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 가락을 연주할 수 있는 현악기나 관악기, 가락악기의 소리를 가진 사람도 있고, 나처럼 박자를 맞출 수 있는 타악기 소리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래희망 칸이 전부 음악가로 채워진 건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음이 있기에 아예 이쪽 길로 가려면 특출난 소리를 가지고 있거나 운 좋게 함께 꽃피울 파트너를 만나야 했다. 우리는 악기나 다름없지만 특정한 상황이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기억과 접촉하는 경우에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오케스트라 못지 않은 연주를 한다는데 정말 희귀한 경우라고 했다.

"희귀..."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음악 쪽으로 장래희망을 정한 애들은 짝을 찾기위해 고군분투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서로 의지하고 받쳐주며 살아가기 위해서.

"곧 우리 무대야."

"어?"

"피날레를 장식해야지. 가자."

"조 율, 화이팅이야!"

"둘 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와!"

바로 직전 합주단의 곡이 끝났는지 뜨거운 박수와 함께 막이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너가 간 길을 따라 어영부영 달려갔다. 너는 무대 한 가운데에서 몇 달 전 봤던 불꽃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바싹 말리고 잘 다듬은 피아노를 닮았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막이 올랐다.

너의 마지막 무대였다.






내 학교는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다. 50년 전 지어졌다더니 벽에 금이 많았고 산중턱에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단 말이 많았다. 옷자락이 엉망이 된 나뭇결에 걸려 찢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내 치마도 재수 없게 화장실 문에 스쳤다가 올이 나갔다.

시설도 대부분은 출입금지, 사용금지가 붙어있었다. 갑자기 무너져 다친단 이유였다. 이럴거면 고치기라도 해야하는데 지원이 들어오지 않는다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닐 수 있는 곳은 고작해야 교실 뿐이었다.

나도 다치고 싶은 마음은 한 점도 없었기에 어지간하면 특수 교실 쪽은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랫동안 하늘을 덮은 구름이 기적처럼 갈라져 미친 듯 불타오르는 노을이 복도를 다 뒤덮고, 낮의 별들이 반짝이며 유리창에 맺힌 날, 교실을 나섰던 나는 그 빛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복도를 걷다가 처음 보는 '음악실 3' 앞에 당도했다. 굳게 닫힌 문 너머 누가 있는지 피아노 선율이 들렸다. 아롱거리는 붉디 붉은 빛깔과 반딧불이 떼 날아가듯 흩날리는 별빛에 나는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내 손은 아무 생각 없이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고, 화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향과 샛노란 햇살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곳에 네가 있었다. 눈을 감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네가 있었다.

너는 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음을 따라 천사의 날개처럼 아름답게 요동쳤다. 신이 내린 사람처럼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손은 마녀가 강림한 것처럼 아주 까맣고 찬란한 밤을 그려내고 있었다. 네 머리칼처럼, 곧게 뻗은 손가락 사이사이 둥근 달이 선명했다.

나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네 연주에 매료되어 흐느적거렸다. 3년 간 학교를 다니면서 널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 네가 튀어나온걸까. 그림? 소설? 엊그제 읽었던 만화책에 나온 모델 주인공보다 네가 더 어여뻤다.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내 사지를 속박하는 것 같았다. 밤의 절정이 끝나고 여명이 밝아올 때에야 나는 마침내 주저앉아 으스러진 숨을 쌕쌕 내쉴 수 있었다. 너는 그제서야 감았던 눈을 느리게 뜨고 날 응시했다. 까만 눈은 거울처럼, 어쩌면 먼 과거 귀족들이 썼다는 금 거울처럼 매끄럽고 반짝거렸다.

"누구야?"

네 첫 마디였다.

"안녕, 난 조 율이라고 하는데."

뿌듯하게 들어찬 숨을 가라앉히며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을 툭 내뱉었다.

"대박... 너 완전 멋져..."

그러자 너는 휘둥그레 눈을 뜨더니만 이내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보다 더 뜨겁고 달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


삶은 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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