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왕(正晟王)께서 용상(龍床)에 오르시어 위진제관길(瑋辰齊瓘吉)씨를 이어받으셨으니, 경치예제(暻熾銳帝)와 정세경제(諪勢警帝)를 모시던 나는 영화성(榮華城)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오랫동안 장용(長用)으로 지낸 나를 두고 환관(宦官)으로서는 더없이 영광스럽다 하였으나, 그 세월은 길고도 길었다.

나의 주인께서는 매사에 빈틈이 없고 잔혹한 분이시었다. 장자(長子)가 아닌 차자(次子)로 태어나시었으나 오랫동안 정진(精進)하시어 결국에는 용상에 오르시고 오랫동안 용상을 두고 다투던 모든 이들의 목숨을 빼앗으시었으니, 이보다 더한 승리는 없을 것이었다. 하여 철이 들 때부터 그분을 모시던 나는 날마다 존경과 뒤섞인 두려움이 뼈에 새겨졌다.

경치예제께서는 다른 이들을 진심(眞心)으로 대하지 않으시었으나, 몇몇 이들에게는 총애(寵愛)를 내리시었다. 그 총애의 으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영의황귀비(榮誼皇貴妃) 유록영(柳綠永)씨께 향하였으니, 내가 아는 한 경치예제께서 그토록 곁에 두고 싶어하시며 그리워하시는 이는 영의황귀비가 유일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이는 아주 영광스러우며 정성스러운 것이었으나, 영의황귀비와 얽힌 이들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경치예제께서는 마음을 조금도 감추지 않으시었으니, 결국 그 무게는 다른 이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나의 주인께서는 삼황자(三皇子)이시며 영의황귀비의 친자(親子)이신 경인충국공(憬因忠國公)을 위하여 영의황귀비의 쌍둥이 동생이신 진의태황태후(珍誼太皇太后)를 경인충국공의 양모(養母)로 삼으시었다. 그러나 경인충국공께서는 영의황귀비를 조금도 닮지 않으시었으니, 나의 주인께서는 경인충국공을 마음속에서 내치시고 진의태황태후 소생(所生)의 오황자(五皇子) 현장왕(賢長王)을 염두에 두시었다.

얼굴이 닮지 않았다면 나랏일이라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인충국공께서는 불행히도 생모(生母)와 얼굴이 닮지 않으시었을 뿐더러 나랏일에 서투르시기까지 하였다. 반대로 현장왕께서는 영의황귀비를 빼닮으신데다 나랏일에 능숙하시었으니, 그것은 예정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형님은 아우를 미워하게 되었고 아우는 형님을 두고 고통을 받게 되었으니, 돌이켜볼수록 참혹한 일이었다.

오래전 경인충국공께서 아직 경보국공(憬保國公)이시었고 현장왕께서 현보국공(賢保國公)이시었을 때, 나랏일에 서투른 형님을 위하여 아우가 잘못된 것들을 조용히 바로잡았으므로 경치예제께서는 아우의 작위(爵位)를 충국공(忠國公)으로 높이시었다. 이로 인하여 형님은 아우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으나, 경치예제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우를 따로 불러서 명을 내리시었다.

“현충국공(賢忠國公), 비록 너는 나이가 어리나 매사에 빈틈이 없지. 그러니 앞으로도 영의비(榮誼妃)의 명예(名譽)를 위하여 정진하도록 하여라. 그것이 네 모비(母妃)와 동복(同腹) 동생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네가 앞으로도 나랏일을 잘 다룬다면, 짐은 영의비의 쌍둥이 동생인 네 모비에게 고귀함을 더하고 네 동복 동생들의 앞날이 평안하도록 안배(按排)할 것이다. 또한 네가 공(功)을 세운다면 짐은 영의비의 아들인 경보국공을 친히 살피어 적당한 자리에 둘 것이다.”

“… 비록 아신(兒臣)은 부족한 사람이나 성심(誠心)을 다할 것입니다. 황은(皇恩)이 망극하옵니다.”

그것은 마치 목에 겨누어진 화려한 검(劍)과 같은 황명(皇命)이었으나, 현장왕께서 두려움을 억누르시고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사은(謝恩)하시었으므로 나는 조금 안심하였다. 비록 형님은 아우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아우는 마음고생을 하게 되었으나, 차라리 그렇게라도 지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분명 문제가 생기겠구나. 영의비는 그토록 어질었는데, 경보국공은 제 어미를 하나도 닮지 않았으니… 오히려 현충국공이 영의비를 닮아 총명하지. 그러나 현충국공은 너무 정이 많고 진심을 중요하게 여기니, 앞으로 경보국공이 어리석게 굴 때마다 현충국공은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제 형님을 도우려 들 것이다. 결국 경보국공은 현충국공의 약점이 될 테지.”

현장왕께서 경인충국공의 억울한 누명(陋名)을 벗기시었을 때, 경치예제께서는 총명한 아우를 위하여 어리석은 형님의 목숨을 빼앗기로 결정하시었다. 나의 주인께서 친히 새 겉옷(袍)과 새 허리띠와 서신(書信)을 대나무가 새겨진 나무 상자에 담아 보내시었으니, 경인충국공께서는 새 겉옷을 입고 새 허리띠로 목을 매어 훙서(薨逝)하시었다. 또한 나의 주인께서 경인충국공을 모시던 장시(長侍) 석풍(夕風)에게 독(毒)을 사용하여 그 입을 막으시었으니, 많은 사람들은 경인충국공께서 오래 앓으시던 병(病)이 깊어져 훙서하신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현군(賢君), 너는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구나. 네가 확인하여 올린 예산안(豫算案)에는 흠이 없었으니 아주 유용하였다. 다만… 경인충국공의 작위가 그 공로(功勞)에 비하여 지나치게 높으니, 아무래도 강등(降等)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경치예제께서 아우의 작위를 군(君)으로 높이시었으나, 명예로는 형님을 떠나보낸 슬픔을 사그라들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의 주인께서 형님의 작위를 낮추려 하시었으니, 현장왕께서는 경치예제의 발밑에 엎드려 간절히 자비를 구하시었다. 결국 경치예제께서는 뜻을 돌이키시어 형님의 작위를 낮추지 아니하시었으나, 아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가슴을 찌르는 칼날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 현장왕께서는 경치예제께서 내리신 안동흑차(安冬黑茶)와 월향백차(月香白茶)를 받쳐 들고 현령헌(賢令軒)으로 발걸음 한 내게 하문(下問)하시었다.

“권수(眷手), 황상께서 내리신 상자에… 새 겉옷만이 있었는가?”

화국(華國)에는 헌종(憲宗) 염욱선제(廉煜禪帝)께서 누명을 벗은 양인원군(良仁元君)께 새 겉옷을 내리시어 억울함을 위로하시었던 전례(前例)가 있었다. 경치예제께서는 그 전례를 들어 현장왕을 속이시었고, 현장왕께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 채로 셋째 형님께 대나무가 새겨진 나무 상자를 올리시었다. 그러나 현장왕께서도 깨달으신 것이었다.

“황상께서는 경인충국공께 새 겉옷과… 새 허리띠와 <공명가(貢命歌)>를 내리시었사옵니다.”

<공명가(貢命歌)>는 문종(文宗) 신엽예제(愼燁譽帝)의 장자였던 예성장왕(睿聖長王)께서 자신보다 총명했던 아우인 헌종(憲宗) 염욱선제(廉煜禪帝)를 위하여 스스로 자취를 감추기 전에 남기신 시(詩)였다. 염욱선제께서는 평생 동안 자신의 형님을 찾으시었으나, 예성장왕께서는 허리띠로 목을 매어 훙서하시었다. 하여 경인충국공께서는 경치예제의 뜻을 깨닫고 그 선례를 따르신 것이었다.

“이는 황상의 뜻이오니, 현군께서는 부디 충심(忠心)을 굳건히 하소서.”

나는 현장왕께서 혹시나 잘못된 마음을 품지 않을까 근심하였으므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 현장왕께서는 두 눈을 내리감으신 채 고통을 억누르고 계시었으니, 나는 그 얼굴을 지금껏 잊지 못하였다.

“하기야, 영의귀비(榮誼皇妃)의 아들께서도 세상을 떠나시었지. 본군(本君)은 영의귀비의 조카에 불과한 사람이고, 본군에게는 모비와 동생들의 안위(安危)가 달려있으니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니 자네가 본군을 두고 근심할 필요는 없네. 본군은 유록영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몸을 낮출 것이다. 보아하니 자네는 이제 현건궁(賢建宮)으로 향하겠구나. 자네는 자네의 할 일을 하도록 하게.”

그 창백하고 냉랭한 얼굴에는 사라지지 않을 고통이 있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몸을 굽혀서 예를 올렸다.

“황상께서 황귀비께 안동흑차와 월향백차를 내리셨사옵니다. 황상께서는 황귀비께서 심신(心身)이 고단하실 때에 차(茶)를 사용하시면 좋을 것이라 말씀하시었사옵니다.”

내가 현건궁으로 가서 몸을 굽히고 경치예제의 진황귀비(珍皇貴妃)였던 진의태황태후께 아뢰었을 때, 태황태후(太皇太后)께서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었다. 그 날카로운 눈동자에는 한없이 깊은 고통이 감돌고 있었으므로, 나는 태황태후께서 무엇을 하문하실지 곧바로 깨달았다. 내가 불안함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때, 태황태후께서 내게 하문하시었다.

“권수, 황상께서 현무(顯珷)에게 무엇을 내리시었더냐?”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러나 나를 향한 태황태후의 시선이 너무나도 날카롭고 차가우며 간절하였으므로, 결국 나는 품에 숨겨두었던 경치예제의 서신을 올렸다. 경치예제께서 그 서신에 <공명가(貢命歌)>를 친히 쓰시어 경인충국공께 내리시었으니, 진의태황태후께서는 그 서신을 두 손에 꼭 쥐신 채로 오랫동안 통곡하시었다.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던 나는 조용히 몸을 굽히어 예를 올리고 현건궁에서 물러 나왔다. 그 통곡소리는 마치 겨울날 살갗을 베어버릴 듯 불어오는 바람과 같았으니, 서둘러 평강전(平康殿)으로 돌아가던 나의 마음을 한 점 한 점 도려내는 것 같았다.

나의 주인께서는 두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랐으므로, 나는 그날 나의 주인을 배반(背反)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훗날에 나의 주인께서는 분명 그 일을 두고 나를 크게 질책하시겠으나,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현세(現世)에 남겨진 모비와 동생들을 위하여 그토록 몸을 낮추시던 현장왕께서는 어느 날 처음으로 경치예제의 뜻을 거스르시어 영장왕후(榮長王后) 마서진(馬誓進)씨를 적배(嫡配)로 맞이하시었다. 오랫동안 현장왕을 염두에 두시고 현장왕께 용상을 물려주시려던 나의 주인께서는 영장황후의 다소 고귀하지 못한 출신(出身)을 싫어하시었기에 붕어(崩御)하시는 날까지 며느리를 지극히 미워하시었다. 그러나 현장왕께서는 배필(配匹)을 한결같이 연모(戀慕)하시었으며, 배필과 아이들을 위하여 영화성에서 벗어나시었으니 나는 차라리 그편이 낫다 여기었다.

현장왕께서 영화성을 벗어나시었으므로, 나의 주인께서는 흉중(胸中)의 뜻을 이루지 못하시었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유록영씨가 명예를 얻었으므로, 경치예제의 장자였던 정세경제께서는 다섯째 아우를 깊이 증오하시었다. 비록 정세경제께서는 평생 경치예제의 계후(繼后)였던 진의태황태후를 공경하지 아니하시었으며 현장왕을 냉대(冷待)하시었으나, 이제는 정세경제께서도 현세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남겨진 이들은 조금이나마 자유롭고 평안할 것이다.

여름이 끝나가는 풍경은 이토록 선명하고 푸르며 화려하다. 하늘에는 눈부신 태양이 있으며 사방에는 축포(祝砲) 소리가 가득하니 이보다 더한 경사스러움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내가 이 길을 따라 서문(西門)을 나선 뒤에는 다시 영화성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나는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입을 다물 것이고 길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들은 영원히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성에 얽히어 고통을 겪었던 이들도 지나간 일들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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