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편 바로가기 http://posty.pe/5atdpy /

소문(http://posty.pe/3uirmn)에서 이어짐/


과연 바를 타고 넘어 가면서 주먹질을 할 정도의 일인가 제헌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물론 맞는 사람도 때리는 사람도 웃고 있었으니 친한 사이에 하는 장난이겠거니 추측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이상했다. 제헌의 머릿속에 렉사의 말이 떠돌았다. 너무 완벽하다고?

"분위기 괜찮네요. 민지 씨는 여기 단골인가 봐요. 집이 근처에요?"

"제 집이 어딘지는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그럼 입 다물고 맥주만 다 마시고 나간 뒤에 영원히 다시 보지 맙시다. 그럴 거 아니면 뭐라도 떠들어야죠. 그러려고 굳이 나온 거잖아요."

"……맞아요. 그러려고 나온 거니까 쓸데없는 소리나 좀 더 해봐요."

그리고 정확히 1시간이 지났다. 민지의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진짜 못 해 먹겠네."

"동의합니다."

"왜 우리 둘 다 술이 센 거죠? 이 정도면 코끼리도 정신을 잃었을 거예요. 본인 주량을 알면서 술에 좀 취하면 적당히 분위기가 풀릴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니 정말 멍청한 짓이었어요."

"근데 저 좀 토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하면 죽일 거예요."

"……화장실이 어디예요?"

알코올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바에 앉아 있던 제헌은 바 스툴에서 거의 떨어지듯 내려가더니 차마 직선이라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민지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을 평소대로 해서 눈치를 못 챘는데 혓바닥만 멀쩡하지 이미 선을 넘은 모양이었다. 완연한 취객의 행세를 하고 있는 제헌이 다른 사람과 툭 부딪히는 것을 본 민지가 결국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중언부언 사과 중인 제헌을 끌고 남자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죄송합니다. 제 남동생이 오늘 처음 술을 마셔서요.」

화장실 옆 벽에 기대 서있자니 안에서 식도가 실시간으로 거덜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나더니 세면대에서 물을 쓰는 소리가 났다. 그냥 씻고 가볍게 입을 헹구는 것보다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제헌이 문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나오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민지를 보고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더니 바로 옆 벽에 마찬가지로 기대섰다. 세수를 꽤 거하게 했는지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은 좀 돌아왔어요?"

"정신은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취하긴 했지만요."

"누가 들으면 안 취한 줄 알겠네요."

"그럼 저랑 잘래요?"

민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제헌과 시선이 바로 부딪쳤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얼굴이 정통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민지의 눈꺼풀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깜빡. 민지는 고민하느라 이 또라이의 싸대기를 날릴 타이밍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본인이 고소장 받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부모님께 사망진단서를 보내도록 할까요?"

민지의 진심 가득한 발언에 제헌이 으하하 웃었다. 조금 전에 실컷 토하고 나온지라 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민지가 그런 제헌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헌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뭘 그렇게 봐요? 고소장에 쓸 내용 구상 중이에요?"

"그렇게 웃으니까 30년은 젊어 보이네요. 훨씬 보기 좋아요."

"30년이면 제가 엄마 뱃속에도 없었는데요."

민지는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좋은 거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지극히 작위적이고 무서운 미소를 본 제헌은 다시 푸흐흐 웃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여자랑 자고 나면 2주 내로 다시는 얼굴을 안 보는 사이가 되더라고요. 경험상 그게 제일 확실해서 권한 것뿐인데요."

"오해의 여지도 없을뿐더러 엄청나게 무례한 소리네요. 제헌 씨가 엄청나게 못 하나 봐요. 그보다 제헌 씨 여자랑도 자봤어요?"

"예? 아니 큰일 날 사람이네. 지금 누가 누구더러 무례하다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 못하진 않았는데, 내가 찬 적도 많고, 아니, 이젠 잘한다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진짜. 그리고 여자도라뇨?"

"저는 제헌 씨가 그 사람이랑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옷차림도 그렇고 게이인 줄로만 알았는 걸요. 그러니까 여기까지도 온 거라고요. 바에서도 그 남자들도 분명히…… 아, 그건가."

"……생각하시는 게 뭔진 몰라도 완전 오핸데요."

"뭐,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걸로 알겠어요."

제헌은 이를 악물었다. 술은 안 깼는데 왜 벌써 숙취가 오지? 술기운이 달아나서 그런가? 억울함을 위액과 함께 마음속에 잘 눌러둔 제헌이 이 화제를 포기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민지씨는 스노우랑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에요?"

"그건 별 건 아닌데."

민지가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민지가 벽에서 몸을 떼 걸음을 옮겨서 제헌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은 다시 바에 가서 앉았다. 

"공짜로 가르쳐주면 억울하니까 제헌 씨가 먼저 말해요. 그럼 저도 이야기할게요."

제헌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특별히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얘기를 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했다.

"제가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로 넘어갈 때였어요. 원래는 부모님들끼리 하는 모임이었는데, 그 2세대까지도 친분이 이어져서 자녀들끼리만 하는 모임이 따로 있었거든요. 신년 파티를 열어서 어쩌다 보니 저도 갔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나름 한가락 하는 인물들의 자녀들 모임이니 미리 선을 대어두려는 거였겠죠. 거의 다 해외파기도 했거든요."

"말하기 전에 고민은 왜 했어요? 거짓말 지어내느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속고만 살았어요?"

"아무렴 어때요."

민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트집이 잡히지 않을까 했던 제헌의 우려와 달리 민지는 순순히 말을 이었다. 

"대학생 때 한국어랑 영어 과외를 했어요. 그때 제가 가르쳤던 학생네 집안에서 연락이 와서 한국말 선생님을 찾는다길래 소개받아서 알게 된 거예요. 처음엔 어떤 호텔로 오라고 해서 착오가 있었나 했는데 일단은 정말로 정상적인 과외긴 했어요. 뒤로 가면서 좀 드문드문해지긴 했지만 한 1년 정도 계속 가르쳤어요."

제헌이 입을 딱 벌렸다. 한글 교습받는 스노우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조합이었다. 물론 모국어가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배우기야 했을 테지만 가갸거겨 배우고 있는 스노우를 상상하려는 것만으로도 뉴런들이 몸서리를 치는 것 같은 충격이 제헌의 정신을 엄습했다. 제헌은 혼란해지는 정신을 수습하는 시간을 짧게 가진 뒤 말했다.

"그때 얘기한 자기소개가 진짜였어요? 아니, 그럼 스노우한테 가나다라 가르치고 그랬어요?"

"속고만 살았어요? 그리고 뒤에 건, 아니요. 그때는 이미 기본적인 부분을 익힌 뒤라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를 찾은 건 억양과 말씨를 다듬고 어떤 어투를 사용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교정하기 위해서였지 한국어 자체는 이미 완벽에 가까웠어요."

민지가 바텐더가 건네는 맥주병을 들어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뭘 생각하는지 미간을 모았다. 깔끔하게 정리한 눈썹이 마주 모였다.

"정말로 이상하긴 했어요. 그 사람들이 찾는 건 한국 사람이나 표준어 능통자도 아니고 경상도 출신에 서울말을 사용하는 중산층 이상인 여자였어요. 저도 오래 알아 온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집안에서 소개한 게 아니었으면 거기서 제시한 조건이 아무리 너그러웠어도 면접을 보기도 전에 발을 뺐을 거예요. 처음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신매매가 아닐까 무척 불안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민지는 맥주를 정말로 물처럼 벌컥 마셨다. 미간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세부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게 좀 특이하긴 했지만 심각한 일은 아니잖아요? 부유한 사람들은 종종 그러곤 하니까요. 어쨌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종종 연락하는 사이가 됐어요. 반쯤은 어조를 다시 잡아주려는 이유에서였지만, 세월이 무섭네요." 

 "어쩐지 말하는 게 비슷하더라니……."

"아, 제헌씨는 알겠네요. 공통으로 대면해본 아는 사람은 없어서……. 역시 저랑 말투가 비슷하죠? 제가 하는 대로 가르쳐 달라고 해서 억양이나 호흡도 거의 같아요. 음색이 다르니 헷갈릴 일은 없지만요."

민지는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술술 마셨다. 제헌은 좀 충격받은 채로 멍하니 병을 들고 있다가 벌컥 마셨다. 목이 따가웠다. 제헌은 귀신에 홀렸다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스노우가 한국말을 배운 거였다니……?"

"그럼 뭐 태어나자마자 일곱 개의 언어를 말하고 걷고 진리를 다 통달하고 있었겠어요? 보살도 아니잖아요. 사람인데."

민지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제헌은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스노우에 대해서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

조치(http://posty.pe/3zo6jq)로 이어짐.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