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하네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창백한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식은땀처럼 보였다. 늘 챙겨 다니는 손수건도 놔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투명한 피부 아래로 겁에 질린 어린이가 엿보였다. 이 얼굴만 안 들키면 되는 자리다. 코하네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려 애쓰다 결국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차라리 친근한 얼굴보다 싸가지 없는 얼굴이 낫겠다. 그럼 적어도 얕잡아 보일 일은 없을 테니까.

“곧 입장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먼저 가 계세요.”

다시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별 거 아닌 자리다. 후원하는 대회의 결승전을 관람하고 상금을 건네기만 하면 된다. 여태 했던 일 중에서 단연 쉬웠다. 지난 3개월 동안 스스로 해낸 일을 돌아보자. 쓰러진 양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기고, 일족의 의견을 모아 주주총회에서 발표하고, 임시 회장이 되어 예정되어 있던 일을 해치웠다. 그 중에는 경쟁사 회장들과의 회담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잔뜩 귀여움을 가장한 무시를 당한 걸 떠올려보자.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경기를 관람하면서 쉬라는 뜻으로 잡은 스케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자꾸 진땀이 났다. 왜 이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코하네가 일반 대중 앞에 임시 회장으로 처음 나서는 날이었다. 선수와 관계자는 물론 얼마 되지 않는 관중들도 그를 발견할 것이다.

코하네는 발견당할 것이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래도 하필이면 아버지의 비호 없이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삼촌 아래에서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장난과 사고 사이를 오가며 코하네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삼촌이라면 오늘도 무슨 일을 꾸몄을 것이다.

그러나 물러날 수 없는 자리였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둬야 했다. 그래야 삼촌을 견제할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는 코하네가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난 할 수 있어.”

마음속에서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코하네는 무시했다. 모른 척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을 때였다.

거울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붉은 브릿지를 넣은 남자는 장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맨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홀린 듯이 바라봤다는 걸 깨달았다. 코하네는 눈을 돌렸다. 손수건을 정리하는 그를 보고 남자가 물었다.

“어디 아파요? 얼굴이 하얀데.”

“걱정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그만 화장실을 나서려는 코하네를 남자의 손이 막았다. 제 뺨에 남은 물방울을 훔치는 남자 덕분에 코하네는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울었어요?”

“세수했죠.”

남자는 손을 떼지 않았다. 코하네가 한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물렸다. 대신 한 발짝 다가섰다.

“뭐든 잘 될 거예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 쪽이 곤란에 처하면 내가 슬퍼질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코하네는 눈을 깜박거렸다. 따라갈 수 없는 논리의 비약에 어이가 없었다. 남자는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 거 알아요. 하지만 전 알아요. 운명은 저의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전혀 위안이 안 되는데요.”

부루퉁하게 반박했지만 긴장이 좀 풀어지긴 했다. 왠지 어깨도 가벼워진 것 같고.

“어서 나오셔야 합니다!”

밖에서 비서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두어 발짝 멀어졌다.

“그럼 적어도 오늘만 믿어 봐요. 오늘의 나는 무적이니까.”

코하네는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왔다.

우스운 플러팅이었지만 기분은 좋아졌다. 아마도 그가 코하네와 전혀 연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어르고 달래는 비서가 잘 될 거라고 하면 염증이 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잘 될 거라고 하니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걸 노린 삼촌의 한 수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어떤 역경이든 괜찮을 거라고 넘어갈 준비가 됐다.

회장으로 들어온 코하네는 곧 귀빈석으로 안내됐다. 광고판 바로 뒤였다. 그 안에서 경기하는 선수와 악수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가벼운 개회사가 이어지고 선수들이 입장했다. 코하네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화장실에서 본 그 남자였다.

“최근 00전자배, 00푸드배에서 우승하며 신인의 야성을 보여주고 있는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입니다. 처음 당구를 시작한 것은 고교 3학년 때로, 그 계기가 많은 이들에게 인상을…”

당구대 옆으로 다가오던 그는 코하네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조금 처진 눈이 꼭 강아지처럼 변했다.

코하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의 직위를 보고 피한 이도, 다가온 이도 많았다. 과연 저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히로마사는 고개를 기울여 코하네를 훑어보다 자리에 앉았다. 오묘한 표정이었다. 재보는 것 같기도 하고 꿰뚫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은 깊게 가라앉아 어두웠다. 그는 곧 눈을 돌렸지만 코하네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히로마사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는 걸 하염없이 바라봤다. 히로마사가 코하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게 육감으로 느껴졌다. 히로마사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코하네가 눈을 떼면 다시 눈을 맞출 것 같았다.

히로마사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고, 코하네 혼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코하네는 어느새 그에게 완전히 옭아 매였다. 코하네가 정신을 차린 건 두 선수가 뱅킹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손 안에 땀이 가득 차 미끈거렸다.

히로마사가 선공이었다. 흰 공을 앞에 두고 큐를 겨냥한 히로마사는 스윙 없이 단박에 쳤다. 흰 공은 붉은 공을 치고 쿠션에 4번 부딪힌 후 노란 공에 맞았다. 심판이 손을 내리그었다.

히로마사는 초크를 큐 끝에 문지르며 힐끗 코하네를 봤다. 잘 보이지 않는 경기를 따라가 보려던 코하네가 흠칫 놀랐다. 움츠린 어깨가 내려오기 전에 히로마사의 포커스가 당구대 위로 옮겨갔다. 그러나 코하네는 남은 시간 내내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가 히로마사를 지우고 경기나 핸드폰, 심지어 뒤에서 속삭이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할 때마다 히로마사가 눈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을 맞추고 그의 발걸음을 쫓으며, 코하네는 문득 히로마사를 어디선가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공의 각도를 계산해내는 눈동자와 조용한 발걸음, 망설임 없는 샷까지 익숙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라리 얼굴이 익숙하다면 정말 아는 사람인지 조사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그의 행동이 너무나 눈에 익었다. 심지어 경기 후반이 되자 히로마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한 이닝에 대여섯 점을 올리는 히로마사를 보며 코하네는 포기에 가까운 체념을 했다. 어쨌든 오늘은 정말로 히로마사의 날이었다. 운명이 그의 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기상대는 점수를 내지 못했고, 덤으로 그가 뻔한 미끼를 던질 때마다 코하네는 덥석덥석 물었다. 이 조그만 방 안에서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아마 이 기이한 느낌마저 그가 의도한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경기는 히로마사의 승리로 끝났다. 상대는 10이닝 마지막 공격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나 운명의 여신은 이미 히로마사의 손을 들어준 지 오래였다.

선수들이 악수를 하고 큐를 비롯한 개인 물품을 정리하는 동안 주최 측이 움직였다. 코하네는 광고판 안으로 안내받았다. 마지막에 상금보드를 건네받고 당구대 앞에 서자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가 시작됐다.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의 이름이 크게 불렸다. 코하네는 그에게 보드를 건네주러 다가갔다.

히로마사는 보드를 건네받고 사진을 찍는 중에 말을 걸었다.

“당신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코하네는 기자들이 터뜨리는 플래시에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아까 봤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요. 아까 봤을 때는 몰랐는데 계속 보니 언젠가 본 것 같아서요.”

그건 코하네도 느끼고 있던 감정이었다. 히로마사가 같은 느낌을 받은 걸 알게 되자 무겁던 속이 좀 풀렸다. 의심이 없었던 건 아니나, 어떻게 고작 한 번 본 사이에 이렇게 통할 수 있겠는가. 히로마사가 최면이라도 걸지 않은 이상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말의 경계심을 발휘해 코하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플래시도 점차 사라졌다. 곧 둘은 헤어져야 한다. 웬만한 일이 없다면 다시 볼 수 없다.

“제 라인 아이디는 hiromasathered1610이에요. 혹시 괜찮으면 라인 주세요.”

“제가 왜요?”

“그 쪽이랑 좀 더 얘기하고 싶어서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떨어졌다. 상금보드를 든 히로마사를 남겨두고 코하네는 등을 돌렸다. 뒤에서는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호위를 받으며 회장 밖으로 빠져나간 코하네는 그 후 다른 일정을 몇 개 더 소화했다. 모든 일을 끝내고 아버지의 병실에 도착하니 벌써 10시가 다 됐다.

코하네는 개인적으로 쓰는 폰을 꺼내 라인을 열었다. 쉬운 아이디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히로마사의 아이디를 검색하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프로필사진이 나타났다. 그 얼굴을 눌러 사진 몇 십장을 넘기며 코하네는 히로마사가 활도 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선수용 활을 들고 있는 히로마사는 꽤 어려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아까 느꼈던 기이한 그리움이 다시 차올랐다. 낯선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낯익은 부분을 찾으려 해봤지만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분위기, 웃는 얼굴이 주는 뉘앙스 같은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와 닿았다. 꼭 오래 사귀기라도 한 것처럼.

코하네는 그의 아이디를 저장했다.

“너도 와있었구나.”

기척 없이 다가온 목소리에 코하네가 휙 돌아봤다. 삼촌이 문가에 서있었다. 그는 코하네의 반대편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들린 시간과 링거의 노즐을 확인했다.

“간략하게 보고 받았다. 오늘도 열심히 보냈더구나.”

“삼촌도 오늘 포럼에 가셔서 많이 바쁘다고 전해 들었어요.”

“당구는 어떻던? 재밌게 즐겼느냐?”

“그다지 흥미롭진 않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좋았어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공방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래, 네 야심이 누굴 닮았겠느냐. 이게 다 형님 덕이지. 그래도 이제 너 혼자 서야 하니 슬슬 결혼을 생각해봐야지?”

결혼이라는 말에 왜 히로마사가 떠오른 것일까. 코하네가 바로 대답하지 못한 사이 상대가 꼬리를 잡았다는 듯 묘하게 웃었다.

“이거,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딱히 그런 거 아니에요.”

“뭐, 네가 말만 하면 이 삼촌이 다 도와주마.”

그 의도가 불순했지만 코하네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보다 오늘 당구대회에서 우승한 사람 말인데요, 그 사람 전에도 저희 회사에서 후원한 적 있었나요?”

재단 이사를 맡고 있는 삼촌은 패드를 켜 몇 번 두드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선수가 프로로 데뷔한 것도 얼마 안 됐고, 아직 접촉한 적도 없다.”

“장학금이라도 준 적 없어요?”

“없다만. 왜 그러느냐?”

삼촌의 눈이 가늘어졌다. 코하네는 다리를 꼬았다.

“아니면 말고요.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같은 학교는 분명 아닌데, 회사 관련 인물인가 했죠.”

코하네의 말에 삼촌은 뭔가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한 번 알아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먼저 일어나마.”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푹 자고 일찍 일어나라. 그래야 키가 크지.”

키는 안 큰지 3년이 넘었다. 부루퉁한 코하네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감상한 삼촌이 병실을 나갔다.

히로마사가 삼촌의 끄나풀이었다면 저렇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좋다고 낄낄댔을 것이다. 삼촌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코하네는 고민에 빠졌다. 자연스레 히로마사의 프로필로 관심이 옮겨갔다.

“!!!!”

알림창에서 히로마사가 코하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허겁지겁 라인을 켜서 대화창에 들어갔다. 코하네의 입장을 본 히로마사가 몇 번의 라인을 더 날리는 동안, 코하네는 스크롤을 가장 위로 올렸다.

[으ㅑ3}

손이 미끄러졌나보다. 삼촌이 들이닥쳤을 때 너무 놀라서 그런 게 틀림없다. 아무렇게나 눌렸는데 하필 대화창이 열린 것도, 전송버튼이 눌린 것도 말이 안 됐지만 현실이었다.

{!!]

{이렇게 빨리 연락 줄 줄 몰랐어요!]

{이제 집에 들어간 건가요?]

{저는 아직 뒤풀이 중!]

{대답이 없네요...]

{저 오타]

{혹시 무슨 일있어요?]

{제가지금바로갈수있는데]

{어디에요?]

{걱정되니까답장부탁해요]

.

.

.

.

.

.

{저 잊혀진건가요...?]

{라인 보낸 거 실수였어요?]

{제가 너무 들이댔나봐요...]

히로마사의 반응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히로마사는 제 뜻을 이뤘다. 결국 코하네의 연락을 받았으니까. 이마저 운명의 신이 도운 건지 모르겠다. 코하네는 한숨을 폭 내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삼촌의 사람이 아니라면 몇 마디 대화 정도야 해도 괜찮았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범위를 허락하며 마침내 함락당할 미래를 모르는 코하네는 그저 자신이 느낀 데자뷔의 원인을 찾기 위해 히로마사와의 대화에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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