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오늘만 좀 부탁할게.”

“아니에요. 자주 부탁하셔도 돼요.”

“고맙다, 정말.”

“백현이 일이잖아요.”

“형이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다음에 같이 밥 먹자.”


눈이 그렁그렁해진 준면이 찬열의 손을 꼭 잡는다. 백현이 아파서 며칠 일을 빠진 터라 일이 밀렸다. 그래서 황금 같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하게 되었다. 아직 백현이 혼자 있을 정도로는 안정되지 못해서 결국 준면은 찬열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준면외에 백현이 믿고 함께하는 사람은 찬열 뿐이었다. 준면의 연락을 받은 찬열이 얼른 달려왔다. 주말엔 친구들이랑 놀아야할 나이인데 이런 일로 부른다는 게 준면은 너무 미안했다. 내심 백현과 둘이 있고 싶었던 찬열이 얼른 일을 보고 오시라며 준면의 등을 떠밀었다. 서류들을 한 번 더 살핀 준면이 병실을 나선다.


“그럼 다녀올게. 여기에 돈 두고 가니까 뭐 먹고 싶으면 사먹고.”

“네. 형.”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아이고, 말이 길었네. 하하”


준면이 부장님이나 지을 법한 웃음을 날리고 사라지자, 찬열이 냉큼 백현에게 가 백현을 꼬악 끌어안았다. 집에서 가져온 바디워시가 과일향인지 달달한 냄새가 난다. 향 자체만 생각하자면 너무 달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백현 고유의 향과 섞여 아주 매력적인 향으로 변했다. 찬열이 백현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좋다, 진짜. 백현이 바르작거리며 찬열의 품안으로 조금더 깊숙이 들어온다. 괜찮아 보이는 백현이지만, 아직 불안함을 다 씻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원래도 스킨십을 좋아해 붙어있기를 좋아했지만, 눈을 뜨고나서는 더욱 찬열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백현이었다. 찬열의 품에서 안정을 찾는 백현이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안쓰러운 마음도 컸다.


“하, 살 거 같다.”

“히히. 살꼬 가따?”

“응.”

“백혀니두 살 거 같다!”


큰 강아지처럼 백현의 목덜미에 제 코를 묻고 킁킁거리니 찬열의 행동이 웃긴지 까륵거리며 웃느라 휘어진 백현의 눈두덩이에도 쪽쪽 소리나게 입을 맞췄다. 볼록한 광대에도, 날카로운 턱선에도, 끝이 둥근 코에도 입술을 내린다. 어른 뽀뽀를 기다리는지 백현이 입술을 슬쩍 내민다. 하지만 찬열은 이마에 뽀뽀를 한다. 백현이 조금더 입술을 주욱 내민다. 역시나 일술이 아닌 볼에다가 입을 맞췄다. 입술을 제외한 곳에만 맞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인다.


“히잉, 그거 아니이...”

“뭐가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어보이자, 백현이 눈을 스륵 감고 입술을 쭈욱 내밀고는 쪽쪽 소리는 낸다. 아, 진짜, 미치겠다. 살풋 웃은 찬열이 백현의 볼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딱 미치게 좋았다. 볼을 살살 간질이던 찬열이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지코 와쪄염! 뿌우!!!!!!!!!!”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지호와 옵션들이었다. 찬열과 백현의 베프(근거 전혀 없음)인 저가 문병을 가지 않으면 누가 문병을 가냐며 징징 거리는 지호를 애써 떼어놓고 왔는데 알려주지도 않았음에도 어떻게 알고 찾아 온 건지 모르겠다.


“시발,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새끼.”

“지호가 그렇게 반가워?”

“...반갑겠냐.”

“그렇게까지 반가워하면 지호 부끄러운데!”


찬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애써 모른 척한 지호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져왔다.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아기자기한 캐릭터 인형들이 놓여있었다. 백현이 그것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우아아!”


백현은 아이스크림보다 인형에 더 정신이 팔렸다. 찬열이 인형을 살짝 들었다. 물티슈가 어디 있지. 아, 협탁. 협탁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한두장 뽑는다. 물티슈로 아래 뭍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내고 그것을 건네주자 아이스크림은 안 먹고 그것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놀기 바빴다. 지호가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본다.


“예쓰! 백현이가 좋아할 줄 알았어!”

“......”


조용히 백현이 놀던 것을 지켜보던 택운 핸드폰을 꺼내 백현의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온 모양인지 핸드폰을 다시 제 주머니에 넣었다. 쟤 지금 뭐한 거지. 백현은 익숙한 듯 택운의 카메라를 쳐다보며 브이포즈까지 취한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찬열이 택운을 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힐끔 찬열을 본다.


“......”

“.......”

“보내 주까.”


?!?!?! 예상외의 미성에 찬열이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택운의 목소리를 제대로 처음 듣는 거 같다. 놀라는 건 놀라는 거고 챙길 건 챙길 거니까 찬열은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이제야 번호를 교환했다. 제 갤러리로 들어간 택운이 익숙하게 백현 폴더에 들어갔다. ?!?!?!? 뭐지 얘 왜 백현 폴더가 따로 있지. 지금까지 눈치를 못 채 왔을 뿐인지 폴더 안에 사진이 많기도 많다.


“뭐야, 너 왜 이렇게 백현이 사진이 많아.”

“...귀여워.”


무심하고 짧게 대꾸한 택운이 고른 사진들을 찬열에게 전송했다. 카톡카톡하는 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질투 때문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찬열과 멀뚱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택운을 번갈아 보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택운이 형이 귀여운 거에 환장해서. 백현이 형만 있는 게 아니고 형 반에 민석이 형이랑 종대형 폴더도 있을 걸?”


...충분히 존나 이상해. 그리고 걔네랑 백현이가 동급이란 소리냐, 지금. 누가 봐도 백현이가 말도 못하게 더 귀여운데. 조금 팔불출 같은 생각을 했지만, 찬열은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사실, 찬열은 택운이 조금 어렵다. 주변에 흔히 있는 타입이 아니라서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 지호와 지훈한테는 막 욕도 하고 하는데, 얘는 좀 그래. 뭔가 못 그러겠어. 찬열이 그러거나 말거나 택운은 제 갤러리를 보며 즐거운 표정이다. 뭐 나쁜 애 같지는 않으니까 놔둬도 되겠지. 택운을 보던 찬열도 금방 대화에 끼어든다. 한창 때 남고생들이 다섯이나 있으니 지호네가 사온 아이스크림 케이크 하나에 과자 몇 봉지, 음료수에 다가 찬열과 준면이 사다놓은 과일들까지 몽땅 동이 났다.


“...이만 가봐야겠다.”

“니들은 쳐먹으러 왔냐.”

“응.”


지호에 대답에 찬열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백켜나아아아아- 지코 또 오께?”

“웅! 지호 안녀엉- 지후니 안녀엉- 태구니 안녀엉-”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며 인사를 하는 백현과 달리,


“다신 오지마, 꺼져.”


찬열의 인사는 강렬했다.


“힝 차뇨리 미오미오.”

“...죽인댔지.”

“꺄! 지호 살려!”


지호와 아이들이 쿵쾅거리고 사라지니 시끄럽던 병실 안에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숨막히는 느낌은 아니었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혼을 쏙 빼놓고 간 아이들 탓에 찬열이 조금 지친듯 간이침대에 털썩 앉았다. 백현이 침대 위에서 옆으로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쳤다.


“이리와 차녀라.”


백현의 옆에 찬열이 앉았다.


“배켜니 말 잘 드러서 차캐 차녀리!”

“뭐?”

“헤헤.”


이건 또 어디서 배운 거래. 찬열을 칭찬해준 백현이 찬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기쁜 듯 짝짝 박수까지 쳐준다. 병실에 있는 TV에서 본건가. 재밌는지 헤헤 웃는 백현이를 간질였다. 간지럼을 많이 타는 지 백현이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뒤로 넘어갈 뻔한 백현을 잡아챘다.


“으아, 배켜니 심장이가 쿵 떠러지뻔 해쏘!”


백현의 말에 피식 웃는데, 벽에 걸린 백현의 차트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백현의 이름 옆에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분명할 숫자가 조금 이상한 거 같다. 찬열이 제 눈을 비볐다. 음?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


다시 봐도 그 숫자가 정확했다.


“...백현아.”

“우웅?”

“백현이 몇 살?”


백현이 손가락 열 개를 좌악- 펴보이며 대답했다.


“배켜니 열이 두 개!”

“허허...?”

“어... 그러니까아... 형아가...”

“백현이가 스무살이라고?”

“마따! 스무살!”


사고 때문에 한참 동안이나 병원에 있었다는 걸 알았는데 왜 생각을 못했지? 아니 근데 이 이상한 기분은 뭐야? 그러니까, 백현이가,


“...형?”


얼얼한 얼굴로 한 마디 내뱉자 백현이 활짝 웃는다.


“헤헤. 형 조아!”

“형이라고...”


형이라고... 찬열이 계속 그 말을 고장 난 기계처럼 되풀이한다. 그 뒤로도 한참을 찬열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병원에 더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준면 때문에 필요한 것보다 오래 병원에 머문 뒤 퇴원했음에도 워낙 백현의 걱정을 사서하는 준면은 백현에게 며칠 학교를 쉬라고 얘기했다. 찬열과 친구들이 보고 싶었던 백현이 학교에 가고 싶다고 우겼다. 미열이 있기 때문에 준면은 단호히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 백현이가 그래도 학교 가고 싶다고 하고 다 컸네. 옛날에는 형아랑 떨어지기 싫다고, 학교가기 싫다고 그랬었는데. 뿌듯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서운함에 몰래 눈물을 훔친 준면이 떨어지지 않는 발에 끙끙 거리며 회사로 향했다. 찬녀리 보고시픈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손목에 달랑거리는 계란마리를 만지작거리던 백현이 집전화기 앞에 가 앉았다. 보고시프면, 저나하라구 해써.


“영, 일, 영, 이, ...”


야무진 손길로 번호를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11자리 숫자 누르기를 끝마치니 뚜르르-하고 통화연결음이 들려온다.


-응, 백현아. 아침부터 전화했네?


수화기 너머로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침이라 조금 더 낮은 찬열의 목소리를 들으니 백현은 발가락도 간지럽고, 가슴도 간지럽고, 귀도 간지럽다. 백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베베 꼬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백현의 표정과 몸짓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행복감에 찬열이 작게 웃었다. 아,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아서 죽겠네.


“차녀라...”

-응, 나 보고싶어서 전화했어?

“응응, 너어무 보고시퍼어...”

-그럼 내가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히잉, 형아가 오늘은 학교가지 말래써! 배켜니 오늘 차녀리 못봐...”

-못 보긴 왜 못 봐.


형이 걱정되셔서 쉬라고 하셨나보네. 근데 네가 안 오면 내가 가면 되지. 하느님, 오늘 자율개교기념일 하겠습니다. 찬열이 학교로 향하던 발을 돌려 백현의 집으로 향했다. 보러가려고 하니까 더 보고 싶어진다. 찬열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내 찬열은 달리기 시작했다. 역주행을 하는 찬열을 이상하게 봤지만, 아무도 찬열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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