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아무 전력 60분 참여했습니다. 주제는 '계획' 입니다.

- 아카이 슈이치 X 후루야 레이

-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AKM 항공 1010편 워싱턴행 탑승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정갈하게 설정된 목소리가 공항 내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가방을 어깨에 메기 시작했다. 함께 기다리고 있던 후루야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는 검지를 이리저리 움직여 메일을 송신하고 나서야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운터 앞에 줄을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해외로 출장을 가는 회사원의 모습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작은 캐리어와 노트북이 겨우 들어갈 만한 숄더백을 멘 그는 돌연 울리기 시작한 진동음에 놀라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짧게 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문자메시지인 모양이었다. 후루야는 속으로 ‘하여간, 쯧.’ 하며 혀를 차곤 한 손으로 빠르게 답장을 입력해 송신했다. 휴가는 오늘이라는 날짜가 바뀐 순간부터였으므로 이런 업무 연락은 매너 위반에 속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경우였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였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그래. 평범하지 않은 게 늘 문제가 되었다. 매 순간 각오해야 하는 죽음, 거대한 무언가를 보호한다는 의무감. 그런 것들에 짓눌려온 세월에 후회는 없었고 과거로 돌아가 다시금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더라도 그는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언젠가 찾아올 달콤한 해방감을 원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루야는 어느 날 문득, 정말 문득 들었던 생각을 떠올리며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안녕하세요, 옆에 자리 있나요?

w. 비에

 

 



샤워부스에서 나온 아카이는 큼지막한 수건을 허리에 둘러 묶었다. 은색 선반에 구비된 그보다 조금 작은 수건으로는 머리에 달라붙은 물기를 탈탈 털어내는 데 썼다. 다 쓴 수건을 정해진 자리에 두자 비슷한 시각에 샤워를 마친 동료 한 명이 그의 등을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윽, 하고 짧은 신음을 뱉어낸 아카이가 조금 휘청거리며 동료의 얼굴을 뚫을 듯 째려보았다. 동료는 날카롭다 못해 닿으면 그대로 살이 찢길 것 같은 시선에도 웃음으로 대응했다.

 

“오늘도 퇴근하긴 글렀네!”

 

곧 아카이는 그의 웃음이 즐거움이나 행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애써 부정해보고자 하는 노력에서 기인했음을 깨달았다.

 

“현장에만 하루 종일 있었더니 화약 냄새가 안 빠진다. 슈, 너도 마찬가지구나.”

 

동료가 킁킁거리며 아카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카이도 자신의 팔을 들어 코를 찡긋거렸다. 동료의 말처럼 화약 냄새가 연하게 남아있었다. 폐건물에서 뛰고 구르고, 권총과 샷건을 쏴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평화로웠지만 사건과 사고는 때와 장소를 가리며 나타나주는 관대함이 없었다. 긴급 소집을 명령받은 게 그저께 새벽, 동이 틀 때쯤이었다. 회의 후 출동을 나간 건 어제 오후였고, 본부로 귀환한 게 오늘 오후 7시가 넘어서였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이쯤 되면 퇴근을 시켜줄 만도 한데, 그들의 상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미처럼 일한 그에게 3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아카이는 캐비닛에서 와이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은 뒤 바로 한 층 위의 취침실로 향했다.

그 때 그가 팔에 걸친 라이더 재킷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 진동음이 원인이었다. 아카이는 핸드폰을 들어 화면에 뜬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그가 출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옷을 다 갈아입은 동료가 그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렸다. 그리고는 아카이와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 너 뭐야? 그럼 나는?”

 

동료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울먹거렸다.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나온 후루야는 공항 1층 벽면에 붙어있는 커다란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평소였다면 뉴스에서 뭐라고 떠들든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앵커의 입에서 FBI라는 말이 나온 탓에 그대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보아하니, 어떤 멍청한 집단이 도시 외곽에서 한바탕 인질극을 벌인 모양이었다. FBI의 지휘 아래 사건은 마무리 되었지만 부상자가 여럿 나왔다는 소식이 이어서 소개되었다. 후루야는 무심하게 화면을 쳐다보다가 곧 픽, 하고 얕게 웃었다.

 

“하여간. 머리에 뭘 얹어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는 건지, 원.”

 

FBI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짙은 군청색 캡모자를 쓴 요원이 빠른 속도로 카메라 앞을 지나갔다. 잠깐 스쳐지나간 정도라 그가 누군지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후루야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직감이라. 후루야가 중얼거리며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직감 하나로 뉴스에서 아는 이의 얼굴을 찾은 건 반가웠지만, 그 낯간지러운 직감은 정작 후루야가 지금 가장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지는 못했다.

그가 탐내고 있는 정보를 알려줄 이는 따로 있었다. 후루야는 다이얼을 가볍게 터치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곧 핸드폰 너머로 여성의 높은 음성이 나왔다. 후루야가 뉴스 화면에서 등을 돌려 걸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 여보세요? 스털링 수사관?”

 

침묵이 아주 잠깐 동안 그와 조디 사이를 채웠다. 조디는 누가 들어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그건 물음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짜증이 섞인 외침에 더 가까웠다.

 

[후루야 레이!?]

 

아, 다행이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3년 전이고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므로 후루야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상냥한 인사말까지 준비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후루야는 핸드폰 너머 상대에게 제 얼굴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양 입꼬리를 끌어올려 활짝 웃었다.

후루야는 공항을 빠져나와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택시들 중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택시를 골랐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기사가 다급하게 담배를 끄고 운전석에 몸을 올렸다.

 

“아카이 수사관의 집주소를 알고 싶은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FBI 스페셜 에이전트의 거처였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절대 알려줘서는 안 될 정보였지만 후루야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제 손 위에 아카이 슈이치의 집주소가 댕그랑, 떨어지게 될 것을 알았다.

후루야는 통화를 스피커폰 모드로 돌려놓고 핸드폰을 기사 쪽으로 기울였다. 세 번의 한숨 끝에 조디는 아카이의 집주소를 털어놓았다. 기사는 알아들었다는 듯 오케이 제스처를 취하곤 시동을 걸었다. 그 소리를 들은 조디가 네 번째 한숨을 푹 쉬었다.

 

 



 



강렬한 색상의 차를 끌고 도로를 뚫고 온 아카이는 차에서 내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샤워를 마친 후 잠깐이라도 자기 위해 취침실로 향하던 때였다. 조디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고, 그 내용은 아카이보다 반 발자국 뒤에 있던 동료를 울상 짓게 했다.

 

‘[오늘 할 일은 끝났으니까 그만 퇴근해.]’

 

인질극은 일단락되었지만 사건 자체가 끝난 건 아니었다. 잡은 범죄자의 취조나 사건 뒤처리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카이에게 퇴근해도 좋다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동료는 아카이의 핸드폰을 빼앗아 조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억울한 목소리로 ‘나는!?’ 하고 호소했지만 그녀는 통화를 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패턴을 알고 있는 아카이는 그가 자신에게 질척거리기 전에 황급히 샤워실을 빠져나갔다. 퇴근 허락이 떨어진 건 기뻤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디가 아무 이유 없이 그를 퇴근 시킬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몇 달 전 임무에서 그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 때문에 최근 더 엄격해졌으니 석연치 않은 기운은 더 강해져만 갔다.

아카이의 집은 3층 가장 끝 방이었다. 길지 않은 복도 끝에서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누군가가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작은 캐리어를 옆에 두고, 가방을 어깨에 멘 채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머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것이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 1시, 어두운 복도에 빛이라곤 오렌지 빛의 작은 조명 밖에 없었지만 아카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후루야 군?”

 

이름이 불린 후루야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고개도 들어 올리곤 시야에 아카이를 담았다. 오렌지 빛이 은은하게 섞인 푸른 눈동자에 아카이의 모습이 들어찼다.

 

“안녕하세요, 아카이. 저, 휴가 왔습니다. 미국으로.”

 

후루야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이미 내려가 있는 눈꼬리가 접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순박한 청년의 얼굴을 한 그는 도저히 서른둘의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서른둘. 문득, 아카이는 자신이 서른둘이었던 때를 떠올렸다. 많은 일이 시작되었고, 또 끝나버렸던 시기였다. 이제는 후루야가 그 나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심장이 간지러웠다.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안에 배속되어, 어느 조직으로의 잠입이 결정되었을 때 후루야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이었다. 이미 몇 번 잠입수사를 경험한 베테랑 선배들이 있었으나 상부는 이례적으로 신입 애송이 둘을 잠입수사관으로 선발했다. 상세한 내막은 몰랐으나, 후루야에게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조직의 말단을 통해 실적을 쌓아 코드네임을 부여받고, 중심부까지 파고들기까지 그는 말 그대로 쉼 없이 달렸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정의와 도덕성이 저울 위에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디케Dike는 부재해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라이Rye가 있었다. 아니, 대신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는 매번,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조직이 스러지는 것을 상처와 먼지투성이 몸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때도 그는, 아카이 슈이치는 우연히 후루야의 곁에 있었다. 우연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는 더는 라이라는 이름이 아니었고, 후루야도 버번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버린 지 오래였다. 후루야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의와 도덕성이 자리해있던 저울을 조직과 함께 부숴버렸고 여신의 부재에 서운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5년의 시간을 달린 끝에 스물아홉이 되어있었다. 그 해 겨울, 후루야는 반듯하고 정갈하게 편 손을 이마에 비스듬히 대는 것으로 아카이를 배웅했다. 아카이와는 그게 마지막이었고, 그 날을 떠올렸을 때 안타깝다와 결을 같이 하는 감정을 발견한 건 최근 들어서였다. 그건 아쉬움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후루야는 8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휴가를 끌어다가 상사 앞에 곱게 던졌다. 답지 않게 충동적이었지만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상사는 후루야의 부재가 얼마나 큰 손실인지를 한 시간 넘게 설명했지만 후루야는 굽힐 마음이 전혀 없었다. 상사는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고집이냐.’며 앓는 소리를 했고 후루야는 거기에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휴가 신청을 철회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세 시간의 대치 끝에 한 달 반의 휴가 기간을 얻은 후루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카자미가 후루야의 눈치를 보며 계획을 물었다. 자리에 앉은 후루야는 곧바로 항공사 홈페이지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여행을 갈 거야.’

‘예? 어디로요?’

‘미국. 워싱턴.’

‘… 예?’

 

의외의 대답에 카자미를 비롯한 주변 부하들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미어캣 같은 모양새에 웃음이 터질 법도 했건만 후루야는 최대한 빠른 항공권을 구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4시간 27분이라는 긴 비행시간 동안에도 후루야는 자지 않았다. 잠들 수 없었다. 옆자리 승객은 어지간히도 피곤했는지 기내식도 거르고 죽은 듯이 자고 있었고 주위의 다른 승객도 대체로 자고 있었지만 후루야는 잠들 수가 없어서 계속 깨어있었다.

거짓된 이름으로 만나 함께 했던 3년, 증오로 점철되었던 2년, 본명으로 다시 만났지만 솔직하진 못했던 1년, 그리고 헤어져있던 2년하고도 몇 개월. 총 8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14시간 27분 동안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14시간 27분에 43일의 휴가 기간을 더한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후루야는 주어진 43일 동안 과거와, 미래를 연습해보기로 했다.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먼저 동거를 해보면서 상대를 알아가는 추세가 늘었다고, 어느 잡지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후루야는 자신이 이 넓고 넓은 미국 땅에서 아카이 슈이치를 찾아온 것도 그런 류의 연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네는 해외여행 같은 거에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가요. 아, 카자미도 놀라서 몇 번이나 되묻긴 했습니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후루야가 휴가를 왔다며 다짜고짜 아카이의 집으로 쳐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웬만한 관광지는 다 둘러본 후루야가 아카이가 자주 가는 식당을 물었다. 집에서 밥을 해먹지는 않을 것 같아 넌지시 물어봤더니 정답이었는지 그는 근처의 유명한 식당부터 외진 곳에 있지만 맛 하나는 보장하는 식당까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 날 이후로 후루야는 아카이가 자주 가는 식당, 카페, 체육관, 마트, 쇼핑센터 등을 물어보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기 오리가 어미라고 인식한 상대를 졸졸 쫓는 모양새라 후루야의 건장한 이미지와는 겹쳐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낯설지는 않았다. 그에게 쫓기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탓일지도 몰랐다.

그 날도 후루야는 아카이가 자주 가는 단골 식당에서 그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랬는데 아카이가 대뜸, 후루야의 여행 이유를 물어온 것이다. 물음표 하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질문이었다.

 

‘아, 이거 향이 좀 강하긴 한데 뒷맛이 괜찮네요.’

 

후루야는 아카이의 불친절한 질문에 불친절한 회피로 대응했다. 화제를 포크에 돌돌 말아 한입에 꿀꺽 삼켜버리는 것은 그가 버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부터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아카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이프와 포크를 동시에 들었다.

처음, 아카이가 후루야의 휴가 기간을 들었을 때는 두 귀를 의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루야의 부재였다. 상부가 그의 부재를 43일이나 용인한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놀란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냈더니 후루야는 ‘43일 동안 머무르는 건 역시 민폐인가요?’ 하고 이상한 방향에서 접근해왔다. 아카이는 급하게 놀람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머무르는 건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 좁은 집이 불편하지는 않을까가 걱정이 되었다.

놀람과 걱정과는 다르게 40일은 빠르게 지나갔고 그 동안 후루야는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이틀이었다. 이틀 후면 후루야는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초조해졌다.

계단을 오르던 아카이가 걸음을 멈췄다. 이 계단을 다 올라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걸으면 집이었다. 문을 열면 후루야가 있는 집. 이틀 후면 그냥 집이 될 집.

아카이는 후루야가 여행 이유를 얼버무렸던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후루야가 단순히 미국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왔노라고 기대했던 건지도 몰랐다. 기대. 얼마나 덧없고 비참한 마음인가. 아카이는 문고리를 돌리고 기대를 밟아 짓이겨버렸다.

 

“왔어요? 오늘은 좀 늦었네요.”

“미안.”

“저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요.”

 

현관으로 걸어온 후루야가 아카이에게 팔을 내밀었다. 재킷과 모자를 달라는 제스처였다. 아카이는 일련의 주고받음에 익숙해진 척을 하며 옷과 모자를 벗어 그에게 건네었다. 옷걸이에 재킷을 건 후루야는 곧 소파에 앉았고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옆에 앉으라는 신호였다.

 

“피곤해보여서 일찍 자라고 하고 싶은데, 오늘은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많이 피곤한 거 아니면 듣고 자요.”

“그래, 괜찮으니까 해봐.”

 

거만하게 들리는 대답에 후루야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언젠가 스파게티처럼 돌돌 말아 삼켰던 화제를 토해냈다.

내가 왜 하필이면 미국으로, 그것도 여기로 왔는지 궁금해 했죠?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궁금해 했잖아요. 맞죠?

아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은퇴 후 연습입니다.”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의 범위에 속한 것이었다. 충격적이라고 표현할 것까진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아카이가 충분히 놀라고 이상함을 느낄만한 답이었다. 만약 나아가 그가 충격을 느낄만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은퇴라는 말이리라. 어리석게도 자신은 후루야를 무적으로라도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은퇴라니, 자네 어디….”

“다친 곳 없습니다. 아프지도 않고요. 다만….”

 

다만 그는 아카이가 착각했던 것처럼 무적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다치면 아프고, 아프면 앓고, 앓다가 죽는 그런 인간이었다.

후루야의 푸른 눈동자가 오렌지 빛으로 일렁였다. 처음 아카이를 찾아와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보았던 그 오묘한 색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아카이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눈동자에는 투명하고 작은 테이블이 들어차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평생 내 나라를 지키고 싶지만 저도 인간이잖아요. 언젠가 늙고, 약해져서 은퇴하겠죠.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생각보다 그 날이 빨라질지도 모르고.”

 

너무 사랑스러워 애인이라고까지 칭한 나를 지키는 일에서 물러나게 되는 언젠가를 말하고 있음에도 후루야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잔잔했다. 내리깐 눈에서나 약간의 아쉬움을 훔쳐볼 수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위태롭고 또 안타까워 보였다. 아카이는 손수건이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것을 떠올리고는 작게 좌절했다.

만약 그가 울기라도 한다면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문득, 아카이는 후루야의 어깨를 끌어안아주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그가 허락만 해준다면 위로의 포옹을 손수건 대신으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그건 정말이지 그냥 문득이었다. 라이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카이가 우연히 제 곁에 있었던 것처럼.

어느 좋은 날에,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은 날일지도 모르는 날에,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 같은 날에 후루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은퇴 후 내 곁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8년이었다. 후루야가 아카이를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8년의 시간이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시작은 썩 좋지 않았고 그 과정도 비유하자면 엉킨 실타래였지만 끝은 나쁘지 않았다. 공항에서 후루야는 아카이뿐만 아니라 FBI 요원 모두에게 감사를 담은 경례를 했고 그건 멀리서 보면 상당히 좋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웠다. 그리고 아쉬웠다. 나쁘지 않은 끝을 분쇄기에 갈아 넣고 싶을 만큼 안타깝고 아쉬웠다.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끝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미련이라고 한다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식으로 치부하고 끝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바람이자 상상이고, 실제는 어떨지 모르니까….”

“실험을 해봤다?”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되게 정 없는 사람 같잖아요. 연습이라고 해줘요, 연습.”

 

후루야가 다시 옅게 웃었다.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지켜보던 아카이는 그를 따라 조금, 웃어보였다. 무거웠던 적도 없었건만, 풀어진 분위기가 둘 사이 공간을 메워 제로로 만들었다.

 

“어땠어?”

“그냥 그랬어요.”

 

그냥 그랬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평이었다.

 

“저 스스로도 제가 뭘 기대했는지는 모릅니다.”

“그게 뭐든 네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해.”

“그냥 그랬다니까.”

“다행이야.”

 

아카이는 허리를 돌려 후루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후루야도 조금 몸을 틀어 그를 마주보는 자세가 되도록 했다. 정해진 각본이 있는 배우들처럼 아카이는 두 손으로 후루야의 뺨을 쥐었고 후루야는 눈을 감았다. 잠시 닿았다가 떨어질 뿐인 입맞춤은 어린애들의 소꿉장난처럼도 느껴졌다.

입술이 떨어지는 잠깐이 아쉬울 법도 한데 두 입술이 다시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숨결을 느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여전히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관계는 그냥 그랬다는 후루야의 대답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여태까지 줄곧 애매함의 줄 위를 걷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제 애매함에 싫증이 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애매하기만 할 뿐인 이 순간이 소중하고 애틋했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에서 평범함을 바랄 수 있도록 숨구멍을 틔어준 것 같았다. 후루야는 아카이의 어깨에 기대듯 몸을 기울였다. 익숙한 담배 냄새가 콧잔등 위로 올라왔다.

그의 담배 냄새를 익숙하다고 느끼기까지 40일이 걸렸다. 후루야는 8년이 넘는 시간을 정리해보려 애썼던 14시간 27분을 떠올렸다. 앞으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은퇴까지, 아카이와 다시 만나기까지, 그와 손잡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허락될지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제가 물러나면, 그 때 곁에 있어줘요.”

 

후루야는 아카이의 어깨에서 이마를 떼어냈다. 한껏 젖어서 눈물이 눈동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눈물은 그가 눈을 깜박이기도 전에 눈 밖으로 튀어나와 흘러내렸다. 아카이는 재킷 안에 있는 손수건 대신 손가락으로 그의 눈물을 훔쳐 닦았다.

 

“그러면 왠지, 적어도 그 때까지는 안 죽을 수 있을 거 같아.”

 

오만한 생각이었다. 매 순간 각오해야 하는 죽음과 거대한 무언가를 보호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는 이에게는 충분히 오만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후루야는 달콤한 해방감을 두 팔 벌려 가득 안을 날을 오만함 위에 올려두었다.

 

“그래. 때가 되면 나도 준비를 끝내고 네 곁으로 갈게.”

 

아카이가 후루야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후루야가 눈을 접어 웃자, 다 채워지지 않은 눈물이 아래로 툭, 툭, 떨어졌다.

곧 아카이가 그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었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다시 대본대로 행동하는 배우가 되었다. 처음 했던 입맞춤처럼 아카이는 두 손으로 후루야의 볼을 감쌌고 입술을 부딪쳤다. 후루야의 주먹 쥔 손에서 아카이의 와이셔츠가 주름을 만들어냈다.

 

 



 



신장이 족히 190cm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택시에 몸을 구겨 넣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그는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에 대충 걸어두었다. 행선지를 묻는 기사에게 남자─아카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청으로.”

 

녹안의 외국인의 행선지치고는 특이한 탓에 기사가 치요다구에 있는 그 경찰청이 맞느냐 되물었다. 아카이는 아까와 같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한 뒤 최대한 빨리 가줄 것을 추가로 요구했다.

 

“관광객인 것 같은데 경찰청에는 무슨 볼 일로 가십니까? 도쿄에는 더 볼 게 많은데.”

 

왜 하필이면 경찰청으로 가는지 돌려 묻는 말에 아카이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하려고 하니 그와의 애틋한 스토리를 얘기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18년, 그리고 앞으로 있을 시간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기 위해 물음과 대답 사이에 시간을 두었다.

 

“10년 전 했던 약속을 지키러 갑니다. 곧 그 사람이 은퇴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연인과 한 약속입니까?”

 

아카이의 표정이 어지간히도 애틋했는지 기사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의 약속 상대를 연인이라 추측해보았다.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이었지만 아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연인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에 놓인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연인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기사는 아카이가 약속 상대를 매우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런 눈을 한 사람의 사랑은 무거운 법이지. 기사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다시 웃었다. 손님의 목적지까지 가려면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릴 터였다. 그는 아카이의 사랑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아카이는 기사가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대화가 제법 잡지 같은 데 실릴만했다.

기사는 그의 이야기에서 놀라운 점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그가 10년 전 사랑하는 사람과 약속을 맺은 뒤로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하나는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경찰청에는 무슨 볼 일로…?”

“그가 경찰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짧지만 추억을 쌓았던 곳도 결국 거기니, 거기에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기사에게 돈을 건네고 아카이는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가 창문을 내려 주먹을 쥐곤 아카이를 응원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카이는 고맙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10년 전, 후루야는 공항에 도착해 조디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녀는 몇 번의 고민 끝에 그의 거처를 알려주었고 아카이에게 이른 퇴근을 허락했다. 그렇게 후루야는 아카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날아와 전화 한 통으로 3년의 공백을 메웠다.

아카이도 그 방법을 베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에는 조디의 역할을 해 줄 이가 없었다. 후루야에게 자주 혼나던 안경을 쓴 남자가 떠올랐지만 그는 죽어도 후루야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가 후루야의 거처를 알고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경찰청을 해킹해 알아내는 방법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랬다가는 고백을 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죽음이 후루야의 손 위에 놓여지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카이는 죽기 전 그와 연애를 해보고 싶었다.

자, 후루야 군은 어디에 있을까. 아카이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선글라스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몇 달 간 합동수사를 진행할 때, 후루야는 도시락을 싸와 공원에서 부하와 함께 먹곤 했지만 워낙에 바쁜 탓에 식사는 대체로 식당에서 해결했다.

어디 어디에 간다고 했더라. 라면집도 있었고, 카레집도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아, 그래. 바에도 종종 간다고 했었지. 어디든 좋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한 군데씩 들러보면 될 터다.

헤맴 끝에 그를 발견하게 되면 뭐라고 말을 걸면 좋을까. 약속했던 것처럼 그의 옆자리를 비어있을 테지만, 그는 정중한 남자를 좋아하므로 일단은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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