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PARTY

契. 여홍


본 글은 지면 기준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웹 기준 행간이 길고 대사량이 많아 보시는데 불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 좌우명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고요. 이상입니다. 면접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거, 강수연씨가 자주 하는 말 아닌가? 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마음에 와 닿은 말입니다. 면접관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잘 알겠다는 한마디와 함께 면접을 끝냈다.

로펌을 나오니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저 사람이래요. 미쳐도 단단히 미쳤죠.”


면접자끼리 술렁거리는 것을 보며 인준이 콧방귀를 끼고는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준아. 면접은 잘 봤어?]


문자를 확인해보니 태일이다. 시간을 확인한 인준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얼마안가 태일이 전화를 받았다.


-면접 끝났구나? 어땠어?

“어떠긴 뭘 어때. 조졌지.”

-쟁쟁한 사람 많았어?

“그냥. 튀어보겠다고 솔직하게 좌우명 말하니까 아주 자알 알겠습니다 하던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 이제 다른데 써보려고.”

-…너 로펌 들어가고 싶기는 해?

“아, 형! 내가 돈은 없어도 가오는 챙기잖아.”


그래, 인준아. 근데 그거 일본말이라고 내가…. 태일이 말을 흐리고는 더 좋은 자리가 생길 거라며 섭섭치않은 위로를 건넸다. 형이나 잘해. 이상한 학생한테 쩔쩔매지 좀 말고. 불퉁한 목소리에 태일은 그저 웃기만 했다.






전화를 끊고 역 안으로 들어왔다. 날도 더운데 사람이 가득하다. 교통카드를 어디에 뒀더라. 이것도 충전해야하는데. 재킷 안쪽 주머니를 뒤적인다. 소란이 일었는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게 정말. 인준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웬 남자가 역 안을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누군가의 추격을 피하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형량 추가!”


추격하고 있는 두 남자는 경찰인 듯 했다. 한 여름에 열심이네. 드디어 손에 잡힌 카드를 쥐고 게이트를 통과하려 걸음을 뗀 순간, 범인이 전속력으로 인준 쪽을 향해 달려왔다.


“발 걸어요, 발!”


빠르게 추격하는 경찰이 인준을 향해 외쳤다. 얼떨결에 다리를 내밀었지만 위협적인 범인의 기세에 움츠러들어 몸을 피했다. 야아! 다른 길로 돌아왔는지 앞쪽에서 튀어나온 다른 경찰이 범인을 덮쳤다. 아, 놀래라.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난 인준은 체포현장을 멀뚱히 보다 게이트 위에 교통카드를 찍었다. ‘삐빅.’ 아, 잔액 구멍 났구나.

카드를 충전하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고 있는데, 누가 옆에 서서 기계를 툭툭 친다. 고개만 돌려보니 범인을 추격하던 경찰이다. 저기요. 땀에 흠뻑 젖은 앞머리가 시선을 끌었다. 하얀 셔츠는 가슴 부분부터 어깨까지 흥건했다. 왜요? 지폐를 꽂아 넣고 대꾸했다.


“제가 아까 발 걸어달라고 했던 이야기, 못 들으신 거죠? 피하시길래.”

“들었는데요.”

“본인이 피해서 범인 못 잡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경찰도 아니고.”

“시민의식이라는 게 있잖아요.”

“참나, 본인이 제대로 못 잡아놓고 나한테 화풀이야. 쏘리. 쏘리! 됐어요?”

“쏘리? 여기가 미국이에요? 쏘리 하게?”


황당한 얼굴을 한 인준이 경찰을 보다가 한숨 쉬었다.


“날도 덥고 본인이 다 잡은 거 놓쳐서 화풀이하시나 본데요, 저는 달아나는 범죄자 잡을 이유가 전혀 없는 선량한 소시민이거든요? 화풀이는 다른 데 가서 하세요. 별 또라이가.”


앞전에 대고 욕을 해놓고는 금세 무서워져 허겁지겁 게이트를 넘어갔다. 세상엔 별의별 미친놈들이 다 있다니까. 물론 난 빼고.

집 앞에 도착한 인준은 문에 손을 얹었다가 뗐다. 아이 씨. 들어가지 말까. 문에 손을 얹었다 뗐다 반복하는 와중에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모친이 나온다.


“어우, 놀래라. 왜 그러고 섰어? 얼른 들어와!”


손목을 잡아끄는 영미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인준이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면접은? 잘 봤어?”

“내 포부를 이해 못 하는 것 같았어.”

“포부?”

“내 그릇으로 담기엔 그 로펌 크기가 조금 옹졸했달까….”

“옹졸? 네가 또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고 나왔겠지! 내가 널 모르니? 너 언제까지 자존심 부리고 살래? 그게 너 밥 먹여줘? 변호사 아들 두면 뭐해!”


엄마는 참 사람 기 못 펴는 말만 골라서. 꿍얼꿍얼. 투덜대면서 눈치는 열심히 살핀다. 혹시 알아? 거기서 날 뽑아줄지? 영미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너 오늘 말하는 거 들어보면 당치도 않은 소리야. 다른 데 넣어. 속 터져! 정말.”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영미의 등을 보며 장탄했다. 밥벌이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아들 둔 당신 심정이 얼마나 힘들겠어. 모친인 영미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답시고 침대에 앉은 인준이 로펌 채용 사이트를 뒤적거리다 잠에 들었다.

로펌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정확이 일주일 후였다. 합격 안내 문자에 갸우뚱했다가 한 번 정독하고, 황인준이라는 이름이 안 믿어져 서너 번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봐도 자신은 합격이 맞았다.


“엄마! 엄마! 나 금, 금배지 달아!”


실로 성대한 잔치였다. 드디어 사 씨 집안이네! 친척들의 아부에 후훗 웃는 인준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끝이다. 반 백수 생활.

 




 

기대만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막연한 기대는 접었지만 변호사 생활은 정말 기대 이하였다. 스카이 대학 나와 동대 로스쿨에 진입하고, 나름 높다 할만한 리트 성적, 우수한 연수원 시절… 같은 건 누구나 가지고 있었고, 개중에는 해외대 출신도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면접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얼마나 정신 나간 놈인지 보려고’ 뽑힌 황인준은 흔하다 못해 덜떨어진 변호사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었다.

몇 달은 소장 세계의 맛을 봐야 한다며 몇십 건을 몰아주던 로펌은 사건에 발을 디딜 때가 되었다 하고는 인준의 앞으로 수임사건을 맡겼다. 존속살인미수. 병중에 누워있는 친부의 호흡기 줄을 의도적으로 밟아 살해를 하려다 간병인에 들켜 소장이 접수된 사건이다. 피고는 모 기업의 대표로 이미 친부로부터 기업을 넘겨받은 뒤였다. 제가 아버지를 왜 살해한단 말입니까? 억울하다는 피고와는 달리 소를 제기한 원고인 여동생은 그를 보며 말했다. 저 새끼가 호스를 밟고 나서 그랬다고 했어요. 깨셨어요? 마지막으로 보는 게 제 얼굴이라 어떡해요? 라고.

수많은 소장을 거쳐 왔지만 이렇게 소름 끼치는 사건은 처음이다. 인준은 피고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피고는 살인미수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증거라고는 증인뿐.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 피고가 승소할 확률이 높지만 왠지 찜찜했다. 운도 더럽게 없네. 재민이 혀를 찰 정도니 말 다 한 수준이었다.

드디어 사무실을 벗어났지만 기껏 들어간다고 들어간 곳이 경찰서였다. 신고로 피고를 체포하러 왔던 경찰에게 사건 초기 자료를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다. 강력 2팀 형사 이제노. 수두룩한 인간무덤 사이에서 인준은 겨우 제노를 찾아냈다. 초면인데 옆통수가 조금 낯익다. 저기요. 작은 목소리에 제노가 고개를 들었다.


“어?”


먼저 알아본 것은 인준 쪽이었다. 어, 소리에 제노 또한 인준을 알아본 듯 이죽대는 표정을 지었다.


“사건 접수하러 오셨나 봐요, 선량한 소시민님?”


이죽거림에 인준이 얼른 명함을 내밀었다.


“환웅 변호사 황인준인데요. 사건 때문에 왔거든요. 연락받으셨을 거라던데.”


서랍을 뒤적거리는 제노가 파일을 내밀었다. 살인미수 말하는 거죠. 조강천 변호사가 그쪽이신가 보네. 인준은 말없이 파일을 받아 들었다.


“내가 뭐 몰라서 하는 말이긴 한데, 이런 놈 변호하면 양심 안 찔립니까? 도리와 윤리에 어긋 난다 뭐 그런 생각 안 드냐고요. 변호사님.”

“죄송한데 저 학교 다닐 때 윤리를 제일 못했거든요. 그리고 전 성선설을 믿는답니다, 형사님.”

“나 같으면 양심 찔려서 변호 못 할 것 같은데. 하긴 지난번만 해도…. 그럴 만할 사람 같기도 하고.”

“한마디 한마디가 심금을 웃기시네. 뭘 안다고, 지가.”

“지가?”

“그게 들려요? 귀도 밝아라.”


제노가 허망하다는 눈을 했다. 기소될 겁니다, 조강천. 복역도 할 거고요. 피해자랑 약속했어요. 인준이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해보세요. 나는 안 지니까. 그럼 이만.”


꾸벅 인사를 한 인준이 서를 나선다. 손에 쥔 명함을 보는 제노가 저소했다. 먼저 걸어온 싸움은 피하는 게 아니었다.

 




 

로펌에 돌아오니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왜요? 더운데 붙고 그래. 제노에게 받은 파일을 책상에 올려놓고, 의자 끌어당겨 책상에 가까이 앉자 재민이 물었다.


“이제노 형사 만났지? 어땠어?”


주변을 보니 다들 무언가 기대에 찬 표정이다.


“어, 체리 같아요.”


일순 침묵이 돌았다 느물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막 탐욕스럽든가?”

“제가 체리를 제일 싫어하거든요.”


인준의 말에 몇몇이 실망한 듯 아이 씨, 하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거봐요. 쟤 성질 더러워서 한 마디도 안 졌을 거라니까. 다들 만 원씩. 재민이 손을 내밀자 주머니를 뒤적이던 사람들이 만 원을 올려놓는다.


“뭐야? 뭐가 성질이 더럽고 말고야. 만 원은 또 왜 나오는데?”

“황변이 이제노 형사를 좋게 생각한다, 아니다로 내기했거든.”

“좋게 생각한다에 건 사람들은 대체 뭔 생각으로?”

“그 형사, 잘생겨서 인기 엄청 많아. 경찰청 모델도 했었고. 근데 이게 좀 많이 제정신이 아니거든. 별명이 미친 개차반이고.”


미친 개차반? 아주 지한테 딱 어울리는 별명이네. 재민의 손 위로 오천 원이 얹혀 올라갔다. 거봐. 아주 딱이라고 할 거라 그랬죠. 집중이 안 되는지 인준이 아! 하고 짧게 소리쳤다.


“서변한테 이른다? 쓸데 없는데 돈내기하지 말고 가서 일해요, 일!”


다들 구시렁 대면서도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몇 시간을 앉아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던 인준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열두시야. 밥을 한 끼도 못 먹었네. 의자에 기대 시체처럼 잠든 동료들을 둘러보다 문과 가까이 있는 조명을 하나 끄고 로펌을 나왔다.

배고파. 김밥이나 먹고 가서 잘까. 멍하니 있는 사이 깜빡거리는 신호등 불빛이 숫자를 줄여나갔다. 신호가 바뀔 새라 횡단보도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옆에서 부웅 소리 나며 눈앞으로 오토바이 지나갔다. 놀라서 소리조차 못 지른 인준이 띵한 얼굴로 서있다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았다.


“신호가 얼마 안 남았으면 기다렸다가 다음에 건너야지. 삶에 미련이 없으신가.”


이제노였다. 뭐, 뭐예요? 댁이 왜 여기서? 팔목을 잡아당겼었는지 피부에 손가락 감촉이 옅게 남아있었다.


“경찰이 밤에 돌아다니는 게 이상합니까? 순찰 몰라요, 순찰?”


아, 순찰. 순찰. 말을 되내인 인준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쨌든 감사는 하네요. 법조계 블루칩을 구하신 거예요, 방금. 웃긴지 제노가 피식한다.


“블루칩 구해드렸는데 뭐 없어요?”


제대로 된 신호에 맞춰 걸음을 뗀 인준이 고개를 들었다.


“김밥 좋아해요? 라면까지 오케이.”


분식집에 마주 앉아 똑같은 메뉴를 시켜놓고 말없이 식사를 하다가 인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퇴근 안 하세요? 교대 근무라 지금 못 하시나? 김밥 집은 제노가 끄덕한다.


“비슷합니다. 그러는 변호사님은. 반쯤 확정 난 살인 미수 변호 어떻게 할까 머리 굴리시느라 지금 나오셨나 봐요?”


손을 올린 인준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저기요, 형사님. 법 공부는 등한시하셨나 봐요. 헌법이랑 형사법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게 있거든요? 유죄판결 받을 때까지 모두가 무고한 거라고요! 아셨어요? 씩씩거리는 인준에 제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법대로 움직이면 나쁜 놈은 어떻게 잡고 억울함은 무슨 수로 풀어줍니까.”


이골이 난 인준은 그러세요, 네네,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법보다 주먹이 빠른 건 맞는데, 그러면 뒤에서 법이 빠르게 달려와요. 별명이 미친 개차반이라고 하시길래 참고하시라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대답 않던 제노가 물 컵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우리 볼 일이 좀 많겠네.”


인준도 지지 않고 경시하며 대답했다.


“나 폭행, 폭언 이런 거 죽어도 못 참아요. 본인 손에 쇠고랑 차고 감방 갈 거면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내가.”


제노는 못 들은 척으로 일관했다.


“갑니다. 잘 먹었어요. 밤 눈 어두우신 모양인데, 앞 잘 보고 다녀요. 어디 가서 넘어지지 말고.”


제노가 먼저 가게를 나서고, 아까워 죽겠다는 눈으로 계산 마치고 나온 인준은 꿍얼거리며 입술을 짓이겼다. 불우이웃 돕기를 하면 마음이라도 훈훈해지지, 이건 뭐 길바닥에 돈 버린 것보다 마음이 쓰려! 공연히 성질을 부리는데, 앞에 있는 낮은 턱을 미처 보지 못해 발목이 삐끗한다. 앞 잘 보고 다녀요. 제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미쳤니? 그 재수탱이 생각은 왜 해. 퉤퉤. 침 뱉는 시늉하고 도리질 치는 인준이 집으로 들어갔다.

취침은 잠시였다. 머리를 기대기 무섭게 날이 밝아 출근길에 올랐다. 종일 파일 들여다보고 있던 인준은 사건 청취 겸 외출을 했다. 성도 식품 이랬나. 여기 교자 맛있던데. 목을 가다듬은 인준이 조강천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올라갔다.


“걸음 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앉으세요. 녹차 좋아하시나요? 제 취미 중 하나가 다도입니다.”


인준의 앞에 차를 내려준 조강천이 소파에 앉았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바로 사건 이야기에 들어갔다.


“제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살인의 이유가 되지는 않잖습니까? 황인준 변호사님.”


조강천의 이야기를 듣고 나온 인준은 착잡했다. 의뢰인을 믿어줘야 하는데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의심하게 돼. 아냐! 초짜 티 내지 말자! 정신 바짝 챙기고 잘 해야 돼. 고개를 흔들며 아프지 않게 머리를 두드리는 인준이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이제노가 왜 또 여기서 나와? 회전문 멀찍이 서있는 제노 또한 인준을 보고 ‘뭐야’ 싶은 눈치다.


“형사님 진짜 웃긴 분이네. 스토킹 중범죄거든요?”


제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강천 감시하러 온 겁니다. 피해자 가족 말 듣고. 나는 뭐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 황 변호사 같은 사람 뒤꽁무니 따라다니게? 제노의 말에 민망해진 인준이 괜히 목청을 높였다. 제가 어제 분명히 무죄 추정…!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제노가 말을 잘랐다.


“난 불쌍한 사람 편이에요. 돈 많은 새끼 편이 아니라. 로펌 가시던 길 같은데, 가던 길 계속 가세요.”


한 마디도 못하고 말문이 막힌 인준이 로비를 나왔다. 지가 배트맨이야? 혼자 정의로운 척은 다하고 앉아있어. 큰 소리는 쳤지만 로펌에 가서도 찜찜한 마음에 끙끙대던 인준이 옆에 앉아있는 재민을 불렀다. 재민은 보지도 않고 배 안 고프다는 말부터 한다.


“네 배사정 궁금해서 부른 거 아니야. 그, 이제노 형사. 그 사람이 왜 미친 개차반이야?”


소장을 해치운 재민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에 개가 붙었는데 왜가 어디 있어? 성깔이 너 못지않게 더러우니까 그렇지.”


이게 진짜! 눈을 올려 뜬 인준이 협박하듯 보다가 한숨을 쉰다. 그러니까 왜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수두룩하게 쌓인 소장 파일을 꺼내는 재민이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강간 미수, 폭행, 특수 폭행, 조직범죄. 다 안 가리고 제일 검거율 높은 게 누군지 알아? 이제노 그 형사야. 그 형사가 있는 대로 잡아다 처넣는다고. 그 형사는 자기가 억울하게 소 제기 당해도, 인권유린이라는 말을 들어도, 끝까지 범인한테 안 굽히고 철창 보내주는 사람이라고. 끈질기고, 나쁜 놈한테 자비 없고, 성질은 더러운데 피해자들한텐 다정하고 친절해. 그러니까 미친 개차반이라 그런다. 됐냐? 별걸 다 물어. 정분났나.”


재민의 말을 듣고 있던 인준이 조소한다. 나, 법에 안 걸릴 만큼 딱 적당하게 욕하고 꼬는 법 안다. 미친 소리 다른 데 가서 해. 입을 삐죽이는 재민이 몸을 틀어 앉았다.

자리로 돌아온 인준은 조강천과 나눈 이야기들을 복기했다. 자판을 두드리고,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데 아까 만난 제노가 신경 쓰인다. 나는 불쌍한 사람 편…. 에이 씨. 볼펜을 내려놓은 인준이 재민을 닦달해 제노의 번호 알아냈다. 수화기를 든 인준이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전화하는데도 제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핸드폰은 폼으로 갖고 다니나.”


참다 참다 제 핸드폰으로 걸자마자 얼마 안 가 전화받은 제노가 바로 왜요, 황 변호사? 하고 묻는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아요? 놀란 인준의 목소리에 제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명함 주고 갔잖아. 언젠가 전화할 거 같아서 저장했어요. 왜요. 무슨 일인데요.

“살인미수로 조강천씨 고소한 사람 여동생이랬죠?”

-네.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왜요?

“만나보려고요. 이야기 한 번 들어보려고. 그게 맞는 것 같아서요.”

-조수윤씨요. 언제 만날 건데요?

“그분한테 연락해서 약속 잡아주시고 저한테 연락해주실래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해주세요.”


전화를 끊은 인준이 번호만 떠있는 전화 목록을 보다가 손을 놀려 제노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러다 슬쩍 호기심이 들어 카톡 창을 열어 제노의 프로필을 본다. 사진은 없고 메시지만 하나 있다. ‘수갑 하나 당 짊어진 눈물이 2.5리터다.’ 아주 배트맨 납셨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준은 괜히 제노의 이름에 한 번 더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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