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주니어 RPS 션규 <나선의 시간> 수록 단편 / SF AU / 80p / 전연령가 


‘…건 더 이상… 가치가 없어.’


이건 꿈이다. 아니, 규현은 정정했다. 이건 버그다.


‘이름이…… 사라질…’


어쩌면 오류, 어쩌면 에러. 다들 비슷한 이름의 실수.


‘그런가요.’


매번 같은 대화. 그 중 하나는 무척 익숙한 목소리다. 자신의 것이었던가, 혹은 자신이 닮은 누군가였던가.


‘하지만 나는 계속…… 부를… 거예요.’


공백의 간격이 지운 단어들과 목소리들. 매일이 똑같다. 사실은 제가 잠들 때마다. 정확히 말하면 잠드는 시늉을 할 때마다.


‘어째서?’


이 목소리는 누구였던가, 이것 또한 저만큼 익숙했었던.


‘왜냐면 우리는 계속…’


새까맣게 펼쳐진 우주 속에서 뒤섞이는 주파음을 뚫고 흘러나오는 목소리. 빛과 어둠이 엉키고 굉음이 뒤따른다. 이것은 버그다. 눈을 감으면 늘 겪는 오류. 자신은 평생 완전할 수 없다. 바다처럼 펼쳐지는 갖은 기억, 정확히는 데이터의 범람에 잠식된다. 새까맣게. 펑.


‘…의 이름을, 부를 테니까요.’


단단한 목소리는 떠올리는 순간과 함께 멀어진다.




규현은 눈을 떴다.

시원은 당연히 먼저 일어나고 없었다. 규현은 습관적으로 뒷목을 더듬어 만져 보았지만 역시 미리 일어난 시원이 충전 선을 뽑아둔 듯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거친 피부의 표면만이 지난밤의 흔적을 알리고 있었다. 연결 단자와 꼭 맞물리는 부분이 흉터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현은 그것을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다. 시원의 집은 거울이라곤 자취를 감춘 곳이라, 제 얼굴도 확인하는 일이 드물었다. 규현이야 자신의 얼굴을 보는 일에 감흥이 없는 것이 당연했지만 시원도 별 흥미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안 그러지 않나? 규현이 물었을 때 시원은 낮게 웃을 뿐,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네가 말해줘. 라고 규현의 손을 잡아끌어 제 얼굴을 만지게 할 뿐이다. 아마도 기원이 같을 피부가 감싼 단단한 뼈와 근육이 손가락 아래에서 느껴지면 규현은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것도 일종의… 버그겠지.


“일어났어?”


거의 같은 시간에, 규현이 빠르게 흐르는 생각을 정리할 즈음 시원은 방문을 열어 규현의 기상을 확인한다. 규현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 짧게 웃어 보인 시원이 밥 먹어, 하며 들어오더니 블라인드를 올린다. 요 며칠 날씨는 계속해서 어둡고 쌀쌀했다. 음울한 회색빛의 하늘을 잠깐 올려보던 시원이 아직 침대에 멍하게 앉아있는 규현을 본다.


“왜.”


규현은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아니야.”


시원은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바쁜 사람이었다. 별것 아닌 것으로 신경을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규현에 대해서 시원이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규현의 출처나 신원은 미상이었기 때문에 시원은 규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거라고도. 어딘가 아프거나 몸이 이상하면 반드시 말해. 몇 번이나 다짐할 것을 강요받았고 규현은 그러마고 약속했지만 애초에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작은 버그를 숨길 수 있을 정도의 의지는 갖고 있다. 이것이 규현을 불완전하게 하는 이유고, 동시에 시원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다. 규현은 시원으로부터 태어났다.


“날씨가 계속 안 좋네.”


시원이 뭔가 다시 묻기 전에 규현이 말을 가로챘다. 시원은 다시 시선을 잠깐 바깥으로 돌렸다. 수도의 어디에서도 보이는 높은 탑이 시원이 일하고 있는 곳. 그리고 그곳에서 이 도시의 날씨를 관리한다. 기온과 습도부터 모든 것까지도. 어떤 기준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지 시원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정부의 기밀사항이고 규현은 사실 그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날이 좀 맑아야 꽃 상태도 좀 좋아질 텐데.”


규현의 말에 시원이 슬쩍 건물 밖을 올려본다. 까만색의 드론이 느리게 날고 있었다. 눈썹을 들어 올리자 규현이 입을 잠그는 시늉을 하며 웃어 보인다. 알았어.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서 시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둘은 나란히 서서 우울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삭막하고 서늘한 얼굴의 도시를. 규현은 그것을 내려보는 시원의 옆얼굴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선을 느꼈을 시원은 규현을 돌아보는 대신 다시 블라인드를 내리며 늦겠다, 하며 몸을 돌렸다. 규현은 시원이 궁금한 자신을 확신할 수 없다. 정의내리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안 늦었어?”

“조금 늦어도 돼.”


접시 위의 샐러드를 뒤적거리자 시원이 다시 눈썹을 꿈틀한다. 다 먹어.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규현이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시원은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주었다. 규현의 몫까지도. 다른 안드로이드는 몰라도 너는 그것들과는 조금 다르니까. 규현은 자신의 몸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남들보다 느리게 뛰는 맥박과 낮은 체온을 알고 있었다. 규현은 샐러드를 덜면서 시원을 보았다. 신문을 넘기며 막 뉴스를 트는 시원도 입이 짧은 편이라, 뭘 많이 먹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무감정한 아나운서의 톤이 반짝 켜진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온다.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단체로 정부에 탄원서를 냈습니다. 해당 기업이 아닌 정부에 서류를 제출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주목할 만한 점이며, 노동자들은 정부의 완화된 안드로이드 생산 규제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규현은 고개를 돌려, 통유리로 된 창밖 멀리 서 있는 탑을 보았다. 바로 그 건물 앞에서 강력하게 뭔가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시원은 무표정하게 화면을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기술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안드로이드는 이제 인간과 크게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인 반면 능률이나 정확도는 훨씬 높다.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에도 많이 투입되고 있었고, 규제가 풀리면서 비용은 많이 내려갔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의 분노는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고, 그것은 규현의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어제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길을 걷다가 화풀이 대상으로 맞아 기능이 망가진 안드로이드의 기사가 떴다. 그것은 나름대로 규현에게 흥미로웠다. 사람이 아닌 안드로이드의 사고에 대한 기사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효율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나니까.”


규현의 속이라도 읽은 것처럼 시원이 가볍게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규현은 시원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이에 비해 정부에서 고위직을 차지한다고 했던가. 시원은 어떤 사안에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었다. 일이니까.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시원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탑으로 출근했고 또 집으로 퇴근했다. 그의 일정은 크게 바뀐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규현이 그와 함께 산 이후로는 항상.


“정부가 안드로이드에게 호의적이긴 한 거지.”

“아무래도.”

“그러면 사람들의 반발을 많이 사잖아.”

“어쩔 수 없지.”


시원은 시위하는 사람들을 덤덤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발전과 도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논하기에 안드로이드는 적합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 데 그만큼 효과적인 존재는 없었다. 인간과 비교해서도. 규현이 작게 웃는다.


“왜?”

“그냥. 그거에 비해서 난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네가 왜 아무것도 안 해.”


하고 있잖아. 시원의 대답에 규현은 다시 샐러드를 뒤적일 뿐, 규현은 자조하지 않는다. 규현의 기능이 거기까지 닿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안드로이드는 목적에 따라 생산되었고 그에 따라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시원의 목적에 의해 깨어난 것이다. 그 목적을 시원은 한 번도 말해준 적은 없으나 애초에 어길 생각도 없어 왔다.


“저거, 네가 말했던 약.”

“그러네.”


금세 주제를 옮겨간 뉴스에서는 이번 주부터 시판되는 약을 설명하고 있다. 도통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규현도 그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많은 논란이 있었고 시원은 종종 그 건으로 늦게 퇴근하기도 했다. 결국은 통과된 거구나. 시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저것도 반대하는 거야? 저건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거잖아. 좋은 것 아닌가.”


뉴스가 끝난 뒤에도 그 약에 관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정부 쪽에서 밀어붙인 건이다. 시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통이라는 게 단순히 신체적인 것만 말하는 게 아니니까.”


토마토를 조각내던 규현이 고개를 든다. 시원의 시선은 이제 뉴스에서 다시 신문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신체적인 게 아니면?”

“정신적인 고통도 포함하는 거지.”


규현을 눈을 깜빡였다. 한 면이 전부 통유리로 된 어두운 도시의 조명이 얼룩덜룩하게 흰 피부 위로 묻어난다. 가끔 규현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형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둘 다 생명이 없다는 점에서 규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규현은 그 경계에 서 있다.


“정신적인 고통?”

“그래.”


시원은 잠깐 머리를 짚었다가, 다시 그 손을 가슴 위로 올렸다. 여기랑 여기. 까만 눈동자에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시원이 새겨진다.


“그걸 어떻게… 없애는데?”

“없앨 수는 없어.”


하지만 약은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신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고 했는데. 규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시원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사실은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에 가깝지.”

“고통을?”

“감정을.”


규현의 한계는 가끔 시원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의미는 모두 알지만 이해는 다른 범위의 문제였다. 규현은 결국 포크를 내려놓으며 시원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음식을 먹어야만 살아가는 건 똑같지만 자신은 사람이 아니다. 시원에게 나눠 받은 삶을 가지고서도.


“잘 모르겠어.”

“몰라도 돼.”


규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시원이 보고 있는 신문의 뒷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몇 가지 작은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날씨에 관한 것, 그리고 드론의 경비가 좀 더 탄탄해질 거라는 기사, 그리고…


“박물관?”


시원이 그 말에 고개를 든다. 규현이 손가락을 뻗었다.


“박물관 열린대.”

“무슨… 아아.”


신문의 맨 뒷면을 덩달아 살핀 시원이 짧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것 아냐. 규현은 고개를 쭉 앞으로 내밀어 그 기사를 읽었다.


“이제는 사라진 유물을 전시할 거래.”

“그래.”


시대는 시간보다 빠르게 흐르고 있어, 남겨진 오래된 것들은 얼마 없었다. 그중 몇몇을 기록해두는 작은 박물관이 열린다는 기사였다.


“뭐가 전시되는데?”

“여러 가지.”


규현이 흥미를 보이는 얼굴을 하자 시원이 결국 설명을 덧붙였다.


“사라진 언어라던가, 예술 같은 것.”

“예술?”

“응.”

“예술이 뭔데?”


시원이 규현을 가만히 본다. 규현은 시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듯 시원은 많은 것의 정의를 가르쳐 주었다. 예술은 규현으로서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이제는 사멸한 것들의 전시에 나오게 된 것이니 들을 일이 없기는 했을 터. 그러나 시원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시원은 말없이 규현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규현은 시원을 바라보며 결론지었다. 나중에 혼자 찾아보든가 해야지.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라진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 태어난 규현으로서는 의미를 모를 것들. 사람들의 유물.


“하긴… 어차피 들어도 이해를 못 하겠지?”


시원은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규현은 시원의 표정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오늘 아침에만 두 번째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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