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교수님’보다 ‘선생님’을 즐겨 썼다. 교수가 직책이니 하는 얘기보다도 어쨌든 선생으로서 존경 의사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원에 와서는 모두가 선생님이 되니, 왠지 모르게 수업을 이끌어나가는 교수님을 구분해야 할 것 같아서 도리어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어려워져버렸다. 권위는 호칭보다 포스(?)에서 오는 것이므로 아무리 교수님을 선생님이라 불러도, 동료 원우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쫄아버린 것이다. 이미 나 자신이 대학원에서 선생이라 불리는 것도 굉장히 기분이 이상한데 그것은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면서 선생님하고 불리는 것과 또 다른 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선생으로서, 동료로서 충분한 역량을 보여달라는 압박을 은연중에 받는달까나, 인용된 논자를 지칭할 때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다 보니 세상이 다 선생들로 가득찬 느낌을 받는다. 어디서든 배움을 구해야겠지만 그런 선생의 범람은 때로 논쟁 중에 상대를 선생으로 부르는 것을 가볍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도 하는 듯하다.

학부 때나 대학원 때나 이 제도보다 제도에 속한 사람들이 뭔가를 만든다는 생각을 한다. 대부분은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거나 큰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 거기서 성실성으로 승부를 보는 사람들이 몇몇 있을 뿐이 아닌가 싶다. 학부 사 년간 배운 것도 있지만 실로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는데 애초에 나는 시 쓰기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거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원에 온 이상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매일 시달리게 되었다. 어찌저찌 최소한의 규격에만 맞춰서 학위를 따내는 것은 스스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차피 지금 시인이 당장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나는 게임을 할 때도 버스 타는 일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퀄리티 게임, 그걸 내가 원한다.

그러는 날에도 파멸적인 날을 종종 예감한다. 게으르게 산 날들이 언젠가는 해일이 되어 돌아오겠지. 그간 농땡이 농땡이 농땡이 생각을 해 왔다. S님께서는 농땡이가 되기 위해 고민을 하는 것부터 농땡이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적당히 재능’으로 많은 것을 때워 왔다. 운이 나를 꽤 많이 받쳐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항상 나는 평범한 수준의 운을 갖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평범이라는 것은 불운과 행운 두 개를 생각할 때 그 의미가 싶어지는 법이다. 집에 책을 잔뜩 늘어놓고 제목만 보며 배부름을 느끼는 일은 학부생 때 졸업해야 했는데 이 무슨 일일까. 이번 추석까지는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책을 조금 읽을 수 있었으면 한다. 역량을 가진 선생이 되자, 어찌되었든 선생이라 불리기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매직 트랙패드2를 구매했다. 아이패드와 함께 써 보니 14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만큼은 아니지만 10만 원 정도였다면 적정가였다고 생각할 만큼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차선책, 중고, 대안 같은 물건을 사용해와서 그런지 대기업 신품이 여전히 낯설다. 이 단단한 마감은 내 삶 역시 그런 단단한 마감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는 어떤 계층적인 감각을 제공한다. 예컨대 ‘토마토’라는 중국 OEM제품 MP3P를 만들던 회사라면 적당히 몇 기능은 아쉬워해야 할 텐데, 애플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할 땐 그 아쉬움이 약간의 분노로 변하게 된다는 그런 차이랄까. 매직 트랙패드는 사실 사지 말까, 중고로 살까 하다가 중고 제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안 사면 아이패드로는 작업을 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샀다. 확실히 화면에 손을 대지 않고 작업하니 훨씬 몰입도가 높아지는 느낌은 든다. 나중에 후기를 작성해볼까 하는 생각도. 소비로 유예한 삶, 이것은 파멸이 아닌가?

던전 https://www.d5nz5n.com/ 에서 시를 연재합니다. 비평에는 관심만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는 시를 쓰다 발생한 수많은 문맥 속 여담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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