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님 글 커미션


W. 야쿠르트















“도련님, 이제부터 이 아이가 도련님 전담 시종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앳된 목소리에 움찔, 쳐다보지도 않던 세란의 시선이 움직인다. 깃펜을 쥐고 있던 손이 멈추고 시선이 정면으로 향한다.

마주치는 보랏빛 눈동자. 긴장했는지 살짝 다문 입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세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작게 목소리를 낸다.

“……잘 부탁해.”

굳은 얼굴로 깃펜을 잡고 있던 나이, 열여섯.

붉어진 얼굴로 쭈뼛거리며 인사하던 나이, 열넷.

봄바람이 햇빛 속으로 스며들던 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처음 만났다.





눈을 감고 있던 세란이 입 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벌써 4년인가.”

그땐 네가 이렇게 소중해질 줄은 몰랐는데. 뒷말을 삼키며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맞이한다.

그가 앉아있는 저택의 정원에 가득 심어져 있는 꽃들의 향이 실살스럽게 바람에 실려 들고 있었다. 따사로운 봄날의 햇볕이 정원 곳곳으로 아름다운 빛을 늘어뜨리고, 나른한 오후 공기가 눈부신 빛들 사이에서 부유한다.

정원을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는지 관리가 잘 되어있는 이 화원은 어렸을 때부터 세란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나무벤치에 앉아있던 그는 조금 멀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하늘을 향하고 있던 고개에 투명한 민트색 눈동자 속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들이 가득 담긴다.

“도련님-”

“..안녕, 헤이.”

“방에도 안계시고, 서재에도 안계시고. 역시 여기 계셨네요.”

“여긴 너 아니면 못 찾잖아.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휴식시간을 방해하는 건 싫어.”

웃으며 말하는 그의 예상치 못한 말에, 헤이는 바람에 날리는 긴 자줏빛 스커트를 손으로 눌러 잡고는 그의 옆에 앉아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며 나지막하게 그에게 속삭였다.

“도련님, 백작님께서 방으로 부르세요.”

“…또 무슨 일로 부르려나.”

“글쎄요…….”

“가기 싫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내가 또 어디로 없어져서 찾느라 오래 걸렸다고 해.”

“푸흐-”

늘 자신의 아버지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는 그가 하는 작은 반항임을 알기에, 헤이는 동의의 뜻으로 더욱 깊게 벤치에 등을 기댄다.

정원에 놀러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귓속으로 흘러든다. 이렇게 함께 정원에 있을 때면 둘은 감상에 젖어 자주 조용해지고는 했다.

다채로운 빛의 장미, 수려한 자태의 수국, 잘 다듬어져 있는 조경 식물들이 흩어져있는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멍하니 장미를 바라보던 그들 사이로, 갑자기 센 바람이 헤이의 긴 머리카락을 잔뜩 흐트러뜨린다.

“아-”

바람에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린 그녀를 바라보던 세란이 천천히 손을 뻗어 헤이의 얼굴 근처로 손을 가져간다.

볼에 닿는 그의 손가락에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눈을 뜨고는 고개를 살짝 떨어뜨려본다. 두근거리는 심박 소리가 새어나갈 것 만 같아 어쩔 줄을 모르는 채로 그저 가만히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얼굴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걷어,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겨주고는 턱 선을 따라 피부를 여리게 스치고는 다시 그의 무릎 위로 돌아갔다. 시선을 맞추고 있던 민트색 눈동자가 잠시 멈춰 있다가 이내 예쁘게 휘어진다. 그리고는 그가 말한다.

“돌아가자.”

“..네.”





앞서 가는 세란의 표정은 어쩐지 긴장한 듯이 보였다. 곧바로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장면에 계속해서 귀를 붉히기를 반복했다. 심장의 두근거림도 심상치 않았고, 반복되는 조금 전의 장면이 아른거려 떠오르기에 바빴다.

봄내음이 가득 담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아득하고도 맑은 보랏빛 눈동자, 긴장한 듯 살짝 떨리던 속눈썹,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 보드라운 살결.

머릿속에서 자꾸 되뇌어지니 세란은 자신이 마치 호색한 같다는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는 그는 어쩐지 알 수 없는 설렘에 모호한 감정을 품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의 방.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 좋은 설렘, 그리고 들이키는 숨.

그의 멍해진 눈동자 속에는 무슨 말을 듣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잔뜩 날을 세우는 듯 하는 의지가 스며든다.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리자 마주치는 시선에 세란이 힘없이 웃으며 속삭였다.

“..다녀올게, 내 방에서 기다려줘. 헤이.”

“네, 도련님.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 안다는 듯 작게 대답하는 그녀의 미소를 기억 속에 남긴다.

손을 들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 세란이에요.”

“……들어와라.”





도련님께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세란의 방으로 돌아가는 헤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펫이 깔려있는 긴 복도를 걸으며 또 생각나는 건 아까의 그 감촉. 볼에 닿았던 온기가 남아있는 손가락, 다정하게 마주쳤던 시선, 귀를 간질이던 그 목소리.

자꾸만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붉어지는 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빨라지는 심박 수에 맞춰 진갈빛 메리제인 슈즈가 내딛는 발걸음도 함께 서둘러진다. 밭아진 숨을 내뱉으며 멈춰선 곳은 그의 방문 앞.

문을 열자 훅 끼쳐오는 세란의 향이 그녀의 볼을 더 붉게 물들인다.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어 늘 그를 기다리던 책상 앞 소파에 풀썩- 앉았다.

“…….”

멍하니 있다가 옆에 있던 쿠션을 하나 집어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왜 자꾸 두근거리지? 볼은 왜 또 붉어지는 거지?

평소에 둘 사이에 스킨십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런 분위기, 주변을 둘러싼 봄내음, 그래서. 그래서 그런가?

어렸을 때는 그저 도련님과 함께하기에도 행복하기에 벅찼었는데. 둘은 서로의 고민, 감정을 공유하던 친구 그 이상의 존재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친구와 부모님의 사랑 없이 그저 후계자로만 대해지던 그는 온갖 엄혹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 친구나 사랑 가득한 부모님과는 거리가 멀었고, 귀족의 하인으로 일하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사막 속 오아시스를 만난 듯 한번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하고 애정을 쏟으며 둘은 그렇게 감정을 공유해 나갔다.

..어쩐지 요즈음은 속마음을 이야기 하는 빈도수가 줄었지만.

“어쨌든 참 대단하신 분이야..”

그녀가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그런 빈틈없는 교육과 훈련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벌써 도련님은 올해 성인이 되셨고, 비슷했던 키도, 체격도, 목소리도 훌쩍 변하셨구나.

자꾸만 드는 설렘과 존경심.

그래, 아마 이 감정의 이름은 ‘존경’일 것이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나는 도련님을 존경하는 것뿐이겠지.

그저 그 뿐이겠지.

어쩐지 허전한 마음으로 결론짓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모습이 시선 속에 자리 잡았다.





“하아…….”

맞은 편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 연거푸 마른세수를 해대는 그를 보며, 헤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혼났어요?”

“…아니.”

“그럼 무슨 일 있었어요?”

“……약혼하래.”

“…….”

쿵-

심장이 나락으로 향해 떨어진다.

아까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 있는 북소리가 귓속에서 울린다.

약혼?

도련님이?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혼사가 오가는 건가?

물어보고 싶은 말들은 산더미 같았지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침묵이 조금 길어졌다.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들이 아득하니 정신을 앗아갔다. 아름다운 백작부인이 될 낯선 여인과 웃으며 정원을 산책하는 세란, 그 뒤를 따라가는 자신의 모습.

싫었다.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헤이.”

“네?”

“뭐야, 내 말 들었어?”

“아..네, 약혼 하신다고…”

“……응.”

어쩐지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은 대답 뒤의 침묵에 억지로 목소리를 띄워 대답한다. 끌어올리는 입 꼬리와는 반대로 그녀의 마음속은 깊이 침식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 밖에 없겠지.

“축하, 드려요.”

아, 생각보다 아파. 안 돼. 흘러 나와.

도망쳐, 헤이.

마음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물밀 듯이 휘몰아치는 감정들이 조절되지 않아 그가 대답을 하기 전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이상하게 밝은 목소리 톤으로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해요 도련님, 아까 집사님이 부르셨던 걸 까먹고 있어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야긴 나중에 들을게요, 그럼……”

“잠깐, 헤이-”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눠진 공간.

흐르는 눈물이 야속하기만 하다. 뭉개지는 심장이 아프게 숨을 죄여온다. 빠른 발걸음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아까 정했잖아.

존경이라고.





“…….”

방에 홀로 남겨진 세란은 그녀가 닫고 나간 문을 한참을 응시했다.

축하한다고, 그렇게나 밝은 목소리로.

순간 느껴지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

넌 괜찮아? 내가 약혼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서운했다. 무슨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했던 시간들, 추억들이 모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하얀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어 올렸다. 군데군데 붉게 물든 부분이 손가락 사이로 헝클어져 내린다.

그나저나 약혼이라고. 자식의 의견도 묻지 않고 혼사를 받아들이는 부모라니.

자신의 처지에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그는 소파 위로 허물어져, 샹들리에를 노려보며 조금 전을 회상했다.


“약혼..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너도 오베르 가문은 알고 있지? 그 오베르 가(家)의 첫째 따님이 너와 꼭 만나고 싶다면서 혼사를 보내 왔더구나. 만약 정말 오베르 가와 우리 가문이 사돈이 된다면…….”

아버지가 손에 들어올 선물들과 명예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둔탁한 끝이 명치를 누르는 느낌이 세란을 자극한다. 아버지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흠흠, 그러니까 이건 평생 다시는 오기 힘든 기회라는 걸 명심하거라. 조만간 우리 쪽에서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으니, 그 때 확실하게 그 아가씨의 마음을 얻어내 약혼까지 최대한 빠르게-”

“아, 아버지!”

두 손을 꾹 말아 쥔 채로 세란이 내지른 소리가 백작의 말을 잘랐다.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둘 사이에는 맥이 끊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를 팔아, 권력을 취하시겠다고요. 아버지, 우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어요?

절망적인 외침이 그의 안에서 메아리친다.

양손에 가득 쥔 주먹이 잘게 떨고 있었다.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예쁜 정원을 거닐며 산책하고 싶었다.

달빛이 내리는 언덕에서 날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과 함께 웃고 싶었다.

때에 맞지 않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도, 사랑이 필요해요, 아버지.

당연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사랑을 모른다.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읏.”

순간 눈앞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

방금 전 이었음에도,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했던 그 순간. 검은 머리카락, 예쁜 속눈썹, 청초하고 맑은 눈동자, 꾹 다문 입술. 그리고 봄바람이 불어온다.

헤이야.

넌 내게 모든 것을 줘.

지옥 같았던 메아리가 잦아든다.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흔들림 없이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그 약혼. 하기 싫습니다.”

“…뭐?”

“하기 싫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유명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요.”

어쩐지 달라진 분위기에 백작은 조금 주춤했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사랑? 이 귀족 계에서 사랑은 필요 없는 감정이다. 식사 자리를 마련할 테니 넌 얌전히 나가서 쓸모 있는 행동을 하면 되는 거야! 가문에 도움이 되란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나가보거라.”

“아버지!”

“나가라고 했을 텐데! 듣도 보도 못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해!”

“…….”

입술을 깨문다. 그래, 늘 이런 식이지.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한 기분에, 세란은 헤이가 기다리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무거운 발을 돌렸다.

인생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은 무력감이 그를 질척이며 감싸 안았다.





몇 일후, 이른 시각에 눈을 떴던 헤이는 분주한 소리에 이끌려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가까이 있던 하인에게 묻는다.

“저기 혹시요, 오늘 무슨 일이 있나요?”

“아,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오베르 가 아가씨가 방문하신다는 날. 세란 도련님이랑 혼사가 오고 간다는데 그게 진짜야, 헤이? 넌 알거 아냐.”

욱씬-

첫 새벽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는 다시 제 자리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침대 위에 앉았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그녀의 자줏빛 흑발을 옅게 비춘다.

“…….”

사실은 안다. 정신이 없어서 까먹은 게 아니라, 일부러 날짜를 보지 않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니, 해가 떠오르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주황빛 햇살이 스며들어 오모한 색으로 물들어간다.





“반가워요, 당신이 세란 씨죠? 후후- 예전에 먼발치에서 봤을 때 보다 몇 배는 더 잘생겨진 것 같네요.”

“…영광입니다, 오베르 영애.”

넓은 테이블에 단 둘이 앉아 차를 마신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미소를 짓는 그녀는 정말 귀족 영애의 느낌이 풍겼다. 입술 밑의 점과 그녀의 금발은 굉장히 잘 어울렸고, 세란보다 나이가 더 많은 노련한 분위기로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갔다.

정작 세란은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했지만.

테이블 조금 뒤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조용히 서 있던 헤이는 고개를 들어 세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궁금했다. 저번 일 이후로 도련님과 대화를 별로 나누지 못했는데, 이번 식사에 대한 이야기를 과연 내게 해주실지 의문이었다.

오베르 가문 자체는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수도의 황실에도 연이 닿아 있어 귀족들 중 꽤 영향력이 큰 가문에 속했다. 그렇지만 오베르 가의 첫째 따님인 저 록산느 아가씨에 대한 사교계의 뒷소문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미소년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말, 야망이 엄청나다는 말, 원하는 게 있으면 꼭 손에 넣고 마는 성격이라는 말 등등.

하인들 사이에서도 파다하게 알려진 이야기들은 헤이를 더 불안하게 했다.

도련님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에.

“그래서, 이 목걸이가-”

멍하니 세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이쪽을 바라보던 오베르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말을 끊더니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스쳤다. 헤이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그녀는 하던 말을 넘기고는 세란에게 조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둘만 있지 못한다는 건 조금 아쉽네요. 저런 것 들은 물리고 조금 더 진중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때요?”

아. 손끝이 차다.

헤이는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옆에 서있던 집사님과 함께 자리를 물린다. 한걸음 또 한걸음씩 내딛을 때 마다 비참함이 넘실거린다. 난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나가지 마.”

“……!”

단호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울린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걸음을 멈춘 헤이는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본다. 그는 뒤를 돌아보고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표정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단호하고 묵묵한 그 표정.

“오베르 영애, 저희 하인들에게 ‘저런 것 들’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오베르 영지가 아닙니다. 제 아이에게 마음대로 명하시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하, 그러하지요.”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코웃음을 친 영애는 세란의 단호한 말에 꼬리를 내리고는 헤이에게 내리던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세란의 뒤로 돌아온 헤이는 볼을 붉게 물들인 채 그의 목소리를 되감는다.

그래, 나는 당신의 아이다. 철없는 귀족 아가씨의 무례도, 날카로운 시선도 당신이 내 앞에 있어준다면.

뭐든 괜찮지 않겠는가.





“후-”

오베르 영애를 에스코트 해 마차에 태우고, 성큼성큼 걸어 방으로 돌아온 세란은 평소처럼 헤이를 제외하고는 하인들을 모두 물렸다.

목에 하고 있던 크리바트를 신경질적으로 풀러 침대 소파 위로 내던지고는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헤이, 괜찮아?”

“네?…네.”

갑자기 안부를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화가 나 있다. 세란은 소파에 앉아 서있던 그녀에게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헤이는 고개를 갸웃- 하고는 그의 옆에 가볍게 몸을 앉혔다.

“...미안. 아까 더 뭐라고 했었어야 했는데,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서 별로 말을 못했어. 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그건 정말-”

횡설수설 달뜬 목소리로 화를 내어주는 도련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상냥한 사람.

단지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이유 없는 무례, 멸시. 비참했다. 화가 났다. 그런데도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대신 화를 내주는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요.

나의 도련님.

이제 난 당신 없이는…

눈물이 투둑- 자줏빛 스커트 위로 떨어졌다.

울멍지게 고인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손을 뻗어 세란의 손을 그러쥐었다.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속삭인다.

“…고마워요, 도련님.”

“……너 울어..? 많이 아팠구나, 미안해-”

“그리고 좋아해요.”

“…!”

갑자기 터져 나온 고백에, 둘은 동시에 얼굴을 서서히 붉게 물들인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세란의 투명한 눈동자에는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그녀가 그 속에 가득 차 있었다. 붉게 물든 눈가, 볼, 코, 입술. 넋을 놓고 너를 바라보았더니 가슴속에 솟아나는 이 감정이 궁금했다. 정원에서도 느꼈던 너무 기분 좋은 이 설렘.

이게 사랑이야?

너 말고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그러니까 알려 줘. 헤이.

세란이 고개를 천천히 그녀에게로 내린다. 손끝으로 턱 선에 맺힌 눈물을 훔쳐주고는 코끝을 맞대고 물었다.

“..키스해도 돼?”

그의 수줍은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헤이를 끝으로 겹쳐지는 입술.

눈물 때문인지 촉촉이 젖은 입술을 달콤하게 베어 물었다. 말랑한 감촉이 생생히 감각을 마비시킨다. 헤이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싼 세란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내 촉-하는 마찰음과 함께 떨어진 입술.
그리고 화아악, 붉어지는 둘의 얼굴이 지고 있는 노을의 색과 함께 물들어 간다.

마주치는 시선이 오롯이 서로를 비추며 감싸 안는다.

휘어지는 눈.

올라가는 입술.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구요? 그, 약혼은-”

“안 할 거야.”

“…정말요?”

“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헤이, 너인걸.”

“…저도 사랑해요, 도련님.”

갑자기 시작된 사랑고백이 아직 익숙지 않아, 둘 다 또다시 볼을 물들인다. 옆에 앉아있던 헤이의 어깨를 휘어감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기더니 머리에 짧게 입술을 맞춘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왜 이제야 알아 챈 걸까.”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녀가 미소 짓는다. 편안했다. 그의 품은 언제나 따스했고, 다정했다. 저야말로 왜 이제야 알아 챈 걸까요. 눈을 살풋 감자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있잖아, 나는 이게 사랑인 줄 몰랐어. 지금까지 살면서 나를 따스하게 대해줬던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내가 너에게 품고 있었던 이 감정도 뭔지 몰랐거든. 이제야 깨달았어. 너를 볼 때, 함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행복했어. 안보면 보고 싶고, 너에게 칭찬 받고 싶고, 꽃을 선물해 주고 싶었어.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너무 걱정 돼서 미칠 것 같았어. 헤이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 어느 때 보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마주치는 시선에 절로 심장이 뛰었다.

그의 입술이 열리고, 달콤한 말들이 귓가에서 녹아내렸다.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이 세상에서 내 유일한 사랑이야.”

그의 아름다운 미소에

그저

눈물이 나올 것 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으음-”

세란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다가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장미를 바라본다. 그리고 헤이를 떠올린다.

“..보고 싶다.”

흘러나오는 마음에, 네가 가득 담겨있어서 행복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리자 문 앞에는 방금 일어났는지 비몽사몽 눈을 부비며 들어오는 헤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그의 옷이 단정히 접혀 들려있었다.

“…후흐- 잘 잤어?”

“……도련님은요?”

“난 잘 못 잤어. 네 생각하느라.”

부드럽게 짓는 미소가 마음에 사무친다. 그의 뒤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내려와 눈이 부시다.

어젯밤, 방으로 돌아와 그를 생각하며 바라보았던 새 하얀 달이 떠오른다. 헤이는 그를 따라 미소 지으며 화답한다.

“어제 달이 정말 예뻤어요.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둘은 마주보며 웃어버렸다.

행복해요.

행복하다.

소리 없이 울리는 목소리가 간질간질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둘의 아침은 침대에서 몇 분이나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밝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약혼은 어떻게 물릴 생각이에요?”

“음… 사실 어제 좀 무례하게 굴었잖아, 운이 좋으면 그 이후로 연락이-”

“왔어요.”

“……어?”

그는 책상에, 그녀는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 내용은 ‘약혼 파기’.

말을 끊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그녀의 행동에, 세란은 떨떠름하게 그녀의 손을 응시했다. 오베르 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음, 욕 같은 걸 써놓았다거나 다신 만나기 싫다거나 하는 말일 수 도 있지 않을까?”

그가 헤이의 손에서 편지를 건네받으며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편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보니,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으니 이번에는 제 쪽에서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님께는 이미 말씀을 드렸으니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기대를 담아, 오베르 록산느.」


옆에서 함께 편지를 보던 헤이는 한숨을 내쉬며 조곤조곤 말을 내었다.

“..후- 오베르 백작님께 이미 말씀을 드렸다는 건, 참석하지 않으면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거네요.”

“그러게. 이거 왠지 협박당한 기분인데. 그렇다면 참석은 꼭 해야 하는 거고, 이번 만남을 마지막으로 할 만한 무언가가 없을까? 약점이라던가.. 헤이, 너 이 아가씨에 대해 뭐 들은 소문 같은 거 없어?”

“소문이요? 음- 글쎄요. 이 아가씨는 저희 사이에도 말이 많기는 해요. 워낙 유명한 귀족계 아가씨니 사치가 심하다는 거랑..”

“대부분 유명한 가문 영애들은 사치가 심한걸. 좀 더 타격이 클 만한 내용의 소문이라거나-”

“아.”

“아?”

“어리고 잘생긴 남자들을 굉장히 좋아하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문란하게 노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정말이야? 으, 사교계나 파티는 정말 질색이라 잘 안 나갔더니 이런 소문 같은걸 잘 몰라. 고마워. 한번 알아볼게.”

“네, 그런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하시게요?”

“만약 네가 해준 말이 맞는다면, 그 식사자리에서-”

어느새 자리에 앉아 답신을 보낼 편지지를 뒤적거리며 그가 생각해둔 계획을 이야기한다. 그녀도 그의 옆에 앉아 편지에 쓸 내용들을 이것저것 고민한다.

이렇게 쓰면 의심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그럼 이렇게 쓰는 게 어때요? 도란도란 오고 가는 말소리가 분위기를 달게 누그러뜨린다.

오늘따라 그림 같은 하늘이 창밖으로 펼쳐지고, 따사로운 햇빛이 너그럽게 비춰든다. 나른한 오후 빛이 단조로운 벨벳 커튼 사이로 넘실거렸다.





“아, 헤이. 마침 잘 왔어!”

“무슨 일 있어요?”

“응, 오늘 드디어 꼬리를 잡는데 성공했어. 미행을 붙여놨었거든.”

“정말요? 아, 저도 드릴게 있어요! 저번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이 오늘 아침에 도착했더라고요.”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아든다. 역시 오베르 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열어 말없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자, 양 손으로 잔뜩 긴장한 채 입을 가리고 있던 헤이가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요?”

“귀공께서 요청하신 부분은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약속 날짜는-”

“아- 다행이에요!”

두 손을 가슴께로 바싹 모아 쥔 채 안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세란은 함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연다.

“헤이, 저번에 네가 알려준 대로 오베르 영애의 뒤를 조금 캐봤거든? 예상대로였어.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을만한 두건을 뒤집어쓰고 후미진 뒷골목에서 어떤 남자와 밀회하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해. 여관까지 갔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 남자를 지하에 잠시-”

“가둬놨어요!?”

놀란 듯 말을 끊고 소리치는 그녀에 오히려 더 놀란 세란이 풋-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두려고 했는데, 그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냥 감시만 붙여두고 방을 하나 내줬어. 오베르 쪽에서 그 남자를 없애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밖으로 돌아다니게는 못하겠지만.”

“아...”

“근데, 그 남자를 걱정해 주는 거야? 그러지 않아도 될 사람인데...”

조금 부끄러워 보이면서도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나지막하게 묻는다. 그 말을 들은 헤이는 그가 귀여운 듯 웃음을 자으며 그에게 쪼르르 다가가 시선을 맞춘다.

“도련님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심지어 저랑은 보지도 못한 사이인데~?”

어쩐지 놀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귀를 붉게 물들인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무릎 위로 앉힌다.

“...!”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의 몸이 세란의 몸 위로 밀착된다. 그가 내뱉는 숨결이 목 부근에 닿아 흩어진다. 반사적으로 그의 뒷목을 감싸 안은 헤이의 팔이 당황한 듯 작게 떨린다.

“도련님-”

“네가 이렇게 예쁜데.”

서로의 시선이 가까이서 마주친다. 코끝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 그가 싱긋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속삭인다.

“어떻게 질투를 안 해.”

그가 내뱉은 달콤한 말이 심장에 닿는다.

순식간에 붉어진 그녀의 얼굴에 수줍게 맞닿는 입술.

어디선가 느껴지는 은연한 꽃 내음.





또 그 여자가 무슨 말로 널 상처 입힐지 모른다며, 그녀를 저택에 남겨두고는 홀로 마차에 오른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녀를 떠올린다. 걱정하고 있으려나.

어느 샌가 가득 차는 네 생각에 오늘도 고개를 묻고는 번져오는 따뜻함에 감사한다. 벌써부터 보고 싶어지는 그리운 모습이 마음을 울리고, 발끝까지 퍼진 따스함이 나에게 모든 것을 준다. 너에게 완벽히 닿기 위해 오늘 계획한 모든 것들을 실수 없이 해내야 한다.

숨을 들이키며 주먹을 고스란히 쥐어 본다.

아무래도 네가 보고 싶었다.


몇 십분 쯤 지났나, 멈춰서는 마차에 그가 조용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응.”

마부가 문을 열고 그가 땅을 밟았다. 오베르 가의 저택으로 들어서자, 그의 합석 요청으로 이미 와있던 귀족가의 자제들도 몇 명 보였다.

“어머, 세란씨가 왔나보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오베르 영애.”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가 내민 손등에 키스를 한다. 그의 모습에 다른 자제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하고, 영애의 입 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간다.

“자, 그럼 인사도 끝났으니 차부터 한잔 하고나서 식사를 시작할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영애들의 모습을 끝으로 그들은 자리를 옮겼다.

식 전 짧은 티타임. 굳이 식사까지 하고 올 생각이 없었던 세란은 이 시간에 모든 것들을 마치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다른 영애들을 부른 이유는 보는 눈을 늘려 사교계에 쉽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였고, 허영심이 많고 으스대기를 좋아하던 오베르 영애는 그동안 잘생긴 외모와 사교계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세란과 약혼을 한다는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계획 하에, 떨리는 표정을 숨기고 카모마일 향이 가득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영애, 언제 세란 씨와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다른 귀족가 아가씨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조용히 차를 마시는 세란의 얼굴을 흘긋거리며,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이번 기회에 나도 조금 연을 쌓을 수 있으려나?

“아, 마침 말씀 드리려 했던 건데.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보낸 후에, 세란씨와 저는 약혼을 하게 될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예에? 약혼이요?”

“정말인가요, 영애?”

“후후, 그렇답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오베르 영애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입술을 억지로 잡아 올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는 미소였지만, 다른 영애들의 눈에는 그녀를 바라보며 달콤하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어머..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영애.”

가식적인 칭찬과, 가식적인 태도. 그 속에서 세란은 답답해지는 마음으로 하염없이 헤이를 떠올린다. 잘 있으려나, 집에 가면 계획대로만 끝내면 오늘 하루 종일 끌어안고 놓아주지 말아야지.

그가 그녀를 떠올리는 동안 아가씨들의 수다는 점점 본질과는 멀어져 편안한 대화로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집 영애가 차를 마시는 예법이 마음에 안 들더라, 신상 드레스가 나왔는데 너무 예쁘더라 등등. 대화가 슬슬 길어지고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찰나가 되자, 세란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이다.

“맞아요. 요즘은 루비가 그렇게 예ㅃ-”

“오베르 영애.”

“……네?”

“요즘 제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말입니다.”

“어머, 뭔데요, 뭔데요?”

“이상한 소문이라고요?”

그동안 조용히 맞장구만 치던 세란의 입이 열리자 말이 끊긴 오베르 영애 보다 두 아가씨들이 더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인다.

“…영애가 밤마다 다른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다닌다는.”

“…!”

“어머, 어머! 어떻게 그런 추잡한 짓을!”

“정말이에요? 세상에,”

사실 심증만 다분했지 물증이 없었고, 급이 다른 귀족 영애를 차마 건들일 수 없었던 둘은 이때다 싶어 놀라는 척 꽤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소란을 피운다.

반면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오베르 영애는 손끝을 떨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당당하게 소리를 높였다.

다들 소리를 낮추세요! 세란 씨, 그저 소문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제가 어떻게 그런 문란한 행동을 하겠어요?”

콧대를 높이며 웃는 눈가에 경련이 인다. 그녀가 위협적으로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 소문의 출처가 어딘지 궁금하군요. 세란 씨는 사교계 쪽으로는 잘 눈길을 안주던 분 아닌가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말도 안 되는 소문인 게 확실한가요, 영애?”

물러서지 않는 시선. 담담한 표정. 자신의 속내를 파고드는 것 같은 맑은 눈동자에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를 다그친다. 뭔가를 발견했을 리 없어. 분명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뒤처리는 확실하게-

“그럼요. 전 결코 그런 일이 없답니다.”

처리를..

입이 열림과 동시에 순간 스쳐지나가는 지난 어느 밤의 대화.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번 밤 상대를 처리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어디론가 사라져서..”

“음, 괜찮아. 죽기 싫어서 어디로 숨었나보지 뭐. 그런 놈은 말하고 다닐 배짱도 없을걸.”

설마.

“아, 그렇단 말이죠. 그럼 이 사람도 모르시겠네요? 집사!

덜컹- 위협적으로 열리는 저택의 문. 그리고 그의 집사에게 팔을 붙잡혀 밀려들어오는 한 남자.

“....!”

“록산느 아가씨! 부디 선처를...!”

그녀의 떨리는 눈빛이 그 남자에서 천천히 세란에게로, 그리고 마치 즐거운 일을 찾았다는 듯이 반짝이는 두 영애에게로 옮겨간다.

“…….어머, 어머. 세상에.”

적막을 깨고 나온 호들갑이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어떡하지?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일부러 계획된 건가?

원망스럽고도 절망적인 표정이 세란을 향한다.

세란은 그녀의 표정에서 계획의 성공 여부를 알아채고는 입을 연다. 큰 홀에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런, 표정을 보니 원 나잇 상대가 맞나보네요. 안타깝게 됐습니다만 저는 평생을 바쳐 한 사람만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영애는...”

그가 덜덜 떨고 있는 남자와 말을 잇지 못하는 영애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럴 준비도, 마음도 없으신 듯합니다. 우린 잘 맞지 않을 것 같으니 막무가내로 들어왔던 혼사는 없던 일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저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어머 같이 가요, 영애!”

당장이라도 사교계에 편지를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두 영애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앞 다투어 오베르 저택을 나선다. 세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고, 저택 홀에는 입술을 깨물며 바닥에 주저앉은 저택의 아가씨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나에게 감히…….감히!!!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과하게 넓은 홀에 울려 메아리친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 작은 창문을 가리고 있는 벨벳 소재의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내려 바라본 떨고 있는 손 끝. 이제 가장 큰 산인 아버지만 넘으면 된다. 아버지만.

두 영애는 물오른 듯 소문을 퍼뜨려 줄 것이고, 그럼 오베르 가로 쏠려있던 위신과 품위는 아마 제 가문 쪽으로 어느 정도 기울 것이다. 각 가문에서 재빠르게 선물을 보내오는 곳도 있겠지. 아버지가 싫어하실 리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다짐했던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떨리는 이 느낌은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강요만 받아왔고, 기댈 곳 없이 시키는 일을 묵묵하게 행했다. 사랑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내게 다정함을 주고, 사랑을 준 사람.

“하-”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발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돌아가는 길.

집사에게는 먼저 아버지에게 오베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몰래 전하라고 말해 두었고, 지금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덜컹, 그가 방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온기 없는 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세란은 굳혀진 표정에 단 일말의 변화도 주지 않은 채, 외출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다시 나섰다. 그리고는 복도를 거쳐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들어와라.”

노크를 하자 곧바로 들리는 목소리. 아버지의 곁에는 집사가 서 있었다. 표정을 보니 이야기는 성공적으로 끝마친 듯 했다.

“저-”

“아주 잘했다!”

“..네?”

“드디어 네가 가문에 쓸모 있는 짓을 좀 할 줄 아는구나.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구나. 이제야 가문을 이을만한 생각이 드는 게냐?”

이제야 쓸모가 있어졌다니.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그녀를 떠올린다. 버텨야 해.

“…아버지.”

“그래. 뭐든 말해 봐라.”

밀려올 선물들과 명예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지,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채였다. 세란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안이라.”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가문을 이어 받을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과 이번 일을 시작으로 사교계에 나가 세력을 넓히겠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요. 사업도 맡겠습니다. 제가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할 테니까-”

길게 말을 뱉어, 말을 끝내자 숨을 몰아쉰다. 그의 포부를 들은 백작의 눈이 얇게 퍼진다.

“제가 사랑하는 그녀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말을 잇자 머릿속에 그녀가 선명해 진다. 그녀를 본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 짙은 머리카락도, 보라색 눈동자도, 부드러운 살결도 너무나도 그리웠다.

나의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낸다.

귓가에 백작의 목소리가 아린다.

“대체 누구인데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냐.”

“…들어와.”

그의 목소리와 함께 열리는 방의 문. 그리고 순식간에 압도되는 분위기.

“...!”

길게 풀어져 있던 짙은 머리카락은 아름답게 정돈되어 보랏빛 비단과 함께 엮여 있었다. 일정한 크기의 진주가 묶여있는 과하지 않은 귀걸이와 목걸이, 옅은 화장. 그 아래로 고급스럽게 퍼진 그녀의 흰 피부와 잘 어울리는 바이올렛 드레스가 서재의 밝은 등불에 맞춰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당황스러운 표정의 헤이가, 세란과 눈빛을 마주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가있던 그는 수초 후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겉치레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녀들에게 몰래 지시해 놓았던 사항이었다. 그렇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수줍게 물든 귀를 모른 채 하고서는 아버지를 향해 다시 시선을 억지로 돌린다. 백작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

분위기를 눈치 챈 그녀는 얼굴에서 당황한 티를 숨긴다. 그녀 역시도 그를 향한 마음이 같았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백작을 마주 한다.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잘게 떨고 있는 세란의 손끝을 천천히 감아쥐었다. 저 여기 있어요, 떨지 말아요.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세란이 은연하게 미소 짓고는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하-”

일순간, 백작이 내뱉은 짧은 웃음소리. 책상 위로 두 손을 마주잡은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저 아이에게 저런 기품과 눈빛이 있을 줄이야. ..좋다. 날짜를 잡도록 해라. 허락하지 않으면 야반도주라도 할 것 같군.”

“아버지-!”

“감사합니다, 백작님!”

“다만.”

밝은 목소리를 끊어내며 백작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발생한 손익은 철저하게 계산해서 남은 손해는 네가 직접 충당해야 한다. 헤이 너도, 절대 우리 가문에 해를 끼치거나 하는 일은 없게 해라. 기품과 위신은 귀족의 전부임을 명심하거라.”

“예.”

백작의 단호한 말에 세란이 뭐라 말하려는 듯 손을 움찔했지만, 헤이가 그의 손을 더 세게 쥐고는 대답한다.

남녀가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지위를 따라간다. 따라서 이제 그녀도 세란이 가문을 물려받으면 백작 부인의 칭호를 받게 되므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받아들인다.


한숨을 내쉬는 백작을 뒤로한 채 방으로 돌아온 둘은 소파에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도련님-”

“이제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이름으로 불러도 되잖아.”

“…….”

헤이가 얼굴을 붉힌 채, 갑작스레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속삭인 한마디.

“세란 씨, 왜 나 안 봐요.”

“…!”

순식간에 붉어지는 두 볼과 귀. 화들짝 놀라며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웃으며 입을 연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그로부터 수개월 뒤. 그 날 예상대로 두 영애들은 각 지역으로 신이 나서 편지를 보냈고, 급하게 열린 사교 파티에서는 모두가 오베르 가의 몰락. 그리고 세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의 단호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에 반한 두 영애는 그에 대한 칭찬을 입이 닳도록 퍼트렸고, 그 결과 사교계에서도 많은 신용과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었다.

뒤이어 사태를 파악한 가문들에게서 줄지어 도착하는 선물들을 마주한 백작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했고, 세란에게도 친하게 지내자는 편지들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 바람이 세어진 듯 나뭇잎 들이 그들의 정원으로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그 중 작은 잎이 헤이의 머리 위로 툭- 기대어 오자, 커다랗지만 얇은 손이 나뭇잎을 집어 바람에 날린다.

“앗-”

“나뭇잎이 떨어졌어.”

세란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시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둘 사이로 퍼지고, 마주보며 미소 짓는 모습에 다정함이 퍼져 나간다.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사랑해, 헤이.”

“저도 사랑해요. 세란 씨-”

그녀의 뒷말이 입술 속으로 먹혀버린다.

그림 같은 풍경의 정원, 그 속의 하이얀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너와 나. 당신과 나.




다정함의 한 조각을 주면

내 애정의 전부를 줄게.


감정에 체한 밤 中_식식



fin.

무단 복제, 캡쳐를 금합니다. 창작물의 모든 저작권은 저(@MMyogurt_)에게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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