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뻥 뚫린 어두운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스포츠카. 간헐적으로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눈은 어느새 그치었다. 지나온 터널만 해도 벌써 몇 개째일까, 반복되는 풍경에 감각이 더뎠다. 준영은 두툼한 패딩에 파묻힌 시호를 곁눈질했다. 납치니 뭐니 하더니 납치당한 차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이 귀여웠다.

파랗게 익어가는 새벽. 준영이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차는 현재 서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10여 분. 10분 동안 구름이 많이 걷혀 주면 좋을 텐데. 준영이 초조한 마음을 담아 핸들을 두어 번 두드렸다.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갓길로 빠지면 정면에 주차장이 있었다. 제설 작업을 위해 쓰이는 공터를 개조해서 만든 졸음쉼터 겸 전망대. 개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은 깔끔했다.

“시호야. 잠깐 일어나 봐.”

약하게 신음한 시호가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깜빡대어 선명해진 시야로 그녀가 주위를 확인했다. 차에 막 올라탈 때보다 환해진 하늘이 코발트 블루빛을 띠었다.

“여기, 어디?”

“전망대야. 해 뜨는 거 보러 가자.”

시호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으로는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그리고 오른쪽에는,

“와. 예쁘다.”

공원처럼 조성된 공간에 드문드문 묘목이 심겨 있었다. 물론 내지른 탄성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펼쳐진 공간의 끝, 유리로 된 난간 너머로는 눈 덮인 산봉우리의 향연이었다.

“잠깐 내려서 안쪽으로 가 보자.”

“아, 근데 나…….”

준영이 운전석 문을 열어 한쪽 다리를 바깥으로 빼다 말고 시호를 돌아보았다.

“신발 없잖아요.”

준영이 멈칫하더니 곧 피식 웃었다. 웃기는 왜 웃어, 본인이 신발도 못 신게 해 놓고. 시호가 뾰로통해 있으면 준영이 웃는 얼굴로 사과했다.

“아, 미안. 그랬었지.”

그랬었지? 완전 남 얘기하듯 뻔뻔한 태도였다. 시호가 황당해하는데 준영은 한 술 더 떠 그대로 차를 나가버렸다. 곧이어 조수석 문이 벌컥 열렸다. 준영이 시호에게 등을 보이며 자세를 낮췄다.

“업혀.”

“네?”

그는 더 재촉하지 않았다. 시호가 머뭇대며 준영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안기고 싶은 단단하고 널따란 등. 시호가 조심조심 준영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준영이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받치고는 힘든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우면 모자 푹 눌러쓰고 나한테 기대.”

산등성이가 끝없이 펼쳐진 정경으로 보아 고도가 꽤 높았다. 그에 걸맞게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시호는 바람을 핑계 삼아 준영을 붙잡은 팔에 뿌듯이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어깨에 파묻은 고개로 미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낮게 깔리는 준영의 웃음소리.

2층 전망대까지 빙글빙글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자연스레 아래를 향한 준영의 시선에 시호의 발이 잡혔다. 수면양말을 신은 두 발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달랑달랑 흔들렸다. 준영이 또 한 번 웃었다. “왜 자꾸 웃어요, 기분 나쁘게.” 웃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시호가 밉지 않게 쏘아붙였다.

“양말이 귀여워서.”

핑크색 수면바지에 민트색 수면양말이라. 수면이란 말이 들어가면 원래 저렇게 다 귀여워지나. 귀엽다는 말이 맘에 드는지 시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짤막한 통로를 지나 문을 열면 한쪽 면이 통유리로 된 아담한 공간이 보였다. 실내 인테리어는 카페처럼 꾸며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핸드밀과 같은 커피용품만이 전시되어 있었다. 준영은 유리면에 붙어 있는 바테이블에 시호를 앉혀 놓았다. “여기 오니까 괜히 커피 마시고 싶네.” 시호가 중얼거렸다.

“구름 때문에 잘 안 보일까 봐 걱정이다.”

시호의 옆자리에 앉으며 준영이 걱정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은 지평선 바로 위에 낮게 깔려 있었다.

“이거 보려고 새벽부터 그 난리를 친 거예요?”

“응. 너랑 꼭 해 뜨는 거 같이 보고 싶었거든.”

“신발도 안 신기고.”

말에 뒤끝이 담겼다. 준영이 쿡쿡 웃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신기지 않았다느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허겁지겁 나오느라 미처 못 신긴 것이 정답이었다. 일출 전에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두꺼운 구름 위로 이제 막 희미한 여명이 밝아 왔다.

“구름이 꼭 나 같네.”

시호가 중얼거렸다. 준영이 시호를 빤히 응시했다.

“무슨 뜻이야?”

“어두컴컴하고 음침하잖아요. 빛도 다 가려버리고.”

“…….”

“제멋대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진짜 이기적이야.”

“구름이 이기적이라는 소리는 또 처음 듣네.”

“태양은 늘 같은 자리에서 뜨는데.”

“그래서. 시호 네가 구름처럼 이기적이라는 소리야?”

끄덕끄덕. 시호는 턱을 괴고 가만히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스라이 뻗은 산줄기 너머로 태양이 조금씩 머리를 내밀었다. 지평선과 구름의 작은 틈새로 태양이 존재를 드러내면 온 세상에 색이 입혀졌다. 어두컴컴한 구름도 희미한 크림색으로 제 색깔을 되찾았다. 태양이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완연한 아침 햇살로 빛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 덮인 산봉우리마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예쁘다.”

실내라고는 해도 난방이 되지 않아 조금 추웠는데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보자 온도마저 올라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고 구경하던 시호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준영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랄 겨를도 없었다. 그저 숨이 멎을 것같이 확고한 시선이었다. 올가미에 걸려든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깊은 응시.

평일 새벽부터 이런 공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세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대도 아무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침묵과 응시가 시호에게 유독 무겁게 다가온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준영이 손을 뻗어 시호의 귓불을 매만졌다.

“내가 너보다 백 배는 더 이기적일걸.”

“…….”

“춥다. 이제 그만 갈까?”

키스하고 싶다. 그러나 먼저 키스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영이 또 업히라고 하길래 시호는 양말을 버리든 말든 그냥 걸어가겠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어차피 금세 꺾일 투정이었다. 결국 준영의 등에 업혀서 되돌아가는 동안 시호는 준영을 마음껏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슬슬 배가 고파서 근처의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다. 화장실까지 업고 갈 순 없는 노릇이라 준영은 시호에게 슬리퍼 한 켤레를 사다 바쳤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시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면바지부터 이미 심상치 않기는 하지만 사방팔방 뻗친 머리는 누가 봐도 막 자다 깬 사람의 몰골이었다. 허둥지둥 머리를 매만지며 시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 키스하지 않기를 다행이다. 이런 꼴로 키스를 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수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기가 하도 창피스러워 얼른 차로 돌아가려는데, 시호가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준영이 떡 버티고 섰다. 양손에는 커피 브랜드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일회용 컵이 하나씩. 마시라며 건네길래 시호는 냉큼 받아 들었다. 커피 마시고 싶은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시호가 배시시 웃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호두과자 사 줄까?”

시호가 눈을 반짝거리며 매점을 죽 훑었다. 규모가 작아도 있을 만한 음식은 전부 있었다. 호두과자, 쥐포, 핫도그, 핫바, 통감자. 시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준영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다 먹고 싶어서 못 고르겠어?”

“음…….”

끄덕끄덕. 핫도그도 먹고 싶은데 통감자도 먹고 싶고 호두과자도 먹고 싶은데 뻥튀기도 먹고 싶었다. 시호가 메뉴를 고르지 못하자 준영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그럼 다 사지 뭐. 대신 다 먹어야 한다?”

“어, 다 먹진 못할 것 같은데…….”

“종류별로 하나씩 담아 주세요.”

“아니아니아니, 잠깐만!”

시호가 결국 제 손으로 메뉴를 짚었다. 막상 고르고 보니 그 또한 적지 않은 양이어서 두 사람은 음식을 한 아름 안아 들고 차까지 걸었다. 맑게 갠 하늘에 공기는 청명했고 바람은 불지만 햇볕은 따스했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에 따뜻한 음식. 꼭 소풍이라도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

“네?”

차에 들어와 포장지를 뒤적거리던 시호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까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길래.”

시호가 눈을 깜빡였다. 준영이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맛있게 먹으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준영이 차를 출발시켰다.

“준영 씨는 안 먹어요? 좀 먹고 나서 출발해요.”

“난 괜찮아. 많이 먹어.”

준영이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에 쫓기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출근이라고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한가하게 음식이나 고르고 있던 것 같아 시호는 조금 미안해졌다. 시호가 호두과자를 꺼내 준영의 입가에 가져갔다.

“먹어요.”

“아… 고마워.”

시호가 직접 음식을 먹여줄 줄은 몰라서 준영의 눈이 금세 미소로 휘어졌다.

“그런데 있잖아요.”

“응?”

“왜 나한테 반말해요?”

쿨럭쿨럭. 준영은 별생각 없이 호두과자를 우물거리다 한 방 먹었다. 정작 한 방 먹인 사람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지 괜찮냐며 진지하게 걱정을 해 왔다. 간신히 음식을 씹어 넘긴 준영이 입가를 훔쳤다.

“왜? 싫어?”

“싫은 건 아니고……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요.”

시호가 핫도그를 한입 크게 바삭거렸다. 생각보다 맛은 없었지만 들뜬 기분에는 그마저도 용서할 수 있었다. 산과 나무뿐인 창밖 풍경도 태어나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했다.

“만약 너희 부모님이 조직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면.”

갑자기 부모님의 얘기가 나와 시호는 무심코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동네를 떠나지 않으셨다면. 너랑 나는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랐겠지?”

“……그러네요.”

“평범하게 오빠 동생 사이로 지냈을 거야. 당연히 내가 너한테 반말도 썼을 거고.”

“…….”

“네가 말했잖아, 평범한 안시호로 살아보고 싶다고. 그래서 평범한 안시호라는 건 대체 뭘까 생각해 봤어. 평범하게 살기 위해 네가 잊어야 하는 과거가 뭔지 생각해 보니까 답이 나오더라. 결국 넌 조직에서의 삶을 전부 잊고 싶었던 거겠지.”

“…….”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어떻게 해서든 너희 부모님께 말씀드릴 거야. 그리고 막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기업에 가시면 안 된다고. 재희를 위해서도 앞으로 태어날 시호를 위해서도.”

“…….”

“그렇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잖아. 그럼 현재라도 바꿔야지.”

시호의 부모가 처음부터 조직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준영의 말처럼 두 사람은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친구처럼 지냈을지도 모른다. 시호는 처음으로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이전에는 해 보지 못했던 상상. 차마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상상.

준영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어울려서 놀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는. 상상만으로 시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가 내 옆에서는 셰리일 수밖에 없다고 하니까……. 앞으로는 최대한, 내 옆에서 안시호로 살게 해 주고 싶어.”

─ “당신 옆에서 나는 셰리일 수밖에 없잖아요. 셰리는 범죄자고요. 범죄자로 계속 살고 싶진 않아요.”

시호는 언젠가 준영에게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그때 준영은 무지 화냈다. 내가 시호 씨를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생각하냐면서. 하지만 그건 정말 오해였다. 그저 시호에게 강준영은 너무 눈부셔서, 말 그대로 빛이라서. 자기는 빛을 가리는 구름밖에 되지 못해서. 그래서 셰리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자기가 한 말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을 안겼는지 알 것 같아 시호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까 내가 반말하는 건 그런 뜻이라고 생각해 줘. 아, 혹시 불편해?”

“으응. 괜찮아요.”

“너도 나한테 반말해도 괜찮아.”

“…….”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받아쳤을 텐데. 시호는 도저히 준영에게 뻔뻔해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란 이렇게나 심란했다.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시호 너는 앞으로 뭐 하고 싶어?”

“앞으로요…?”

“뭐 취조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부담 없이. 또래들처럼 대학에 가고 싶다거나. 그렇지는 않아?”

“…….”

시호는 문득 경구가 생각났다. 혹시 재수하냐고 미안한 듯 물어 오던 경구의 얼굴. 그때 느낀 생경함, 평범한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낯섦이 시호는 나쁘지 않았다. 두렵지만 그런 세계에서 살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준영 씨가 제일 잘 알잖아요. 전에 하던 것처럼 준영 씨 도울 수 있다면 도울게요.”

준영에게 돌아온 이상 시호는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선택지에 없어.”

그러나 준영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와 시호는 가슴이 선득했다. 그건 마치 네 도움은 필요 없다는 잔인한 선고 같았다.

“앞으로는 내가 너한테 협력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없을 거야.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 자체도 없을 거고.”

“…….”

“그 외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뭐든지 다 하게 해 줄게.”

왜지. 왜일까. 한번 변심한 사람은 다시 받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라도 있는 걸까. 따지고 보면 변심한 게 아니라 잠시 떠나 있었을 뿐인데. 혹시 예측 불가하며 신뢰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버린 건 아닐까. 선물 같은 여행에 들떴던 시호의 기분이 부지불식간에 가라앉았다. 마음이 차갑고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대학에 다니고 싶다든가 여기 와서 한 것처럼 가벼운 아르바이트를 해 보고 싶다든가,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시호가 떨떠름하게 대답해서 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시호가 먹던 핫도그를 호두과자 봉지에 처넣었다. 달콤한 기분에 취해 있던 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


준영은 시트를 바짝 밀어 장시간의 운전으로 뻐근한 다리를 쭉 뻗었다. 새벽부터 장장 6시간에 걸친 대장정 끝에 도착한 서울. 준영은 잠시 눈을 감고 피곤함을 달랬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시호를 깨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시호는 고개가 왼쪽으로 꺾인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잠든 척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잠에 빠졌다.

식어버린 커피. 몇 번 입에 대지도 않은 음식.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몰라도 준영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그 이후로 시호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정말 골치 아픈 아가씨가 따로 없다. 준영이 작게 웃고는 시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시호야, 일어나. 다 왔어.” 천천히 열리는 눈꺼풀. “어, 다 왔어요?” 약하게 갈라진 목소리. 이런 인형 같은 존재가 제 눈앞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준영은 시호를 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여긴 또 어디예요?”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시호가 말했다. 늘 보는 주차장이 아니었다.

“일단 내리자.”

“오피스텔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응. 거기서 지내기에는 문제가 있어서.”

문제라는 말에 시호는 다시 불안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공안에 단단히 찍힌 모양이었다. 시호가 안전벨트를 푸는 동안 준영은 시호의 캐리어를 꺼냈다. 시호도 주섬주섬 봉투에 음식을 담았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욕심만 부린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엘리베이터 안에는 거울이 없었다. 아침부터 씻지도 못한 탓에 이미 찝찝함은 한계에 다다랐다. 가자마자 샤워부터 해야겠다, 시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25층에 도착했다. 무슨 건물인지는 몰라도 꽤 고층인 듯싶었다.

준영이 문을 열었고 시호가 먼저 집으로 들어섰다. 뭔가 웅장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현관에서부터 왠지 모를 웅장함이 느껴졌다. 정면으로는 커다란 액자가 걸린 벽이 있었고 액자를 중심으로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통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방과 화장실이 있는 듯했고 왼쪽에는 한 스무 발짝을 걸어야 끝에 도달할 것 같은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중천에 떠오른 햇빛이 유리면을 투과하여 실내 전체에 쏟아져 내렸다. 유리면을 따라 활엽수가 늘어진 광경은 흡사 식물원에라도 와 있는 것 같았다. 시호는 감탄하다 불쑥 의문이 들었다.

“여기 어디예요?”

“시호 네가 앞으로 지낼 곳.”

“그러기에는…… 너무 넓은데요.”

아마 시호가 지낼 방은 통로의 오른쪽에 있는 것 같았다. 준영이 방문 앞에 시호의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액자 앞에 서서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시호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두 사람?”

준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이라니. 나 말고 누가 더 있어요?”

준영이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누군데요?”

그리고 검지를 들어 자기를 향하게 했다.

“네?”

“말했잖아. 오피스텔은 안 된다고. 그럼 내 집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그러면 여기가 준영의 집이란 말인가. 무슨 모델하우스인 줄 알았다. 시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 통로의 오른쪽 방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맞은편에는 아담한 화장실이 하나. 그래도 샤워 부스가 있어 사용하기에는 편리해 보였다. 그다음은 현관을 중심으로 왼쪽. 통로를 지나자 사각지대에 있던 주방이 보였다. 벽면을 장식하는 섬세한 타일이 감탄을 자아냈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 또 통로가 있었고 안쪽으로 방문이 늘어서 있었다.

“구경해도 돼요?”

여태 맘대로 구경해 놓고 이제 와서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가 웃겼다. 준영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시호가 신나게 방문 이곳저곳을 열어젖혔다. 하나는 서재인 것 같았고 그 옆은 화장실 딸린 침실. 그리고 맞은편은 옷방이었다. 방들은 저마다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모델하우스 같았다.

달리 말하면, 원래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닌 것 같은. 인위적인 느낌.

“여기가 진짜 준영 씨 집이에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시호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준영이 질문에 담긴 뉘앙스를 눈치챘다.

“응. 정확히 말하면 강준영의 집이지.”

“……?”

“다른 신분도 마찬가지지만 강준영으로 활동하는 집은 특히나 보안 문제가 엄격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분수에도 안 맞는 집에서 살고 있을 뿐이야. 평소엔 일이 많아서 여기에 들를 시간도 없어.”

그렇구나, 강준영의 집. 그렇다면 다른 집도 있다는 얘기겠지. 아직도 안기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꼭 안기준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아무개로서 또 다른 거주지가 있을 터였다.

“지내기에 별로 불편한 점은 없을 거야. 나랑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을 테니까.”

“아…….”

“그러니까 여기 있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있어도 돼.”

“…….”

“……평생 있어 주면 더 좋고.”

내내 시호를 향하던 그의 시선이 살짝 비꼈다. 시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있으면 출근이라서. 일단 씻고 점심 준비할 테니까 너도 얼른 씻고 나와. 아까 방 맞은편에 화장실 봤지? 거기 편한 대로 써.”

“아, 저…….”

시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준영은 쫓기듯이 방으로 사라졌다. 완전히 닫히지 못한 문틈 사이로 그가 하나둘 옷을 벗는 장면이 보여서 시호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거두었다.

방 앞까지는 어찌어찌 걸어왔으나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방문을 닫은 순간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시호는 방문에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울렁대는 심장에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그렇게 아주 기묘한,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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