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OUR TIME FOR






내가 너의 이름을 부름으로 인해서
닫혔던 내 마음의 빗장이 열렸어.

한번 열린 그 문은 닫을 수가 없어.
한번 부른 네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네 이름을 불렀던건..

내가 너에게 의미있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야.

소중한 그 무엇이.






모든 바쁜 나날이 끝난 겨울.
 진우와 민호의 집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부모님께서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여행을 가시기 때문.

민호는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부모님의 여행 준비를 도왔고, 진우는 거들고 싶지 않다는 듯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민호가 혼자서 짐을 다 나르는 것을 두고 보기가 힘들어 한번씩 도와주고 있었다.


집에서 보는 진우의 표정이 늘 그렇듯 그다지 상쾌하지 않아 보이는 반면, 민호는 무엇이 그렇게 신났는지 연신 생글 생글 거리고 있다.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으며 진우가 쏘아 붙인다.


“ 뭐가 그렇게 좋아서 바보처럼 웃어?”
“ 으흐흐, 그런게 있어!”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진우의 물음에 민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설레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우는 그저 실없는 놈이라고 내뱉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이번 부모님의 여행이 철저한 민호의 계획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소문에 의하면 여행지 선정부터 비행기 예약, 숙소 예약까지 민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부모님들은 그저 민호의 부추김 반, 즐거움 반으로 허허 웃으며 여행을 준비할 뿐이었고, 진우는 그런 민호의 의도를 알길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두 사람은 진우가 보기 싫을 정도로 화목한데 굳이.


진우가 그에게 왜 그런 쓸데 없는 일에 에너지는 쏟느냐, 수능 끝나고 할일이 그렇게도 없냐고 핀잔을 주어도 민호는 도리어 다 작전의 일부라는 둥, 자신의 깊은 뜻을 네가 어떻게 아냐는 둥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그저 그의 바보같은 행동에 동조하고 싶지는 않아서 진우는 그저 일이 어떻게 진행되나 방관자처럼 지켜볼 뿐이었다.


부모님께서 집에서 나와 차 앞에 서셨다. 민호는 여전히 기분좋은 웃음을 짓는다.
진우는 그저 현관문에 기대 서 있었다.

“ 다녀오세요~ 좋은 추억 만드시고. 뭐, 동생을 만들어 오셔도 됩니다.”
“ 흠흠.”
“ 실없는 소리는..”


민호의 난데 없는 말에 연신 헛기침을 해대는 아버지와 핀잔을 주는 어머니. 진우는 어쩌면 당연한 가족의 모습을 저만치서 보고만 있었다.

참으로 단란한 가족 분위기다.
다만 아직도 겉돌고 있는 자신에게는 점 점 더 멀어지는 그런 모습일 뿐.
아주 어렷을때는 단란한 가족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은 후,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새롭게 생겨버린 어머니라는 존재. 어린날의 진우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혼란스러웠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이십대가 되어도 여전히 어색할 뿐.


“ 진우야, 얼른 와서 너도 인사해야지!”


그런 자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보같은 송민호는 자신에게 손짓하며 부른다. 그런 행복한 가족놀이에 끼고 싶지 않은데 이상하게 민호의 부름에 진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 다녀오세요."


진우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순간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진우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녀의 표정이 미묘했다.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사람 치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지난 여름 즈음부터 어머니께서 부쩍 자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물론 어렷을때 부터 진우도 그녀를 대하는게 어색하고 불편했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서로 대화를 할만한 자리를 만들지 않았었지만, 자신이 피하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피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느낌이다.

수능이 코앞이라 그동안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 유난히 매서운 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다.


“ 엄마, 뭐하세요? 얼른 타시라구요!”


민호는 길에 서 있는 어머니를 강제로 차에 태우다시피 하고는 차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신나게 손을 흔들어 댄다.


“ 다녀오마. 집 잘보고 있거라.”
" 민호야. 무슨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알았지?"
" 엄마는, 나 다컸어. 부끄럽게 무슨."


민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두 사람에게 툴툴거린다. 곧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게 보여졌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민호가 옆에 서 있던 진우에게 다가와 그를 꽉 끌어 안았다.

놀란 진우는 토끼눈이 되었다.


“ 야, 뭐야.”
“ 얏호! 이제 우리 둘 세상이야!”


민호는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원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목소리로 들떠 외쳤다. 진우는 갑작스런 민호의 행동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자신을 꼭 끌어안은 민호를 힘겹게 밀어냈다.
민호도 머쓱한지 배시시 웃는다.


“ 벌건 대낮에, 집 앞에서 뭐하는 거야, 송민호. 힘만 세가지고.”
“ 흐흐, 미안. 너무 흥분 했나봐.”
“ 집에나 들어가자.”


입이 귀에 걸려 하늘 만큼 흥분해 있는 민호가 그리 밉진 않은지 진우는 그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강아지 같이 배시시 웃는 민호.

가끔 이렇게 돌발 행동으로 자신을 놀래키긴 하지만 예전 보다는 뭐랄까, 마음이 누그러진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든 것도 그 무덥던 여름의 한 가운데부터였던 것 같다. 약에 취해서, 몸에서 나는 열에 취해서 잠들어 있던 민호의 이마에 자신도 모르게 입맞췄던 그 순간부터.

아무리 지우려 해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부터,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 민호라는 존재가 좀 더 의미 있어 진 것 같다.


" 진우야, 우리 뭐 할까?"
“ 어?”
“ 3박 4일 동안 부모님이 없잖아. 으흐흐.”
“ 그래서, 뭐? 난 너랑 놀 시간 없는데?”
“ 어.. 왜? 야, 김진우. 거기 서봐."


음흉한 웃음으로 웃어대던 민호는 시간이 없다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진우를 불렀다. 진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자 민호는 졸졸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보챈다.


“ 너 약속 같은 거라도 있어?”
“ 왜.”
“ 안돼. 취소해.”
“ 왜.”
“ 아, 안된다고~ 내가 부모님을 왜 여행 보내버렸는지 몰라? ”


민호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억울해 하는게 보인다.
사실 약속 같은건 진우에게 없었다. 그저 이유 없이 들뜬 민호를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일부러 부모님을 그리 보냈다는 민호의 자백에 오히려 당황한 진우.
눈을 동그랗게 뜬다.


“ 왜 그랬는데?”


진우의 되물음에 민호는 속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애써 진우의 시선을 피하여 중얼거리듯 말한다.


“ 아.. 그러니까.. 수능도 끝나서 학교도 안 가는데, 엄마가 자꾸 너 따라 다닌다고 뭐라고 하니까 귀찮아서... 그래서 너랑 같이 오붓하게 있어 보려고.. 아하하하.”


민호의 볼이 빨갛게 물든다. 늘 저돌적인 척 진우에게 자신의 마음을 툭툭 내뱉으면서도 이런식으로 말하는 건 부끄러운 모양이다.


진우는 웃음이 나왔다.
수능도 끝나고 학교도 가지 않은 요즘.
민호는 수시로 진우의 방으로 처들어와 같이 놀자라든가, 같이 외출하자고 했지만 진우는 선뜻 그러자하고 대답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를 형제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일들이 쉬웠을까.
하지만 진우는 정말로, 그를 동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선뜻 그러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내심 없는 민호가 선택했던 건 같이 나갈 수 없다면 둘 만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진우는 부끄러워하는 민호가 귀여웠다.
자신보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굵고 이런 저런 모습을 보아도 나이가 어리다는 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럴때는 꼭 한 번씩 그런 모습이 느껴진다.

" 뭐야, 그게.”
“ 아, 진짜. 몰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단둘만 있을 수 있는 순간을 꿈꾼다. 그렇다고 밀월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둘이 있고 싶으니 유일한 방해물인 부모님을 여행보내버리는 녀석. 진우는 그런 민호가 싫지만은 않다.


지금 이 집안에, 이 공간에는 민호와 자신 밖에 없다.
두사람의 관계를 가족으로 정의내릴 사람도, 그렇기에 눈치봐야 하는 상황도 없다.



조금 더 내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보여도 될까...

진우의 마음 속에서 누군가가 솔직해져보라고 이야기 한다. 늘 숨겨왔던 마음이, 억눌러져있던 감정이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한다.


나는 저 녀석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와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걸까.
저렇게 환하게 웃는 녀석을, 애써 외면 하고 있지만 자꾸만 자신을 향해 묵묵히 걸어오는 저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와.. 뭘 하고 싶은 걸까.


진우는 민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계단 올라가다가 멈춰선 진우를 따라 멈춰서있는 그를 가만히 보았다.
이렇게 따스하고, 잘생긴 아이가 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나 처럼, 마음속에 까만것들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을.
네가 웃으면 한없이 내 세상은 밝아져.
그런지 좀 됐어. 나 스스로도 그걸 깨달은지.


진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서있는 민호의 옆을 스쳐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갑작스런 진우의 행동에 놀란 민호가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묻는다.


“ 어, 어디가?”


자신의 옷 자락을 잡은 손. 미묘하게 느껴지는 그에게로의 끌림.
그가 당기는 만큼 아직 내가 다가갈수는 없지만, 그래도.


“ 민호야. 배고프다. 밥 먹자.”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진우.

계단에 나 있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진우를 비춘다.
커다란 눈이 반달처럼 휘어져 환하게 웃는 진우의 모습이 눈부신건 햇살 때문이라고 민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멎을것 같아서.


“ 너..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 밥먹자고 했지."
" 아니, 그거 말고. 방금 내 이름 불렀잖아."

민호는 멈춰서있는 진우의 가까이로 성큼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진우는 조금 흠칫 놀랐지만 이내 다시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때보다 가까웠다.
마음의 거리도 어느때보다.

생각해보니 진우가 먼저 저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것도 처음인것 같다.
그리고 잘못들은게 아니라면.. 평소처럼 송민호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데.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까이 다가와있는 민호에게서 등을 돌려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눈빛에,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들키지 않으려 민호가 가까이 다가온 만큼 다시 한걸음 먼저 걸었다.
민호는 그런 진우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 다시 한번 불러봐.”
“ 뭘.”
“ 그러지 말고, 한번 만 더 불러줘."


애교 섞인 눈웃음을 짓는 민호.
키도 자신이 훨씬 크지만 진우의 앞에만 서면 옛날 그 시절처럼 마냥 어린 되고 싶어진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숨길수가 없다. 이렇게 손목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기가 통하는 듯 온몸이 저릿저릿한데. 참을 수가 없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민호에게 잡힌 손을 물끄러미 보던 진우는 고개를 들어 민호를 보았다.
웃었다. 그는 자신이 웃는 걸 좋아하니까.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 민호야.”


어느 시인이 그렇게 말을 했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꽃이 되었다고.

이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다는 것이. 이런 두근 거림과, 이런 설렘으로 가득 차는 걸까.

민호의 심장이 터져나갈듯이 두근거린다.
민호는 진우에게 한걸음 더 다가갔다.


" 한번만, 더 불러줘. 네 목소리 좋아."


그윽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민호.
진우는 순간 긴장했다.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 지금 이렇게 떨린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진우는 민호에게 잡히지 않은 팔의 팔꿈치로 그의 가슴께를 쳤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계단으로 다시 내려갔다.

민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속과는 반대로 이미 올라가기 시작한 광대가 그의 기분을 이야기 해준다

이름을 불러주는게 무슨 그런 큰일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큰 의미였다.
처음이었다. 송민호가 아닌 민호라고 불러준건.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부터, 아니 그 어릴적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진우의 예쁜 얼굴이, 그의 빨간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작은 사소함 하나이지만, 언제나 자신을 밀어내는 그의 곁에 백만 걸음 정도 더 다가간 기분이었다









“ 아, 배부르다. 으흐흐.”


아까부터 허파에 바람든 사람처럼 연신 웃어대는 민호.
진우는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떼고 있었다.

식탁 가운데 놓여진 부대찌개.

자신이 서투른 솜씨로 만들어 본 건데도 민호는 맛있다며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진우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의 그릇을 보며 핀잔을 준다.

“ 그렇게 꾸역 꾸역 먹으니 배가 부르지.”
“ 맛있어서. 헤헤. 우리 진우가 요리도 잘하는 지 몰랐네?”
“ 너 보다 라는 말을 붙여야지.”

진우의 지적에 민호가 피식 웃는다.

가끔 이런 환상을 꿈꾸곤 했었다.
자신과 진우가 나란히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고, 함께 웃는 생각.
진우가 다정하게 자신을 불러주고, 웃어주는 그런 환상.

언제까지나 환상일거라고 생각했다.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함께 있고 싶어 벌인 바보 같은 일인데, 그 바보 같은 일이 뜻밖의 선물을 가져다 줬다.


“ 설거지는 네가 해라.”
“ 왜?”
“ 내가 부대찌개 끓였잖아.”
“ 안해, 안해 안해. 그런거 없어!”


평소의 민호라면 군말없이 설거지를 했겠지만, 오늘의 민호는 되도 않는 고집을 부려보고 싶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진우가 좋다.
진우는 알고 있을까. 작고 하얀 얼굴에 빼곡히 차 있는 그의 눈 코 입이 만들어내는 표정이 저렇게 다양하다는 걸. 그리고 그 모든 표정을 이미 자신은 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어떤 표정을 지어도, 어떤 말을 해도 그저 지금 네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 양심도 없어.”
“ 히히, 그러지 말고~ 내기하자, 내기.”
“ 무슨?”
“ 축구게임해서, 지는 사람이 설거지 하기.”
“ 싫어. 그런거 안해.”
“ 왜~ 한번 해보면 재밌어."


민호는 불만으로 볼이 통통해진 진우의 손을 잡고 거실로 끌었다. 진우는 못이기는 척 하며 민호를 따라갔다.
거실에는 민호가 애지중지하는 게임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활동적인 민호와 달리 그런 것에 전혀 취미가 없던 진우가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민호는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모으는 걸 좋아했다.
게임기도 종류별로, 지금은 타지 않지만 오토바이 관련 용품도 가득가득.
요즘은 진우에 대한 것들로 마음속을 가득 가득 채우고 있다.

민호는 신이난 몸짓을 하며 게임기를 연결하고는 진우를 불렀다.


“ 진우야 뭐해~ 옆에 와서 앉아.”


쇼파에 앉은 민호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친다.

진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민호는 조이스틱 하나를 진우에게 건네주며 버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설명을 심각하게 듣던 진우는 난색을 표했다.


“ 복잡한데?”
“ 아냐, 한번 해 보면 쉽다니까.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 이런거 보고 어렵다고 해서야.”
“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 그럼 네가 설거지를 하든가. 참고로 게임으로 해도 나한테 못이길지도 몰라. 나 승부욕이 강하다고. 너한테도 안봐줘.”


으스대며 말하는 민호가 밉지 않다.
진우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가벼운 터치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자신이 더 어색하다.

진우는 서둘러 그가 가르쳐준대로 조이스틱을 잡고 투지를 불태웠다.
그가 해주었던 설명보다 실제는 몇배 더 어려웠다.
슬쩍 곁눈질로 본 민호의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뭔가 속은 기분.

게임을 하면서 계속 표정이 변하는 민호를 보는 것이 재밌다.


너는 즐거울 때 그런 표정을 짓는 구나.
늘 너는 내가 하는 것, 내가 하고싶은 것들에 맞춰줘서 네가 뭘 좋아하는지, 네가 뭘 잘하는지는 생각해 보질 못했었네.

이렇게 너랑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도 좋다.
생기있는 표정을 짓는 너를 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뭐랄까 마음이 뿌듯하다.



그들의 축구게임은 계속 되었다.
계속 해서 지는 진우와 억울하면 다시 또 하면 되지~라는 서글서글한 말을 내뱉은 민호 덕분에 설거지는 그대로 쌓여있었다.

그렇게 특별할것도 없지만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하루의 나날이 저물어간다.







“ 진짜 사람 많네. 그냥 집에 있자니까.”
“ 그래도~ 집에만 있으니 재미가 없잖아.”


영화가 시작할 시간을 기다리며 극장 의자에 앉아 있던 진우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며 갑갑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민호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손에는 나쵸와 큰 사이즈의 콜라 한 개를 들고서.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민호에게 게임을 배운 진우는 손가락의 지문이 다 없어 지도록 조이스틱을 쥐고 놓질 않았고 때문에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마자 민호는 진우를 흔들어 깨웠다.


-영화보러가자, 조조 영화.


자신과 함께 게임하느라 분명 민호도  늦게 잤을 텐데도 말끔한 모습으로 금새 변신해서는 진우를 흔들어 깨워댔다.

진우가 귀찮다는 듯 발길질을 해대었음에도 불구하고 민호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를 일으켜세워 반강제적으로 욕실로 밀어 넣었다.


‘ 얼른 안 씻으면 씻겨준다! 으흐흐..’


변태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는 민호에게 아름다운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준 진우는 그제서야 씻으며  민호의 행동에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도 즐거워하는 민호의 모습은 처음봤다.


그렇게 끌려나온 영화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며 민호는 그의 의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영화표를 끊어왔고 진우는 낮시간, 사람이 바글바글한 극장에서 약간의 짜증을 내고 있었다.

커다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 쓰고서 연신 툴툴거린다.


“ 아침부터 그리 수선을 떨더니, 이게 뭐야."
" 네가 늦게 일어나서 그렇지."
" 고작 영화보려고 잠도 안자고 사람을 아침부터 못살게 굴고."

삐친 사람처럼 툴툴거리는 진우를 보며 민호의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민호는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 고작이라니~ 내가 너랑 하고 싶은 게 백 만가지 쯤 있는데 그중에서 네가 안 해줄 것 같은건 빼고, 또 뺀 결과라고.”
“ 백 만가지는 뭐냐?”
“ 흠.. 놀이동산 가서 토끼 머리띠 끼고 사진찍기라던가..”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것을 읊어대는 민호.
그렇게 말할때마다 실룩이는 그의 입꼬리.
진우는 워낙 키가 크고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 그리고 거기에 대한 패션감각까지 지닌 민호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힐끔 거리고 보는게 느껴졌다.
그 옆에 있는 자신은 어떻게 그들에게 비춰질까, 사뭇 의식되는 건 왜인지 알수가 없다.


“ 야, 다 들었어?”
“ 어, 뭐?”
“ 나 금방 공원에서 커플 자전거 타기 까지 말했다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민호의 얼굴표정이 밉지는 않다. 진우은 그가 꼽아놓은 손가락을 모조리 펴면서 피식 웃었다.


“ 그런건 애인 생기면 하셔요. 송민호씨.”
" 그러니까. 너랑하고 싶어."
" 또 오버한다."


민호는 입을 삐죽거리며 원망의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계속 그에게 말해왔다. 자신의 진심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질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이 지속되고 나이가 들어 갈 수록 처음엔 마음을 전하기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던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로 바뀌고 있다.

그런 자신을 발견 했을 때 스스로도 당황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
늘 상처가득한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웃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다정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 목소리가 좋은 그의 옆에 늘 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이젠 어쩔 수 없다. 스스로도 멈출수가 없다.

그러나 진우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끔 저런 말들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순간 갑자기 진우가 자신의 손을 꼭 잡았다. 입을 삐죽이던 민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동그랗게 뜬 그의 표정이 귀엽다.


“ 놀라긴. 들어가자.”


그제서야 민호는 전광판에 입장을 재촉하는 사인이 떴다는 걸 알아차렸다.
민호는 옆에 놓아두었던 나쵸와 빅사이즈 콜라를 손에 들고서 일어났다.
진우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들에 시선을 한번 주고는 무심하게 물었다.


“ 근데 왜 콜라가 하나야? 돈없어?”
“ 대신 사이즈가 크잖아.”
“ 빨대도 하나잖아.”
“ 같이 먹으면 되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민호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진우의 웃음소리.
그 웃음을 듣는 민호는 마냥 행복했다.
지금 옆에서 걸어주고 있는 그 사람이, 자신의 옆자리에서 함께 영화를 봐줄 그 사람이 바로 그라는 사실 만으로.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어스름한 하늘빛이 조금씩 지상으로 내려앉는 늦은 오후. 사랑하는 사람과, 혹은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나는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과, 일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안락한 보금자리로 향하는 사람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후의 길거리를 카페의 창가자리에서 넌지시 바라보는 두 사람.


“ 나 오늘 재미있었어. 너는?”
“ 어? 응.”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 창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진우는 뒤 늦게 그의 물음에 맞지 않는 대답하곤 멋쩍게 웃었다. 민호는 자신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마시더니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이 참 멋지다.


“ 아무 것도. 그냥.”


사실 거짓말이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거리를 바라보면서 어제부터 오늘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나 -마치 예전처럼 그래왔던 것 처럼- 그의 이름을 상냥하게 불렀고, 그에게 웃어주었다. 그를 위해서 서툴지만 요리 솜씨도 발휘해 보았고, 그가 좋아하는 게임도 같이 했다.

슬그머니 의자 팔걸이를 올리고서 자신에게 가까이 몸을 당겨 앉아 영화를 보는 그를 모른척 했고, 기지개를 펴는 척하며 자신의 어깨를 감싸오는 그의 팔을 그대로 두었다.
가끔 곁는질로 힐끔 그의 즐거워하는 얼굴 표정을 보며, 심장의 두근거림도 느꼈다.


이런 기분. 분명히 가슴을 설레게하고, 두근거리게 하고, 그리고.. 부끄럽지만 자신에게도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로 인해 즐거워 하는게 왠지 어색해져버린 그때이후로.


‘ 이렇게, 마냥 좋아해도 되는 걸까... 나는 이 녀석이랑 형제인데.’


내면의 또 다른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한적 없다고 부인해 왔는데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결론은 내려지지 않는다.
그런 생각들이 진우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 진우야, 표정이 안좋아, 너.”


그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민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진우는 애써 웃었다.


너를 보면 자꾸 기분이 좋아진다.
너를 보면.. 자꾸 마음이 편안해진다.
너를 보면.. 자꾸 네 이름을 불러주고 싶고, 네 머리카락을, 네 손을 만지고 싶어져.
근데.. 이래도 되는 거니.
넌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거야?


마음은 숨긴다.


“ 피곤해서. 아침부터 난데없이 일으켜져서는, 영화보고, 밥먹고, 스케이트 타고, 시내를 걷다가 카페. 생각해봐라, 안 피곤하겠는지.”


진우는 가볍게 민호를 째려보며 약간의 장난 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일단은, 아무런 생각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도 이야기 했다.
민호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 저으며 팔짱을 끼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아, 너무 끌고 다녔나.. 체력이 약해서 안 되겠네, 우리 진우.”
“ 우리는 개뿔. 네가 비정상인거야.”
“ 그럼 이거만 마시고 밥은 집에 가서 먹자.”
“ 헉, 그럼 이거 마시고 또 딴 거 하려고 했었어?”


걱정하는 목소리로 선심쓰듯 집에 가자라고 이야기하는 민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진우. 장난 칠때면 언제나 반달로 휘어지는 민호의 눈꼬리가 또 싱긋 거린다.


“ 당연하지. 이렇게 네가 착하게 나를 따라와 줄 일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겠냐. 기회 있을 때 쭉쭉 뽑아야지. 아야, 왜 때려. 헤헤.”
" 진짜, 유치하다 송민호."

민호의 발언에 가볍게 그의 머리를 때리는 진우. 민호는 맞은 곳이 아픈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웃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다. 늘 웃는다. 자신을 보면.



“ 어머, 민호야!”


그런 생각을 하며 민호를 바라보던 진우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자신뿐 아니라 민호도 놀란 듯 소리가 나는 쪽을 보고 있다.

진우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민호에게는 아닌 것 같다. 자신에게 웃어주던 그 눈이 소리가 나는 쪽을 보고 또 웃는다.


“ 어, Hi~”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는 민호. 민호의 인사를 받은 여자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와 자연스럽게 민호의 옆에 앉았다.


진우는 이 상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너무나 편했던 민호와의 자리가 갑자기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 어, 친구랑 있었나봐. 미안해~”


그녀도 진우를 발견하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지만 목소리 톤으로나, 얼굴 표정으로 보나 그냥 인사치레에 불과한 것 같다. 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민호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는다.


“ 웬일이야, 여긴. 오랜만에 보네.”
“ 아, 친구랑 만나기로 했거든. 올 때까지 여기 앉아있어도 돼?”
“ 아.. 그게..”

민호는 말꼬리를 흘리며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진우는 관심없다는 듯 차가운 김진우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민호가 곤란해 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저 민호의 안부와 그녀의 근황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 그때, 너 갑자기 이제 바이크 안 탄다고 해서~ 애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아? 사실, 네 친구들 중에서 네가 제일 인기 많았잖아.”
“ 하하.. 다 옛날 이야기인데 뭐..”


민호가 멋쩍게 웃는다.

그랬다. 비가 쏟아져 내리던 그 날 밤. 진우가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던 그날 밤. 그 후부터 민호는 친구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친구들이 원망과 질타를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진우의 옆에 좀 더 오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또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진우를 둘러싼 복잡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감정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 학교에서 일부러 그를 찾아갔던 그날. 복도끝에서 걸어오는 진우를 보면서 민호는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 복잡한 감정은 사실은 하나였다. 그는 진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날 우연히 강가에서 그를 발견하고 얼마나 설렜던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보는 진우의 매서운 눈빛이 왜 그리 좋던지.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그의 손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서툴렀지만 그에게 키스 했었던 그 날의 용기.

진우가 있었기에 지나왔던 그 날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민호는 저렇게 웃기도 하는 구나.

진우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늘 자신 곁에서 빙글 빙글 도는 민호의 주변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의 앞에서만 웃고, 늘 자신의 앞에서만 저런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웃는민호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생각은 큰 착각에 불과했다는 진실이 머리를 관통하는 기분이다.
갑자기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는 기분이 든다.
좀전까지 느꼈던 민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과대망상처럼 느껴진다.
약에 취해 있다가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잔인하게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린다.

진우는 그런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초라해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말을 던진다.


“ 나 먼저 간다.”
“ 어?”


그렇게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와 버렸다. 뒤에서 민호가 놀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바보같다고 머릿속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속삭이지만 마음속의 누군가는 계속 자신을 부채질 한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자리 옆에 놓아두고 온 게 생각이 났다.


“ 바보 같다, 김진우.”


자신에세 쓴 소리를 내뱉어 보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당연한 건데. 사교성이 좋은 민호니까.
어릴 때부터 늘 친구들이 많았고, 어른들에게도 사랑받는 타입이라는걸 알고 있었는데.

내리는 비가 책망하듯 자신에게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민호와 함께 있어 즐겁다는,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그 감정을 느껴버린 자신이 원망스럽다.

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두드려대는 민호의 그 웃음, 행동 하나하나도 원망스럽다.


“ 꿈이면 얼른 깨라고.”


진우는 자신에게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쪽이 꿈이면 좋은지는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지금의 이 상황인지, 아니면 자신이 민호에게 느끼는 그 감정의 연속인지.


“ 감기 걸려...”


걱정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내리던 비가 멈추었다.
진우는 걷는 걸음을 멈추었다. 익숙한 향기가 비에 젖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그의 얼굴이 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 그렇게 나가면 어떡해. 놀랬잖아.”
“ 피곤하다고 했잖아.”


진우는 일부러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민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아무말없이 다시 길을 걸어갔다. 민호는 그의 발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며 그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받쳐주었다.


“ 진우야, 나 한테 화 난거 있어? 내가 뭐 잘못했어?”
“ 아니.”
“ 그런데 왜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싱글 싱글 잘만 웃더니.”

민호의 말에 진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채 말한다.


“ 피곤하다고. 몇 번 말해야 돼, 피곤하다고.”
“ 진우야..”


짜증 섞인 진우의 목소리가 마음을 찌른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봐주지않는 진우가 야속하다. 자신도 곤란했었다. 그래서 진우의 마음을 살피려 그를 보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그 틈에 앉아버린 그녀를 귀찮다고 쫓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에서 예전의 진우와의 기억이 나서.. 본의아니게 조금 집중하긴 했지만 진우가 이렇게 나가버릴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진우를 따라 나왔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곤하다고 하며 짜증내는 진우.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다.


“ 피곤하게 해서 미안. 미안해, 진우야.”


또..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내뱉는 민호.
어렷을때 부터 자신이 화를 내면 바보 같은 녀석은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마음을 풀어보려고 했다.

네가 미안할 건 없잖아.
멋대로 화 내 버리고, 멋대로 걸어 나와 버린건 난데.


진우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도 민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익숙하지가 않다. 그래서 더욱 미안할 뿐이다.


방금까지도 그렇게 복잡하던 자신의 마음이 그의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누그러진다. 녹아 든다. 그의 목소리엔 그런 힘이 있다. 감정에 치우져 멋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꼭 잡아주는 그런 힘이 그에게 있다.



“ 송민호.”



쭈뼛거리며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민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민호야, 라고 다정하게 불러주고 싶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그렇게 부르기엔 자신의 마음이 들켜버릴 것만 같다.


진우의 약간은 차가운 듯한 목소리에 민호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진우는 민호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축 쳐진 어깨를 끌어안아주고 싶다. 금방이라도 뻗어버릴 것 같은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꼭 주었다.


“ 왜..”
“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는 표정이라면 나한테는 하지마.”


진우의 뜻모를 말에 민호는 어리둥절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하지말라는 것인지.
자리를 박차고 가게를 나설때 부터 지금까지, 진우가 왜 그러는지 무슨 이유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답답하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민호의 힘없는 되 물음에 진우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로 가져갔다. 까만 눈썹을 매만진다. 약간 아래로 쳐져있는 그의 눈매를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다. 진우의 행동에 놀란듯 약간은 경직된 얼굴이지만 참 멋진 얼굴이다.
진우는 그의 볼을 살짝 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 그렇게 예쁘게 웃어줄거면, 나한테만 웃어줘."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뒤돌아서는 진우.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과 행동에 심장이 터져버릴것 같다.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민호가 꽉 잡고는 그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 고마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어깨를 감싼 그의 팔과 넓은 가슴이 마음을 전해준다. 진우가 비에 젖지 않도록 막아주는 우산도, 귓가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에서도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착각이라도 좋다. 그저 그렇게 느끼고 싶다. 지금은.


비가 내렸지만 맞닿은 두 사람의 몸은 따뜻했다.

아주 오래전 옛날, 두 사람이 조금 많이 어렸을 때, 아버지께 혼나 울다 지친 진우를 민호가 도닥여주던 그때처럼.







기분 좋을 때면
눈 꼬리가 휘어지는 네 웃음.
동그랗게 내 귓가에 들리는
네 목소리.
곁에 다가올 때면 느껴지는
너의 향기.
그리고 맞잡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너의 따스한 온기.
모두 나의 것이었으면 좋겠어.
비록 이것이 너무 많은 바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신이 나를 벌한다고 해도
그래도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그런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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