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에 너와 만났고, 여름에 너를 사랑했고, 여름에 너와 이별했다.

아직도 너는 나의 여름이다.



W. 렌지



선선하지만은 않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내리쬐는 햇빛이 조금은 강렬하다고 느껴지는 계절. 그리고 네가 나를 찾아오는 계절. 나는 여름마다 너를 앓았다. 잊힐 듯 잊히지 않는 상처처럼,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감기처럼 너를 앓았다.

언제나처럼 집을 나선다. 앞을 비추는 햇살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꽃들이, 대신 자리한 푸르른 나무들이 어쩐지 너를 다시 끄집어내서. 문득 네 생각에 빠지며 마음속으로 네게 부재중 전화를 걸고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오랜만이야. 여름이라 그런지 네 생각이 났어. 날씨가 좋아. 조금 덥긴 하지만, 아직은 시원하지. 거리도 예쁘네. 예전에 너와 왔던 곳인데. 넌 지금 뭘 하고 있어? 그 사람과 함께 있을까…….


또다시 나를 채워가는 널 털어내려 애써 고개를 흔든다. 미련이 남은 것도, 붉은 조각 하나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여름만 되면 나는 너를 피해갈 수 없는지.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한심하대. 여름마다 아픈 나를 보면서 이제 그만 잊으래. 근데 있잖아,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어. 내 여름의 처음과 끝이 너니까. 내 여름이 너인데,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걱정 마,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네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잠깐. 잠시만 너를 떠올리고 가볍게 아파할 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흔한 감기처럼,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괴롭히다 또 어느 순간 사라지는 그런 병이니까. 그러니까 짧은 여름 동안만 네 생각할게. 긴 여름 동안만 혼자 아파할게.


톡, 얇은 빗방울이 푸른 이파리를 두드리고 하늘을 올려다본 내 얼굴에 떨어진다. 이 빗줄기가 거칠어질 즈음엔, 그래서 세상이 온통 빗소리에 잠길 즈음엔 나도 너로 가득 차겠지. 혹시 내가 지나간 여름을 그리워해도, 그래서 네 전화번호를 눌러도 모른 척해줘야 해. 아무것도 모른 척, 오랜만이네 한 마디만. 잘 지낸다는 인사만 주고받자, 내 여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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