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의 손에 들린 잔에서 투명한 액체가 잔잔히 일렁였다. 드라이진과 베르무트를 제멋대로 섞어 얼음을 반쯤 담은 잔에 쏟아 넣고는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 속삭이는 수진. 내가 좋아하는 마티니를 만드는 모습이 들떠 보여 퍽 귀여웠다.

 

“올리브나 레몬은 준비를 안 해두는 건가?”

“그런 거 제때 안 먹으면 쓰레기나 되는 걸. 그냥 술만 있으면 돼.”

“마티니라. 자기가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나?”


수진이 제가 꺼낸 술병을 정리하며 물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나, 라. 나는 수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 물음을 곰곰이 곱씹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삶이었노라 말을 할까. 그게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 수진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돌아볼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조금씩 늘었어. 이런 저런 행사 참여하려면 가볍게라도 한 잔씩은 해야 하니까.”

 

수진이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티니를 담은 잔 두 개를 들어 내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얼음조각이 흔들리며 잔을 두드렸다. 수진이 적당히 한기가 어린 잔을 내게 내밀었다. 이미 칵테일의 맛을 아는 입에서 침이 저절로 고였다. 곧 입에 머금을 그 한 모금의 액체가 얼마나 달게 내 안을 적시고 쓰게 내 안을 타고 내려갈까.

 

“건배.”

 

수진이 나를 보며 잔을 올렸다. 우리는 나누어 쥔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각자 쭉 들이켰다. 독한 향이 갈급한 입안에 퍼졌다. 아 ……, 나도 모르게 몸을 떨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갈증에 타들어가는 몸이 시원한 칵테일에 흠뻑 적셔지는 것 같았다.

 

“좋다 …….”

 

나는 헐벗은 스스로를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며 수진의 어깨에 기대었다. 우리는 여전히 정사를 치른 나의 거대한 업무 책상 위에 있었다. 수진이 잔을 내려놓고 팔을 뻗어 내 몸을 감쌌다. 차가운 손바닥이 내 몸을 더듬어 이내 꽉 옥죄듯 붙들었다. 그 뜨겁고 서늘한 감각이 좋아 나 역시 잔을 내려놓고 수진의 몸에 더 깊이 기대었다. 노을이 졌고 어둠이 내렸고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 너머로 비행기의 불빛이 깜박거리며 지나갔다.

 

“우리 오늘 그냥 여기서 잘까?”

“자는 건 문제가 없는데 일어날 때 온몸이 욱신거리고 결릴 거 같아.”

“아, 내가 또 중년 애인 배려 따위 안 하는 말을 했네.”

 

혼내줄래? 수진이 은밀히 속삭였다. 혼내지지도 않으면서 혼내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는 수진의 코를 깨물었다. 수진은 깨물린 코로 내 얼굴 곳곳을 누비며 연신 낮은 웃음을 흘렸다. 미소를 짓는 수진의 모습은 어릴 때처럼 여전히 싱그러웠다.

 

수진의 변함없는 모습은 나를 예전처럼 설레게 했다. 예전처럼 설레면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이 다시금 살아났고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하고 또 그만큼 슬프게 했다. 기억의 끝자락이 무디어진 머릿속을 강하게 할퀴고 사라지면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늘, 그렇게. 울음에 인색한 나로서도 도저히 그 울음만큼은 이겨낼 수 없었다.

 

“좋은 날에 왜 울어. 응?”


나는 우리의 체향이 고인 수진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조용한 흐느낌은 백색소음처럼 이어졌다. 나는 수진의 품에 안겨 곧 잠을 잘 터였다. 5분이든 1시간이든, 그 품에 안기고 나면 수마처럼 쏟아지는 잠으로 혼곤해졌다.

 

수진은 내게 자라며 속삭였다. 자, 내가 알아서 할게. 수진이 그리 속삭일 때면 오래도록 뛰기를 거부했던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수진은 예전의 수진이 아니고 나 역시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나서 나는 또 기쁘고 슬프고. 잠이 들 때까지 내게 닿는 수진의 입술이 너무도 부드럽고 달아서 설레고 서글프고. 나는 그러는데 말은 못하고 다만 수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노래 들으면서 자. 나도 같이 눈 좀 붙여야겠다.”

 

수진은 빌리 조엘의 ‘Piano Man’을 틀 테다. 삶의 모든 감정이 녹아있는, 영원히 늙지 않는 그 곡이 흐르면 나는 깊이 잠이 들고 그런 나를 수진은 오래 지켜보겠지. 피아노 간주가 시작되었다. 하모니카 멜로디가 뒤이어 흐르고 씁쓰레한 가사가 읊조리듯 퍼지면 그 사이로 수진이 사랑해, 사랑해, 속삭이며 노래는 계속될 터였다.

 

수진이 내게 사랑을 10번 말하면 나는 그 중에 5번은 무시했고 3번은 의심했고 1번 흔들리다 마지막 1번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전했다. 우리는 그랬다. 나는 잠에 빠져들며 의문했다. 내가 네게 얼마나 많은 확신을 주었을까. 네 마음에 들어차도록, 흡족하도록, 답을 한 적이 있던가.

 

수진아, 내가 네게 사랑한다고 말을 했던 적이 언제였지. 그랬던 적이 있기는 있었나. 속으로 무수히 속삭이던 그 말을, 네가 알도록 소리 내어 뱉은 적이 있기는 있었겠지.

 

1995년 어느 초여름의 한낮이었다. 아직 매미가 울기 전의 그날은 엷은 신록이 은은히 퍼진 거리가 무척이나 맑고 고왔다. 그리고 아직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은 내 몸 역시 그만큼이나 연연했다. 마치 비가 내린 뒤에 더욱 본연의 색을 내뿜는 색색의 나무들처럼, 나는 젊고 생생했다.

 

수진과 처음 만날 날의 나는, 그러했다.

 

온성주 회장의 집은 아주 잘 관리가 된 박물관의 냄새가 났다. 우성 알파가 세 명이나 있는 그 집은 어떤 것보다 그 향으로 나를 맞이했다. 우성 알파를 실제로 대면하는 일은 오메가, 그것도 나처럼 고아로 자란 오메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페로몬에 노출되어 본 경험이 일천한 나는 현관에 목석처럼 서서 발을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박제가 된 공간의 향이었다. 오래되어 그 가치가 진귀하게 된, 아주 비싸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고급스러운 향이 현관에 우두커니 선 나를 감쌌다. 내가 앞으로 디뎌 발을 들여야 할 공간이 너무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섞여서는 안 될 불순물이 되어 그 한곳에 동동 떠있는 기분이었다.

 

“거기 멀뚱히 서서 뭐하나. 들어오지 않고.”

 

온 회장은 거대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회장님이 나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에 서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온 회장은 강건한 그 몸을 안락한 소파에 깊이 묻고 신경질적으로 티브이의 리모컨을 달깍거렸다.

 

달깍, 소리를 내며 티브이 속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그 안에서는 똑같은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붉은색으로 굵게 써진 ‘속보’라는 글자가 어느 채널에서든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종잇장처럼 찢어져 폐허가 되어버린 백화점의 참상이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중계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채널을 계속 돌리던 온 회장이 티브이를 향해 리모컨을 집어던졌다. 그것은 티브이의 가장자리를 부수며 산산조각이 되어 응접실 바닥에 흩어졌다. 실금이 간 티브이 화면에서 사이렌이 왱왱 울었다. 그 불온한 경고음이 허공에 치솟는 연기와 그 위를 돌아다니는 헬리콥터의 소리와 버무려져 계속 커져가는 것 같았다.

 

부엌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인이 서둘러 응접실을 내달려 온 회장의 분노로 박살이 난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곳에 서있었다.

 

“…… 들어오세요.”

 

더 큰소리가 나기 전에요, 아주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서야 나는 티브이에서 눈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회장님은 두 번 말하는 거 굉장히 싫어해요.”

 

크고 둥근 두 눈이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고, 두려움이 깃든 그 새카만 눈이 내게 애원했다. 15살의 수진이었다. 이제 막 우성 알파로 진화를 한 앳된 수진이 내게 차마 손을 뻗지 못하고 그저 손을 움찔거렸다. (*우성 알파로 ‘진화’는 우성 알파를 상징하는 ‘성기’가 완전히 갖추어 졌을 때를 말하며, 평균 14세-15세가 되면 페로몬 샘이 열리며 우성 알파로의 성징이 완료된다.)

 

어린 우성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은 초여름의 신록처럼 푸르고 싱싱했다. 그 페로몬으로 인해 몸이 동한다거나 이상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특유의 페로몬이 우성 알파 개인을 특정할 수는 있었다. 이를 테면 기억에 남을 첫 인상과 비슷한 맥락의 어필이었다.

 

이렇게 어린 우성 알파를 대면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고 자란 보육원은 쓸모 있는 오메가를 애인이나 노예로 삼으려는 완숙한 우성 알파만이 드나들었다. 그들이 풍기는 향은 온 회장의 그것처럼 탁하고 진하여 나 같은 오메가를 숨이 막히게 하곤 했다.

 

수진이 풍기는 향은 그렇지 않았다. 싱그럽고 순수한 향. 갓 씻은 아기한테서나 날 법한 그 향에 이끌려 나는 수진이 원하는 대로 신발을 벗고 비로소 온 회장의 집에 발을 디뎠다. 수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하며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 수진의 어깨 너머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수진을 뒤에서 껴안았다.

 

“언니, 나 무서워.”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끔벅거리며 수진에게 안아달라며 두 팔을 벌렸다.

 

“안 돼, 회장님 계실 때는 안 된다고 했잖아.”


아이는 수진에게 언니, 언니, 속삭이며 눈물을 흘렸다. 수진이 온 회장을 흘끔거리며 재빨리 아이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냈다. 5살의 수현이었다. 믿을 수없이 하얗고 예쁜 작은 우성 알파가 새빨간 입술을 우물거리며 제 언니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수현이 착하지? 선생님 오늘 처음 오셨는데 이렇게 울보처럼 굴면 어떡해.”

 

수진은 여전히 울먹이는 동생을 부드럽게 달랬다. 수현은 그제야 제 앞에 서있는 나를 곁눈질하며 주춤거렸다. 그러다 내게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줍은 작은 입술이 내게 그리 웅얼거렸다. 나는 내가 목격한 우성 알파 중에 가장 작고 아름다운 존재에게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가 ‘막내 주인님’이라 불러야 할 5살의 수현은 그토록 어여뻤다.

 

내가 이 성으로 오게 된 이유인 막내 주인님에게 마음을 빼앗긴 찰나, 응접실에서 홀로 화를 내던 온 회장이 소파 옆에 있는 앤티크 전화기를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내가 저기에 얼마를 쏟아 부었는데 무너져!”

 

온 회장이 자신이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낸 전화기의 조각을 발로 짓밟으며 소리쳤다. 꺼지지 않은 티브이에서는 여전히 무너진 참사를 중계하며 신원 파악이 된 사망자의 수와 그 성명을 한 줄로 내보내고 있었다.

 

나와 내 앞의 자매는 길길이 날뛰는 거대한 온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망한 눈빛으로 서로를 곁눈질하며 얼굴을 붉혔다. 사망자를 의미하는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했고 화면에 흐르는 성명의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온 회장의 분노 역시 커져갔다.

 

“언, 언니 …….”

 

수현이 새된 음성으로 수진을 불렀다. 창백하게 질린 수현이 소리 없이 울며 얼굴을 찡그렸다. 온 회장이 뿜어내는 광폭한 분노에 겁을 먹은 막내 주인님이 오줌을 지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수진이 입술을 깨물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망하게 떨리는 그 눈빛이 내게 닿았다. 도와달라고 그 눈이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었다. 그리고 벌벌 떠는 막내 주인님의 메마른 다리 앞에 엎드려 바닥에 번져가는 소변을 손에 쥔 카디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아이의 똥오줌을 치우는 일은 보육원에서 자라온 내게 익숙한 일이었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나마 이 집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차피 이 집에 들어온 이상 매순간 나의 ‘쓸모’를 그들에게 증명해야 할 터이니.

 

“한심한 것.”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온 온 회장이 침을 뱉듯 말했다. 엎드린 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바닥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와 훅 끼치는 공격적인 페로몬으로 온 회장의 경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오들오들 떠는 수현의 작은 몸을 덮었다.

 

“네가 오줌을 지리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뭐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일갈이었다. 그 귀하디귀한 우성 알파가 이토록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것에 나는 아연했다.

 

“이렇게 한심할 줄 알았더라면 데려오지 않는 건데, 제기랄.”

 

온 회장이 서재로 가며 수현의 몸을 강하게 밀쳤다. 바닥에 쓰러진 수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파랗게 변한 얼굴로 파르르 떨었다.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던 내 눈에 그런 수현이 담겼다. 나는 나의 막내 주인님을 위해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감히.

 

온 회장이 서재의 문을 부술 듯 닫으며 사라져서야 나는 겨우 굽은 상체를 들어올렸다. 수진이 한없이 가여운 눈길로 바닥에 넘어진 제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이 천천히 몸을 수그려 소변으로 젖은 수현의 몸을 껴안아 품었다. 그리고 바닥을 짚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최초의 접촉이었다. 소변에 잔뜩 젖은 내 손을 잡은 그 순간이 수진과 닿은 처음이었다.

 

“그거 그냥 두시고 절 따라오세요.”

“어디로 …….”

“머무실 방으로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수진은 내 손에서 젖은 카디건을 빼어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실신한 듯 늘어진 수현을 소중히 껴안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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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더 올릴게요.

조금은 어둡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될 예정이에요.

저의 감이 잘 올라오고 있는지 독자님들께서도 확인해 보세요.

다양한 이야기를 새롭게 쓰고자 하는 GL 소설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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