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이야, 아오키.” 


 크로스백의 끈을 쥔 채 길 잃은 꼬마처럼 두리번거리는 아오키를 향해 마키는 목청을 틔우며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곧 골든위크 시즌이라선지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상점가는 불이 환하게 켜진 채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손을 흔드는 마키를 발견한 아오키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허둥거리듯이 걸음을 빨리 했다. 소매가 짧은 여름용 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뚝은 기쁨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서, 마키는 괜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겨우 찾았다. 마키 씨, 잃어버린 줄 알았어요.” 

 “관둬. 너만큼 커다란 미아 찾자고 미아 보호소 들르는 것도 부끄러우니까.” 

 ‘마키 씨가 미아가 된 줄 알았다는 말이었는데... 아냐, 그만두자.’ 


 말하면 틀림없이 한 대 맞고 말 생각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아오키는 자꾸만 위로 치솟는 입가를 추스르느라 애썼다. 마키의 출장 때문에 겨우 이틀 정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마키를 만나자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반갑고 기뻐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전 마키를 마주했을 때도 그만 내키는 대로 와락 끌어안지 않은 것도 아오키로서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였다. 인파 틈에서 애정표시 하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긴 했지만, 나란히 걷는 와중에도 아오키의 시선은 마키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하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느라 마키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거의 듣지 못했다. 


 “너 내 말 들었어?” 

 “네? 어, 네? 죄, 죄송해요. 마키 씨 보느라 너무 행복해서 그만... ...아, 아얏. 아야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군살이 잡히지도 않는 옆구리를 있는 힘껏 꼬집은 마키는 쀼루퉁한 얼굴을 하고 콧방귀를 뀌듯 고개를 돌렸다. 얼얼한 옆구리를 문지르면서도 아오키는 금방 실실 웃으면서 은근슬쩍 마키의 정수리에 치대듯이 뺨을 묻었다가, 이를 악문 마키가 꾸짖듯 돌아보기 전에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 딴전을 피웠다. 


 “앗, 마키 씨. 저 가게 맛있어 보이지 않으세요? 마키 씨 저런 곳 좋아하시잖아요.” 

 “능청 떠는 게 제법 늘었겠다, 아오키 경시정. 상사를 막 갖고 놀아?” 

 “에이, 그럴 리가요. 자요, 얼른 가요. 배고프시죠. 도시락은 또 안 드셨죠?”

 “기차역 도시락 맛없어.” 


 입 짧은 어린애처럼 투정을 하는 마키를 한껏 귀여워하는 눈으로 보면서, 아오키는 얼른 마키를 데리고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낮에는 평범한 밥집이고 밤에만 술을 파는 겸업집인듯,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앞에 놓인 메뉴는 서로 제각각이었다. 나무 의자를 끌어내 앉고 메뉴판을 펼쳐 마키 쪽으로 밀어준 아오키는 가방을 벗으면서 경쾌한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꽤 있네요. 맛있나봐요.” 

 “흥, 먹어봐야 아는 거지. ...넌 뭐가 좋은데?” 

 “저야 아무 거나 잘 먹는 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마키 씨 드시고 싶으신 게 좋아요.” 

 “차라리 집에 가서 먹을 걸 그랬나.” 


 마땅히 마음이 내키는 것이 없는듯 한참이나 메뉴를 훑는 마키를 보며 아오키는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로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러다 마키가 마침내 회 세트와 술을 골랐을 때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아오키 인생에 있었던 연애 상대들 중 함께 외식하는 일이 마키만큼 까다로운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대학에 다닐 때야 고만고만한 주머니 수준에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많지 않았으니 예외로 두더라도, 유키코와 사귈 때도 비교적 서로 내키는대로 식사를 했는데 마키와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마키가 좋아하는 메뉴 자체가 한정적인데다가, 아오키의 기준에서 데이트에 어울릴 법한 메뉴가 아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출장은 어떠셨어요?” 

 “뭐, 그저 그랬어. 의원들 만나는 일이 재미있을 게 뭐가 있겠어.”

 “다들 마키 씨 보고 놀라지 않았어요?” 

 “옛날만큼 놀라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아무래도 몇 번씩이나 얼굴을 비쳤으니까.”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술이 먼저 날라져 나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잔을 신기해 하는 아오키와 달리 마키는 이런 것에도 능숙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술병을 들어 각자 잔을 채우자마자 마키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모습이지만 목을 싸르르하게 훑고 내려가는 감각에 놀란 아오키는 반도 못 마신 술과 마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눈을 껌뻑거렸다. 


 “마키 씨, 이거 데운 술인데 꽤 독한데요? 센 술인가요?” 

 “별로 독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냥 아무 거나 눈에 띄는 걸로 주문했어.” 

 “알고 있지만 마키 씨랑 술 마실 때마다 놀란다니까요... ...” 

 “왜? 주량 때문에? 네가 너무 약한 거지. 내가 센 게 아니라.” 

 

 아닌데. 술잔에 입을 댄 채 한두 모금을 다시 홀짝인 아오키는 벌써 석 잔째 비워지는 마키의 잔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조그만 몸집을 보고서는 아무도 마키의 주량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아오키도 몇 번이나 마키와 둘이 술을 마셨지만 마실 때마다 놀라곤 했다. 무슨 술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잘 마셨고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술 자체를 거절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술은 마시는 둥 마는 둥, 벌써 홧홧해지려는 뱃속에 얼른 음식을 집어넣던 아오키가 문득 생각났다는듯 마키에게 물었다. 


 “그런데 마키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잘 드시게 된 거예요?”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걸 기억하면서 술을 마셔. 바보냐?” 

 “그래도 처음 술 마셨던 게 언젠지는 기억이 나실 것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렇게 잘 드셨어요?” 

 “그럴 리가 있냐. 친구한테 배워서 어릴 땐 술버릇 엉망이었지. 주정하기 싫어서 연습했을 뿐이야.” 


 연습한다고 그렇게 잘 마실 수 있는 건가. 가만히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아오키는 갑자기 젓가락질을 멈추고, 잔을 기울이는 마키를 바라보았다. 처음 주문한 한 병은 이미 빈 지 오래였고, 두 번째 병도 마키에 의해 반쯤 비워진 상태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키라면, 술에 취하는 감각 자체를 싫어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런 주당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인물은 아오키가 알기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친구라면... ... 혹시 스즈키 씨요?” 

 

 마키의 시선이 약간 흐리게 뜬다. 그, 갑작스럽고 어찌할 수 없는 변화에 아오키는 가슴 안쪽이 꾹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피해보려 노력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스즈키에 대한 화제가 나올 수밖에 없는 때는 분명히 있었다. 마키가 걸어 온 지난한 인생에서 스즈키에 대한 마음만이 빛 바래지 않은 채 영원히 반짝이고 있음을 아무리 둔한 아오키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깨달을 때마다 아오키는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아오키가 혼자 갈팡질팡하는 사이 마키는 태연한 표정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그래. 내 친구라고 해봐야 스즈키가 전부였으니까. 맥주도 못 마신다고 놀려대기에 화가 나서, 매일 저녁마다 술을 마셨더니 조금씩 늘더군. 스즈키는 잘 마시는 편이어서, 같이 술 마시다가 내가 더 오래 버텼을 땐 기분 좋았지.” 

 “그러셨군요... ... 하하, 그런 마키 씨는 잘 상상이 안돼요. 그래도 역시 마키 씨는 마키 씨라는 생각이 들지만요.”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얼버무리며 아오키는 거의 빈 자기 술잔에 새로 술을 채웠다. 음식은 다행히도 맛있었다. 까탈스런 마키의 입맛에도 맞았는지, 오밀조밀한 모양으로 튀긴 흰살생선을 집어먹고 있는 마키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스즈키는 취하면 술버릇이 우스웠어. 멀쩡히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찾아서 온 방 안을 헤매고 다니는 건 예사고, 밑도 끝도 없이 새 안주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지.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야.” 

 “아... ... 하하. 네에... ... 술에 취하면 그런 사람들 많죠.” 

 “언젠가 한 번은 스즈키가... ...” 

 “마, 마키 씨. 튀김 더 드실래요?” 

 “뭐? 아니... ... 이거면 됐는데. 너 더 먹고 싶으면 주문하든지.” 

 “아... ...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마키 씨 배고프실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면 됐어요. 집에 가서 출출하시면 제가 뭐라도 더 만들어 드릴게요.” 

 “넌 나보다 요리도 못하잖아. 그런 걸 보면 스즈키하고 진짜 똑같은 데가 있다니까. 잘 만들지도 못하면서 음식 만들어서 먹여주고 싶어하는 게.” 


 아오키는 무릎 위에 얹힌 손을 꾹 움츠렸다. 마키가 스즈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오늘이 처음도 아니고, 자신이 스즈키와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은 유키코에게서도 들었던 말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거슬려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아오키와 사귀게 된 이후로 마키는 스즈키의 이야기를 부쩍 자주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즈키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과 뭔가를 함께 할 때보다 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키에게 있어서 스즈키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오키도 잘 알고 있었다. 스즈키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그게 마키의 인생을 어떻게 뒤틀었으며 그 마지막 때문에 스즈키는 마키의 마음 안에서 도무지 빼낼 수 없는 커다란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스즈키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자신의 경우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키를 지키기 위해서, 추악하고 징그러운 괴물의 욕망으로부터 마키를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 자신도 스즈키처럼 똑같이 죽었을 것이다. 그게 마키에게 거대한 상처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가 스즈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그것도 마키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단 한 사람을 질투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아오키는 이럴 때마다 스즈키가 미웠다. 


 “마키 씨에게는 스즈키 씨가 정말 소중한 분인 것 같아요.”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입밖으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오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술을 마시는 척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병을 들고 있던 마키의 손이 허공에 멈춰 있는 시간이 영원 같았다. 


 “아오키 너,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 아뇨. 별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스즈키 씨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마키 씨는 뭐랄까... ... 굉장히, 표정이, 달라지신다고 해야 하나... ... 저는 잘 모르는 마키 씨 같은 느낌도 들고요. 과거에 계신 것처럼... ... 스즈키 씨랑 같이요. 그래서, 어... ... 그냥, 마키 씨에게 있어서 스즈키 씨는 정말 가장 소중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달까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뭐라는 건지.” 


 아오키는 허둥지둥 술을 들이켰다. 따끈하던 온기가 식어서, 아까보다 더 독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마치 생선 가시를 잘못 삼킨 것처럼 입속과 목 안이 동시에 거북해지는 기분에 아오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슨 생각으로 마키 앞에서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소리를 해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기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는 하나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듯이 마키를 흘끔 쳐다본 아오키는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내닫는 마키와 눈이 마주치고 찔끔한 채 시선을 피했다. 소리없이 병을 내려놓은 마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술집 안을 잠깐 바라보면서 말이 없었다. 긴 속눈썹이 만든 그늘 때문에 그의 시선이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맞아. 스즈키는 나한테 있어서... ... 특별해. 소중한 건 물론이고.” 


 알아요. 아오키는 소리를 치듯이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어차피 자신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시간의 마키와는 만날 수 없었다. 닿을 수도 없었다. 마키의 마음을 모른 채 그의 옆에서 눈치없이 맴돌았던 시간만으로도 이미 자신에게는 질투할 권리도 없다는 생각도 늘 하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가슴이 터지도록 뛰어도 과거의 마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 외롭게 서 있는 마키를 자신이 만나서 안아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아오키를 더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키의 마음을 몰랐던 스즈키가 미운 것은 어쩌면 동족혐오 같은 기분인지도 몰랐다. 


 “슬슬 일어나자.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아, 네. 가요.” 


 의자를 밀고 가방을 메면서 아오키는 착잡한 기분에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모처럼 이틀만에 마키를 만났는데, 자신이 괜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마키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차라리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지만... ...’ 


 속으로 우울하게 중얼거리면서, 아오키는 말없이 마키의 옆에서 걸었다. 스즈키를 질투해서는 안된다. 마키의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자신이 함부로 건드리고 흩트려서 망쳐놓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러기 위해 마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키를 구속하고 속박하기 위해서 옆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좋다. 어디에 살든, 누구를 좋아하든, 설령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좋다. 

 아침에 이 사람이 반드시 제9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이 사람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좋았다. 만족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함께 하는 지금, 마키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면서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된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키와 아오키는 서로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가끔 마키가 추운듯이 어깨를 떠는 것을 보고 재킷을 벗어주려 했지만 그는 ‘됐어’라는 말 한 마디로 아오키의 손을 막았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목까지 접어들어서도 아오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마키의 손을 잡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현관문을 잠그고 불을 켜서 집안을 밝히고, 가방을 내려놓는 일련의 행동을 하면서 아오키는 연신 힐끔거리며 마키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서늘하게 가라앉은 것 같은 무표정한 마키는 그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이 먼 사람 같았다. 마치 그를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너무나 가까이 느껴졌던 마키가 지금은 자신의 손이 결코 닿지 않는 머나먼 절벽 끝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마키 씨, 아까 제가 드린 말씀은 잊-”

 “네가 한 말, 뭐?” 


  날카롭게 돌아보는 마키의 얼굴이 확 가까워졌음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아오키는 그의 손에 의해 거의 멱살을 붙들리다시피 한 꼴로 비틀거리다 어정쩡하게 자세를 고쳤다. 넥타이 끄트머리를 나꿔챈 마키는 아오키가 실없는 소리를 했을 때처럼 콧방귀를 뀌면서 당장이라도 폭언을 쏟아낼 듯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 마키 씨? ...저기, 지금... ...” 

 “패기없이 힐끔거리면서 눈치 볼 거였으면 애초에 말은 왜 꺼냈어? 멍청한 녀석.” 


 험악하게 내쏘는 것 같은 말투와는 정반대로, 마치 응석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끌러내리는 마키의 태도 때문에 아오키는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아까 마신 술이 이제야 몸을 덮치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고 뱃속이 뜨거웠다. 침대조차 아닌 소파에, 다리를 다 걸치지도 못하는 아오키를 밀치듯이 자빠트려놓고 마키는 아무 스스럼도 없이 셔츠를 벗어올렸다. 옷자락이 스쳐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아오키는 입만 벙긋거렸다. 술이 오른 게 맞는 것인지 온몸이 이상하게 뜨겁고 팔다리를 가누기가 약간 버겁게 느껴졌다. 그와 반대로 마키는 멀쩡해보였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아오키의 뺨을 만지는 손끝도 평소보다 아주 약간 체온이 올랐을 뿐 흔들림조차 없다. 숨을 쉴 때마다 가볍게 들썩이는 아오키의 배 위를 더듬거리듯 매만지면서, 마키는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즈키는 내게 있어서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야, 아오키.” 

 “저도... ... 저도 알고 있어요, 마키 씨. ...죄송해요. 마키 씨 마음을 상하게 하려던 게 아니라... ...” 

 “넌 스즈키하고는 달라.” 

 

 순간 아오키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창문을 등진 마키의 얼굴은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새카매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늘게 흘리는 한숨 소리만이 그가 마키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문득 아오키는 까마득하게 깊고 차가운 계곡에 나침반도 하나 없이 덜렁 떨어져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키를 찾으려고 했는데, 마키를 찾아야만 하는데, 자신은 방향조차 모르고 헤매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키는 대체 어디에 있는 마키일까. 절벽에? 계곡의 끝에? 아니면 어디에도 없었나? 

 별안간 눈꺼풀 안쪽이 더워지며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서 귀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키는 아오키가 우는 모습을 보고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오키는 어린애처럼 끅끅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마키 씨... ... 저도, 저도... ... 스즈키 씨만큼, 마키 씨한테... ... 그런, 존재가 못된다는 건 알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 그래도, 마키 씨, ...좋아해요. 너무 좋아하니까... ... 그렇게, 다르다고 말ㅆ, ...말씀하지 마세요.” 

 “잇코우.” 

 

 아오키는 순간적으로 헛숨을 들이마시며 딸꾹질을 했다. 방금 자신이 뭘 들은 것인지 금방 알아챌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는데, 그게 마음까지 와 닿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아오키의 눈빛이 혼란하게 흔들리자,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볍게 손을 들어올린 마키는 엉망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손끝으로 문질러 닦아주면서 아오키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넌 스즈키가 아니야. 스즈키는 내 추억이지만 너는 내 현실이야.” 

 “... ...마키 씨.” 

 “너하고 스즈키를 비교하지 마. 널 스즈키처럼 내 인생의 추억으로 만들 생각은 요만큼도 없으니까. 너는 언제까지고 내 옆에 있는 거야. 절대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거야. 알겠나?” 

 

 마키의 목소리는 꾸중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오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마키는 그대로 아오키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입술 사이로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흘러 들어와 혀끝에 고이다가 곧 사라졌다. 정말로, 이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입맞춤을 하고 난 후에야 아오키는 비로소 마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스즈키와 자신은 당연히 달랐다.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건지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스즈키와 함께 했던, 스즈키 때문에 수많은 열병을 앓아야 했던 모든 시간이 지금의 마키를 만들었다. 마키의 마음 안에 여전히 스즈키만을 위한 자리가 있기 때문에, 마키가 이전에 스즈키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은 지금 여기에 있는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키의 마음 속에서 자신이 있어도 좋은 단 한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아오키는 따뜻하게 열이 오른 작은 몸을 소중하게 보듬어 안았다. 뺨을 맞대고 입을 맞추고 그를 만지면서 몇 번이고 입속으로 마키의 이름을 불렀다. 마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영영 이 밤에 갇혀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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