미미 인형 사러 갔다가 싸우고 드러눕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직원이 보여주는 팔찌에 이니셜을 넣을지 날짜를 넣을지 의논하던 대만이 피식 웃었다.


"너 장난감 땜에 드러누웠었냐? 좀 보고 싶네."

"말을 말자..."


태섭은 헛소리에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같은 층의 편집샵이나 보고 오겠다했다. 



마침내 대만이 골라온 팔찌는 핑크 스톤이 박힌 심플한 라인 팔찌였다. 지하 식품관에서 케이크도 하나 사서 차에 넣어놓고는 점심 제대로 못먹었다 죽는 소리를 하며 저를 데리고 백화점 뒤 골목을 요리조리 활보했다. 반지하로 된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이모님 삼계탕 특 두 개 주세요! 시원하게 외친다.


"야 오늘 복날이래. 먹어라. 여기 진짜 맛있어."

"그만 사줘도 돼요."

"왜? 8년치 한번에 갚을라는데."


숟가락을 들다 뒷목이 뻣뻣해졌다.


"할부 하세요. 이자 쳐서 받게."

"이거 자본주의 본진에 살더니 똑똑해졌어."


스읍 입맛을 다시는 대만이 닭다리를 쭉 찢어서 제 그릇 위에 놓아준다. 


"배고파 죽겠다면서요."

"엉아의 마음."


그러면서 하나 들어가 있는 전복도 건네준다. 닭다리까진 우정이라 치자. 전복은, 전복은 좀? 하아.. 나 더위 먹었나보다. 하지만 이왕 정신이 나간김에 태섭은 아예 유치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바닥에 드러눕는 꼴은 못보여줘도 낯짝은 두껍게 두를 수 있다.


"연락 먼저 끊은 거 형인거 알죠?"

"아닌데?"


일말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는 반격에 뚝배기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닮은 부글거림이 속에서 끌어올랐다.


"정말로? 곰곰히 잘 생각해봐요."


대만은 내말에 순순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 시늉을 했다. 우물거리는 볼따구가 설치류과를 닮아 있었다.


"진짜 모르겠는데. 그렇다 치자."

"아, 이..."

"거의 욕했다 지금?"


좋아하는 상대 때문에 물에 빠진 닭고기 마냥 찐득해진 마음을 간수하려니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질겅질겅 곱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데. 정대만은 살코기에 깨소금까지 야무지게 콕콕 찍어가며 잘도 한그릇을 비워냈다.





생애 첫 소풍을 다녀온 것이라는 아라는 실물 기린을 보았다는 자극이 너무 컸는지 대만을 따라 목욕하러 들어가면서도, 목욕하는 동안에도, 목욕하고 나와 저가 머리 말려줄 때까지 동물원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밤 8시가 지나기 무섭게 전원 나간 장난감 인형처럼 뚝 잠들었다. 고대로 안아 들고 방에 들어간지 이십여분 정도 지났을 때, 깨금발로 문을 열고 나온 대만이 말했다.


"맥주 사러 가자."


대만의 슬리퍼를 빌려 신고 나가 슈퍼에서 캔맥주 번들 하나와 마른 오징어 하나 사들고 올라왔다. 가스불 앞에서 오징어를 굽는 동안, 대만은 평소에 잘 트는 일이 없던 티비를 만지작 거리더니 원래 자기 방에 들어가 뭔가를 들고 나왔다. 비디오 테이프였다.


"뭐예요?"

"너 이번 시즌 녹화 해둔거."


VTR 속에 테이프를 밀어넣는 웅크린 등을 보며 태섭은 낮부터 속을 괴롭히던 체증이 사르르 녹아내림을 느꼈다.


"아직 복기 안 했지? 나도 녹화만 해놓고 안 봐서."

"...네."


단촐한 안주를 바닥에 놓고 대만과 소파에 기대앉아 두런두런 맥주 캔을 비워가며 태섭은 브라운관 안의 저의 모습을 보았다. 상대적 신장 차 때문에 화면에서 잘 뵈지도 않는데 옆에 앉은 남자는 득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어시스트도 패스 미스도 쏙쏙 잘도 골라 피드백했다.


정말 관심있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정말 관심..

태섭은 오늘 아침처럼 제 뺨을 후려치려다 참았다. 그 정대만인데 당연히 농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겠지 뭔 소리야.


"정우성 포가로 만나니까 어떻던?"


대만이 바꿔 넣은 비디오 속 경기는 몇 주 전으로까지 와있었다. 검은 유니폼과 노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점프볼과 동시에 일사 분란하게 움직인다. 동양인 선수는 극히 드물었기에 서로의 존재를 모르기도 어려웠다. 하물며 대만이 물어본 상대는 미국에서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동안 생각해온 바를 술술 털어놓을 수 있었다.


"꽤 예전에도 한번 붙긴 했었는데."

"아, 얘기 했던 것 같다."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NCAA 시즌을 앞두고 정우성이 속한 팀과 만난 적이 있다. 대학 간 코치끼리 연줄이 있어 진행 됐을 뿐인 관중도 그리 많지 않은 연습 경기였지만 태섭에게는 자신이 선발에 들 수 있나 없나 판가름 하는 기회라 제법 긴장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 당시만 해도 디펜스 플레이 위주로 실적을 내온 팀과 합이 맞지 않아 고생하다 막 벤치 신세를 벗어났을 즘이었다.


"이번에 처음 10분 뛰고 나오는데 아 이거 말렸네. 싶은 생각들어서 짜증나더라고요."


십대적부터 농구 신동 꼬리표를 달고 고교를 평정했던 인물을 타향에서 저와 같은 포지션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재밌는 인연이다 싶었고, 볼 찬스에 자꾸 반응하는 상대를 꿰뚫어 본 태섭이 역이용해 근소한 차이지만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데 한 몫 했다. 그 때 플레이로 입지를 잡기 시작하기도 했고.. 하지만 상대는 결코 태만을 부리는 천재는 아니었던 것인지 프로 리그에서 다시 만났을 땐 사뭇 노련해져 있었다. 요즘이야 존프레스 파훼법이 흔하다지만, 마치 그 시절 마주한 유쾌하지 않은 큰 바위 산처럼 태섭을 가로막아 왔다.


저 치고는 제법 솔직하게 털어놓아 그런지. 대만은 어느새 팔꿈치를 무릎에 세워 턱을 받친 자세로 제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약간 술이 돌아 느릿해진 말투로 자기가 들어가 있었으면 이렇게 했겠다 저렇게 했겠다, 거실 바닥에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선을 그어가며 온갖 가정법을 나열해갔다.


"그래도 내 말 듣길 잘했지?"


왜인지 저까지 정대만의 취중설법에 심취해서 듣고 있다가 에? 멍청한 소리를 내버렸다.


"미국 가기 잘하지 않았냐고."


고작 맥주 세캔에 얼굴은 터질듯이 빨개져 있어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있는 상대가 고까웠다. 푸우 소리나게 숨을 내 쉰 태섭은 삐죽 되묻기만 했다.


"형 농구 계속 하는거 맞죠? 은퇴 한단 소리 잘못 된거죠?"

"너는 내가 농구 때려치면 안 보고 살거냐?"


쭈욱 얼굴을 찌푸린 대만의 말이 얄미웠다. 


"어떨 것 같아요? 관둬 보시던가."

"이게!"


대만은 헤드락을 걸며 몸을 잡아 당겼다. 엉겁결에 가슴팍에 정면으로 부딪친 태섭은 앓는 소리를 냈다. 몸장난 친 세월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뜨끈뜨끈한 기운을 내심 즐기며 가만히 있는데 대만의 낮아진 목소리와 함께 은은히 흉통이 울렸다.


"준호가 그러디?"


출처를 특정해서 묻는 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많지 않다는 걸 방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대만은 한국 농구계에서 꽤나 아이코닉한 존재다. 한국 프로농구 효시를 알리는 해에 함께 데뷔하여 지금까지 3점 슈터 마스코트 격으로 뛰고 있었다. 남녀 모두에게 어필되는 외모 때문에 대학 선수 때부터 팬몰이를 했던 그가, 팀명은 바뀌어도 백넘버는 바꾸지 않는 무릎 부상에 얽힌 사연이 매스컴을 탄 이후로는 한국의 부활 신화다 뭐다 하며 스포츠 스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혼이나 계약 종료 소식이 스포츠 신문에 단 한줄도 없다는 건.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선배."


태섭은 천천히 대만의 고개를 잡아 끌었다. 얌전히 저를 바라보는 대만의 눈가가 열꽃이 올라 붉어져 있었다.


"나 선배 만나려고 나왔어요."


시선을 고정한 채 귓불을 만지작거려도 그저 온순하게 제 손길을 느끼는 상대의 입술을 물었다. 말캉하게 닿아오는 걸 혀로 살살 달래주자 제 허리를 꾹 붙잡는다. 그걸 신호로 태섭은 아예 다리 사이에 대만의 몸을 가두고 거칠게 뺨을 틀어쥐었다. 아. 소리와 함께 벌어진 속에 혀를 밀어 넣어 더듬는다. 미세한 움찔거림을 무시하며 태섭은 턱을 비틀어 더욱 깊숙히 점막 위를 훑어 올렸다. 숨구멍이 트일 정도로만 떼었다 붙었다 반복하는 입질에 조금씩 자세를 뒤로 빼던 대만은 소파에 등이 가로막혀 종국엔 제 어깨를 붙잡았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흐. 잠깐.."


대만이 입은 흰 티셔츠 안으로 손바닥을 밀어넣자, 축축하니 땀이 배어 나왔다. 등 뒤로 손을 돌려 힘을 주어 당겼다. 태섭은 아래에서 대만을 올려다 보며 쉴 틈 없이 쪽 쪽 살 빠는 소리를 냈다. 대만의 눈이 결국 감기고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앞으로 쏠린 자세가 무너질 것 같았는지 양 어깨를 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불뚝 튀어나온 살 위를 더듬던 태섭이 문득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쥐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붉은 자국이 쉽게 남는 피부에 천천히 눈길을 주다 태섭은 대만이 자세를 편하게 하도록 몸을 풀었다.


"해줄게요."

"아니.."


슬쩍 부풀어 있는 바지 앞섶을 한손으로 더듬자 대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사선으로 돌아간 방향의 얼굴은 침묵했다. 제 심장이 아까부터 벌컥벌컥 성을 내는 통에 태섭은 평정심을 위해 이를 더 악 물어야했다.


"왜 대딸쳐주는거 처음도 아니잖아요."


대만의 손을 끌어 제 것 위에 놓았다. 트레이닝복의 얇은 천 위로 모양이 느껴지자 길게 뻗은 흰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물러난다. 


"그게 언제적이야. 우리가. 지금 나이가.."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팔뚝으로 닦아내더니 대만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기적거리는 우스꽝스런 발걸음을 붙잡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치기 어린 시절의 해프닝처럼 끝내기 싫었다. 싱크대에서 어푸어푸 세수하는 정대만의 뒷모습에 태섭은.


"나 선배 좋아해."


물 소리에 섞여 저의 고백이 점점이 흩어졌다. 


대만은 거칠게 레버를 닫았다. 퉁.. 퉁... 수도 끝에 맺혀있는 물방울이 쇠면에 닿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뒷모습을 돌려 세우고 싶은 형언하기 힘든 난폭함이 차올랐다.



"안돼, 안돼! 취소해!"

"--뭐라고?"


긴장감을 한방에 뻥 차버린 대만이 허둥지둥 현관문으로 뛰어간다. 제 앞을 훅 스쳐 가는 바람을 맞고 태섭은 얼이 빠져버렸다.


"어디 가요?!"


태섭 역시 벌떡 정신을 차리고 대만을 붙잡기 위해 일어났다. 진심으로 뛰면 속도는 제가 더 빠르...다..는 생각과 동시에 우뚝 멈췄다. 그는 식탁 의자에 걸어둔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집어 넣었던 손을 빼들자 손아귀에 사각진 케이스가 들려 있다. 그 상자가 자신 앞에 내밀어진다. 이게 뭐야. 태섭은 이어지는 전개에 잠시 머뭇거리다 대만을 올려다보았다. 대만의 표정이 안절부절 못했다.


"너 오늘 생일이잖아."


지중해를 닮은 하늘색 작은 케이스를 어서 받으라는 듯이 흔든다. 아무리 노려봐도 반지 케이스와 비슷한 크기에 태섭은 잠시 아찔함을 느꼈다.


"......열어봐도 돼요?"

"어."


볼품없이 덜덜 떨리는 손 그대로 뚜껑을 열었다.


"몰라 니 취향 뭔지. 그냥. 눈에 띄어서 샀어."


주절 주절 덧붙이는 대만의 변명이 무색하게 태섭은 상자 안에 소박히 담겨있는 한쌍의 귀걸이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거 내 맘대로, 작위적으로 해석해도 돼요?"


가장 기본 형태인 스터드 이어링은 특별한 장식은 없었다. 섬세하기 짝이 없는 플래티늄 프레임에 센터 스톤으로 솔리테어 다이아몬드가 물려있을 뿐이었다.

태섭은 제 목소리가 들쭉날쭉 해진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대만의 말을 기다렸다. 투명한 빛을 과시하고 있는 보석과 달리 마주보는 새카만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한참만에 대만의 입술이 움직였다.


"태섭아 난..."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어이쿠. 아라 깼어?"


문틈으로 눈을 부비고 선 딸을 능숙하게 안아 올리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깊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아빠 왜 같이 안 자?"


 아라는 졸음 가득한 눈으로 대만의 목에 매달린다. 


"아빠 농구 공부했지. 이제 공주님이랑 같이 코야코야 해야지."


대만이 잠투정하는 아이 등을 토닥이며 방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좀 처럼 기다려도 문이 다시 열릴 기미가 없어보였다. 태섭은 심란한 밤을 각오하고 열기를 벅벅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대만에게 받은 귀걸이를 차마 껴보지도 못하고 여직 상자에 넣어둔 채 만지작거렸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레 웃게되는 태섭은 어쩔 줄 모르고 베개나 퍽 소리나게 주먹질 했다.

저인간은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태섭은 문득 서울에 도착한 첫날 자신의 예상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될까 생각했던 일이 떠올라 마른 세수 했다. 


오늘 아침 등원 준비로 복작했던 현관문 앞에 서서 태섭은 무심코 대만과의 신혼 생활을 떠올렸다. 아이를 돌보는 궁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겪어본 적 없는 자괴감에 빠트린 순간이기도 했다.

남의집 귀한 자식으로 뭔 쓰레기 같은 상상을. 태섭은 양 손바닥으로 쭈욱 볼을 잡아 늘렸다. 속이 안 좋아졌다. 


손에서 굴러나온 작은 상자를 소중하게 베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스탠드 불을 껐다. 태섭은 암흑 속에서 가만히 되내였다. 내일은 내일 몫의 번뇌가 찾아오겠지.


-- 똑똑.


돌아눕자 마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자냐."


속닥이는 소리에 태섭은 스탠드 전원을 다시 켰다.


"아뇨."


대만은 소리 안 나게 방문을 밀어 닫았다. 미약한 빛 속에 침대 옆으로 슬슬 걸오는 남자가 보였다. 


"야, 애 재웠다."

"근데요?"


아까 분명 입을 떼다 말았기에 태섭은 조용히 있었다. 긴장감이 콩콩 콩콩 다시 세차게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애. 재웠다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대만의 기색이 이상했다. 끼이익.. 대만이 앉는 움직임을 따라 침대 스프링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태섭은 가까이 다가온 상대를 확인하고 뒤로 넘어갈뻔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만 꼬아보고 있는 대만은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벌개져 있었다. 무언의 텐션을 읽은 태섭은 소름이 돋아 아무 소리나 나올 것 같은 입부터 틀어막았다.


진심이야? 정말로?

정대만이 못봐서 다행이지 아마도 지금 엄청나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건 내 쪽일 것 같았다.


"그..."

"...하 됐다. 자라 태섭아."

"미쳤냐고! 사람을 연타로 먹여놓고 어딜 가!"


태섭은 재빠르게 대만의 경로를 블로킹했다. 뒤로 그대로 고꾸라진 대만은 제 몸을 깔고 누웠다. 출렁거리는 침대가 잠잠 해질 때까지 둘은 가만히... 숨만 쉬었다. 파울 먹은 사람처럼 핸즈업 자세로 누워있던 대만은 등에 닫는 숨결이 간지러운지 슬쩍 틀었다. 움직이다가 뭔가를 느꼈는지 엉덩이가 움찔한다. 태섭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대만의 팔뚝의 말랑거림이 기분 좋아 그거나 계속 주물거렸다. 


"저기. 태섭.."

"쉿."

"어."


태섭은 대만을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쿡 박았다. 생각보다 품 안에 쑥 들어오는 몸둥이에 당황하는건 순간일 뿐이었다. 정수리 끝까지 고양감을 일으키는 살냄새에 태섭은 스물스물 속옷 안으로 손을 미끄러 뜨렸다. 미수에 그쳤을 때와 다르게 단단하게 세우고 있는 것이 만져졌다.

대만의 숨소리가 흐트러져 들렸다. 급소 잡힌 짐승이 된 남자가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이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 들어 깍지를 꼈다.


"태섭아 나도."


목덜미를 잘근거리는 제게 대만이 떨리는 소리로 묻는다.


"나도 귀 뚫을까?"


태섭은 코웃음쳤다.


"반지나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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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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