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예린 - Bye Bye My Blue





어젯밤 선호와 관린은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며 섹스를 했다. 사랑해, 선호야. 그 말이 기계적인 투라는 걸 알아챘음에도 선호는 그냥 사랑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 했다. 한 쪽은 거짓이었고, 한 쪽은 진심인 말이었다. 날이 밝고 잠에서 깨어난 후에 둘러본 집 안에 관린은 없었다. 함께 쓰던 모든 것들이 남았는데. 관린의 옷장은 비어있었고, 주방엔 선호에게 남기는 짧은 이별의 말이 쓰여있었다. 



미안해. 네 잘못 아니니까 너 자신을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알아. 너와 사귈 때 내가 되게 많이 나빴다는 거. 이젠 나 같은 사람 절대 만나지 마. 너는 정말 예쁜 아이야. 그래서 사랑했어. 잘 지내, 선호야.



그렇게 끝이 났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무어라 대답할 기회조차 없게 이미 짐을 모두 싸들고 선호의 곁에서 자리를 뜬 그였다. 그렇게 안절부절 지켜오던 5년간의 사랑이 고작 메모지 하나에 적힌 이별의 말로 끝이 났다. 선호는 꽤나 담담하게 그 편지를 원래 자리했던 식탁에 다시 올려두고 우유를 꺼내 마셨다. 너무나도 담담한 제 자신이 신기했다. 어쩌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그런가보다 싶었다. 쭉 그렇게 담담할 줄 알았다.




관린과 만났던 5년 중 4년은 무섭도록 행복했으며 반 년은 매일을 싸웠고, 반 년은 싸우는 것조차 지쳐 서로를 천천히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래 두 달은 다시 서로에게 노력해보자는 관린의 말에 다시금 뜨겁던 그 날들을 재연하는 것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선호는 답지 않게 그 두 달을 가장 최악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그 사람이 내게 화를 낼까 안절부절 못하고 그의 온갖 짜증과 투정을 다 받아내며 철이 든 사람처럼, 속이 없는 사람처럼 굴며 이해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관린은 그런 선호에게 화가 난 게 있으면 차라리 말을 하라고, 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냐며 또 화를 냈다. 내가 얼마 노력하는데 그런 나한테 화를 내? 그런 생각들에 가득 차 선호는 점점 상처 받고 지치고 있다는 게 몸으로 와닿았지만 가끔씩이라도 제게 웃어주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무서웠다. 너무 사랑해서 무서웠다. 저만 놓으면 끝이 날 관계인 것만 같아서 텅 빈 집에서 킹사이즈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아무리 불안해도 사랑하냐고 물으면 또 그 말이냐는 듯, 지겹다는 표정을 보여줄 게 뻔해서 선호는 관린의 앞에선 웃었고, 관린을 이해했으며, 관린이 자리를 비운 때면 눈물을 훔쳤다. 



원망스러웠다. 노력해야만 서로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게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비참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매일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하며 혼자 울면서도 관린의 앞에 서면 그에 관련된 말들은 모조리 삼켜버리는 자기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그를 너무 사랑해서 비참했다. 선호는 우유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비로소 이제야 우리는 남이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나도 바로 짐 뺐어. 어차피 계약 얼마 안 남았기도 했고, 같이 쓰던 집이라 나 혼자 월세 달달이 채우기엔 무리기도 하고. 학교 앞에 싼 원룸으로 옮겼어."

"야, 잘했어. 진짜 잘했어. 내가 진작에 헤어지라고 했지? 나쁜 새끼. 쓰레기, 진짜."

"맞아. 잘 헤어졌어. 그 새끼는 진짜 아니야. 어떻게 헤어지잔 말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냐? 끝까지 좆같네."



근데 사실, 조금 후회 돼. 그 사람이 날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그 말은 그냥 삼켰다. 진심으로 화가 난듯 잔뜩 얼굴에 열을 올리고는 관린을 욕하는 두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유선호를 알게 된다면 더 화가 나 선호에게 호구새끼라고 욕할 게 뻔해서, 그냥 삼켜버렸다. 


유선호는 알았다. 관린이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거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호는 짐을 싸는 내내 펑펑 울었다. 라이관린과 함께 양치를 했던 세면대가 밉고, 함께 밥을 먹던 식탁이 미웠고,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며 섹스를 하던 침대가 미웠다.



관린과 3년을 함께 했던 자취방을 떠나면서 선호는 마지막으로, 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번호는 바꾸지 않았는지 통화연결음이 들려왔다. 그 사람은 당연히 내 전화를 받지 않겠지. 통화연결음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음성메세지를 남기겠냐는 자동음성이 흘러나왔다. 선호는 울었다.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형이 불행했으면 좋겠어요. 형이 후회했으면 좋겠어요. 형이 내가 그리워서 아팠으면 좋겠어, 내가 형 만날 때 무지 아팠던 것처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



그의 불운을 염불하는 사람처럼 못된 말을 하다가도 결국 그의 하루의 행운을 빌어주는 제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그래서 음성메세지 종료버튼을 차마 누르지 못하고 엉엉 소리내어 우는 선호였다. 형은 정말 나쁜 새끼야. 너 진짜 나빠, 개새끼야. 야, 라이관린. 넌 진짜...


선호는 그 날 바로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의 전 애인 욕을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시는 친구놈들을 보며 다시금 옛 생각에 잠겼다. 일 년 전 일이었다.



- 나 너무 비참해. 나 너무 비참해, 형.

-

- 나를 사랑한다면서, 날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 나한테 너무 못되게 해,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엉엉 우는 선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관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 그래, 내가 너한테 너무 못되게 하는 것 같다.



그 말이 다였다. 선호는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원하는 대답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대답을 원한 건 분명 아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은 욕구가 크게 일었다. 내가 너무 비참하고 아픈데 형은 그걸 알면서도 날 이렇게 방치하는 거라면 차라리, 헤어지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관린이 없는 날의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서 차마 이별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선호의 울음소리만 가득하던 방 안에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 소리가 들리고, 둘은 언제나 그랬듯 또 그렇게 흐지부지 싸움을 끝내고 섹스를 했다. 



사랑해, 선호야. 정말 많이 사랑해. 형이 잘할게. 



분명히 거짓말이었다. 아니, 자기 딴엔 노력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린은 매일 그렇게 말하면서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선호에게 그건, 거짓말이었다.



형은 모르지. 마음이 너무 아프고 답답해서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는데. 형 욕을 잔뜩 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렇게 형이 내게 했던 짓들을 말하면 당장 형과 헤어지라고, 나쁜 놈이니 어서 헤어지라고 말할까 봐 무서워서 그 누구에게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던 내 마음을. 형이 연락도 없이 일주일째 집을 비우던 날, 비를 다 맞으며 형을 기다리다가 쓰러져 그 때서야 내 사정을 알아채게 된 소꿉친구들에게 그래도 날 따뜻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고 형을 감싸던 내 마음을. 


그만큼이나 형을 사랑했던 나를 모르지, 형은.







넌 날 사랑할 수밖에 없어 1

w. 오언







선호는 그렇게 이별했고, 매일을 아파하며 세 달을 보내다가 차츰 나아졌다.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통보에 '헤어지고나서 하는 가장 찌질한 행동 20위'에 들만 한 것들은 모조리 다 해 본 것 같았다. 이제와서는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그런 짓들 말이다. 과모임에서 술에 잔뜩 취해 엉엉 울면서 관린의 이름을 불렀고, 관린의 SNS를 모조리 뒤져 행적을 찾아내 몰래 뒤따라가도 봤으며, 이미 바뀐 번호에 전화를 걸어 밤새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성을 듣고, 또 들은 적도 있었다. 



선호는 한참을 그렇게 관린을 앓았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란 말처럼 그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은 점차 원망과 미움으로 바뀌어 갔으며,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는 모든 일상 속에서 그 사람이 떠오르던 몹쓸 병이 나았다. 그렇게 그 사람을 잊었다. 그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깊지 않은 감정 탓에 제법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었다. 그 일을 세 번 정도 반복했다. 그리고 선호는 군대를 갔다. 차라리 그 사람과 만날 때 다녀올 걸. 조금만 더 함께 지내면 사이가 다시 나아지겠지 하는 몹쓸 기대감 탓에 군대를 미뤘는데. 결국은 그게 다 시간 낭비였다.



군대를 다녀온 후 제법 남자다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키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했던 몸무게가 표준보다 조금 덜 나가는 체중으로 바뀌었으며 마냥 말랐던 몸에 얕은 근육들이 자리 잡았다. 아, 턱도 조금 각져진 것 같다. 동기들이 선호에게 말했다. 넌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군대 다녀온 뒤가 더 낫다고. 그렇게 복학을 하고 정신 없이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관린과 헤어진지 딱 삼 년 째가 되던 날이었다. 선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공을 살려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 파티쉐로 취직했고, 민현은 그 레스토랑의 양식파트 수셰프로 이미 4년째 근무 중이었다. 사실상 파티쉐와 양식파트 요리사가 만날 일은 굉장히 드물었지만 그냥 어쩌다 만났고, 어쩌다 호감이 생겼며, 어쩌다보니 사랑에 빠졌다. 


그게 다였다. 

계기도, 이유도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 그게 바로 황민현이었다. 선호가 이런 생각을 한 걸 알면 민현은 분명 서운해하며 자기는 이렇고 저렇다며 끝 없는 얘기를 늘어놓겠지만 그냥 선호는 그랬다. 선호는 민현이 만드는 음식을 사랑했고, 민현은 선호가 만드는 디저트를 사랑했다. 선호는 민현의 미소를 사랑했으며, 민현은 선호의 눈물까지도 사랑했다.



갓 들어온 신입 때 만나 사랑에 빠져 지금은 벌써 선호의 뒤로 후배가 둘이나 생겼다. 두 사람은 엊그제 1주년을 맞았다. 관린과 헤어진 후 설렁설렁 만나던 다른 연애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치킨 각 한 마리를 시켜놓고도 닭다리를 모두 자신에게 양보하는 민현을 보며 아, 이 사람이면 되겠다. 하는 확신을 가진 선호였다. (타이밍이 그랬던 거지 먹을 거에 미친놈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근무시간이 겹치는 날이면 함께 출퇴근을 했고, 잠깐씩 짬이 날 때마다 호텔 휴게실에서 만나 테이블 밑으로 손을 맞잡았다. 선호가 주방장에게 잔뜩 깨지고 우울해할 때면 민현은 그 날 오피스텔에서 선호가 좋아하는 영화를 빔으로 틀어주곤 선호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해먹였다. 선호가 좋아하는 걸 알아주고, 챙겨주고, 신경써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다, 황민현은.



선호가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잠들어 있는 민현의 넓은 등의 맨살을 쓸었다. 그럼 민현은 몸을 돌려 선호를 품에 꽉 안는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 입꼬리는 잔뜩 올리고 말이다. 그게 요즘 선호의 일상이었고, 선호는 그 일상이 더없이 행복했다. 무슨 큰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매일 입가에 미소를 달고 살았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지만 누구처럼 선호에게 일방적으로 화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누구와 다르게 선호를 이해했고, 선호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게 정말 사랑 받는 기분이구나, 를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호는 확신할 수 있었고, 관린과 지낼 때는 달고 살던 날 사랑하냐는 말은 더이상 꺼내지 않았다. 


선호는 자길 사랑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드는 자신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관린이 확신을 주지 않아 불안했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민현과 맞는 아침이 더 감사했고, 그 하루하루가 사랑스러워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면 움켜쥐고 다신 놓고 싶지 않았다.



아, 늦었다! 진짜 늦었네!


선호가 알람을 듣고도 행복한 기분에 젖어 빈둥대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정확히 사십 분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선호가 늦잠을 잘 때면 그래도 평소엔 민현이 그를 깨웠는데 하필 민현이 어제 동창모임을 다녀와 민현마저 늦잠을 자버린 탓에 꼼짝없이 지각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거의 출근시간을 40분 남기고서 눈을 뜬 선호는 시계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하필 제일 바쁜 금요일에 이게 무슨 일이야. 대충 몸과 얼굴에 물을 끼얹고 옷을 챙겨 입고, 급박하게 민현의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엘레베이터에서부터 습한 기운이 있다 싶었는데 역시나 비가 오고 있었다. 


유선호가 제일 싫어하는 비.



하필 또 차가 막혔다. 큰일났네... 민현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선호는 창문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미쳤지, 아까 나 왜 다시 잤을까? 응? 아아, 형... 빠져나간 정신이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도로에 빽빽하게 들어선 차들이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민현은 신호에 걸린 틈을 타 팔을 뻗어 선호의 머리를 창문에서 떼어낸다. 아파, 하지 마. 민현이 잔뜩 축 처진 선호을 얼굴을 돌려 저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최대한 빨리 갈게, 걱정 마. 선호가 저를 안심시키려 눈을 휘고 웃는 민현에 코를 찡그리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 형 근데 왜 머리 안 넘기고 왔어? 원래 항상 넘기잖아."

"넘길 건데?"

"언제? 우리 가면 바로 옷 갈아입고 주방 들어가야겠는데?"

"형 오늘 오후파트잖아."



뭐? 그럼 왜 벌써 나왔어.


당황스러운 감정이 잔뜩 묻어난 선호의 말에 민현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야, 너 데려다 줘야하니까. 


아나, 진짜... 어제 술도 많이 마셨는데 그냥 푹 자지... 감동받았다는 듯 제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선호를 꿀이 잔뜩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민현이 바뀐 신호에 다시 엑셀을 밟았다.



"선호야."

"응?"

"그냥 형 집 들어와서 살래?"

"뭐?"

"싫어?"

"아니, 싫은 건, 싫은 건 아닌데. 아니..."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연인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거의 섹스파트너로 전락해버린 그 사이가. 그 시간 속에 살던 자신이. 선호는 부러 눈을 활짝 휘게 웃으며 입을 꾹 닫았다. 민현은 그런 선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천천히 생각하자, 그건. 


창문 위로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마저 불안정한 순간이다.




주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들었다. 형에게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 관계에 믿음이 없는 게 아닌데 왜 그렇게 머뭇거리고 망설였는지. 형 되게 서운했겠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잡 생각에 결국 선호는 하루종일 실수를 연발했다. 그런 선호를 참아주던 선배조차 후에 선호가 수플레를 두 번이나 실패하고, 가나슈 비율까지 잘못 맞추자 결국 소리를 꽥 질렀다. 여러모로 참 진 빠지는 하루였다. 도저히 일을 할 맛이 안 났다. 물론 누구는 맛이 나서 일을 하냐만은.



집에 가면서 함께 살자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결심했다. 선호가 민현보다 두 시간 조금 넘게 일찍 일을 시작했지만 퇴근시간은 별다르지 않았다. 오늘 선호는 풀 타임, 민현은 오후 타임이었으니까. 선호가 제 핸드폰을 돌리며 호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심산으로 들어섰다가 저도 모르게 놀라 입이 벌어졌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카페가 늦은 오후 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인간들아, 룸을 잡았으면 얼른 입실해 줘... 부탁 좀 할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선호가 구석 빈자리에 대충 자리를 잡았다. 


형 보고 싶다, 형 보고 싶다, 형 보고 싶다... 선호는 하릴없이 애정이 가득 담긴 말들을 보내다가 같은 내용의 카톡을 스무 개 즈음 보내고나서는 그 짓마저 그만 두었다.



곧 웨이터가 내어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저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이 깨가 쏟아진다. 앞 테이블의 가족들은 아주 행복해 보이고. 괜히 울적해진 마음으로 커피잔에 맺힌 물방울들을 닦아냈다. 예전엔 혼자 있는 거 되게 잘했던 것 같은데. 민현을 만난 뒤로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게 버릇이 들어서 그런가, 잠깐이라도 혼자 있으려고 하면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형이 내 버릇을 잘못 들였어, 그러니까 형 나한테 코꿰였어. 다시 한 번 카톡 대화창을 띄워 키패드를 두드리며 웃었다. 퇴근하고 카톡을 발견한 후 웃음 지을 민현이 눈 앞에 그려졌다. 아, 정말 형 보고 싶네.



민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퇴근했어? 보고 싶었어. 그런 말들을 건네며 대충 가방을 챙겨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형. 내가 지금 1층 카페거든? 내가 지금 그리로,



얼른 민현을 보고 싶은 마음에 복잡한 카페를 벗어나려 급하게 걸음을 떼던 중 손목이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선호의 몸이 돌려지고, 곧이어 마주한 그는,




"맞네, 유선호."


더 성숙해진 얼굴로 선호를 보며 밝게 웃는다. 수많은 함께한 시간을 고작 작은 메모지에 가둬버리곤 선호를 떠났던 그 사람, 라이관린이었다.



판섢 rps _____ 트위터 @bsso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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