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세탁소 6부


외전 하

 

 



 

"최설아!!!"




 

 

 

 

 

 

쾅! 




교실문이 열리자마자,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다 수민을 쳐다보았다. 쳐다보든지 말든지, 오로지 설아만을 위해 레이더를 가동시킨 수민은 오랜만에 전의를 불태우며 주먹을 하얗게 쥐었다. 구겨진 교복, 평소보다 조금 초췌한 제 모습따윈 신경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최설아 한 명만 잡아내면 되었다. 씩씩 거리며 설아와 제가 앉는 자리로 고개를 돌리는데 설아는 제 살기가 어린 등장에도 저를 보며 활짝 웃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빠르게 깜빡깜빡거리며, 저에게 입을 뻥긋 거리며 뭐라고 다급하게 외친다.





 

 

 

 

 

뭐래, 저게...

 

 




사과해봤자 늦었어...

 

 

 

 

 

 

 




"너이씨...!!"


 

 

"수민아! 화장실가자!"

 

 


"어어?"

 

 

 

 

 

 

 




수민이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오는게 무색하게 설아는 아연실색이 되어 쪼르르 저를 향해 날아오더니 이내 수민을 무슨 럭비공마냥 가슴팍에 끌어안고는 강제로 교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안그래도 정신없는 아침에, 빼빼로에, 미친세탁소에, 지각에 대한 걱정에 허둥거리며 유림의 차를 타고 왔지만, 최설아의 작품때문에 차 안에서도 민망해서 애꿎게 창밖만 바라보며 손톱을 깨물던 수민이었다.

 

 

 

 

 




더군다나 평소처럼 완벽하게 꾸민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초췌하기 짝이 없는 제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두 배로 상한 수민은 이 모든 상황이 설아때문인 것처럼 느껴져 야속하기 그지 없었다. 유림이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수민은 스프링에 튕겨나가는 사람처럼 조수석문을 열고(사실 박차고 나간다는 표현이 맞았다) 교실으로 뛰어가버렸다. 유림이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이내 풉,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건 보지도 못한 채. 



 

 

 

 

 

 

"야, 이거 안놔!? 넌 죽었어...!"


 

 

"그래그래... 알겠어 정수민, 일단 화장실부터 가자고."

 

 


"아 이거 놓으라니깐!"

 

 

 


"잠깐, 잠깐만..."


"이거...놔!"

 


 

 

결국 수민은 복도 한가운데서 설아를 뿌리치는데 성공했다. 설아의 품에 끼인 듯 꽁꽁 끌어안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손으로 아무렇게나 쓸어넘기며 숨을 골랐다. 등교시간이라 계단을 올라오던 학생들이 모두 설아와 수민을 쳐다보았다.

 

 

 

 

 

 





"야! 빼빼로가 그게 뭐야!?"

 

 

"왜?"

 

 


"왜애애? 누가 그렇게 쓰래!!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미친세탁소가 뭐야!?"

 

 


"어? 네가 그렇게 하라며?"

 

 


"내가? 아, 내가 언제!?"

 

 

"와, 어이없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라면서 설아는 "친구 부탁 들어줬더니 원수로 갚네, 정수민 완전 실망 ..."이라고 말했다. 거기다 수민보다 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너 때문에 내가 쓴 시간이 얼만데! 어제 늦게 들어가서 엄마한테 진짜 다리몽둥이 부서질 뻔 했거든?"이라고 쏘아버린다.




결정적으로 "열심히 만들어주는데 옆에서 잠만 잘 자더니..."라고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설아의 쏘아붙임에 살기가 등등하던 수민의 표정은 점점 뭔가 실수를 해버린 강아지의 표정으로 바뀌었는데, 가만 듣고보니 설아의 그 말엔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잠결에 끊임없이 부스럭 거리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설아의 움직임들을 떠올려보니 제법 늦은 시간까지 한 모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부탁을 한 당사자인 저는 쿨쿨 달콤한 잠에 들었으니.




....어...그런가...





 

 

 

 

 

 

"그리고! 내가 너한테 물었잖아!"

 

 


"뭘!!"

 

 


"미친세탁소 사랑하냐고! 그랬더니 네가 자면서도 헤벌레웃으면서-"

 

 


"이게 미쳤나!"

 

 


"네가...으읍!!"

 

 

 

 

 

 

 


설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민은 모든 운동신경과 반사신경을 동원해 설아의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살폈다.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식은땀이 흐르는것 같았다. 헐, 최설아, 이게 미친게 분명해.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설아는 그때서야 자기도 주위를 의식하며 수민의 손을 떼며 생글생글 다시 예쁘장한 그 얼굴로 돌아갔다. 아, 정말 최설아... 이건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너...너...나중에 얘기해. 내가 너 때문에 오늘 얼마나 쪽팔렸는 줄 알아?"


 

 

"야, 정수민. 너 인간적으로 그런 얼굴로 쪽팔린다고 하진 말자."


 

 

"...뭐?"

 

 


"너 나한테 이러면 안되는거 아냐? 쪽팔렸다고? 내가 보기엔 니가 나 상이라도 줘야할 거 같은데?"

 

 


"뭐?! 내가 오늘 너 때문에 얼마나..."

 

 


"야!"

 

 

 

 

 

 





설아가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채 "하!"하고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은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수민은 그런 설아의 모습에 이게 아주 간땡이가 부은게 분명해, 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최설아는 하루아침에 왜 이렇게 싹퉁바가지가 없어졌을까. 물론 어젯밤 저를 위해 정성을 다해 빼빼로를 만들어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미친세탁소가 뭐냔 말이야. 거기다 오늘 운전하고 오는 내내 유림이 전방을 바라보며,

 

 

 

 

 

 

 



 

"우리 수민이가 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다니... 난 이제 여한이 없어."



 

 

라고 하지 않나,


 

 

 

 

 

 

 

 


 

"근데 미친세탁소라는 말... 종종 듣긴 했는데 나 사실 자세히 몰라. 그건 무슨 뜻이야 응?"




 

 

라고 하지 않나,



 

 

 

 

 

 

 

 

 

"아무리 그렇대도 선생님보고 미친세탁소는 좀 그렇네."




 

 

라고 해서 수민은 마음에도 없는,

 

 

 

 

 



 

"아 진짜, 미! 미! 아름다울 미! 예쁘다는 뜻이에요! 알겠어요!?"





 

 

 

 

 

 

라고 말해서 유림을 두 번 기쁘게 했고, 덕분에 오늘 하루종일 "담임선생님께 미친세탁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A4용지 가득 적어오라는 명령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설아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별명은 내가 지은게 아니란 말이야. 아 진짜 일이 뭐이렇게 꼬여. 수민은 빼빼로데이가 원망스럽지만, 그보다 먼저 설아에게 유림을 향한 제 마음을 너무 쉽게 털어놨다는 게 가장 일이 꼬인 주범인것 같았다.




 

 

 

 

 

거기다... 이제 두고두고 설아에게 약점을 잡혀버린 꼴이 아닌가. 최설아 성격으로 장담하건대, 분명 수민이 필요할 때마다 미친세탁소를 사랑하니 어쩌니를 운운하면서 저를 잡아끌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유림이 그 빼빼로의 문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저보다 한참 어린 햇병아리 제자의 순진한 순정쯤으로 치부한다는게 피부로 느껴져서 오늘 이리저리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긴 수민이었다.




 

 

 

 

 

 

"최설아...일단 오늘 일은...없었던걸로 해. 다 망했으니까."

 

 


"망하긴 개뿔, 키스마크나 지우시지?"

 

 


"어?"

 

 


"아주 도장을 콱 찍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려고 작정을 했어?"

 

 

 

 

 

 




쯧쯧, 하며 설아가 다시금 한숨을 푸욱 쉬고는 얼빠진 표정의 수민을 질질 끌고 화장실에 밀어넣었다. 아침에 워낙 정신이 없는데다가, 유림의 독촉까지 더해져 어제 맸던 가방만 그대로 들고 유림에게 질질끌려 나오게 된 수민은 오늘 처음으로 보는 제 얼굴이 비췬 거울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제 뺨에 찍힌 립스틱 자국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뭐야?!?!?!?!?!??!?!?

 

 

 

 

 

 



제 뺨에 찍힌 선명한 입술자국에 수민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가 저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설아의 눈을 보고는 귀 끝까지 얼굴을 붉혀버렸다. 수민의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던 설아는 놀이터에서 봤던 그 때 제 담임의 모습과, 지금 수민의 뺨에 남아있는 립스틱자국을 보며, 새삼 유림의 수민을 향한 애정에 소름이 돋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


"한 턱 쏴, 정수민."


".....이...이게..."





 

 

 

 

 

 

 

 

참 쌤도...

 

 




이런 둔팅이를 좋아하시다니... 안됐어요, 정말.

 

 

 

 

 

 

 

 



설아는 쯧쯧, 고개를 흔들었다. 

 

 

 

 

 

 

 

 

 

 

 

 

 

 

 

 

 

 

 

 

 

 

 

 




















-

 

 

 

 

 

 

 

 

 

 

 

 

 

 

 


 

 

"왜 안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뭐가?"

 

 


"아... 그....그거...그..."

 

 



 

 

 

 

수민은 말없이 눈을 굴렸다. 뻔뻔하기 짝이없는 유림의 표정에 더이상 묻질 못하고, "아 몰라요!"하고 조수석에 몸을 쏙 들여버린다. 유림은 피식 웃으며 이내 운전석에 올랐다. 나올땐 책가방 하나만 달랑 가지고 왔던 수민은 이내 주섬주섬 짐들을 불편하게 끌어안으며 유림의 눈치를 한 번, 전방을 한 번 바라보다가 이내 안전벨트를 매려고 몸을 틀었다.




 

 

 

 

 

 

 

"빼빼로 많이 받았네?"

 

 


"그냥 동아리 후배들이랑... 암튼, 별로 없어요."

 

 


"이리 줘 봐."

 

 


"왜요?"

 

 


"열어 봐."

 

 

 

 

 

 




엥? 갑자기 제 빼빼로 포장을 사정없이 뜯으며 능숙하게 이리저리 수민의 짐들 속 아기자기한 포장상자나 종이가방들을 살피던 유림은 귀신같이 쪽지며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과 파스텔톤의 편지봉투들을 골라내어 제 핸드백속에 넣어버린다. 그 모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수민이 이내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 편지를 왜..."

 

 


"고백성 편지니까 안돼."

 

 


"네? 아니거든요? 그거 그냥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거예요."


"그렇게 사랑이 싹트는거야."


"....하."




뭐라는 거야, 이 여자...



그리고 그렇게 치면, 자기는?!




"쌔...쌤은요? 쌤것도 뜯어보면 그런거 많을 텐데!" 

 

 

"내껀 존경의 의미로 주는 거잖아."


 

 

"...뭐라구요?..."




 

 

 

 

 

 

아 진짜 황당해... 무슨 저런 말도 안되는 논리가 있어. 누가 존경의 의미로 저렇게 뒷자석도 모자라 트렁크에 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빼빼로 바구니들을 주냔 말이야. 그리고 보아하니, 남자 선생들이 보낸 것들도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뭐야 진짜... 




존경- 은 개뿔. 맨날 자기 수업 때마다 남자애들이 입술이 어쩌니, 몸매가 어쩌니 하는 말들을 음흉하게 해대는 걸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안그래도 하교를 위해 주차장으로 오자마자 유림의 뒤로 남자애들이 빼빼로 짐들을 들어주며 헤벌레 하는 꼴이 짜증났던 수민이었다. 뒷자석도 모자라, 트렁크까지 열어야하는 빼빼로들... 저게 존경이면, 내 손모가지를 잘라도 좋아요,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저건 사심이 가득한 선물을 넘어서 욕망이 가득한 선물들이구만.




 

 

 

 

 

 

"반성문은 썼어?"


 

 

"....아 진짜..."

 

 

 

 

 

 




안썼어요, 라고 하기엔 아직까진 미친세탁소가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으므로 수민은 툴툴거리며 가방속에서 구깃구깃하고 너덜너덜한 A4용지를 꺼내 유림에게 보여줬다. 담임선생님께 미친세탁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라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한 종이였다. 유림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 종이를 한참 살펴본 다음, 그것도 핸드백에 넣으며 수민을 돌아본다.




 

 

 

 

 

 

"이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렴, 수민아?"


 

 

"......"

 

 


"대답이 없네? 우리 수민이가 또..."

 

 

 

 

 

 




헐. 수민은 부러 머리를 귀뒤로 슬어넘기며 은근히 손목에 감긴 베르사체 금장시계를 보여주는 유림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저 놈의 시계... 도대체 미친세탁소에게 빼빼로를 보낸 인간들은 이런 모습을 알기나 할까? 이렇게 베베꼬이고 뻔뻔한 여자라는 걸 알면... 뻔뻔한... 헐...맞아... 당신의 뻔뻔함 이야말로...




아...!




잊을 뻔 했어...!




 

 

 

 

 

"어느 선.생.님이 학생 볼에...그...뽀...뽀뽀를 해요?!"

 

 

 

 

 

 



뻔뻔함, 이라는 단어에 수민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키스마크의 일을 추궁하기 위해 고개를 홱- 돌리며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말한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확인받아야 했다. 도대체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 여잔 정말...




 

 

 

 

 

 

"언제 알았어?"


 

 

"네? 하... 설아가 알려줬다구요. 아침에 들어가자마자... 아 진짜..."

 

 


"에이, 아쉽다. 좀 더 늦게 알아챘어야 하는데."

 

 


"하...뭐라구요?"

 

 

 

 

 

 




입가에 미소를 만연히 띄운 채 시동을 거는 유림이었다. 수민은 수민대로 오늘따라 이 여자가 진짜 왜 이러나 싶어 유림의 옆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유림은 전방만 주시한채 운전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또 민망해질까봐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수민이었지만 이내 하루종일 내내 담아두었던 물음표가 제 가슴을 간질거리자 어쩔 수 없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유림을 향해 말했다.




 

 

 

 

 

 

"...진짜 나한테 뽀뽀한거예요?"

 

 


"응."

 

 


"...왜요?"

 

 


"왜요?"

 

 


"아...그, 그러니까..."


"뽀뽀를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


"네?"


"사랑하니까 하지." 




 

홱- 다시금 창밖을 향했던 수민의 고개가 유림을 향한다. 수민의 동그란 눈에 가득한 물음표. 그러나 유림은 그럼에도 짖궂게 전방만 주시한채 얄궂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정적이었다. 수민은 제가 계속 쳐다봐도 저를 한번 쳐다보지도 않은채 말을 잇지 않는 유림이 야속했지만 이내 그냥 눈을 내리깔았다. 




헐. 가슴이...미친듯이 뛰어...어떡해...으으 미쳤나봐 정수민, 정신차려. 귓바퀴를 웅웅 울리는 심장소리. 




 

 

 

 

 

 

"...쌤은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세상에... 진짜...




달아오른 귓바퀴의 열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초겨울인데 어째 더운 느낌까지 들었다.




 

 

 

 

 

 

아 진짜 돌겠어, 어떡해. 이 여자 또 장난치는거 아냐? 



애꿎게 제 손을 쪼물딱거리며 수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야."

 

 

 

 

 

 




유림의 말이 마치자 마자 수민의 동네가 보였다. 길게만 느껴지던 등하굣길이 오늘은 왜 이렇게 짧게 느껴질까. 수민은 유림의 말에 뭐라 말을 더 붙여야 할지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는데 결국 오늘도 차에서 내려야 했다. 가방을 매고 빼빼로들을 품에 안은 채 수민이 마지못해 조수석에서 내려 유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그런데, 갑자기 고요해지는 느낌에 수민이 언뜻 돌아보니 유림의 차가 시동이 꺼져있는게 아닌가. 게다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려 제 옆에 나란히 선 채 수민의 짐까지 들어주는 유림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요?"하고 묻는 수민에게 유림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설마 우리집 간다는거?




 

 

 

 

 

 

"어서 문 열어."


"아, 네, 네."

 

 

 

 

 




현관문을 열자마자 엉망이 된 거실이 수민과 유림을 맞았다. 갑자기 또 민망함이 올라오는 수민이었다. 이놈의 빼빼로 때문에 되는게 하나도 없어. 유림의 눈치를 보던 수민은 후닥닥 거실로 들어가 대충 집히는대로 식탁에 올려다 놓으며 정리를 하는 건지, 그냥 밀어넣는 건지 알 수 없는 짓을 했다.




 

 

 

 

 

"청소부터 해야겠다 얘."

 

 


"나중에 제가 하면 돼요."

 

 


"근데 빼빼로 네가 만들었어?"

 

 


"네? 아... 그, 그게...어...그러니까...좀 도움을 받아서..."

 

 


"맛있었어.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제일."

 

 


"...어 진짜요?"


"응. 나 원래 과자 별로 안 좋아해. 그런데 네껀 진짜 맛있게 먹었어."





아, 최설아는 정말 좋은 친구였습니다. 




수민은 내일 설아를 보면 오늘 부렸던 짜증을 사과하고 설아에게 무한한 우정과 신뢰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새 유림은 재킷을 벗고 집을 이것저것 청소하기 시작했다. 아, 또 시작이야. 저 여자는 우리 집에 오면 제 집인양 청소를 해. 



"청소기 돌려. 분리수거는 내가 할테니까." 



게다가, 명령하는거 보라지. 마음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수민은 교복블라우스의 소매까지 야무지게 접어 올려 쭈구리고 앉아 이것저것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둘은 말 없이 청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을 얼마나 크게 벌려놓은 건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유림은 유림대로 무언가에 집중하면 끝을 보는 성격으로, 또 수민은 유림과 함께 있는 상황 자체가 민망해 부러 더 열심히 청소를 하다보니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정리가 끝났다.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며 유림은 쇼파에 몸을 기댄 채 청소에 지친듯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수민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치다 이내 수민의 옆에 앉았다.




 

 

 

 

 

"아, 나도 손 씻어야 겠..."

 

 


"앉아."

 

 


"으앗!"

 

 

 

 

 

 




유림이 제 옆에 앉자마자 민망해 자리를 피하려던 수민은 이내 제 팔을 끌어 앉혀버리는 유림때문에 저도 모르게 유림의 딱 바로 옆에 앉게 되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괜스레 민망해 텔레비전이라도 틀려고 눈을 굴리며 리모컨을 찾는데 갑자기 제 어깨에 스윽 기대오는 유림의 머리에 수민이 놀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




어어...어...?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인거야...

 

 

 

 

 

 




"아, 피곤하다."




끈적하게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제 귀 바로 아래에서 속삭이듯 들리자 수민은 이제 허리 아래가 찌르르 해져오는 긴장증세까지 느끼고 있었다.



  

"오늘 쌤 자고갈까?"


 

 

".....네에?"





 

 

 

 

 

 

......허얼. 




방금 내 옆의 미친세탁소가 한 말을 제대로 들은게 맞는 걸까. 가끔씩 수민의 집에 늦은 밤까지 있게 되어도 결코 자고가진 않았던 미친세탁소였다. 유림은 말하지 않았지만 수민은 느낄 수 있었다. 사제지간의 벽이라는거. 아무리 가까워져도 결코 그 벽을 넘지는 않겠다는 유림의 의지가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 제 옆의 미친세탁소가.... 




말투라도 담담하면 몰라, 제 어깨에 기대듯 하고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고간단다. 헐... 뭐야 목소리 깔지말란 말이에요, 하고 말하려다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경직된 제 목께를 의식해 대답은 못하고 입술만 앙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수민아."


 

 

"왜, 왜요?"


 

 

"너 왜 땀 흘려? 덥니?"

 

 


"아니요! 아! 나 씻어야겠네! 아하하! 옷도 갈아입어야겠네!"

 

 

 

 

 

 




어색하게 로보트처럼 뻣뻣하게 일어나는 수민이었다. 제 어깨에 살짝 기댔던 유림을 의식해 슬쩍 어깨를 비틀며 눈을 땡글땡글 굴리는 걸 잊지 않은 채. 유림은 쫄쫄쫄 욕실로 뛰어가는 수민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죽인 채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양...이...

 




.....한 마리...

 




....두우마리...

 




....세에마리...

 




....양이...

 




....푹신푹신하다...

 




...양은 푹신...푹신...

 




...두마리다...두마리야...

 




...양은...C컵인게 분명해. D컵인가...아...으아...돌겠어....

 




...아...미치겠어....아...어떡해...

 




으아아....잠을 못자겠어!!!

 

 

 

 

 

 




빼빼로데이를 만든 최초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수민은 그 사람을 때려주고 싶기도 했고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제가 샤워를 하고 민망하게 욕실 문을 열고 빼꼼히 거실을 들여다보자 이미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한쪽으로 얹어놓고 눈을 감고 있는 유림이 보였다. 그 치렁치렁하고 잘 꾸며진 머리카락들이 유림의 오똑하게 빠진 콧날에 흐트러져 조금 묘한 느낌을 주었다.




 

 

 

 

 

헐...진짜 미친세탁소가 자고있어. 




그리고 보니 미친세탁소가 잠든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수민은 슬쩍 유림에 가까이 다가가 유림이 잠든 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제 머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 유림의 잠든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




 

 

 

 

 

 

.....아 진짜....



 

 

 

 

 

 

"...예뻐..."


 

 

 

 

 

 


 

진짜진짜진짜 예쁘다. 이 여자 왜 이렇게 예쁜거지!?




 

 

 

 

 

 

아흐, 수민이 쇼파 밑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예쁘다... 미친세탁소... 잠든 것까지 예쁘다... 




오늘 하루종일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갑자기 잠든 유림의 얼굴을 보니 한 순간에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제 마음따윈 모르는지 우아하게 자고계신 미친세탁소는 오늘도 역시나 명대사를 남겨주시고 나몰라라 이렇게 제 앞에서 편안한 잠을 취하고 계신다. 




- 뽀뽀를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 




- 사랑하니까 하지.




...라니.




그런말을 하고도 잠이 와요? 




네? 




이렇게 잠을 잘 수가 있냐구...




 

 

 

 

 

어른들에겐 그게 그렇게 쉬운 말일까. 사랑하니까라니... 난 그런 말... 얼마나 용기를 짜내고 짜내야 할 수 있는 말인지 알기나 하냐구요... 




 

 

 

 

 

고요하니 정적이 돌자 오만가지 생각이 수민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처음 유림을 만났을 때부터, 어젯밤 설아의 말까지.




 

 

 

 

 

"야, 근데 너랑 쌤이랑 몇 살 차이야?"라던 그 말. 알아, 그런 거 너무 잘 알아. 저를 본격적으로 갈구기 시작할 때부터 손가락을 꼽으며 유림과 제 나이의 차이를 헤아려보았던 수민이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씁쓸한 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어른'인 유림과, 아직 교복도 벗지 못한 제 모습 사이의 괴리감. 그건 숫자의 차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유림은 제 '담임선생님'이었다. 이 관계에 있어 언제고 아둥바둥 마음이 달아오르는 쪽이 자신인 건 분명했다. 분명, 분명 유림에게 제 모습은




그저 한낱 어리고 까부는 애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러겠지. 그러고도 남을거야.





 

 

 

 

 

어려도 돼요? 나 애같지 않아요? 난 아직 쌤같은 어른이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당신은 이미 너무 빛이 나서... 그래서 불안하단 말이에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좀 마세요. 가뜩이나 나이차이 많아서 짜증나는데 확인사살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구요... 미친세탁소 내가 지은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게 진작에 작작 좀 괴롭히셨어야죠."




근데 예뻐, 당신 너무 예뻐서...정말 美친세탁소 맞아...응...맞는것 같아.




"......"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수민은 잠든 유림의 면전에 대고 퍼붓는 것도 우스울것 같아 그냥 한숨만 푹푹 쉬었다. 결정적으로 아까 자고간다는 유림의 말에 수민은 괜스레 가슴이 떨려 어쩔 줄을 몰랐다. 아까 욕실에 들어설때부터 심장이 떨렸다. 거울속의 저를 보니 꼴이 말이 아닌 것 처럼 보였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수민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더 오래 욕실에 머물렀다. 한 번 더 거울을 통해 제 얼굴, 제 몸을 꼼꼼히 확인하고 이미 사놓은 바디워시의 향을 다시금 맡아보고, 욕실에서 나서는 그 순간이 민망해 한참동안 문 손잡이를 돌리지 못해 우물쭈물했었다.




 

 

 

 

 

그런데 샤워 후의 나른한 기운만큼이나 김빠지는 상황이어서 황당하긴 했지만. 제 설레는 마음은 알지도 모른 채 유림은 잠이 들어있었으니까.

 

 

 

 

 

 



 

"쌤...일어나요. 침대에서 주무세요..."


 

 

"응......"




침대에서 편히 누워 주무세요.




피곤한 기운이 서려있는 유림의 막 잠에서 깬 얼굴은 새삼 너무나 해사해 보인다. 분명 피곤하고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평소에 학교에서 보던 그 당당하고 화려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상냥한 얼굴색과 저를 보며 연신 눈웃음을 담은 눈매로 시선을 맞춰주는 게 아마 그 이유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 옷 좀 줘."


"...아, 네." 




 

 

 

 

 

진짜 자고 가려나보다. 설마설마 했던 말이 기정사실화되자 수민은 정말 긴장해버렸다. 수민은 살면서 누군가와 함께 자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했을 땐 누구와도 함께 자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것도 미친세탁소와 함께 잠을 자게 되다니... 헐... 이게 진짜 뭔일이야.




 

 

 

 

 

유림은 몸을 일으켜 머리를 묶어 올리고는 수민이 건넨 티셔츠와 트레이닝 팬츠를 보더니 싱긋 웃고는 핸드백에서 휴대용칫솔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수민은 저도 모르게 뺨이 붉어져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저...저건 샤워기 물이 떨어지는 소리일 뿐이다.




흠흠, 괜스레 마른기침을 하며 수민은 다시금 두 무릎을 끌어안고는 그 위로 가만히 턱을 괴었다.




수, 수건은 있었나? 아 있을거야. 알아서 뒤져보겠지.




속옷은... 안 줘도...




아, 무슨 생각하는거야!




자꾸만 샤워를 하는 유림에게 신경을 쓰게 되는 수민이었다. 손바닥으로 두 뺨을 꾹꾹 누르며 미쳤어, 미쳤어를 외치던 수민은 이내 쇼파에서 슬쩍 침대쪽을 바라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가만... 난 어디서 자는거야? 

 

 

 

 

 




어...쇼파? 쇼파에서 자야하나?

 

 

 

 

 




아...그러기도 웃긴데... 침대 넓으니까...

 

 

 

 

 




....어... 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어떻게든...


















-된 결과가 바로 이렇게 되었다.






.....양...이........한 마리.......두우마리.......세에마리......양이.......푹신푹신하다......양은 푹신...푹신......두마리다...두마리야......C컵에 두마리....아...으아...돌겠어.......아...미치겠어....아...어떡해...으아아....잠을 못자겠어, 가 된 것이었다.





 

 

 

 

 

유림은 드라이기를 사용하는지 한참 머리를 말리고는 욕실에서 나와 수민의 티셔츠가 유독 가슴이 낀다며 피식 웃더니(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수민이었다. 저도 작은 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 티셔츠가 유독 유림의 가슴부분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걸 보고 기가 죽어버려 결국 수긍해버린 수민이었다), 이내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가져와 수민을 앉혀놓고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했다. 그 때문에 수민은 또 어색하게 유림에게 붙어버렸다.





 

 

 

 

 

거기까진 좋았다. 제 머리를 살살 만져주며 다정하게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이 수민은 은근히 좋았다. 게다가 유림이 수민의 머리를 말려주는 게 왠지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같이 부드러워서 수민은 저도 모르게 얌전한 고양이처럼 가만히 있게 되었다. 한참 기분이 좋아 가만히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데 갑자기,




 

 

 

 

 

 

"자 이제 다- 끝났지? 자자."

 

 

 

 

 

 


라고 하면서 수민의 침대가 제 침대인양 자연스럽게 쓰러져 이불까지 덮어버리는 유림때문에 수민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장유유서라고 했어. 웃어른을 공경해야지.

 

 

 

 

 

 





수민은 제 자리는 쇼파구나, 싶어서 어색하게 여름이불이라도 꺼내와야겠다고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제 뒤에서 꽂히는 의아한 목소리에 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어딜 가? 이거 네 침대야."

 

 


"....같이 자자고요?"

 

 


"그럼?"

 

 


"......"

 

 


"왜? 부끄러워?"

 

 


"아니거든요!?"

 

 


"그럼 이리 와."

 

 

 

 

 

 





라고 하면서 하나뿐인 베개는 자신이 차지한 채, 한쪽 팔을 쫙 피고는 그 아래를 팡팡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 설마 저거... 팔베개...해주겠다는 거?! 

 

 

 

 

 




아 진짜 저 여자가!!

 

 

 

 

 




...는 무슨. 유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쑥쓰럽게 눈을 땡글땡글 굴리다가 이내 꼬물꼬물 유림의 옆으로 기어들어가는 수민이었다. 그리고는 차마 유림의 팔 위에 머리를 뉘일 순 없어서 슬쩍 그냥 유림의 옆에 자리만 잡고는 어색하게 눈을 감으려는 수민을 한참동안 쳐다보는 유림이었다.

 

 

 

 

 

 




"너 또 혼날래? 나 지금 시계 푼 상태야, 응?"

 

 


"...왜, 왜요?"

 

 


"하나, 순순히 팔베개를 벤다. 둘, 오늘 나랑 자지말고 입시와 진로에 대한 진지한 상담을 나눈다. 선택해."

 

 

 

 

 

 




꼬물꼬물, 톡. 순식간에 제 팔 위에 머리를 뉘이며 눈을 감아버리는 수민의 모습에 유림이 씨익 웃으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 팔위에 수민의 머리가 뉘이자마자 그대로 수민의 머리를 끌어안아버리는 유림이었다. 억지로 눈을 감고있던 수민은 갑자기 저를 끌어안아버리는 유림의 행동에 놀라 다시금 눈을 번쩍 떴다.





 

 

 

 

 

......어어...

 

 

 

 

 





하지만 이 자세는 서로에게 너무나 안정적인 자세였다. 잠이 잘 올것 같은 편안한 자세. 제 품에 쏙 들어오는 수민이나, 저를 꼼꼼히, 그리고 포근히 감싸안는 유림이나 모두 놀라울정도로 위화감이 없어서 서로 말은 안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답답해?"

 

 

 

 

 

 




도리도리. 




수민의 머리가 가만히 있다가 살며시 도리질친다.

 

 

 

 

 




"....."

 

 

 

 

 

 




답답하진 않아요... 근데... 잠을 못자겠어... 아... 진짜...

 

 

 

 

 

 




정적, 또 정적.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 야밤에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소리나 간간히 들리는 밖의 소음들. 수민은 유림의 가슴에 얼굴이 폭 묻힌 채 잠을 자긴 다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를 안고있는 유림은 이미 잠에 들었는지 조용할 뿐이었다.

 

 

 

 

 




 

 

"쌤...자요?"




간간히 야밤의 도로에서 날 법한 엔진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수민은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이내 가만히 뜬채로 제 이마를 살짝 밀어보았다. 유림의 가슴께로 폭 더 파묻혀 버린 얼굴이 편안했다.





 

 


 

 

"....치..."

 

 

 

 

 

 

 

 





뭐야, 이 상황에서 잠이 오다니. 역시 당신은 대단한 여자야. 양을 세던 수민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명 잠을 못 잘꺼야.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꼭 안겨 있어야지. 어색하게 유림의 위에 얹어놓은 팔을 슬쩍 유림의 허리쪽으로 내리며 유림을 꼭 껴안는 수민이었다. 




아 푹신푹신해...

 

 

 

 

 

 





"쌤 진짜 자요? 응?"

 

 

 

 

 

 

 

 

한 번만 더 물어볼꺼야... 그리고 대답 안하면...

 

 

 

 

 

 




"......"

 

 

 

 

 

 

 



오 진짜 잠들었나 봐. 기회다 싶어 수민이 유림의 가슴에 더 꾸욱 제 얼굴을 묻었다. 으아 대빵 푹신... 흐으... 양을 세었더니 제가 새끼양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수민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들리는 유림의 심장박동소리... 좋다... 제 침대가 이렇게 꽉찬 느낌이라니, 뭔가 침대가 꽉찬 느낌도 있지만 사람의 품에 안긴다는 게 이렇게 안락한 자세라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지자, 수민은 문득 아까 살짝 눈을 감은 채 잠이 들었던 유림을 떠올리고는 다시금 유림이 자는 모습이 보고싶었다. 





평소 제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아니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미친세탁소의 무방비한 모습. 잠은 어떻게 잘까. 어떤 표정으로 잠들까. 잠버릇은 어떨까. 수민은 슬쩍 유림의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고개를 위로 올렸다. 





".....?"





어?





그러다가 숨을 헉, 들이키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뭐예요! 아 놀라...."

 

 


"잠이 안와?"

 

 


"아..."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유림의 얼굴. 어둠 속에서, 그것도 침대에서 보는 유림의 얼굴은 또 색다른 미묘함이 있어 수민은 기분이 야릇해졌다.

 

 

 

 

 

 




"......잠이 올리가 없잖아요."

 

 


"왜?"

 

 


"쌤...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왜 결혼 안해요?"

 

 


"글쎄."

 

 


"음...그럼 쌤은 연애 몇 번 해봤어요?"

 

 




 

 

 

 

조곤조곤, 침대를 사뿐히 흘러넘치는 말들이 꼭 자연스럽게 흐르는 배경음악같이 흘렀다. 수민이 속삭이듯 유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기새처럼 재잘재잘 소곤거리는 모습을 보며 유림은 연신 꽉 안아주고픈 충동을 겨우 억눌러야했다. 그러나 그런 유림의 마음은 모른 채 제 가슴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궁금함을 끊임없이 유림에게 말하는 수민이었다. 잠에 겨운 목소리는 평소에 그 목소리보다 훨씬 더 무방비해서 정말 앳된 톤으로 꿀이 또옥 또옥 떨어질 것 같은 말투였다. 




 

 

 

 

 

 

"솔직히 말해줘?"


 

 

"......" 

 

 




아, 아니, 말하지 마세요- 하고 수민이 말을 흐리며 팔자눈썹으로 제 가슴에 금세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기분 나쁠 거 같아요..."




분명 많이 해봤겠지.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너 안잘꺼야?" 

 

 


"...잠이 안온단 말이에요."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래. 어서 자."


"아 진짜 쌤은 이 상황에서 잠이와요? 난 진짜 떨려서...으...뭐예요...헐...뭐야..." 

 

 

 

 



 

 

 

....허얼...뭐하는거야, 이여자...

 

 




으응?

 

 

 

 

 

 




아찔한 향기가 났다. 같은 바디워시, 같은 샴푸를 썼을텐데 왜 미친세탁소의 향기는 이렇게 아찔한걸까. 수민은 제 아랫입술을 무슨 젤리라도 먹는 듯 꾸욱 누르며 가볍게 빨아들이는 유림의 입맞춤에 저도모르게 유림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고 유림이 입고있는 티셔츠를 꾸깃거리며 잡았다.




 

 

 

 

 

 

허얼...?

 

 

 

 

 

 




이내 제 입술을 눌러 머금은 채로 살짝 앞니를 세워 잘근 씹어대는 유림이었다. 전혀 아프지 않게, 마치 예쁜 디저트를 조심스레 떠 먹는 사람처럼 살짝 살짝 깨물다가 빨아올리는 유림의 행동에 수민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유림의 침이 반질반질하게 제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이제 수민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림은 한참 그렇게 수민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고 핥고 깨물더니 이내 서서히 고개를 들어 가만히 수민을 내려다보았다. 




"힘 빼야지, 아가."




그리고는 살짝 몸을 일으키는 유림이었다. 스스슥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들을 쓸어넘기며 저를 내려다보는 유림은 어둠 속에서 더 묘한 색기를 띄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쩌면 유림의 모습은 이렇게 잘 보일 수 있을까, 싶어 수민은 아찔한 생각까지 들었다. 머리를 한쪽 어깨로 가지런히 모은 뒤 여유롭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유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민을 반듯하게 눕히고는 그 위로 가볍게 몸을 숙였다. 




"잠 들어도 좋아."




다시금 유림의 입술이 제 입술로 다가온다.




 

 

 

 

 

 

"....으...ㅇ"

 

 

 

 

 




유림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수민의 두 손에 깍지를 껴준 채 꽉 잡아주었다. 파르르 떨리며 연신 마른침을 삼켜대는 수민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살짝 입을 벌린채 밭은 숨을 몰아쉬는 수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공기들이 뜨겁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수민이 호흡조절을 잘 못하고 무작정 제가 입술을 붙일 때마다 숨을 참아버리자 피식 웃으며 입술을 살짝 떼었다.




"...숨 참지 않아도 돼."


"...모, 못하겠어요... 어떻게 하는지..."


"으응, 그랬어?"




수민의 목소리가 긴장에 잔뜩 떨고 있었다. 유림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 아래의 수민의 동그란 이마선 쪽으로 손을 뻗어 살살 만져주며 수민의 호흡이 진정하기를 조금 기다렸다. 어둠속에서도 보이는 발그레한 뺨, 놀란 눈동자, 깜빡깜빡이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속눈썹, 그리고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모르는 입술이 무슨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아서 유림은 또 살풋 미소 지었다.





 

 

 

 

 

 

 

"넌 내가 몇 번짼데?"


 

 

".....네?"

 

 


"몇 번째야, 내가." 

 

 


"......그, 그야..."

 

 

 

 

 





또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수민이었다. 그럴 법했다. 




저를 내려다 보며 자신이 몇 번째냐고 묻는 미친세탁소의, 유림의 얼굴은 그야말로, 정말이지 무슨 야한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밑에서 올려다보는 유림의 야릇한 표정을 보며 그야말로 남자애들이 낄낄거리며 찬양했던 여신의 이미지를 똑같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었다. 수민은 그 아우라에 압도당한 채 보이지 않는 수갑이라도 채워진 사람마냥 포박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저를 이렇게 지그시 쳐다볼 것 같은 유림의 기세에 수민은 눈을 질끈 감고 항복하는 사람처럼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요."

 

 


"그럼 사랑해요, 해봐."

 

 


"네에?!"

 

 


"빨리. 나만 고백했잖아. 불공평해."

 

 

 

 

 




엥??! 




이게 뭔소리야. 수민이 눈을 부릅뜨며 황당한 표정을 지으려니까 유림은 "나는 오늘 사랑한단 말을 분명히, 소리내어서 했잖아."라고 하며 제 뺨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뽀뽀도 했단 말이야. 물론 뽀뽀는 오늘 하루 내 도장을 찍어두기 위해서였고." 그리고는 슬쩍 수민의 옆에 몸을 옆으로 누으며 수민의 배를 살살 만지며 평소의 그 특유의 여왕같은 표정으로 쐐기를 박는다.




 

 

 

 

 

 

"거기다 빼빼로 그거... 네가 한거 아니지?"

 

 

 

 

 

 




헐. 명탐정 납셨네. 진작에 알고있었음이 분명한 유림의 말투에 수민은 괜스레 뜨끔해졌다. 하기야 2년 내내 저를 들들 볶아대며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간섭하다보니 제게 손재주가 없음은 물론이요, 숱한 반성문을 제출한 이력으로 보아 이제 수민의 글씨체쯤이야 슬쩍 보기만 해도 알아챌 수준인 유림이긴 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미친세탁소- 그것도 네가 쓴 거 아니잖아."


"그, 그렇지만... 그건 그래도..."


 

 

 

 

 

 

"너무한거 아니야? 먹을만큼 먹은 어른한테 고백만 받고 입을 싹 닦으면 안되는거야, 이 천둥벌거숭이야."




유림의 눈엔 이제 완연한 눈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사랑해요."

 

 


"어?"

 

 


"사랑해요."

 

 


"야...무드없게..."

 

 


"사랑해요."

 

 


"야..."

 

 


"됐죠? 난 세 번했어요."

 

 


"뭐?"

 

 



유림은 갑자기 제가 누워있던 침대가 크게 일렁이는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민이 한 쪽 팔을 바딱 세우고 벌떡 몸을 일으킨 까닭이었다. 옆으로 누워있던 까닭에 제 뺨과 입술에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으로 수민이 그 손을 넣어 가만히 헤집는 느낌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제 머리카락들을 모조리 뒤로 넘긴 채 얼굴을 화악 가까이 가져다 댔다.




"쌤..."


"응?"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안돼요?"





 

 

 

 

 

여전히 떨리고 긴장되는 말이었지만 보다 더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유림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 위로 입술을 박치기하는 수준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수민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꾸욱, 제 입술위로 덮쳐지는 작은 입술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종류의 떨림과 설렘이 느껴졌다. 유림은 수민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는 그 상태에서 소리내어 웃었다. 달콤한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수민의 동그란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제가 끌어안자 잠시 움찔하던 수민은 유림이 준 힘 만큼이나 강하게 유림의 허리를 끌어안아 품을 조여왔다. 코 끝, 입술 끝, 속눈썹의 끝, 그리고 이마끝이 서로 살짝 부딪히고 맞대어졌다. 




문득 끌어안았던 손을 어깨로, 등으로, 허리로 내렸다가 다시금 수민의 뒤통수를 헤집으며 다부지게 감싸잡았다. 그리고 도톰한 두 아랫입술이 잠시 뜨거운 숨을 간극으로 살짝 떼어졌다. 




"첫 번째야."


"....네?"


"그리고 이건 비밀이야. 너도 몰라야 해."





이 천둥 벌거숭이야.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믿든 말든 네 자유지만.





싱긋, 하는 소리라도 낼 것 같은 눈웃음이 수민의 커진 동공으로 바짝 다가온다.





"그러니까 평생 단골해."




촉-



촉, 촉-




하는 소리가 수민의 이마와, 두 눈두덩이로 가 닿는다.





"미친세탁소에."





오늘 밤은 다른데에 도장 찍어야겠다- 넌 VVIP고객이라서, 응? 하며 푸스스 웃는 소리에 수민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짜 끗♡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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