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장막이 들춰올려지자 그 속에 달이 있었다. 온통 노랗게 빛나는 원형 위로 희게 서린 빛이 내려앉았다. 얼룩져 드리워진 빛은 달그림자처럼 고요히 노래하다가도 시시때때로 점멸했다. 기다란 속눈썹 그림자가 우주의 무희가 절정에서 놓아 던져버린 베일처럼 파르르 날아올랐다.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 다시 닫힌 눈꺼풀에 카게야마는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가락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더했다. 내려갔던 하얀 눈꺼풀은 잠시 후 그보다 더 서서히 올라갔다. 무기질의 차가운 암석 같은 만월을 젖은 막이 감쌌다. 다시 한 번 침묵의 깜빡임이 지나자 달빛으로 가득한 호수 위에서 꽃이 피어났다. 이름 모를 온갖 빛깔의 꽃잎이 정중앙의 까만 씨앗에서부터 방사형으로 날아올랐다. 그 명멸하는 비상에 카게야마는 숨쉬는 것조차 잊었다.


"하아-"


기나긴 세월처럼 무거웠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린 이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쉬는 숨에 순식간에 달큰한 내음이 적막했던 주위를 채웠다. 눈 앞에 떠오른 두 개의 노란 보름달에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던 카게야마는 그 향기에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굳어버린 몸과 반대로 머릿속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살아있다! 누구에요? 어, 심장이 안 뛰었는데? 그런데 살아있어! 다행! 이제 괜찮아요? 어? 맥이 없었는데?! 여기서 뭐해요?

온갖 생각들이 얕은 물의 물고기마냥 동시에 파닥파닥 튀어올라서 어느 것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카게야마의 곤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뜬 사람은 몇 번 숨을 깊게 쉬어보더니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아무렇지 않게 팔꿈치를 대고 제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카게야마는 잡고 있는 손을 떼어낼 생각도 못 하고 그가 일어나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장 높게 튀어오른 생각이 겨우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어, 어- 괜찮아요?"

"왜 왔어?"


돌아온 것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또다른 물음이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은 더욱더 혼돈으로 치달았다. 왜 왔냐니?


"에?"


남자는 카게야마에게 붙들린 불안정한 자세에도 개의치 않고 기다란 손가락을 맞물려 만지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손톱 끝에서부터 열 손가락을 모두 꾹꾹 눌러보고서야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왔냐구"


질문을 도통 이해하지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던 남자는 하얀 손을 들어올렸다.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감아쥐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등 위를 그의 손가락이 스쳤다. 카게야마는 통제를 벗어난 머리와 그 덕분에 명령 전달이 안 되고 있는 몸 때문에 계속 입만 우물우물하고 있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그는 카게야마의 손가락을 그러쥐어 어깨에서 떼어냈다. 그의 손바닥은 부드럽고 또 매우 차가웠다. 그것도 잠시, 남자는 카게야마의 손가락을 허공에 던져버리고 제단 위에 기대있던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멍해진 뇌의 통제를 벗어난 카게야마의 눈은 기다란 다리를 따라 사락 흘러내리는 고풍스러운 옷자락을 따라 내려갔다. 남자는 카게야마의 턱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가느다랗고 길쭉한 손가락에는 별다른 힘이 실려있지도 않았는데 카게야마는 꼼짝없이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할 수 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있어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남의 잠을 깨운 거 아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카게야마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살아있는 자의 흔적이 없는 성.


"어... 어?! 어?"


서로 다른 높낮이로 같은 음절을 반복하고 있는 카게야마의 멍한 얼굴에 대고 남자는 낮은 한숨 처럼 읊조리듯 혼잣말을 했다.


"…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언어 체계가 바뀌기라도 했나. 아니면 유독 모자란 애가 왔나."


어두운 복도와 어두운 방들의 연속에서 유일하게 외부의 빛이 들어오던 방. 

그 곳에서 죽은 듯 잠들어있던 자.


"ㅁ…”


소리가 입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허공에서 갈 곳을 찾지 못 했던 손가락이 다시금 떨려왔다.

아니, 설마. 그래도.

카게야마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는 온갖 가능성과 설마와 의심과 부정이 휘몰아쳤다. 남자는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벙긋벙긋하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흥미를 잃은 듯 두 손을 모아 동그랗게 말았다. 그 안에서 새하얀 빛이 가늘게 새어나왔다. 그 빛이 카게야마의 부정어를 기어코 지워버렸다.


“마, 마왕?!"


카게야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명칭이 남자의 눈썹 앞머리를 잔뜩 구겨놓았다. 감싸쥐고 있던 손 안의 빛이 사그라들자 남자는 손을 펼쳤다. 두 손바닥 위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두 개의 유리알이 이어진 안경이 올려져 있었다.


"용건 없으면 이만 가."


카게야마가 겨우 뱉어낸 단어를 부정하지도 않고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적 내저으며 남자는 안경을 들어 코 위에 걸쳤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는 약 10초쯤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허둥지둥하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겨우 칼을 빼들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놓칠 뻔 했지만 두 손으로 칼자루를 강하게 쥐고 눈 앞에 세웠다.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날카로운 검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남자는 낮은 제단에 양 손을 뒤로 기대고 앉아 한가로이 다리를 주욱 펴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그건."

"너! 너를 무찌르고! 마을을 구할 거야!"


떨리는 손 끝을 의식적으로 가다듬으며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긴장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치달으며 자꾸만 가라앉는 목을 틔워내려다 보니 마지막 말은 숫제 비명처럼 튀었다.


"하?!"


어이없다는 듯 내뱉는 소리에 움찔한 카게야마에게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하게 튀어나온 소리와 달리 그의 기다란 몸은 잠시 균형을 잡지 못 하고 휘청였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하던 일도 잊고 오히려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하려 들었다. 공중에 내밀어진 카게야마의 한 손이 무안하게도 남자는 곧장 균형을 잡고 바로 섰다. 잠시 가만히 서 있는 남자의 옆에서 허공을 떠도는 손이 민망해졌다. 그런 카게야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그에게 척척 다가왔다. 급히 칼 끝을 내밀어 보았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기다란 몸을 굽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그대로 있다간 다가오는 얼굴을 베고 말 판이라 카게야마는 결국 그의 기세에 밀려 손을 내저으며 들고 있던 검의 궤도를 급하게 수정해야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뛰지 않았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까워진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없이 날선 목소리로 카게야마를 추궁했다.


"내가 계속 자고 있던 거 못 봤어?"

"???"

"잘 자고 있던 사람 깨운 게 누구야?"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못 박히듯 자신에게 날아오는 걸 보면서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에 올려진 유리알 위로 희미하게 자신의 난처한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어… 나?"


원하는 답을 얻어낸 모양인지 남자는 오만하게 웃었다. 허리춤에 올렸던 한쪽 손을 들어올려 남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카게야마의 가슴을 콕콕 찌르며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어가며 추궁을 이어갔다.


"자는 사람이, 응? 마을을, 응? 어떻게 구할 지경이 되게 만들어?"

"그거야 난 모르지!!!"


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을 찌를 때마다 움찔하며 뒷걸음질치던 카게야마는 세 걸음만큼 뒤로 물러나고서야 겨우 그의 손가락을 탁- 쳐낼 수 있었다.


"네 두 눈으로 자고 있던 사람 봐놓고도 지금… "

"마… 마왕이면 자면서도 어떻게 할 수 있나 보지!"


자신에게 자꾸 답을 요구하는 태도에 발끈해서 카게야마는 앞뒤 생각해보기도 전에 소리쳤다. 그래놓고는 남자의 깊은 한숨에 오히려 움찔거리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는 안경을 벗고 미간 사이를 주무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대체 네 마을이 어디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렸을 적부터 마왕이 우리 마을을 괴롭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가끔씩 사람들이 마왕성이 있는 동쪽의 숲에 들어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에 놀라 다치고. 게다가 이번엔 그 순발력 좋은, 다람쥐처럼 날쌘 히나타마저도 다리가 똑 부러져서 돌아왔고. 그래서 영락없이 마왕 짓인 줄 알았지.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카게야마는 점차 험악해지는 남자의 표정에 움츠러들었다. 마을 어른들하고 얘기할 때도 이렇게 누구 눈치를 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진짜 마왕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쭈그러들 리가 없어. 카게야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하- 짧은 비웃음을 공기 중으로 날려보냈다. 혼자만의 생각 속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카게야마는 곧 그 속에서 길을 잃었다.

물론 순순히 인정할 리야 없겠지만. 본인은 그런 일 한 적 없다고 하니 진짜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실제로 내가 깨우기 전까지는 죽은 듯이 자고 있었고.


죽은 듯?

정말 잤던 게 맞을까? 심장도 뛰지 않았고, 맥박도 뛰지 않았는데?

이와이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에서처럼 유령처럼 혼만 빠져나가서 밖에 나가서 나쁜 짓 했던 거라면?


"그러면! 내가 여기에서 너 감시할 거야!"

"…"

"너 진짜 그런 짓 하나 안 하나 감시할 거라고!"


빼액 소리를 질러놓고 숨을 몰아쉬는데 앞에 선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의 등 뒤로 새삼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마왕이면 화가 나서 나를 성 밖으로 휙 날려버린다든가. 이상한 주술 같은 걸 써서 저주를 내린다든가. 아니면 마수 소환술?! 흔들리는 손가락을 다잡으며 내려두었던 칼자루를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다시 부여잡아 세웠다.

얼굴을 찌푸리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맘대로 해."


팔짱을 끼고 곧게 서 있던 남자는 그 대답을 끝으로 벙찐 카게야마와 그의 검을 지나쳐 유리창벽 앞으로 걸어갔다.

카게야마는 얼떨떨하게 몸을 돌렸다. 남자는 어느새 유리창에 앞이마를 기대고 서있었다. 살짝 숙인 머리카락과 굽은 어깨 위로 화한 달빛이 떨어져 내려 그의 등을 타고 흘렀다.


화 안 났어?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너는…

진짜 마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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