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cCmRmdO34E

*BGM_내 님의 얼굴_광해OST



연모(恋慕) - 네 번째 장.

W.수미




“물리거라.”

“마마..”

“생각이 없대도.”



벌써 수 일째 세손의 수라 거부로 김 상궁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타락죽을 올려도, 입맛이 돌까 싶어 수라간에 청해 만든 유자단자도 백현은 모두 돌려보냈다. 혹여 해종의 귀에라도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는 김 상궁의 마음도 모른 채, 세손의 시위 아닌 시위는 청운궁의 모든 궁인들을 마냥 애태웠다. 결국 물리라는 명을 거부한 채 엎드린 김 상궁이 간곡히 주청하였다. 전하께서 아시면 크게 혼이 나실테니 한술이라도 뜨시라고.



“야단이 무서울 나이는 지났어.”

“그 해가 비단 마마께만 돌아오는 줄 아시옵니까.”

“김 상궁.”

“마마께서 기력이 쇠하시면 청운궁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날아갑니다. 야단이 무서울 나이는 지나셨다 하셨지요. 그럼 제 사람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셔야지요.”



곁에 서 문을 지키던 나인들이 덜덜 떠는 와중에도 김 상궁은 남들이 들으면 방자하다 소리치고도 남을 말들을 세손과 두 눈 맞추어가며 아뢰었다. 제가 십여 년을 넘게 지키고자 한 세손이 마냥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강직하고 총명하던 두 눈은 나인이던 시절부터 뵈어왔던 선왕을 빼닮았다. 필시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강건하시옵소서.


선왕이 지키고 있던 시절부터 세손을 봐온, 모셔온 이들이라면 하나같이 아비인 해종 보다 선왕을 더욱 닮았다고 했다. 그러니 선왕조차 세손을 그리도 예뻐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겠지.



“..김 상궁은 이길 수가 없단 말이야.”

“참으로 잘 하셨사옵니다. 한 그릇 다 비우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김 상궁과 짧은 기싸움을 벌이던 백현이 앞에 놓인 반상의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입으로 죽이 한 숟가락씩 넘어갈 때마다 궁인들이 벌벌 떨며 참고 있던 숨을 그제서야 쉬기 시작했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김 상궁을 향해 웃어 보인 백현이 언제나처럼 경수의 입궁여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곧, 가례도감이 있을 것입니다. 도 가의 도련님께서는 당분간 출입이 어려울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명경전에 가야겠다. 채비하라 이르거라.”

“전하께선 집무하고 계실 시간입니다. 체통을 지키시지요.”

“가례도감이라니, 세자니 빈이니 다 생각 없다는데!”

“...마마.”



제 얼굴을 감싸며 답답함을 호소하는 백현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궁인들의 마음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눈과 귀가 있는 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세손의 세자 책봉식과 함께 서론의 뜻대로 좌의정의 손녀가 빈에 봉해질 것이라는 것을. 다만 숨죽이며 애써 모른 척 할 뿐. 




*




“무어라?”



들고 있던 상소를 내려놓은 해종이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선 좌의정을 바라보았다. 좌의정의 청으로 대신들을 모두 물린 터라 상선 이외의 그 누구도 듣는 이 하나 없었다. 허. 이마를 짚고 실소가 터져 나온다. 좌의정, 경이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드는 가. 그 한마디가 바로 나오지 못해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해종은 그리도 나약한 사람이었다.



“왜 놀라십니까. 저는 말미를 드렸사온데, 답이 늦어지니, 더는 기다릴 수 없지 뭡니까.”

“지금 나를 겁박하려 드는가.”

“겁박이라니요. 어찌 한 나라의 존엄하신 전하께 신하인 제가 감히.”

“그런 자가 세손을 두고 나와 거래를 하겠다 하는 것이야?”



높아진 언성에 고개를 똑바로 쳐 든 좌의정이 ‘상선, 자리를 물러주시지요.’ 하며 웃음 지었다. 전하를 앞에 두고 무슨 망언이냐는 듯 나서려 해보았으나 ‘상선, 물러나있으라.’ 해종의 한 마디에 명경전 내부엔 해종과 좌의정 단 둘 뿐이었다.



“영의정을 내치시지요.”

“무슨 명분으로 신하를 내친단 말이냐. 그는 선왕의 스승이네.”

“장차 세자가 되고, 훗날 전하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세손마마께서 너무도 편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의정의 아들 말입니다. 예동의 정이라기엔..”

“또래의 벗이니 가까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전하, 세손을 보는 저희 서론들의 시선이 마냥 좋지만은 않사옵니다. 벌써부터 당파를 편애하시오면.. 잊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좌의정의 뱀 같은 두 눈이 빛났다. 필시 누이와 모후를 잃게 되었던 그 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서서히 독극물에 중독 시켜 왕족을 시해했던, 배후가 서론인 것은 알았으나 더 이상 추궁할 수도 밝혀내지도 못한 채 쉬쉬하며 끝이 난 끔찍했던 지난 일들이 해종의 머리를 스쳤다. 좌의정이 제 아들 세손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주마마의 다과에 올리는 오미자 화채에 생각시 하나가 무언가를 넣었습니다.’

‘다과상을 살펴보아 주시옵소서.’

‘세자저하!’



누이의 다과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나인 하나가 끊임없이 찾아와 일러주어 알고 있었다. 허나 당시 세자였던 해종은 제가 나서서 막아서기엔 저 하나도 지키기가 벅찼다. 늘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아침 밤낮으로 올라오는 모든 수라에 독이 있을까 전전긍긍했다. 어린 나이에 맞아 여러 해 함께한 세자빈이 계속해 회임을 실패하는 것도 그들이 손을 쓰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라버니, 알고 계셨지요?’

‘원망하지 않습니다. 꼭 오래오래 아바마마 곁을 지켜주세요.’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저 살자고 입 다문 채 나약해 숨기만 한 오라비 원망 한번 하지 않고 꼭 살아 있으라 당부하며 제 소원은 그것뿐이란 말을 남긴 채 눈 감은 누이의 마지막 얼굴이 여즉 선했다. 아아, 나는 여태 아바마마의 곁이 아닌 뒤에 숨어 지킴을 받아 목숨을 부지했다. 누이야, 내 어찌하면 좋으니. 나의 사랑하는 자식마저 그들에게 목숨을 쥐게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내가 부덕한 탓이겠지.



“원하는 것을 줄 테니 세손은 건드리지 말라.”

“그리하지요.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면 말입니다.”



웃음을 지어보인 좌의정이 명경전을 나서자 급히 상선이 들어와 해종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용안이 걱정되어 궁인들을 시켜 따뜻한 찻물을 올리라 명한 상선이 해종 곁을 지켰다. 



“상선, 나는 왜 이리 나약한 왕인가.”



상선은 그저 해종의 외침에 묵묵히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해종의 한숨이 짙어진다. 좌의정이 지금은 제 목적에 눈멀어 그저 영의정 세력과 세손이 가까이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뿐이라지만 더 깊은 것을 알게 된다면 필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누가 무어래도 제 자식인데 그 속 모르랴. 예동의 정, 친한 벗 따위가 아니겠지. 어릴 적이야 또래가 없으니 외로워서라도 그 아이의 입출궁에 예민할 정도로 반응하는 것이라 넘겨짚었건만. 단지 그 뿐이라면 빈 또한 맞이해야 함이 당연한지고. 



“그 아이를 더 두고 볼 수가 없겠구나.”



세손에게 그 아이가 보통의 벗이 아니라면 더 이상 곁에 둘 수 없었다. 아니, 두어서는 아니된다. 세손의 큰 약점이 될 터였다.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상선, 날이 밝는 대로 세손의 세자 책봉식부터 길일을 알아보라.”

“예, 전하.”



만일 운명이라 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막을 것이다. 이생에선 아니 된다.

한참을 고뇌하며 침수조차 들지 않은 채 해종은 밤을 지새웠다. 아바마마, 소자의 부덕함을 용서치 마세요. 결단을 내릴 차례였다. 영의정을 내쳐야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 것이다.




*




“달이 참 밝지.”

“..마마? 어찌..”

“쉿. 몰래 나온 것이야. 여기 온 것을 들켰다간 너도 혼이 난다.”

“저도 혼이 날 짓을 왜 하시는 겝니까.”

“네가 오지 않으니 내가 온 것인데 기쁜 척이라도 좀 해주지 서운하게.”



사랑채의 대청마루 앞에 앉아 속도 없이 밝기만 한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제 곁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궁에 있어야 할 백현이 언제 담을 넘은 것인지 호위하는 자들도 없이 홀로 경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놀란 경수의 소리를 막고 쉬이- 속삭인 백현이 품안에 넣어 온 천을 내밀었다.



“또 무엇입니까.”

“유자단자.”

“누가 보면 제가 꼭 다과를 못 먹어 안달이 난 줄 알겠습니다.”

“내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 좋겠구나.”

“예?”

“그 잠깐이 뭐라고 네가 참 보고 싶었는데.”

“...농이 지나치십니다.”



무릎위에 놓아 둔 단자 하나를 집어 기어코 경수의 입 안으로 밀어 넣은 백현이 우물우물 씹는 모양새를 바라보다 만족한 듯 웃는다. 



“여태 내가 하는 말이 다 농으로 들렸던 것이야?”



반박하려 하였으나 입 안에 가득 찬 단자 덕에 씹느라 답도 하지 못하고 답답한 다리만 동동 굴렀다. 그런 경수의 손을 한번 꼭 잡았다 놓아 준 백현이 일어서서 제가 넘어 온 담 앞으로 향했다.



“..버..벌써 가십니까?”

“반가워하지도 않더니, 왜 간다니 아쉬운게야?”

“그..그것이.”

“너 오늘도 계속 마마라고만 불렀다 알고 있어?”



말을 마치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훌쩍 담을 넘은 백현에 경수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향하며 ‘백현아’ 이름을 외쳤다. 마당 흙 위로 유자단자 서너알이 구른다. ‘하하.’ 아직 가지 않은 듯 담 너머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가장 듣고 싶었다. 그거면 돼.”

“..곧..가례도감이..있을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런 일 없을 것이다. 맹세코.”

“왜 제게 맹세까지 하십니까? 순리대로 따르셔야 합니다.”

“경수야. 그만 모른 척 해.”

일순 말이 끊겼다.

“나에게 너 뿐이다. 너 밖에 없어. 경수야.”

“마마.”

“곁에 두고 싶은 사람도 오직 너 하나뿐이야.”



둥근 뺨에 분홍 꽃물이 든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더 이상 좁히지 못하는 거리가, 나눌 수 없는 온기가 참으로 애달팠다. 달은 이리도 밝은데 어찌하여 감은 두 눈앞은 캄캄하기만 한지. 백현은 주체 못할 제 가슴 위로 손을 얹었고, 경수는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덜컥 겁이 났으나 이것이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만 들어가. 고뿔에 들면 너만 고생해.”

“제가 마마보다 건강합니다.”

“그런 주제에 나보다 병치레가 잦단 말이야?”

“그..그것과 체질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예?”

“경수야. 네가 오지 못하면 이제 내가 네게 오마.”



말을 마치곤 정말 가버린 것인지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담 위로 손바닥을 갖다 댄 경수가 조용히 읊조렸다. 



“수라 거르지 마시고 건강하셔야 합니다.”



닿지 못할 한 마디가 뱉는 숨에 흩어졌다.





잠기고 싶었다.

수미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