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드라실 칼레는 곱실거리는 와인색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며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건장하고 각진 체구와 반듯하게 선 허리가 워낙 완벽한 인체구조를 이루는 터라, 그 실루엣만 봐도 누구나 한 번은 돌아볼 것이다. 무예로 다져진 몸임에도 근육이 드러나지 않는 마른 타입에다가, 완벽한 균형미를 느끼게 하는 그의 얼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는 극찬이 떠오르는 신체적인 조건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속에 든 것은 그의 겉에 것 이상으로 비상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가주를 포기하겠다면, 당장 혼인을 명한다. 가주에겐 배우자를 선택할 권한이 있고, 내가 선택한 약혼자 이외에 절대 혼인하지 못한다. 거절도 불가하다. 거절하려면 단 한 가지. 가주직을 승계하여라. 스스로 가문을 위해 봉사하지 않겠다면 정략결혼으로 집안 일원으로 의무를 다 하도록. 이 나라 최고 명문가와의 혼담이니 예를 다하도록 하여라.>


양어머니의 ‘명령’이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스토랑을 반쯤 가로 질렀을 때 한 갸르송이 나타나 물었다.


“무슈 칼레 되십니까?”


놀랍게도, 이 갸르송의 이름은 바로 줄리앙. 매일 자신의 거울을 보는 이그드라실도 잠깐은 놀랄 만큼 화사한 갸르송은 방긋 웃으며 이그드라실을 안내했다.


‘내가 포기할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천만에 말씀. 혼인해주지. 내가 혼인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주직을 포기하고 싶어 할 거라 예상 못하셨을 거야. 하나는 포기해야한다면, 인생을 포기 안 해.’


줄리앙이 안내한 방은 레스토랑의 구석 중에도 구석이었다. 물론 VIP 고객을 위한 룸이니 고급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방문을 몇 개나 거쳐 갈만큼 보안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긴. 어머니께선 혼담이 깨질 것을 기대하고 계시니 깨지게 되면서 어마어마한 가문의 영애에게 누가 가거나 나에게 소문이 생길 일은 안 만들려고 이러시는 거겠지. 하지만 누가 알아? 내 취향에 꼭 맞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여러 생각을 하며 이 상황을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손에 넣으려고 다짐해 보지만, 일생일대의 ‘혼인’이란 과정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뜨린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영 기운이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혼담이 무조건 깨질 것을 확신한 양어머니가 선택한 여자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나이가 자신보다 세 배는 많거나, 혹은 정말 결혼을 못 할 것 같이 성격이 안 맞을까? 어떤 사람이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리라 몇 번을 다짐하면서 이그드라실은 문 앞에 섰다.


“먼저 와 계십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벨을 울리세요.”


마지막 방문을 열어주고 줄리앙은 사라졌다. 이그드라실은 다시 한 번 머리카락을 흩으며 안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테이블에서 자신이 들어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가지런한 이목구비에 새하얀 얼굴에 긴 검은 머리를 곧게 땋아 한 쪽 어깨에 늘어뜨린, 엄청난 미인이었다. 사지도 무척 멀쩡하며 젊다. 많이 봐도 자신의 또래로 보였다. 우려했던 나이차나 혹은 취향문제는 전혀 없을 것 같다. 새하얀 목덜미 아래로 걸친 진보랏빛 사제복이 무척이나,


‘명문가의 아가씨라.’


라고 생각한 동시에 이그드라실은 당황했다. 이런 사제복이라면 아가씨가 아니다, 이 헤어스타일. 얼핏 여성스러울 수 있는지만, 이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국교 하이리히츠의 사제. 교구의 사제들은 일단 혼인을 하지 않는다. 혼인을 안 하는 사람과 어떻게 약혼을 한다는 것인가 의문인 것 이전에 엄청난 사실이 이그드라실의 머리에 맴돌았다. 머리를 왜 양갈래가 아니라 한 갈래로 땋고 있을까. 왜 일까, 아니 왜 인지 물어볼 것도 없다.


‘남자사제잖아!’


앉아 있던 율리우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명문가의 자녀와의 혼담이라 함부로 깰 수 없다고 윽박질러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선자리에 나왔던 것인데.


‘남자라니. 그럴 리가 있나? 속세 풍조가 바뀐 거야?’


웬만해선 당황하지 않는 율리우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봤다. 분명히 새로 나타난 남자가 방을 잘 못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그드라실도 일단 평정을 찾고 가장 논리적인 결말에 닿았다.


“제가 방을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실례를 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가 방금 열었던 문을 열고 나왔다. 때마침 밖엔 줄리앙이 미리 준비된 음식이 놓인 식차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그드라실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합니다. 방을 잘못 안내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줄리앙은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무슈께서 안내되기로 한 방이 맞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온 사람이 잘못 들어온 모양이다. 문가에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율리우스는 성큼성큼 걸어서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럼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네요. 죄송했습니다.”


라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줄리앙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무슈 스피엘님으로 예약된 방에 무슈 칼레를 안내하는 것으로 예약이 되어 있답니다. 지금 식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테이블에 앉아주세요.”


줄리앙은 아주 상냥하게 둘을 테이블에 인도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둘은 서로가 확실히 ‘남자’가 맞다는 것과 서로의 성을 듣고서 이 선자리에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가문의 자제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참이라 얼떨떨했다. 줄리앙에 안내를 거절하지 못해 멍한 상태로 테이블에 앉아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음식이 놓이는 것을 쳐다보았다. 아니, 시선은 그리로 향해있지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음식이 다 차려지자 줄리앙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줄리앙은 손님들 상태가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문까지 닫아주었다.


덩그러니 둘만 남겨졌고 그 사이의 공기엔 여전히 혼란이 가득했다.


“혹시...”

“저기....”


둘은 부적절하게도 같은 타이밍에 말문을 열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혼약상대를 만나러 오신 것이 맞나요?”


정신이 아주 많이 단련이 되어 있는 율리우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자기 또래의 남자를 너무 오랜만에 보다보니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걸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설마 했던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었기에 이그드라실은 망연자실했다.


“예.”

“맙소사네요.”

“그렇네요.”

“혹시 집안에서 혼인으로 협박이라도 하고 있나요?”

“그쪽도 그렇겠군요.”

“하아…….”

“실수가 있었다고 믿고 싶지만 의기양양하게 맞선자리에 나가란 말씀을 하신다 했습니다. 이 혼담 외에는 절대 허락 안 하신다고요. 어쩐지……. 그쪽 부모님도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그드라실이 물잔의 물을 마시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행동을 따라하듯 율리우스도 목을 축였다. 선자리에 남자가 나타났다는 현실을 간신히 이해하고 나니 두 가지 생각이 머리에 맴도는 율리우스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혼인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계속 사제로 살아야만 한다. 배우기를 열망했던 마법을 영원히 포기해야하며, 사제이기에 혼인은 어차피 강제로 포기된다.


이런 악랄한 수법은 상상하지 못했었기에 그는 드물게도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제로 살아야한다는 거다. 남자와의 혼약 이외에는 허락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혼을 영원히 하지 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다.


아마득한 심정에 있어서는 이그드라실도 만만치는 않았다. 원하지 않는 훈련, 사람을 신속하게 박살내는 방법을 보다 더 훌륭하게 수행하도록 연마하는 삶과 평생 가문에 묶여서 여행 한 번도 제대로 못 한 채 원하지 않는 여인과 어차피 혼인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혼인은……. 포기하는 게 전제였던 거야.”


좀 더 원하는 삶을 살고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과감하게 결정한 일인데 집안에서 남자를 혼인상대로 정하고 결정하라는 말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과 같았다.


“그러게요. 어차피 혼인은 저와 연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제는 어차피 혼인 못하니까요.”


공감하는 마음에 율리우스가 맞장구를 쳤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비슷한 나이같은데. 스피엘가의 사제님.”

“율리우스 스피엘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스물입니다.”


그제야 이그드라실은 ‘아, 그 유명한 비올레테’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놀랐다. 사제로 태어나 사제로 죽을 것만 같았던, 자신이 정말 어렸을 때부터 정말 유명한 사제였던 바로 그 ‘율리우스 드 비올레테’였다. 하지만 아는 체를 삼가고 자신을 소개했다.


“동갑이네요. 저는 이그드라실 칼레라고 합니다.”

“칼레가문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바가 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일부러 사내를 사내에게 혼인시키려하는 이유가 혹시 있나요. 우리 가문에선 일단 혼인을 안 시키기 위해서 그쪽 가문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이용이라뇨. 우리 가주께서도 혼인을 안 시키는 게 목적이라서요. 그건 그렇고 사제님이 혼인하셔도 되는 건가요?”


칼레 가의 차기 가주 지명순위 1위는 아주 순수하게 질문했다. 율리우스는 물을 한 모금 더 들이키고 대답해주었다.


“환속할거거든요.”

“환속요? 사제를 그만두는 거예요?”

“네.”

“왠지 물어봐도 됩니까?”

“지긋지긋하잖아요. 기도만 하는 건. 전 기도하는 것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참는 것만도 지겨워요.”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강렬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제중의 하나가 사제를 그만둔다니. 그 동안 쌓아온 것이 있을 테니 ‘왜 그러세요, 아깝게?’ 라는 질문을 하려던 이그드라실은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런 질문은 바르지 않았다. 그에게도 쌓아놓은 것은 있지만 더 원하는 것이 있어서 칼레가의 가주직을 포기하려던 것이 아닌가.


“하……. 그럼 지금 환속하신다면 당장 혼인을 하라는 명령을 받으셨단 건가요? 그것도 남자랑?”

“예. 혼인을 거부하면 환속은 불가하다네요. 제 가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 같단 생각을 한 참입니다.”

“저랑 같으시네요.”


이그드라실은 물을 한 잔 싹 비우고 거칠게 테이블 위에 컵을 놓았다. 그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칼레가의 가주가 되고 싶지 않거든요. 지명하려 하시기에 영구포기를 선언했더니 혼인하라고 하더라고요. 이를 갈며 혼인해주지, 라고 생각했지만 저의 양어머니는 대단하십니다.”


그제야 둘은 두 가주가 아들들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썼는지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언제부터 두 가주가 아는 사이였는지 모르겠다. 명문가의 가주들이 아들을 실수라도 남자와 혼약하게 선시장에 내놓을 리 없다. 쉽지도 않지만 소문도 안 좋아지고, 애초에 혼약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통념이었으니 말이다.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세력가가 아들을 남자와 혼약이라는 수까지 쓰면서 주무르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못할 걸 알기에.

이그드라실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크게 푹 쉬었다.


“어머닌 이 혼인 외에는 인정 안 하신 다네요. 혼인을 포기한다고 하면 가주직을 이으라시고.”

“제 어머니께서도 같은 말씀 하셨습니다. 이 혼인 외에는 절대 안 된다고. 차선도 없으니 무조건 혼인하고 싫으면 명령을 따라 사제로 살라는 거죠.”


이그드라실은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충 정신을 차리자 맛있는 음식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적당히 배도 고플 시간이고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 허기는 졌다. 비록 내일이 우울할지라도 배꼽시계는 운다. 무척 우울한 기분이 입맛을 쓰게 했지만 그런 기분에 굶는 것도 부모님에게 지는 기분이었다.


“식사나 하죠.”

“예?”

“맛있게 먹고 가세요. 이것도 인연이네요. 유명한 사제님과 밥도 먹고 좋네요.”

“쓴 이야기 하나 해드려요?”

“네?”

“사제들은 바깥 식사를 쉽게 못합니다. 특히 이 스테이크. 오늘 오전에 한 조각 먹어서 더는 금지되었고, 이 피망은 오늘 먹을 수 있는 색깔이 아닙니다. 포크도 창이 세 개인 것만 써야하고 나이프엔 톱날이 108개 있는 걸로만 먹어야하죠. 오늘 먹을 곡류는 현미와 흑미 9대 1비율의 회색 밥입니다. 근데 여긴 빵만 있고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평온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율리우스에게 이그드라실은 애틋한 동정심이 일었다. 이 나무 테이블이라도 먹으라면 먹을 수 있는 배고픈 나이에 엄격한 음식규정으로 손도 못 댄다는 것이 답답해 보였다.


“환속은 물 건너갔으니 이 답답한 생활이…….”


약간 질린다는 얼굴로 율리우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그드라실은 그런 율리우스에게 말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어차피 망했어요, 우린. 그냥 먹어요. 배부르게 다 먹어요. 여기 비싸고 맛있기로 유명해요. 비용도 돈 많으신 부모님들이 하실 테니. 환속까지 마음먹었었는데 그딴 룰 하루 어긴다고 문제 있겠어요?”


이그드라실이 율리우스의 앞에 있는 접시를 당기더니 자신의 칼로 큼직하게 잘라주었다. 그리고 다시 율리우스 앞으로 밀어줬다. 그가 나이프를 쓸 줄 몰라 못 자르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대신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율리우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4지 포크를 들고 고기를 먹었다. 그것을 보고 이그드라실도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테이블 위 음식이 싹 비워지는 건.


“아마 이 음식도 버려질 거라고 생각했겠죠. 분위기 파토나서 집으로 돌아갈 걸 알고 시킨 음식일테죠. 음식 주문은 누구 센스일까요?”

“스피엘가는 육식을 즐기지 않으니 아마도 칼레가의 작품일까요.”

“그냥 최고로 비싼 거로 시켰지 않을까요. 맛은 있네요.”

“그러게요. 한 접시 더 먹고 싶네요.”

“시켜요. 돈 걱정 말고. 아, 와인도 시켜야지.”

“술이요? 속세에선 20살이면 와인을 먹나요?”

“뭐 그 전에 배운다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아요. 마실래요?”

“그러죠 뭐.”


이그드라실은 종을 울렸다. 그러자 금방 줄리앙이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다시 문을 닫았다. 상냥한 얼굴로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여기 계산 사전에 된 겁니까?”

“예. 스피엘가에서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더 시켜도 추가 지불 없죠?”

“예, 마음껏 주문하십시오.”


이그드라실은 줄리앙이 건네준 메뉴를 보고 줄줄 읊었다. 간혹 율리우스가 맛있겠다고 말하면 그것을 시켰고, 와인을 무려 10병이나 시켰다. 줄리앙이 대충 주문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이그드라실이 그를 불러 세웠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게 뭐예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다.”

“연어구이 정식이 맛있을 거 같던데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줄리앙은 메뉴를 추천했다. 사실 이미 주문한 것들만 해도 많은데,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란 생각도 조금 했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 중에 음식을 안 남기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정도니 상관없었다.


“그럼 그것도 주세요.”

“그렇군요. 의무에 청춘이 메여있는 몸이 한 분 더 계시네요.”


율리우스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이그드라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앙이 주문을 위해 다시 방 밖으로 나갔고, 제법 친해진 둘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가 같댔죠. 리넨 원년생.”

“예.”

“그럼 그냥 말 놓읍. 아니 놓자. 존댓말도 지겹습니, 후. 지겹다.”


고명하신 고위사제님께서 고장난 것 처럼 말을 더듬어 고치며 말했다. 이그드라실은 의외라고 생각해서 물었다.


“존댓말이 지겨워?”

“평생 했으니까요. 아니, 했으니까 지겨워. 또래들은 직급이 낮아서 나에게 존댓말하고, 늘 연장자에 둘러싸여서 누굴 만나도 존댓말밖에 안 했는데 그럼 지겹지.”

“존댓말도 규칙 같은 건가?”

“규칙은 더 많아. 혀 굴리는 각도까지 어딘가 써 있을지도 몰라.”


이그드라실은 소리 없이 웃었다. 보랏빛 사제복의 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었다. 딱히 즐거우라고 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았기에 맞받아줬다.


“난 반평생을 팔 굽히는 각도랑 다리 굽히는 각도만 죽도록 연마했는데. 그쪽 수도원 어딘가에 분명 혀 굴리는 각도도 누가 정리해뒀을지 누가 알겠어.”

“칼레는 무인가문이었지.”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을 지겹게 연마해야하는데 문제는 그걸 내가 더는 하기 싫다는 거야.”


이그드라실이 이갈면서 하는 말에 율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싫다는 게 문제지.”

“부모님들에겐 큰 의미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의미가 크다고.”


상당한 공감대가 둘 사이에 머물렀다. 또래를 만나 이야기하는 게 율리우스로선 정말 처음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그드라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않는 또래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식사는 빨리 준비되었다. 줄리앙은 식차를 끌고 와서 요리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테이블 위에 올렸다. 테이블 가득 음식이 모두 운반되고, 소임을 마친 줄리앙은 미소로 답하며 방문을 나가려고 했다.


“혹시 바빠요?”

“또 주문하실 게 있으세요?”


율리우스가 줄리앙을 질문으로 잡아 세웠다. 이그드라실은 여분의 포크 나이프를 식차판에서 꺼내서 테이블 위에 얹었다.


“식사시간 내내 일하는 거 같던데, 딱히 안 바쁘죠? 이 방 담당만 시켰을 텐데.”

“예, 제가 이 방을 맡고 있습니다.”

“그럼 잠깐 거기 앉아서 먹어요.”


율리우스가 줄리앙에게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은 미세하게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 금방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들 식사에 방해가 됩니다.”

“지금 우린 아주 안타까운 상황이거든요. 기대고 뭐고 다 접고 의무에 짓눌려 살아야할 날만 남았어요. 그래서 의무를 수행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한 사람을 지나칠 수가 없어요.”

“오히려 굶으면서 방 앞에 계시는 게 더 방해가 됩니다. 서럽잖아요. 자기 탓도 아닌데.”


이그드라실이 맛있어 보이는 닭고기를 한 점 줄리앙의 접시로 옮기면서 말했다.


“어차피 이 방만 맡고 계신다면서요. 같이 먹고 놀아요. 어차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인데.”


스피엘과 칼레라고 하면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유명한 ‘이름’이다. 그 가문 자제들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열심히 먹더니,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만한 가문의 자제들이 할 것 같지 않을 이야기였다. 줄리앙은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염치불구하고 함께 어울리겠다고 말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이 방에 누군가 또 있었다면 정말 눈이 호강하는 조합이라고 박수라도 칠 법한 면면들이었다. 본인들은 딱히 신경 쓰고 있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니까 하나는 살아남을 수 있어요. 흠흠. 있어.”


율리우스가 말했다. 그랬더니 이그드라실이 바로 캐치했다.


“아 그거. 근데 그건 하지 말자. 생각해보니 우습더라.”

“아냐. 한 명이라도 제 갈길 찾아야지. 내가 집에 가서 파혼해달라고 하면 난 수도원으로 들어가겠지만, 네가 가서 혼인하겠다고 하면, 혼인상대가 파혼해서 의무 수행이 불가능해지고, 너희 부모님께선 나 말곤 혼인을 허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 그럼 넌 자유 아냐?”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줄리앙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똥그랗게 떴다.


‘혼인? 이 둘이?’


“그건 내가 구차하잖아. 이것저것 폼 안 나고 치사해.”

“하긴.”


그러면서 둘은 쉴 새 없이 꾸역꾸역 먹었다. 줄리앙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말을 걸었다.


“좀 천천히 먹어요. 그 음식은 그렇게 꾸역꾸역 먹는 것보다 와인이랑 조금씩 씹어 넘겨야 맛있는데.”

“그래요?”


줄리앙의 말을 듣고 바로 실행해 보았지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어서 이그드라실과 율리우스는 그냥 슬쩍 웃어주곤 다시 마음대로 먹는 것에 몰두했다. 


식사를 싹 비우고, 줄리앙이 정신 차렸을 땐 와인을 퍼마시다시피 하는 자리까지 동참해주고 있었다. 한 잔, 두 잔이 비워지고 금방 그 자리가 술로 채워졌다. 그건 다시 젊은이들의 목을 축이며 사라졌다. 술이 들어가자 제법 가벼운 웃음소리도 났다.


“도망을 다섯 번이나 쳤는데 너무 외진 곳이라 아무도 모르는 거야. 계획이 실패해서 결국 수도원으로 몰래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아직 나밖에 몰라. 아무도 몰라.”

“거기도 웃기는구나. 난 10번 도망갔는데 다 잡혀서 돌아왔거든. 수련을 안 하고 버티면서 싫은 티를 냈는데 그게 같이 수련하던 놈들 사이로 번진거야. 그래서 걔들이 하도 빼먹어서 결국 내가 제일 열심히 한 게 되어 버리고. 하하.”

“그게 뭐야.”


줄리앙은 일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과하게 마시진 않고 있었다. VIP룸 손님들이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만 받고 있었으니 그에 따르면 됐다. 하지만 설마하니 레스토랑이 문 닫을 시간까지 술 마시면서 계속 있을 줄 몰랐다.


‘어쩌나. 곧 마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냐? 부모가 어떻게 그래? 내가 원하는 거 하나 해주기 싫어서 남자랑 선을 보게 하는 게?”

“하기 싫다는 말은 이해하고 싶지 않으신가봐. 안 듣는 거지 ”

“속된 말로 이 상황이 지랄 같아!”

“그래. 지, 지, 지, 지랄 같아.”

“사제가 그런 말 써도 돼?”

“뭐 쓴다고 누가 뭐라 하나?”

“하아…….”

“하아아아!”


둘은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다니 끔찍하다.”

“가주라니.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


술에 취해서 더더욱 감정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분노가 치솟았다. 부모님에 대해 원망이 샘솟고, 아무리 그래도 혼인까지 강제로 시킬 거면서 남자랑 혼담을 주고받고 자식에게 이긴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냥 우리 혼인할래?”


라고 말한 건 이그드라실. 율리우스는 킥킥 크게 웃더니,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러면 진짜 화나시겠지. 얼굴 볼만 할 거야.”

“팔짝팔짝 뛰실걸. 아들들 마음대로 못하게 되고, 대는 영원히 끊어지는데다, 무조건 사내랑 결혼하는 꼴까지 보시는 거야. 그걸 물리는 것도 못하실걸. 킬킬. 그럼 정말 환장할 일일거야.”

“하자하자. 푸하하하.”


술이 들어갔다. 기분은 몽롱하게 붕 떠있었다. 오래 된 친구처럼 가까워졌고, 인생과 바꾼 장난을 쳐서라도 부모님께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자식을 마음대로 못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럼 가주도 때려 쳐도 되고, 사제도 때려 쳐도 되고, 부모님은 열 받을 거고!”

“완벽해.”


그러면서 이그드라실은 벌떡 일어났다.


“풀네임이 뭐랬지?”


율리우스도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율리우스 스피엘. 속세이름은 그래. 줄리앙도 일어나 봐요.”

“예?”

“나, 이그드라실 칼레는 율리우스 스피엘에게 청혼합니다. 줄리앙. 일어나서 증인 좀 해줘요.”


이그드라실까지 일어나라고 부탁을 하자 줄리앙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속으로 ‘설마’라는 말을 한 열 번은 했을까? 율리우스는 술에 취해 혀가 약간 꼬부라진 말로 대답을 했다.


“나, 율리우스 스피엘은 이그드라실 칼레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박수!”


라고 말하며 혼자서 물개박수를 쳤다. 줄리앙도 엉겹결에 박수를 쳤다. 그럼 그 다음은,


“이제 증인이 우리 입 맞추는 걸 보면 끝인가?”


이그드라실이 헷갈린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율리우스는 아마 맞을 거라며 끄덕이며 줄리앙에게 동의를 구했다. 줄리앙은 안 취한 상태라 많이 당황했다.


“저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미래를 결정하시면.”

“인생 뭐 있어요? 충동적이지 않으면 모든 걸 남이 결정할 텐데.”

“지랄 같죠.”

“푸하하하 사제님이 지랄이란 말 써도 되는 거야?”

“혼인하면 환속이지 뭐.”


줄리앙은 술에 취해 험한 소리도 내뱉는 청년들이긴 하지만, 정신만은 온전한 것을 느꼈다. 몸이 좀 비틀거리고 술 취한 말투로 웃으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또렷해보였다. 줄리앙은 바로 자세를 잡고 약간 큰 소리로 환기했다.


“알았어요. 증인이 되어 드릴게요. 약식이니까 키스만 하면 둘은 약혼이 인정돼요. 그거면 되는 거죠.”

“오케이. 그럼 키스인가.”

“술 한 병 더 마실까.”


율리우스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 풀죽은 모습이 이그드라실에겐 안쓰러워서 직접 율리우스의 고개를 양손으로 잡아끌어 올리고 빤히 쳐다봤다. 남자인 것만 빼면 완벽한 얼굴이고.


“양치는 안 했지만 같은 거 먹었으니 참아.”


라고 말하며 율리우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실 무슨 느낌인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금욕적인 생활가운데 당연히 첫사랑은 물론이요, 첫 키스는 상상도 못해봤던 비올레테 사제님은 그대로 굳어서 단번에 술이 깬 얼굴로 키스를 받고 있었다. 몇 초간 붙어있었던 입술이 떨어지고 둘은 이 장면을 제대로 목격했어야 하는 줄리앙을 강하게 쳐다봤다. 어떤 의미로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확실히 증인이 된 줄리앙은 선언했다.


“저 줄리앙 J 란페는 이그드라실 칼레와 율리우스 스피엘의 사, 사랑의 서약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 두 분의 약혼을 인정합니다.”


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로 긴 문장을 간신히 완성했다. 이그드라실이 먼저 푸하하하하 웃기 시작하더니 율리우스가 따라 웃었다. 줄리앙도 그만 웃음이 터졌다. 셋은 레스토랑 최고급 방의 바닥을 구르면서 웃었다. 소름끼치게 닭살 돋는 약식 약혼식의 뒤풀이로 셋은 본격적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마셨다. 별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아님에도 무척 즐거웠다. 누군가가 정한 ‘의무’라는 것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는 것을 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웠다.



물론 뒷감당은 나중일이다.

1차BL 쓰는 계정: @bbokkwon 랑야방/엔네아드 덕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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