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꼬박 일주일을 앓고서야 성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어느정도 몸이 회복 됐다지만 약간의 미열이 남았다. 하지만 성운은 몽롱한 머리를 애써 모른체하며 등교를 해야한다고 책가방을 매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나 때문이죠? 햄 아픈거.]

그 날 이후로 한번도 자신을 보러 찾아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픈걸 빤히 알면서도 일주일 넘게 코빼기도 안 비춘 것이 괘씸했다. 집도 코앞이잖아. 자기가 바쁘면 뭐 얼마나 바쁘다고 연락도 안하고 싹 씹어. 사실 제 마음을 성운도 잘 모르겠다. 자꾸만 생각나고,  뭐 하고 있나 궁금하고, 또 보고 싶었다. 자꾸만 다니엘이 떠오르는 이유는 괘씸해서 그런 거라고 보기 좋은 허울로 포장하고 싶었다.

급한 마음 만큼이나 이르게 등교한 성운은 뒷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엎드린 넓은 등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일부로 발 소리를 크게 내며 걸어간 성운은 책상 위에 가방을 내팽겨쳤다. 의자도 시끄럽게 끌었고, 괜스레 헛기침도 한번 했다. 그러자 다니엘이 인상을 찌푸리고 잠에서 덜 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새초롬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다니엘은 고개만 한번 까딱이고 다시금 책상 위로 엎어졌다. 성운이 놀라움만큼 눈을 땡그랗게 떴다.

"야. 나 왔다니까? 왜 반응이 그것밖에 없어?"
"성우이 햄."
"응응."
"죄송한데 제가 좀 많이 피곤해서요. 낸중에 다시 얘기해요."


얘 뭐지. 할 말을 잃고 뻐끔거리는 성운의 입을 때마침 교실에 도착한 현태가 친절하게 다물려 주었다. 담임 선생님도 들어온 바람에 성운은 일단 앞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꽁기한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다. 자기가 먼저 나한테 다가왔으면서. 먼저 나에게 친한 척 말 걸었으면서. 가만히 있던 사람 멋대로 정 주고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이런 식으로 피하는 모습이 너무 괘씸해서 화가 났다. 뜨거워진 눈시울에 코를 훌쩍이며, 성운은 간신히 교실에서 질질 짜는 추태를 피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샐쭉하게 뒤를 돈 성운은 엎드려 있는 다니엘의 책상을 주먹으로 쾅 쳤다.

"야, 너 나 좀 따라와."

다니엘은 부시시한 뒷머리를 누르며, 교실문을 박차고 나간 성운의 뒤를 따라 느직히 걸었다.


-


"너 왜 나 피해?"
"나가 언제요."
"다니엘, 너 지금도 내 눈 안 쳐다보고 있잖아."

집요하게 다니엘의 눈을 보고 얘기하자, 다니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성운은 면전에 대놓고 내뱉은 그 한숨의 의미를 도통 알 수 없어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싫어진거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람 밀어내는 게 어디있어.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잘못 했어?"
"아니요, 햄."
"아니야, 너 변했어. 그때랑 지금이랑 꼭 딴 사람 같아. 지금 너는 조금도 날 마주 보려고 하지 않잖아."
"......."

이 와중에도 다니엘의 시선은 성운이 아닌 애매한 벽쪽으로 빗나가 있었다. 혼자만 바라보고, 혼자만 노력하고 있는 혼자만의 관계라는걸 깨달은 성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보다. 친구, 그딴게 나한테 이렇게 쉽게 생길리가 없지."
"....햄?"
"부담줘서 미안해, 다니엘."
"아니 그게."
"네 마음 잘 알겠어. 이제 안 그럴거야."


...나에게만 특별했구나. 그 날의 바다가, 함께 웃고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마음이 통했다고 믿었던 그 날 하루가. 너는 전혀 아니었는데 혼자만 들떴던 내가 바보같았다. 성운은 빠른 걸음으로 옥상을 빠져나왔다. 왜 이렇게 가슴이 홧홧하고 시큰거리는지 모르겠다. 정기 검진일이 다가와서 그런가, 심장박동이 유난하게 빠르고 불안정했다. 초조했다. 너 같이 약해빠진 애가 특별함을 멋대로 꿈꾸다니. 다 욕심이고 비정상인 거라고, 사납게 쏘아붙이는 것 같았다. 나약한 제 몸뚱아리도, 미열에 몽롱한 머리도, 무심한 강다니엘도. 모든게 다 싫고 환멸났다.



8.


고작 다니엘 하나 일상에서 지워낸데도 그다지 달라진건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 말씀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를 적었고, 체육시간에는 스탠드에 앉아 열심히 공을 튕기는 애들을 구경했다. 점심시간에는 현태가 자신의 친구들 무리에 성운을 끼워주어 낯선 애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하교길에는 아직도 낯선 바다 내음을 맡으며 느릿하게 걸었다.


그렇게 수 일을 지내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집으로 걷던 성운은 우뚝 멈췄다.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다른 발자국 소리도 멎었다. 성운은 지끈거리는 미간 사이를 꾹꾹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았다. 꼭 돌아봐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다니엘이 뒤에 서 있었다.


"왜 따라와?"
"........."
"나 자꾸 왜 따라오냐고!"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지난 며칠 동안 그랬다. 하교길마다 자신을 따라 걷는 발자국 하나. 그 소리를 들으며 성운은 화가 날마다 쌓여가곤 했다. 바람이 길게 불었다. 인상을 팍 쓴 성운은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다니엘의 표정을 읽고 싶었다. 다니엘이 한 발, 두 발, 세 발, 간격을 좁히며 점점 더 다가왔다.


"내랑 바다보러 안 갈래요, 성운이 햄."
"........"

멋쩍게 말을 건 다니엘은 성운의 모난 얼굴을 보고 푸스스 웃다, 가느다란 손목을 멋대로 잡고 방향을 꺾어 걸었다. 버티는 듯 싶던 성운은 망설이다 그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바다바람은 참 차다. 암만 봐도 그냥 일직선인데 정말로 둥근가. 성운은 눈가를 가늘게 좁히고 한참 해수면을 쳐다보았다. 그런 제 시야에 갑작스럽게 갈색 캔 코코아병이 끼어들었다. 무심결에 손을 뻗은 성운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온도에 캔을 집어들려던 손바닥을 튕겼다.

"앗뜨뜨."
"뭐 보고 있었어요?"
"...내가 뭘 보든 말든 뭔 상관인데."


잔뜩 토라져서 나온 목소리가 꼭 삐진 아이의 것처럼 들려 성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니엘을 다시는 보지 않으려 결심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딱 한번만 더 따라와준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막상 옆에 앉더니 대답없이 한참동안 먼 바다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잠자코 기다리던 성운은 침묵이 길어지자 점점 욱했다. 다니엘 같은 건 세상에서 제일로 불편했다. 나는 대체 뭘 바라고 얘 옆에서 또 의미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까, 이런 삐뚤어진 생각이 들었다. 이럴거면 그냥 일어나야 겠다며 엉덩이를 막 떼려던 순간, 드디어 다니엘의 입이 열렸다.


"내가 억수로 잘못했어요."
"어...?"
"미안해요, 햄."


다니엘은 성운의 동그란 어깨 위에 고개를 툭 떨궜다. 그러다 몸을 돌려 성운을 꼭 끌어 안는 바람에 그 안에서 숨을 쌕쌕 고르던 성운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가슴팍을 주먹으로 쾅쾅 세게 두드리며 품에서 빠져나왔다.

"너 뭐야? 장난하냐? 와 너는 진짜 니 멋대로다. 이번에도 또 네 맘대로 다시 잘해주려고?"
"햄, 그게 아니라."
"니가 얼마나 날 우습게 보고 이러는 줄 몰라도 이제는 내가 사절이야. 잘해주다 피하다가. 너같이 제멋대로인거 진짜 싫어, 짜증나고 다신 쳐다도 보기 싫...!"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부로 모질게 말을 뱉던 입술이 틀어막혔다. 턱과 뒷 목을 큰 손바닥으로 잡힌 성운은 지나치게 가까워져 다 보이지도 않는 다니엘의 이목구비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입술 위에 맞닿은 덜덜 떨리는 낯선 체온은 도대체 무언지 제대로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니엘과 자신이 입을 맞추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에 다다르자, 성운의 두 눈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래졌다. 다니엘은 움직이지도 않고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맞닿고만 있었다. 콧가에 내뱉어지는 따뜻한 숨이 간지럽고 더워 성운은 다시금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숱이 많은 성운의 속눈썹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햄이 너무 좋아가 피했어요."

한참 후, 입술을 아주 살짝만 떼어낸 채로 다니엘이 머뭇, 이야길 시작했다.

"어떻게든 맘을 좀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서 거리를 두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내는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
"미친놈이라고 때리고 밟고 욕해도 좋으니까, 제발 외면하지만 말아조요."
"........"
"내가 진짜로 잘못했어요, 성우이 햄."

-근데, 진짜로 진짜로 많이 좋아해요.


아주 조그맣게 속삭인 마지막 고백까지 들은 성운은 도무지 자신이 듣고있는 것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운 시선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다니엘은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품고 있던 미열이 옮았나,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꾸만 입꼬리가 비싯 올라가는 바람에, 성운은 애써 침착하려고 간질거리는 가슴을 꾹꾹 참아 눌렀다.



-



"그런거는, 말을 해야 알아. 바보야."

일부러 쪽 소리가 나게끔 다가가 뽀뽀했다. 놀란 다니엘이 꼭 토끼같은 표정을 지었다.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경쾌한 웃음이 팝콘처럼 마구 튀어 나왔다.

"낯설긴 하지만 너랑 멀어지느니 맨날 뽀뽀하고 지내려구, 녤아."


그러니까 입술 도장 꾹 찍자, 다신 도망 못 가게.
 
대범한 말과는 다르게 성운의 문제 많은 심장이 미친듯 쾅쾅 크게 박동했다.



 

 
----------


바다마을 사는 시골소년핓X깍쟁이전학생클 

쓰고 싶었는데 너무나 노잼인것 ;ㅁ;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신 독자님들 계시다면 감사인사 올립니다. 흑흑
3편으로 마무리 될줄 알았으면 그냥 상중하로 할걸.. 01 02 쓴김에 그냥 03 씁니다핳

처음 써본 핓클 안녕

Daisy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