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홍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어둡게 가라앉은 제 표정을 가리려는 시도를 하듯 그 표정은 더할나위 없이 상냥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넋이 나갈 정도로 황홀하고 눈부신 미소였지만 소요에게 이는 통하지 않았다. 한 차례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소요는 다시금 미간을 구겨 보였다. 모든 술법은 새기는 것과 동시에 지우는 방법이 존재한다. 헌데 신연진을 몸에 새긴 장본인이 그걸 지우지 않겠다니? 객기나 다름없는 연홍서의 대답에 소요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지경이었다.

"이유가 뭐지?"

소요의 심각한 표정을 보곤 연홍서가 재빨리 대답했다.

"제 이야기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이건 제 고집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지우지 않는 게 아니라 지우지 못하는 것일 뿐이죠. 현무신, 당신은 어째서 그 술법진이 수궁에서 새겨졌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돌리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

"당신 몸에 새겨진 신연진은 최근의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천 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죠. 당신은 스스로의 몸을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있나요? 시선이 닿지 않는 부위까지 꼼꼼히 살피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연홍서는 소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몹시도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부분의 대답이 본론을 빙 둘러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소요는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논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신연진을 네가 새긴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전부터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조금 다르지만, 맞습니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소요가 날카롭게 반박하자 연홍서는 눈을 조용히 감아 보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없이 조용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법이니까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소요는 제 감을 믿을 수 없었다. 저토록 무해하고 상냥한 모습에 한 번 속아 몸을 내주었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보냐. 이야기를 지속해봤자 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신연진을 지울 생각이 없다면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소요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훽 돌려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토라진 고양이와도 같아 보였다. 도망을 쳐봤자 이런 주변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는 소용이 없을 것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제대로 알 수 없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소요가 완강한 거부의 의사를 보였지만, 연홍서는 이대로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듯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고개 돌린 소요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소요는 아예 등을 돌려 보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홍서는 소요의 귓가에 제 입을 대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현무신."

"!!!"

이리도 기척이 없을 줄이야, 귀신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다가오는 일말의 낌새조차 없었다! 화들짝 놀란 소요가 몸을 움찔였다. 저를 부르는 그 미색 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차례 놀란 탓에 심장이 벌렁였으나 소요는 조금의 표정도 바꾸지 않은 채 연홍서를 응시했다.

"뭐지?"

"떨어트리셨어요."

연홍서가 내민 것은 소요의 신기인 수엽이었다. 양손으로 손잡이와 검날을 바쳐 내미는 꼴이 퍽 예의 바르다. 분명 소요는 밀려드는 팔의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수엽을 땅에 떨어트렸다. 그 뒤로 온 천지가 불타 재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엽의 칼날엔 일말의 그을음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잿더미가 된 땅에서 주웠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이 부시고 예리한 검날이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신통력이 대단한 사방신의 신기라고 해도 이토록 깨끗할 수가 있나? 방금 제련을 끝낸 것과 같은 깨끗한 모습에 소요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타지 않았군."

"당신의 물건인데, 어떻게 함께 태울 수 있겠어요?"

연홍서의 웃음을 뒤로하고 소요는 수엽을 낚아채 검집에 집어넣었다. 검날과 더불어 줄곧 몸에 지니고 있던 검집에도 그을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주변을 깡그리 태우는 와중에도 제게는 단 하나의 피해도 입히지 않다니, 소요는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연홍서에게 구해진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짜증 나는 자라곤 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유와 방법이 어찌 되었든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지네의 뱃속에서 위액과 뒤섞여 피부가 흐물흐물 녹아가고 있는 느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소요는 말문이 막혔다. 실컷 무시하다가 이런 상황을 직면하게 되니 여간 무안한 것이 아니었다. 친절하게 수엽까지 주워줄 건 또 뭐람. 칼이 깨끗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현실을 갑작스레 깨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

아무리 싫은 자라고 해도 소요는 고마운 것도 모를 정도로 무례하고 파렴치한 놈이 아니었다. 인정하기는 죽어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은 현무신이 된 자로써 품격에 걸맞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우선은 너한테..."

"잠깐."

소요는 감사 인사를 내뱉지 못했다. 허나 그것은 소요 스스로가 망설인다거나, 내키지 않는다는 정도의 이유가 아니었다. 연홍서는 갑작스레 소요의 팔을 붙들고 제 품 속으로 잡아당겼다. 소요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말문이 막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몰려드는 불쾌한 감정에 이 파렴치한 귀신을 순식간에 뿌리치고 싶었으나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힘인지 품에 꽉 껴안은 손목은 마치 태산의 산맥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 소요를 가볍게 제 품에 안아 든 연홍서는 훌쩍 뛰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쿵-!!!!!!

그때였다. 온 천지가 울리며 땅과 하늘이 거세게 흔들렸다. 소요는 발밑으로 느껴지는 진동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연홍서의 몸만은 달랐다. 부드러운 비단에 머리를 대고 있자니 마치 무릉도원의 꽃밭에 당도한 듯 일말의 긴장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죽은 몸인 탓에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 품은 몹시도 따뜻했다. 달큰하게 퍼지는 복사꽃 향기는 코 끝을 맴돌며 기억을 남긴다. 평범한 사람이 이 품에 안겼더라면, 다시는 벗어나고 싶지 않아 제 팔에 깍지를 끼고 버텼을 것이다. 

'또 무슨 꿍꿍이속이지.' 

소요는 홍서의 품에 안긴 채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는 크게 파여 마치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 마냥 처참한 몰골이 되어있었다. 재와 흙먼지가 흩날려 구덩이를 만든 실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분명 뼈가 으스러져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연홍서는 또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쌓여만 가는 빚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수치스럽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차라리 생각하기를 포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화야행!!!"

"!!!"

순간 소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앞이 분간조차 가지 않는 흙먼지 속에서 우렁차게 울린 것은 소요가 벽린사로 향한 이유이자 지금껏 소식조차 없던 청단의 목소리였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 분명 적어도 열세 개의 봉우리가 재가 되어 없어졌으니 찰나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 화염과 불길, 검은 연기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마지막 봉우리에 있다던 청단은 그 흔적을 보고 단번에 달려온 것이다. 사흘 동안 제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듯 청단의 소리는 평소처럼 올곧고 군더더기 하나조차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잠시 흐르던 침묵이 지나고 먼지는 곧 가라앉았다. 청단의 표정은 마치 봐선 안될 것을 마주친 듯 무섭게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표정이 청단이 화가 났다는 것을 단번에 알려주고 있었다. 

"네가 이 곳에 요괴를 죽이고 산을 태웠나?"

"그래."

"이 자식....!"

청단이 이마에 힘줄을 솟으며 덤벼들 듯 눈을 번뜩거렸으나 연홍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입에는 기분 나쁜 비소가 걸쳐져 있었으며 여전히 소요를 제 품 안에 안은 채였다.

"너라면 현무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 한 요괴를 그냥 둘 수 있었겠나? 내가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야. 제 동료를 짓밟을 뻔 했던 누구와는 다르게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지."

"뭐?"

홍서의 말에 청단의 표정이 눈 녹듯이 풀렸다. 두 눈을 번뜩이던 그는 그제서야 연홍서의 가슴에 안긴 것이 누구인지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설마 현..."

"저리 비켜!"

소요가 힘을 주며 거칠게 연홍서를 떼어냈다.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던 연홍서는 그제서야 별다른 거부 없이 소요를 놓아주었다. 하마터면 말도 안 되는 꼴을 청단에게 보일 뻔했다. 

"네가 왜 여기있어?!"

"설명하자면 길어."

청단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소요는 한숨을 쉬며 착잡하게 대답했다.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네놈... 또 무슨 기괴한 짓을 벌인 모양이구나."

소요를 잠시 쳐다보던 청단은 홍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던 출발 전 약속과는 달리 그는 투지로 눈동자를 불태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무언가의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벽린사에 있어서는 안 될 소요가 있는 이유와, 과도한 능력의 사용으로 인해 산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이미 천계에서 적대시 받고있는 귀신이란 점이었다. 평소라면 둘이 만나 무슨 짓을 하던 크게 신경 쓰지 않겠으나, 이곳은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었고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 여파는 어마어마하게 퍼져 도망을 갈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일단 좀 진정해."

"하지만 저 녀석이 너를...."

소요의 만류에 청단은 말을 잊지 못했다. 너를 안고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어? 라는 뒷말이 삼켜진 듯했다. 소요는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그의 행적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입으로 귀신의 변호를 한다니. 소요는 눈을 질끈 감아 보였다.

"그가..."

"그가?"

"나를... 구...했어..."

"???"

청단의 눈이 크게 뜨인 걸로도 모자라 바보 같은 표정이 더해졌다. 어째선지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몇 가닥 튀어나온 것도 같았다. 어? 응? 같은 소리를 내며 청단은 소요와 연홍서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청단은 연홍서의 말을 믿진 않아도 소요의 말이라면 전적인 신뢰를 보냈다. 함께 지냈던 1000년의 세월 동안 거짓은 커녕 불필요한 말조차 꺼내지 않은 이가 이런 말을 꺼내다니, 이리도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아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현무신을 죽일 뻔한 요괴가 있었다고."

연홍서가 말했다. 하지만 귀신의 말을 믿을 리가 있나, 특별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청단이 언짧은 표정으로 연홍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시 옮겨지는 시선,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청단은 소요를 응시했다.

"....맞는 말이야. 지네처럼 생긴 요괴에게 당할 뻔했어. 다리 대신 인간의 팔이 달려있는 모습이었지."

"그 녀석은 내가 일부러 잡지 않고 남겨둔 놈이야. 이 곳에 도망친 신부가 그 녀석에게 혼을 먹힌 것 같아서, 혹시 돌려낼 방법이 있진 않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지. 제때 돌아가지 못한 것도 그 이유고."

"....너다운 이유네."

청단은 자잘한 정이 많았다. 제 편으로 여긴 사람은 사이가 어떻게 되었든 끔찍이도 챙긴다. 귀신에게 먹힌 신부 또한 한 때 천계의 신관이었다는 이유로 이토록 돌려내려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요괴가 단번에 소멸하며 그 노력은 허사가 되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게 연락을 해야 했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왜 진작 나를 찾지 않았어? 혼자 온 거냐?"

"아니, 정보상... 독각이랑 함께 왔었어."

"응? 함께 왔다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데 설마..."

"나중에 말해줄게. 여기서 들으면 또 길길이 날뛸 것 같으니."

정보를 주었던 사람이 사실은 시화야행과 한패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소요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연홍서는 소요의 옆에 서서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는데, 연홍서와 나란히 선 채 청단과 마주 보고 있으니 어째선지 구도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소요가 슬그머니 위치를 옮겨 청단의 옆에 붙자 연홍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너무 적대시 하진 말아주세요."

"...."

무슨 개수작이냐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맞는 말이었다. 소요는 얌전히 제 팔짱을 낀 채 청단에게 눈치를 보냈다. 워낙 막무가내 성격인 그가 제 뜻을 알아채고 빠르게 이 곳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인지 청단은 소요의 눈빛을 보고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이걸로 불편한 상황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겠지.

"시화야행, 네놈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

미친 것인가.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던 청단은 오히려 도발을 하며 손가락을 쭉 펴곤 연홍서에게 삿대질을 해 보였다.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인 청단의 행동에 소요는 제 이마를 퍽 쳐보였다.

"꿍꿍이 속?"

청단의 도발에 연홍서가 되물었다. 물음을 받은 청단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이 지네 요괴가 네 신부의 혼을 삼켰다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처럼, 붉은머리의 염왕인 네가 가지고 있는 한이 신부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 여겼지. 헌데 너는 네 손으로 지네를 태워죽이고 현무를 구했어. 이는 필시 우리의 추리가 틀렸다는 증거일 터."

"완벽하네, 제대로 헛다리 짚었어."

연홍서가 빈정거렸다. 칭찬을 하는 것인지 조롱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지만 청단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단 네가 감추고 있는 생각이 어찌 되었든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지. 너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는 현무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고, 나 역시도 현무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 무턱대고 뛰어들었으니까, 네가 아니었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마음대로 생각해."

청단이 손을 거두고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지만 연홍서는 슬그머니 웃어 보일 뿐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연홍서의 태도에 청단은 다시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라. 나중에 이 일을 빌미로 천계의 술법진을 또 다시 깨트리거나, 관계의 우위를 점거해 위해를 가하려 들면 그땐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과연, 청단은 연홍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인 친절을 보인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굉장히 괜찮은 생각이었고, 또한 청단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였을 것이다. 실제로 소요의 생각 또한 그랬다. 연홍서가 굉장한 변태가 아니라면, 이토록 자신에게 집착하며 돕는 이유가 저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높으신 분들은 어째 하나같이 다 생각이 똑같은지."

연홍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하게 웃으며 숨을 내뱉는 것이 무언가에 지친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생각 같은 건 없어. 말해도 믿지 않을걸 알아. 하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 난 너희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 같은 건 없어. 귀신이라고 다 같은 귀신이 아니란 말이야, 그저 결계를 깨부수며 천계에 침입하려는 생각 없는 놈들이랑은 달라."

"너도 처음엔 술법진을 박살 내고 들어왔잖냐."

청단이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실수였어."

"뭐?"

"...즐거운 생각을 하느라 힘 조절에 실패해서. 너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음."

연홍서의 물음에 청단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인정하고 자빠진 것인지 소요는 당장 이 정신 나간 대화를 중단시키고 싶었다. 소요는 가라앉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이어 눈을 깜빡이던 도중, 마침 저를 응시하고 있던 연홍서와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맞닿자마자 눈을 휘어 웃어 보이는 것이 여간 잔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저를 무시하는 소요에게 끊임없는 눈빛을 보내다간, 연홍서는 더 이야기 할 것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것에 대해선 말리지 않겠어. 어차피 찾지도 못할 테니까."

"...."

"...."

소요는 연홍서의 말을 무시했고, 청단은 찔린 듯 대답하지 않았다.

"또 덤빌 생각은 없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연홍서가 청단에게 물었다.

"겨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난 현무와 약속을 했다. 너와 싸우지 않기로. 그리고 너 또한 나를 적대시 하지 않으니 무턱대고 칼을 들이댈 이유가 없다." 

"그것참 현명하군."

"...."

"현무신."

청단이 싸울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연홍서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소요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요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리움을 가득 담은 눈빛이 피부를 찔러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감각이 이어졌다.

"기분 나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다 알고 있어요. 제 이름을 부르는걸 망설이지 마세요. 제게 도움을 받는 것 또한 망설이지 마세요. 저는 언제나 그 순간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

"당신이 좀 더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쉬움과 슬픔이 잔뜩 담긴 목소리,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여전히 웃는 표정의 연홍서는 아득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는데, 이를 보고도 소요는 처음만큼 싸늘한 눈초리를 보낼 수 없었다. 이야기 속에 담긴 감정이 확연히 드러나 변하지 않던 귀신의 유약한 부분이 내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요는 특별한 부정을 해 보이지도 않았다. 

"저 이제 갈게요."

"...."

"다음에 만나요."

작별 인사를 함과 동시에 연홍서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을 울리는 작은 파열음 소리와 함께 붉은 구멍이 허공에 열렸다. 연옥의 귀신들이 고하 라고 부르는 입구였다. 고하가 열림과 동시에 타버린 흙먼지와 재가 날뛰며 줄곧 땅 아래서 숨어있던 벌레들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갑작스레 시야가 가려져 검은 색의 작은 벌레들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날아든 벌레들과 연홍서는 불길함이 감도는 붉은 입구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의 주변은 놀랄 만큼 적막에 감싸였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고요함이 지속되었다. 연홍서가 사라진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청단은 소요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 어째 너한테 말하는 것만 꿀이 달달하게 떨어지는 것 같은데. 사실 너를 엄청 좋아하는 거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지 않아도 기가 차는데 청단은 열 받은 소요의 머리를 더욱 들쑤셔 놓았다. 연홍서를 적대시 하던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 듯, 사실은 말이 통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며 그에 대한 의견을 조금씩 늘어놓기도 했다. 소요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청단의 가슴을 한대 퍽 치곤 연홍서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뒤늦게 풍강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 곳에 더이상 볼 일은 없겠군. 완전히 헛걸음을 했어."

"그보다, 독각은 정말 어딜 간 거냐? 내 아우의 얼마 없는 벗이라...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

"그건 돌아가서 얘기해."

진상을 듣는다면 청단은 뒷목을 움켜잡고 쓰러질 것이다. 제 동생의 하나뿐인 벗이 사실은 귀신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만천성이 충사의 정체를 알고 곁에 둔 것인지도 문제였다. 허나 소요는 많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던 마지막 순간까지 저를 쳐다보던 연홍서의 샛노란 눈빛이 잊혀지질 않았다.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상상 속에 일렁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파왔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목숨을 빚졌어...'

이 일로 또 얽혀들기 전에 빚을 갚아야한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두 번 씩이나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얼마 가지 않아 다시금 엮여들 때가 올 것이다. 수궁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절대 마주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이제는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어느덧 달은 중천에 떠 있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가슴 속을 깨끗이 씻겨내려 주는 것이 나름의 위로가 되었다. 두 번째 나들이는 몹시도 피곤했다. 일찍이 천계로 돌아와 침소에 몸을 뉘인 소요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아니,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그가 목숨값을 빌미로 어떤 부탁을 해올지, 빚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생각했다. 연홍서과 관련된 생각을 할 때 마다 뒷목에 자리한 신연진이 뜨겁고도 따스하게 고동쳤다. 그리고 소요의 걱정이 잊힌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천계를 덮쳐올 무렵이었다.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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