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왜 저모양이냐면 생각이 안나서...  본즈커크 사랑해



제임스 커크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깜빡. 또 다시 깜빡.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스타플릿 아카데미?”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지금 지구로 떨어진 거지? 계획대로라면 커크는 지구가 아니라 군소 행성 GX7에 도착했어야 했다. 커크는 함선에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터는 먹통이었다. 커뮤니케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지구라니? 잠시 고민하던 커크는 걷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전경은 커크의 기억과 조금 달랐다.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터가 있기도 했고, 커크가 낡았다고 투덜대던 강의실은 최근에 지은 것처럼 깨끗했다. 리모델링을 한 건가? 두리번거리며 교정을 걷는 커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소중한 추억이 한 장면씩 겹쳤다가 사라졌다. 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본즈랑 샌드위치 자주 먹었는데. 여기서 낮잠도 많이 잤고. 본즈가 귀신같이 알고 찾으러 오곤 했었지….

그러나 커크의 회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서 심각한 얼굴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페이저 건에 커크는 머쓱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미첼 대령일세. 소속과 신분을 밝히게.”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장 제임스 커크입니다.”
“…엔터프라이즈 호? 그런 기함은 없네만. 자넨 누구지?”
“대령님, 죄송합니다만 방금 무슨 말씀을?”
“그런 기함은 없다고 했네.”

단호한 목소리에 커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엔터프라이즈 호가 없는 스타플릿이 가능한가? 그러다 스치는 생각 하나에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지금이 몇 년도입니까?”
“2247년일세.”

커크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CMO가 입에 달고 사는 악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망할 우주! 한숨을 푹 내쉰 커크가 대답했다.

“…저는 2263년에서 왔습니다.”


* * *


미첼 대령과의 대화로 알아낸 건 두 가지였다. 커크가 다른 우주로 넘어왔으며, 현재로서는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신원확인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곧 커크가 스타플릿 소속임을 인정했다. 곤란해하는 그에게 대령은 돌아갈 방법을 찾아줄테니 그동안 아카데미의 교관으로 머물러달라는 제안을 건넸다. 커크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쪽의 아카데미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손 놓고 가만히 있기에는 몸이 근질거렸기 때문이었다.

배정받은 교관용 숙소는 아담했다. 커크가 지냈던 함장용 쿼터를 생각한다면 비좁게 느껴질 만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커크는 숙소가 이상할 정도로 넓게 느껴졌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새 침대는 낯설었다. 빳빳한 시트에서는 희미한 세제 냄새만 아른거렸다. 커크는 어색하게 베갯잎을 만지작거렸다. 홀로 잠든 게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커크는 엔터프라이즈 호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대원들을 생각했다. 오작동에 당황했을 스코티는 트랜스포터를 붙잡고 낑낑대고 있을 것이다. 스팍은 우후라와 머리를 맞대고 트랜스포터의 오작동 사례를 찾아보고 있을 거고. 술루와 체콥은 그가 사라진 지점 근처를 탐색하고 있겠지. 맥코이는 커크가 달고 올 바이러스를 대비해 온갖 백신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커크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첫 강의 시간, 커크는 생도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자신의 기억보다 호리호리한 몸매(그러나 이 또한 평균 이상이었다)와 특유의 치솟은 눈썹을 가진 청년의 모습에 커크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잔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에 발간 볼이라니. 발그레한 볼을 가진 본즈라니! 갓 소년의 태를 벗은 눈 앞의 남자는 그의 오랜 연인이자 든든한 CMO 레너드 맥코이가 틀림없었다.

본즈?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킨 커크는 맥코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맥코이도 시선을 느낀 것인지 커크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커크가 가볍게 눈을 찡긋거리자, 맥코이는 고장난 로봇처럼 삐그덕대더니 입을 쩍 벌렸다. 순식간에 목에서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그의 모습에 커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의를 마친 커크는 맥코이의 생도 일지를 살펴보았다. 앳된 외모로 커크를 놀라게 한 이 우주의 맥코이는 무려 스무 살이었다! 커크 자신이 스타플릿에 들어왔을 때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그러나 이미 의사 면허가 있었고, 의학부에서 수석과 차석을 다투는 인재였다.

자신의 본즈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레너드 맥코이의 존재는 커크에게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스무 살의 맥코이는 결혼한 적도, 이혼한 적도 없었고 소아과 의사도 아니었다. 맥코이의 일지를 묵묵히 읽던 커크는 문득 상실감을 느꼈다. 그는 본즈일 수 없었다.


* * *


맥코이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늘어지는 강의가 지루할 법도 하건만 맥코이는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강의를 들었다. 올리브빛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 위로 친숙한 남자가 겹쳐진다. 8년의 시간동안 그가 성실하지 않던 적이 있던가. 커크는 피식 웃었다. 우주가 달라도 레너드 맥코이는 레너드 맥코이였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커크는 종종 맥코이를 본즈로 부르는 실수를 저질렀다. 커크가 처음 맥코이를 본즈라 불렀을 때 맥코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본즈요?”
“미안합니다, 맥코이 군. 맥코이 군이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

커크가 웃으며 사과하자 맥코이는 눈살은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는 기묘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맥코이는 본즈라는 호칭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커크의 입모양이 동그랗게 말리기만 해도 자신은 본즈가 아니라 레너드 맥코이라 목소리를 높여 정정했다. 커크는 그런 맥코이가 귀엽고 색달랐다. 본즈라면 한 두번 싫다고 하다가 받아줬을텐데.

그러다 만약 본즈가 조금 더 어렸더라면 커크의 애칭을 허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이상해졌다. 본즈가 아닌 본즈라. 정말 이상했다.


* * *


삼 주가 지났지만 원래의 우주로 돌아가는 법은 소식이 없었다. 커크는 조금 초조해졌다. 엔터프라이즈 호는 잘 있을까? 두 우주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가 자리를 길게 비워 좋을 건 없었다. 

그러나 뾰족한 방도도 없었다. 예민해지는 자신을 느낀 커크는 교관 생활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게 긴장을 푸는 데에 도움을 줄 것 같아서였다.

강의를 마친 커크는 교정을 거닐었다. 커크를 알아본 생도들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커크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과제의 산에서 허우적대는 생도들을 보고 있자니 옛 생각도 났다.

커크는 게시판 액정에 표시된 포스터를 천천히 살폈다. 이 곳의 아카데미도 여러 소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종류도 많았다. 같은 전공자들끼리 모인 세미나, 졸업생이 후배들을 위해 준비한 1회성 강의, 선망하는 함선으로 발령받는 정보 공유….

그런데 수많은 포스터 중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커크는 눈을 비비고 포스터를 다시 읽었다.

제 1회 우주공포증 세미나
: 심연의 우주, 우주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주최자 레너드 맥코이

 

“맙소사, 본즈.”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작게 키득대던 커크는 이내 눈물까지 흘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은지! 이 우주의 맥코이도 똑같이 우주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커크가 눈물을 닦으며 그의 본즈를 떠올리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관님도 제 세미나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맥코이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거는 생도는 새빨간 생도복이 잘 어울렸다. 커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흥미로워 보이네요.
“교관님도 시간이 되신다면 들러주세요.
“그러죠. 그럼 전 이만.”
“저, 교관님.”

자리를 뜨려는 커크를 붙잡은 맥코이가 머뭇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커크는 의아한 얼굴로 본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생도.”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가요? 생도.”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코이는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키더니, 커크를 빈 강의실로 이끌었다. 커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고민 상담인가? 귀엽기는. 그런데 문을 잠그는 맥코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 이런 말씀을 어떻게 들으실 지 잘 모르겠습니다.”
“……?”
“규정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저.”

뜸들이는 본즈, 아니, 맥코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예감이 좋지 않다. 커크는 맥코이의 말을 듣지 않으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맥코이가 빨랐다. 밖으로 나가려는 커크를 재빨리 막아선 맥코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잠깐만 들어주세요. 저는, 저는…. 교관님이 좋습니다. 교관님의 보석같은 눈동자에 반했습니다. 하루종일 교관님 생각만 납니다. 젠장,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젠장. 이제 교관님이 없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생도? 지금 뭔가…….”
“아뇨. 착각 아닙니다.” 

커크가 애매하게 웃어보였으나 맥코이는 단호했다. 

“어린애 취급하셔도 좋습니다. 풋내기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당신을 잡을 기회를 놓친다면 저는 후회할겁니다.”

상상도 못한 폭탄 발언에 커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올곧은 눈동자에 당황한 커크가 시선을 피하자 맥코이가 커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얽혀오는 손은 따뜻했다.

“신체접촉으로 징계를 주신다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교관님이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닮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죠. 분명 연인이셨을 거고… 절 보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시는 것도 알아요. 그 사람 대신이라도 좋아요. 대타로라도 교관님 옆에 있게 해주세요.”

절절한 고백을 들으면서 커크는 이상한 기분에 휩쌓였다. 그의 ‘본즈’는 한번도 이런 식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있더라도 술기운에 흘리는 한 두마디가 전부였다. 커크가 아는 한 본즈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보다 말없이 커크를 끌어안는 편이 익숙한 남자였다.

한편으로는 이쪽의 맥코이에게 미안해졌다. 여태껏 그는 맥코이 위에 본즈를 덧그려 대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신이. 커크는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발버둥쳐왔고 그 기분을 잘 알았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겹쳐 보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커크는 사과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맥코이가 한 발자국 다가와 커크의 입을 막았다. 입술 위에 닿은 체온에 커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익숙한 향에 커크는 생각했다. 분명 본즈가 아닌데, 본즈같아.

커크가 거부하지 않자 맥코이는 조금 안도한 기색이었다. 맥코이는 제 손을 뗴더니, 커크의 손등에 느릿하게 입을 맞추며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커크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춘 맥코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교관님. 단 한 달, 아니, 단 일주일이라도 좋습니다. 저와 교제해주세요.”

거부할 수 없는 눈빛에 커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본즈, 너 이렇게 대책없던 때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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