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y-made heart

레디메이드 하트


OIKAWA TORU X HINATA SHOYO X KAGEYAMA TOBIO


12


KAGEYAMA TOBIO is saying.



히나타가 보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기획 1팀 사무실을 계속 기웃거려 보았으나 그가 그리 염원하던 이의 주홍빛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퇴사한건가, 아니면 어디 아픈건가? 늘 그렇듯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 관한 한 상상은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 슬쩍 기획 1팀의 문을 쳐다본 카게야마가 몸을 돌려 휴게실로 들어와 정 자세로 반듯하게 자리에 앉아 연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해도 되는걸까. 아무리 히나타가 마음을 풀었다지만 아직 불편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는 건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그 날 밤 히나타에게 자신은 친구로라도 좋으니 곁에 있길 바란다고 말했었고, 그런 자신에게 히나타는 망설이다가 수락했었다. 

그가 생각했던 말들, 변명과도 같은 행동들을 모두 집어 치우고 히나타에게 진심을 담아 고백하고자 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왜였을까. 진짜 이유를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한 채 겨우 얻어낸 친구라는 이름으로 히나타의 곁에 맴돌았다. 사내에서 이따금씩 눈이 마주칠 때 보이던 서늘한 눈빛은 그로선 잊을 수 없었다. 왜, 좀 봐 준 게 아니었나? 온갖 가정 속에서 겉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이 알게 된 하나의 사실은 카게야마의 뒤통수를 거세게 내리쳤다. 

분명 히나타 쇼요는 뒤끝이 없었다. 

…정말 그랬던가. 그 위에 올라간 작은 의문은 빠르게,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또 다른 사실이 다시 덮어졌으므로. 그것은 바로 그가 감정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단호함이 어떻게 보면 냉정했다. 카게야마가 알던 히나타 답지 않게. 그에 관해 새롭게 정의 내린 그가 헛웃음을 머금고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토오루, 히나타 쇼요, 그리고 카게야마 토비오— 그 자신. 차례대로 이름을 떠올렸다. 어쩐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억을 파고드는 잔상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 예감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렇게 카게야마는 눈에 선명히 보이는 사실을 외면했다.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생일인데 휴일에 오지 않겠느냔 질문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카게야마의 시선이 잠시 달력으로 향했다. 어느 새 그가 태어난 날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또한. 자꾸 새어 나가려는 생각을 단속하며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내려가기 위해 백팩에 간단히 짐을 쌌다. 어머니께 줄 고가의 화장품, 아버지께 양주를 드릴 요량으로 따로 넣은 쇼핑백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카게야마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희미한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내려가는 고향이었다. 

그가 예상한대로 고향, 미야기 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선발로 미리 나와 계셨다. 아들, 왔어? 고향에 돌아온 아들에게 인자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잡았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아들이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어쩐지 화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아들은 그 얼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이라, 제 나름대로 반가워하고 있음을. 

“춥지?” 

“별로 춥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단답으로 끊어졌으나 주변에 퍼지는 분위기만큼은 온유했다. 

“토비오, 지난 번 앨범을 봤는데 문득 그 애가 생각나더구나. 히나타—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더냐? 요새 네게서 히나타 군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 

불시에 들어오는 아버지의 질문에 무심했던 카게야마의 암청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노년의 남자는 그저 평온하게 차를 홀짝였다. 

“…히나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호흡이, 말이 끊어졌다. 평소와 다른 대답, 그 미묘한 숨소리에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아버지의 시선이 카게야마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러나 아들은 이미 표정을 숨긴 후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느꼈나보다, 하며 다시 일상적인 얘기를 이어가는 가족 앞에서 카게야마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았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히나타의 이름을 들을 줄 몰랐던 카게야마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히나타와 카게야마의 관계는 아직 모호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면서 입을 닫았다. 이 평온하던 시간이 불편함으로 채워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에 슬그머니 일어나 피곤함을 이유로 방에 먼저 들어왔다. 

온전한 제 공간에 들어온 그의 긴장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짐 정리하고 뭐 해야 하지— 로 시작한 생각은 내일 일정을 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결정을 내린 남자의 행동은 빨랐다. 이 곳에 왔으니 자신이 찾아가야 할 곳은 있었다. 

지리한 밤을 보내고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가 겉옷을 챙겨 들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남자가 나온 고등학교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교문에 달린 저 낡아빠진 청동색 명패는 여전했고 어지간히 돈을 쳐 발랐는지 묘하게 변한 구석이 있었다. 

몇 년이던가. 심심한 감상을 날리던 남자의 암청색 눈동자가 흐릿했다. 바로 이 곳이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는 제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에 슬쩍 몸을 떨며 제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었다. 

지금은 쓸 데 없어진, 유쾌했던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제 사진 속 한 켠을 늘 차지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두 부질없었다. 

“…….” 

문득 뺨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자신말고도 또 누가 있었나, 하는 의아함에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꽤 오랜 시간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겼는지 뿌연 시야 사이로 잡히는 인형은 체구가 작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점점 더 선명해지는 색은 그가 익히 알던 색을 담아냈다. 잠시 후 완전히 상대를 알아본 그의 눈이 흔들렸다.  

“…히나타?” 

이 곳엔 어쩐 일로. 겨우 내뱉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냉골같은 추위에 얼었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꽤 오랫동안 밖에 있었는지 창백해진 얼굴, 그 위에 떠오르는 복숭앗빛 뺨, 그 아래로 수없이 키스했던 장밋빛 입술.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서 나타난 남자는 땅에 뿌리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그를 응시한다. 숨 막힐 듯한 고요가, 복잡함이 선명히 드러나는 눈빛이, 그와 히나타 사이만큼이나 벌어진 거리가 카게야마로 하여금 뒷말을 잊게 했다. 

몇 시간이고 이 차가운 거리를 유지할 것 같던 남자는 차가운 숨결을 뱉으며 성큼 다가왔다. 천천히 간격을 좁혀오는 남자의 기세가 제법 흉흉해서 저절로 뒷걸음질 칠 뻔했다. 그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슬슬 발에 시동을 걸던 남자는 그를 지나쳐 빠르게 달렸다. 제게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가는 히나타를 따라 본능적으로 뛰었다. 

“뭐, 하는……!”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뛰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으나 앞서 달리는 등을 보자니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 상황, 그 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히나타가 어디로 뛰는지 짐작이 갔다. 짧은 망설임을 떨쳐내고 예상하는 곳으로 힘껏 내달렸다. 

“허억, 헉, 이게 무슨…….” 

거칠게 숨을 몰아 쉰 카게야마가 시선을 들어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자신 못지 않게 빨개진 얼굴로 숨을 고르며 카게야마를 흘깃 보다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 끼릭,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손쉽게 열린 문 너머에 과거가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네트로 향했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히나타가 발을 들였고 그의 뒤를 카게야마가 따랐다. 약속한 듯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암청색 눈과 주황색 눈이 서로를 담았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느 새 호흡은 안정되었고 묘한 기류만이 짙게 남아서 넓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히나타에게서 겨우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본 카게야마가 어디선가 배구공을 가져왔다. 손에 착하고 감기는 배구공의 곡면이, 매끄러운 감촉이, 눈 앞에 있는 ‘파트너’ 히나타의 존재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지금 그들이 있는 코트 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현재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였다. 

시작한다는 신호도 없었다. 허공에 공이 두둥실 떠올랐다가 빠르게 낙하한다. 타앙!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공을 건너편으로 세차게 날려보냈다. 공의 궤적을 따라 히나타와 눈이 마주쳤다. 온순했던 주홍빛 눈매는 날렵한 맹수의 것처럼 변해 모두 집어 삼키려는 욕망을 내보였다. …아, 저런 눈은 꽤 오랜만이라 카게야마의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공을 받아낼 준비를 하는 남자가 동작을 최소화해 무릎을 잠시 굽히다 튕겨낸다. 공에 가해지는 공기의 저항은 히나타에게 소용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그의 손에 닿아 다시 위로 올라간다.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퍽 자연스러워 카게야마는 순간적으로 감탄했다. 새삼스럽지만, 히나타의 발전은 눈부셨다. 제 옆에 저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력을 잔뜩 발산하는 저 애가 있다면. 

그의 생각을 방해하려는 듯 공이 날아왔다. 상대를 향한 탐욕 어린 생각이 휘발되고 손바닥에 착 감겨오려는 공을 건너편 사선으로 내리 쳤다. 마음 깊은 곳에서 파트너였던 남자를 이기려는 욕망이 싹을 틔워갔다. 긴 랠리의 시작이었다. 

“헉, 이제 항복하시지!” 

“누가 할 소릴, 허억.” 

숨이 가빠왔다. 체력적 소모가 제법 들어갔는지 서로 숨을 고르기 바빴다. 패배를 모르는 시선들이 강하게 부딪히고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방심할 만한 곳을 찾아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타아앙! 지축이 요란히 울려 대고 그의 예상대로 히나타는 공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제 기약 없던 끝이 보였다. 

체육관 안에는 숨소리로 가득 찼다. 카게야마는 문득 고개를 돌려 깨끗한 벽 위의 낡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들어올 때 시간을 보지 않았으니 언제 시작했는지, 시작 후 얼마 만에 끝났는지 모른다. 그가 시계를 보며 소요시간을 가늠하고 있을 때, 귓가에 그의 이름이 들렸다. 

“…야마.” 

소리의 방향을 따라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게야마.” 

공을 줍기 위해 몸을 돌린 히나타의 등이 땀에 젖어 있었다. 춥지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그 순간 카게야마의 심장이 덜컹이며 내려앉았다. 불안, 초조, 긴장 같은 부정적인 상태들이 카게야마에게 찾아와 안녕, 하고 손짓했다. 

히나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적어도 얼굴만이라도 보면서 대화를 해야 했다. 그래야 히나타의 표정을 보고 짐작이라도 할 수 있으니. 하지만 자신의 전 연인은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제 스스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카게야마는 망연히 히나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카게야마.” 

히나타가 재차 불렀다. 

“……왜.” 

카게야마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자 숨을 한 번 고르는 듯 어깨가 잠시 으쓱였다.  

“이 학교에서, 이 체육관에서 너를 볼 줄은 생각도 하지 못 했는데.” 

히나타는 몸을 굽혀 공을 주웠다. 이윽고 고요가 찾아 들고 몸을 돌려 저를 보는 눈하고 마주친다. 

히나타의 주황색 눈썹이 깜박였다. 눈꺼풀 사이로 맑은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응시한다. 감정이 하나도 깃들어 있지 않은 무감한 시선과, 발갛게 달아올랐던 뺨은 어느 새 본래의 빛을 되찾았고 가파른 호흡을 내뱉던 입술은 고요를 속삭인다. 손에는 여전히 배구공을 들고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주홍의 눈동자는 자신이 그가 기억하던 과거의 연인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이미 생겨버린 불길함은 카게야마의 심장 귀퉁이에서 퍼져 나가 서서히 잠식한다. 좋지 않은 예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뭐라도 해야 해. 생각과는 달리 몸은 바닥에 뿌리 박힌 듯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골이 송연했다. 

“내가 이 곳에 왔던 이유.” 

히나타의 목소리는, 그 답지 않게 조용했다. 

“지금 너와 배구를 했던 이유, 그게 궁금하지 않아?” 

그가 날렸던 질문의 대상은 어떤 언어도 완성하지 못한 채 입술을 꼭 다물었다. 히나타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뒤따라올 어떤 예감이 굳어 있는 남자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선명한 어둠이었고 잔혹한 칼날이었다. 형태를 갖추지 않은 생각은 카게야마의 심장 가까이 대고 속삭인다. 잘 들어, 카게야마 토비오. 지금 네 ‘옛 연인’이 무슨 얘기를 하려 하는지. 제 색을 닮은 심연이 발을, 전신을 붙잡았다. 

아냐, 그럴 리가. 그 짧은 시간에……. 두 가지 인격이 충돌했다. 부정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입 안의 사탕처럼 달콤했고 유혹적이다. 너와 다시 이어지고자 할 수 있잖아. 조금은 기대해도 되지 않아? 물론 그것들은 지금껏 히나타가 보였던 행동들을 간과한 생각들이었다. 이 혼재된 생각 속에서 분명한 것은 어느 쪽으로든 히나타 쇼요가 여기서 결판을 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알겠어.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카게야마의 대답을 기대도 하지 않았던 듯 말을 이었다.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한 그의 몸이 드디어 히나타에게로 향했다. 뭐라고? 되물으려 했지만 물음은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상황에 맞지 않는, 어딘가 들뜬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심장을 두드린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그가 아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 따위는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 뻔뻔하고 얄미운 낯짝에 미소를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형성된 불안감은 의심이란 형태로 서서히 변화해갔다.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너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을 부정하지 않아.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을 거고! 단지 추억으로 남겨두자는 얘기야.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이상, 좋게 지내고 싶어.” 

“추억? 히나타, 너는…….” 

어떻게 쉽게 말하는 거야. 손톱 끝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말을 흐렸다. 

“쉽게 말하는 거 아냐. 그리고 나, 사실 알고 있었다?” 

“뭐?” 

“네가 그렇게 반응하고, 보아온 시간이 있는데…….” 

다음에 따라올 말을 예상한 히나타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다가 공을 담아두는 바구니에 넣으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떠나려는 모양새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사람이냐, 히나타 쇼요?” 

두서없이 내지른 말에 작은 몸이 멈칫했다. 제 삐죽 머리에 가려진 남자의 표정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말없이 마저 걸음을 옮겨 제 손에 들린 공을 소켓에 넣은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고 있었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원했던 밝음을 담은 주홍의 눈이 열망을 담고 어두운 바다를 쳐다보았다. 의심은 오래지 않아 확신으로 변화했고 검은 바다는 더더욱 깊게 일렁였다. 저 태양이 원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히나타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 순간 찾아 든 감정을 정의 내리기 어려워 망연히 서 있었다. 숨 막힐 듯한 고요가 심연에 내려앉았으나 히나타가 있는 곳이 자신과 다르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난데없는 정적에 제 얼굴을 잠시 긁적이고는 슬쩍 시계를 쳐다보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왠지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카게야마, 생일 축하해.” 

그가 기억하는 말간 얼굴을 하고 미소 짓는 히나타. 평온한 일상을 말하듯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등을 보인다.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두드린다. 어느정도 멀어진 듯 소리는 끊어졌다. 카게야마는 미동도 없이 서서 히나타의 흔적을 좇았으나 사라진 감정은, 히나타가 두고 간 마지막을 보여주면서 현실을 일깨웠다. 

“이제, 정말…….” 

…끝났던가, 아예 완전히? 빠르게 맥동하던 심장이 천천히 제 속도를 되찾았다. 느리게 회전하던 사고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며 히나타가 했던 말들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뭐라 했더라. 

그들의 시작점이었던 이 곳에서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완전한 끝을 선언했다. 정말 잔인하게도 제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 고백하면서, 거짓을 하나도 섞이지 않은 정직함을 앞세우면서. 그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며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저절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제 연적이었던 그가 눈 앞에 있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당신이 이겼노라고. 

하지만 이 곳에는 오이카와가 없다. 그게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 그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을, 행복에 잔뜩 젖어 있을 얄미운 웃음을 보지 않아서.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게 눈가가 뜨거운 느낌이었다. 

히나타 쇼요. 마지막으로 불러야 할 것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입 안에 굴린 이름은 작은 찌꺼기만을 남기고 흩어졌다. 이 감정을 뭐라 말해야 할까? 분노도 열망도 원망도 그 무엇도 아닌. 어쩌면 이 끝을 예상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물으면서, 몸을 돌렸다. 질척하게 달라붙던 그림자가 옅어져 간다. 

“하.” 

짧게 내뱉는 숨결이 무거웠다. 망막에 맺히는 지금은 과거도 환상도 아닌 현재다. ‘현재’가 주는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껏 과거에 머물러 있는데, 히나타는 저보다 한 발 더 앞서 갔다. 이건 반칙이야, 그리 우기고 싶었으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변명거리도 없었다는 게 명확할 것이다. 

눈 앞에 선명한 그의 지금을 보며 비로소 카게야마는 그의 패배를, 히나타의 마음을, 그들의 마지막을 인정했다.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끝이고 마지막이었다. 


Ready-made heart

-레디메이드 하트

W. 은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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