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 파산 신청을 할 지언정 사채는 절대 쓰지 마라, 사람들이 공공연히 진리로 받아들이는 이 한 마디는,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지키기 그리 썩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감당도 못 할 거대한 빚더미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대부업자들에게 손을 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사업을 위해서든, 눈물나는 사연을 포함한 가족의 수술비를 위해서든, 혹은 도박판을 위해 흥청망청 쓰기 위해서든, 사실 이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남자, 토마스 갤러거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그는 실업자다. 불경기가 닥친지 한참이 되어서도 나아지지 않는 경제에 그만 뎅강 잘리고 난 뒤로 벌써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때부터 이 때까지 그는 항상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가장이어야 했다. 그 결과 는 것은 이유 없는 분노와 음주, 가족에의 폭력 뿐이었다. 저보다 한참 어린 노엘을 죽도록 때리면서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기위로하는 게 고작이었다. 노엘은 어린 날의 제 모습과 지나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그 어린애가 자신과 겹쳐 보이니 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온종일 어두침침한 날씨까지 가세하고 나니, 그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치졸한 일말의 자존심과 끝 없는 자기비하 뿐이었더라고.


그래도 그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며 나름대로 노력을 해 보았고, 그 결과 그가 발을 들인 것이 도박판이었다. 하지만 카드라곤 친척들과 게임 할 때나 잡아본 게 고작이었던 그가 그 은근한 도박판에서 이겨낼 수 있을 재간이 없었으매, 그는 마침내 사채까지 쓰게 되었더란 이야기다. 하지만 토마스 갤러거, 그는 이제 또 다른 위기에 마주해 있었다. 사실 가족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일찌감치 벌려놨던 그 빚더미는 이제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노력했다. 적어도 스스로는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단계에 종착하고 말았고, 그는 이제 가정을 내버리고 도망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 정말 도망을 가는 중이다. 어디론가 먼 도시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 그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마주앉은 사람의 발치에만 시선을 꽂을 뿐이었다. 남은 가족은, 글쎄, 잘 모르겠다. 그는 당장 제 앞가림 하는 것만도 버거워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무책임하다.




*




리암은 심심했다. 아니, 정정. 그냥 심심한 게 아니라 죽을만큼 심심했다. 아주 지루하다 못해 불어 터질 것 같은 표정의 리암은, 벌써 네 시간 째 널찍한 제 사무실 쇼파에 거의 용접이라도 된 듯 들러붙어 사무실 밖만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원체 이 바닥 사업주라는 게 할 일이 없는 거야 당연한 일이어서 웬만한 지루함에는 면역이 생긴 리암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다. 리암은 이제 지루해 불어터지다 못해 말썽을 부려 볼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웬만해서는 나타나지 않는 제 측근인 겜이나 앤디가 나타나서 말릴 것 같은 빡센 장난을 순식간에 계획하고서 아예 지금 당장 그것을 손수 실행하려 할 참이다. 문득, 리암은 사무실 유리 문 건너편으로 보이는, 새까만 양복을 입고 험상궂은 인상을 한 일수꾼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거야 자주 보던 사람들이니 리암이 놀라지는 않지만, 놀람과는 다른 의미로 리암의 표정이 슬핏 구겨지기는 했다. 저 새끼들, 이미지 버리니까 사무실엔 올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건가 싶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리암이 쇼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한 소리를 하려고 할 때 즈음이다. 리암은 벌써 그들을 향해 '야, 씨발, 거기 다 서 봐!' 하고 소리를 지른 뒤였지만, 바로 그 직후 굉장히 획기적이고도 재밌을 것 같은 계획이 생각나버린 것이었다! 리암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갑자기 시비를 걸어대는 제 고용주를 쳐다보는 일수꾼들을 향해 지랄맞은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수금하러 가는 거지? 나도 간다. 앞장 서."


"… 같이 가신다고요?"


"칼로 귓구멍 파이기 싫으면 한 번에 알아들어. 고막은 잘 팔리지도 않아서 별로 파고싶진 않지만."


"…."


심심하던 도중 때마침 잘 되었다며 낄낄대는 리암을, 그들은 굉장히 난감한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바닥에서 유난히 성격 지랄맞기로 유명한 리암 갤러거다. 게다가 재력이나 못하면 윽박질러보기나 하지, 사실 사람들 중 몇몇은 리암이 왜 그 미친듯이 어마어마한 자본을 가지고 이 바닥에서 사채놀이나 하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 했다. 그 정도면 대기업 하나는 쉽게 꿀꺽할 만한 돈인데, 왜 빚쟁이들 돈이나 뜯어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종종 제기되곤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요지를 말하라면, 이 리암이 아무리 지랄맞게 굴어도 결국 이 일수꾼들은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의 하늘과도 같은 고용주니까, 솔직히, 까라면 까는게 맞다. 게다가 한 덩치 하는 일수꾼들에 비해서는 좀 작은 덩치의 리암이라지만, 불과 얼마 전 벌어졌던 웬 마피아 똘마니들을 눈도 깜짝 않고 손쉽게 썰어버리는-말 그대로, 잭나이프로 썰어댔다- 모습을 직접 본 그들이라 당최 끽 소리를 할 수가 없었더랬다.


그들은 잘 놀던 리암이 갑자기 왜 이 지랄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리암 하나가 더 낀다고 해서 별로 힘들어질 일도 아니라 생각하고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리암도 거기에 만족한 듯 실실 웃더니 그들이 타는 봉고차에 답삭 올라탈 뿐이다. 사실 수금하러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인 탓에 목소리가 좀 들떠있긴 했다. 리암은 평소에도 워낙 들뜬 듯한 상태인 탓에 겜이나 앤디 말고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순 없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리암은 좀 들떠있었다.


"누구한테 가는데? 얼마나 받으러 가?"


"토마스 갤러거, 삼십 만 파운드 빌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새끼, 도망간 것 같단 소리가 들려서."


"와, 이 미친 새끼. 내 돈 그렇게 떼먹고 도망을 갔어."


"본인이 안 갚으면 가족이 갚거나 할 겁니다, 뭐… 아니면 콩팥이라도 떼다 팔든지."


누가 들어도 섬뜩한 한 마디가 일수꾼의 입에서 툭 던져졌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이게 썩 그럴 듯한 농담이라도 되는지, 삭막하니 꽉 차있는 봉고차 안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질 낮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낄낄대며, 부인이 예쁘면 콩팥 말고 다른 걸 팔아도 되겠지, 하는 농담따먹기를 하는 놈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질 낮은 농담들은, 어느샌가부터 웃음을 딱 그치고 정색하며 윽박지르는 리암 탓에 모두 자취를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입 닥치고 운전이나 해. 사실, 암만 사채업을 하고 있는 리암이라도 저런 질 낮은 농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물론 돈 빌려간 새끼가 돈을 못 갚겠다 발을 빼면 본인 역시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일상에서만은 저런 소리가 나오지 않아야 했다. 그건 리암 나름대로의 철학과도 가까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시끄러워서 짜증난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


리암이 일수꾼들을 끌고 찾아간 토마스의 집에는, 아니나 다를까 토마스는 없었다. 당연스럽게도 그의 부인은 그가 당장 어디를 갔는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사실 리암이 듣기에도 그건 진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정 저 사정 다 봐주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리암은 당장 제가 해결하겠다며 험상궂게 눈알을 부라리는 일수꾼들을 잠깐 뒤로 물려놓고, 제가 직접 토마스의 부인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페기,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고, 페기의 옆에는 아들인 듯한 폴 갤러거가 서 있었다.


두 모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에 영문도 모르고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 점점 늘어지는 리암의 설명-요지는 토마스 갤러거가 빚을 왕창 져 놓고 홀랑 도망가버렸단 것-을 듣는 페기의 표정은 이제 세상의 끝을 본 듯이 암담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옆에 선 폴 갤러거도 예외는 아닌 듯 잔뜩 창백해져, 간신히 제 어미를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거 참 별 쓰레기같은 새끼가 다 있지?


그러니 진작 이혼하지 않고 뭘 했냐며 낄낄대는 리암을 향해, 뒤늦게사 좀 정신을 차린 듯 페기가 대답을 했다. 그 사람이 진 빚이에요, 그리고 삼십 만 파운드나 되는 큰 돈을 어떻게 여섯 달 안에 갚으라는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가난한 맨체스터 노동자 계층의 가정이, 그것도 여성 가장이 부담해 낼 만한 금액은 아닌 것이다. 사실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내야 한다. 빌렸으니 갚아야지, 그건 어떤 논리를 갖다대도 이길 수 없던 진리였던 것이다. 리암도 이 진리에 입각해, 뭘 당연한 걸 따지냔 표정으로 능청스레 대꾸한다.


"이거 뭐, 너네 장기 다 팔아도 그 돈 갚긴 글러먹기야 했지. 근데 어떡해? 니 남편이 빌렸으면 너라도 갚아야지. 딱하긴 하지만, 일일이 사정 봐 주면, 난 씨발, 뭐 먹고 살라고. 너네 봐주다가 내가 밥 굶으면, 그럼 안 되잖아."


페기의 표정은 좀 더 어두워졌다. 일말의 희망을 갖고 따졌던 한 마디였지만, 사실 이런 대답을 빤히 예상하고 있었던 까닭이리라. 폴은 피도 눈물도 없어보이는, 얄쌍한 낯짝의 사채업자를 향해 차마 내지르지 못할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꽉 쥐고만 있었고, 뻘하게도 뒤에 서있기만 하던 일수꾼들은 처음이라더니 정말 제대로 멘트를 치고 있는 리암을 향해 의외의 눈빛을 쏴줄 뿐이었다. 사실 저 대사는 온전히 리암 성격에서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리암은 이게 천직인 것도 같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있던 그들도 사실 방금 전 대사에는 좀 질릴 뻔 했으니까.


사실 삼십 만 파운드 정도는 리암이 운용하는 자금에 대면 손톱만큼도 되지 않을 양이었다. 아니, 손톱이 다 뭔가. 손톱 때만큼도 안 된다. 평소같았으면 뭐 포커판이나 그런 데에 끼어서 십 분만에 날리고도 미련없이 그냥 날아갔나봐 하고 집어치울 금액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뭘, 밥을 굶어? 저정도 뻔뻔함이면 그냥 타고 난 거라고 밖엔 말을 할 수 없다. 게다가 리암의 표정에서 단호함마저 읽어낸 페기가 이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니, 상황은 점점 더 뻔할 뻔자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좀 투닥투닥 하고, 신체 포기각서를 쓰든가 집문서 양도 서류에 사인을 하든가 하는 정석을 리암은 예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 소란스런 가운데, 어느 한 순간이었다. 페기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울음을 잠깐 가다듬고, 리암도 입을 꾹 다무는 어느 조용한 한 시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틈에, 저 안쪽으로 보이는 방문 안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엄마? 누구 왔어요?"


자세히 듣자니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한 듯도 한 목소리였다. 이에 대한 반응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리암은 장기 떼일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며 낄낄 웃어제꼈고, 폴은 눈 앞이 어찔한 듯 휘청거렸으며, 페기는 울음기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와중에도 급하게 방 안을 향해 소리를 치는 것이다. 쉬, 노엘, 나오지 마! 하지만 페기의 외침보다, 안쪽 방의 문이 열리는게 좀 더 빨랐다. 아직까지 영문도 모르고 비척비척 걸어나오는 또 다른 아들을 보는 페기의 표정은 이 이상 절망스러울 수도 없을 것 같은 무저갱이었다.


"…엄마?"


여직 졸린 듯 눈을 주먹으로 부비적대며 현관까지 나타난 이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물으며 가만히 하품을 내뱉었다. 분명 무슨 큰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당연히 이제까지의 상황을 알 리가 없는 노엘이니, 지금 당장 문 앞에 서있는 이 거대하고 험악한 사내들이 누군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페기는 울기만 하고 있고, 그래서 직접 상황 파악을 좀 해 보겠단 취지로, 노엘이 한참 눈을 부벼대던 주먹을 내리고, 맨 앞에 나와 현관문 앞에서 페기와 마주하고 있던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도 노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슬슬 지루하게 감겨가던 그의 눈이 슬그머니 둥그렇게 떠지는데, 노엘은 거 참 맹한 표정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얄쌍하게 생긴 놈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다시금 나른한 하품을 내뱉으며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그 때, 멍청했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섭게 굳어지더니, 대뜸 노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페기는 거의 까무러치듯 기겁하며 노엘을 빼내려고 달려왔지만 그것을 제지하는 일수꾼들의 행동이 먼저였다. 졸지에 사내에게 손목을 잡혀 영 썩은 표정을 한 노엘도, 그제서야 분위기가 좀 험악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곤 사내에게 윽박질러보지만, 너무 늦은 뒤다. 사내는 거의 수갑이라도 채우듯 노엘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이거, 얘 내 놔."


"안 돼… 내 애한테서 손 떼! 노엘! 빨리 이리로 와!"


페기의 얼굴은 이제 백지장보다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노엘의 손목을 부여잡은 리암의 손에서 도통 떨어지지를 않았고, 그녀 옆에 서있던 폴 역시 사나운 표정으로 제 앞을 가로막는 일수꾼들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난장판이 나버린 것이었다. 정작 붙들려 있는 노엘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 주위가 온통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시끄러운데다 페기의 울음소리마저 덧씌워진 뒤로는 저 소음 더미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곤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계속 묵인하기에는 리암이 시끄러운것에 썩 관대하지 못한 성격이었고, 결국 이 시끄러운 난장판은 리암이 제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천장을 한 방 쏘아버리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귓청을 찢을 듯한 쇳소리가 울리고, 집 안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고 리암을 쳐다보았다. 특히나 페기는 그 총에 노엘이 맞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걸음마저 휘청거리는 것이다. 리암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아줌마 상상하는 거 하고는. 빈정거리듯 페기를 향해 몇 마디 더 깔짝대던 리암은, 드디어 조용해진 분위기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노엘을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와중에 잡힌 손목이 아팠는지 앓는 소리를 내는 노엘에게 미안하다며 등을 토닥이는 모습이 영 그 답잖게 보였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 권총을 들고 설쳤던 사람과는 영 이미지가 다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노엘을 이리 보내라며 언성을 높이는 페기에게는 사뭇 살벌한 표정을 해가지고선 윽박지르듯 대답한다.


"웃기네. 지금 아줌마한테 선택권이 있는 줄 알아?"


"하지만 그 애는…, 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


이제 거의 애원하듯, 제 아들만큼은 안 된다며 비는 페기를 향해 리암은 가차없는 욕설만을 틱틱 내뱉을 뿐이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빚 갚을 생각이 있긴 한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 치미는 막대한 짜증보다도, 제게 안겨 있는 조그만 아이에 대한 호감이 더 컸던 리암은, 결국 사장의 권한을 좀 남용해다가 페기에게 특권을 줄 생각이었다. 자꾸 안 된다고 하는 저 여자한테는 좀 짜증이 나긴 하지만, 맙소사, 대체 이 조그만… 이런 게 있단 소린 듣도보도 못했다. 빤히 저를 지켜보는 일수꾼들과 이 애의 가족들 탓에 당장 실쭉 벌어지려는 표정은 꾹꾹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게다.


리암은 자꾸만 꼼지락대며 페기에게 가려고 용을 써대는 노엘을 아예 꽉 붙들어다, 제 주머니에 있는 수갑을 꺼내 제 손목과 그 얇은 손목에 떡하니 채워버리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갑이 어디에서 났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지!) 그 모습을 본 페기가 기함을 해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따져 물었으나 리암은 그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하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얘가 자꾸 너한테 가려고 하잖아. 그리고서 몇 마디 더 빈정거리려는 리암을 향해, 더 참지 못한 폴이 언성을 높였다. 사실 일찌감치 나왔어야 하는 말이기도 했다.


"바라는 게 뭡니까, 노엘한테 뭘 바라요?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된 앱니다. 그 애를 담보로 잡기라도 할 생각이면 차라리 날 데려가요!"


"싫어, 징그럽게 널 왜 데려가냐? 그냥 얘 데려갈래. 그 대신 붙는 조건 들으면 너도 싫다고는 못 할텐데."


받아치는 리암의 말에, 이번에는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일수꾼들이 낄낄대는 웃음을 흘렸다. 능청스런 리암의 표정이 도무지 이 심각한 상황과는 들어맞지를 않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는 페기도 폴도 휑하니 빈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의도찮은 침묵이 다시금 장소를 메웠다.


그러나 그 불편한 침묵을 대뜸 깨버린 이는 누구도 아닌 노엘이었다. 폴이 하는 말과 험상궂은 사내들의 사이에서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듯한 노엘은, 제법 영특하게도 제가 리암을 따라감으로써 따르는 이득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노엘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리암을 향해 물었다. 내가 따라가면 뭐 해줄 거에요? 우리집엔 먹고 뒤질 돈도 없는데…. 웅얼웅얼, 입 안에서 맴도는 듯한 말들이었지만 집안이 너무 조용한 탓에 저 뒤에 있던 일수꾼들까지 그 말을 들은 모양이다. 어린아이 답잖은 걸어지는 말투에 몇몇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리암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으며, 단지 노엘이 어떻게 제가 채워놓았던 수갑을 풀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싶어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노엘의 간단한 행동이 뒤따랐다. 리암의 손목에 치렁거리는 한 짝의 수갑에, 노엘이 제 손목을 그냥 쑥 집어넣었다 쑥 빼버렸던 것이다. 그래, 수갑으로 묶어놓기엔 노엘의 손목이 너무 얇았다. 당장 먹고 뒤질 돈도 없다고 말한 게 헛말은 아닌 듯, 제대로 먹지 못한 전형적인 아이처럼 노엘은 말라있었다. 리암은 혀를 쯧쯧 차며 노엘을 다시 제 품에 여몄다. 노엘은 이제 꼼지락대지 않았다. 거기에 만족한 리암이 나른한 웃음소리를 내며 페기에게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의 시선은 거의 홀린듯 노엘에게 매여 있었다. 어지간히도 걱정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은 이 작은 애밖에 없어 보이는걸. 방금 전 노엘이 물었던, '내가 담보로 따라가면 얻는 이득이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을 리암은 노엘 대신 페기에게 돌려주었다.


"얘 데려가는 대신 이자는 없는 걸로 쳐 줄게. 사실 원금이야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나쁜 조건은 아니잖아?"


이 때까지 쭉 거짓으로 점철되었던 리암의 발언들이지만, 이 말만큼은 사실이다. 이자까지 다 해서 삼십만 파운드인 거지, 거기서 이자만 빼고 본다면 원금은 십만 파운드 남짓 될 뿐이다. 사실 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는 그것도 어마어마한 금액이겠지만 이들에게는 이것마저도 감지덕지일 거다. 하지만 이러한, 지극히 합리적인 계산을 하기엔 리암에게 붙들려있는 노엘의 존재가 페기에게는 너무 커다랬다. 삽십만 파운드건 십만 파운드건 당장 노엘부터 제 품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사랑스런 아들, 술 취한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빚 대신 팔아넘겨야 할 상황까지 왔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노엘만큼은 안 돼, 하며 절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절한 울음기가 간간히 섞여들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웬만한 상황에는 눈 하나 깜짝 않던 일수꾼들마저 휑하니 시선을 피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또다시,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한 것도 노엘이었다. 노엘은 세상이 무너져라 우는 페기를 향해 말했다. 목소리는 굉장히 담담해서, 차라리 이 중에 가장 어른스러운 게 노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엄마, 나 괜찮아요. 이 사람 따라 갈게."


"안 돼, 노엘, 절대 안 된다. 엄마 말 들어, 응?"


"엄마, 울지 마… 정말 괜찮아."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슬슬 힘에 부치는 것이다. 그렇게 악을 썼으니 원, 혀를 쯧쯧 찬 리암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아래에 있는 노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웬 걸, 여기 있는 사람들중에 얘가 제일 어른스러운 것 같다. 심지어는 심드렁하게도 느껴질 법한 담담함이 이 애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것이다. 리암은 노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알고싶어졌다.


정말 괜찮아요, 사랑해요, 엄마. 마지막으로 내뱉는 한마디에서 슬쩍 떨림이 묻어나는 것 같으나 그게 무서워서 그런 건지 어떤건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암은 점점 더 이 조그만 것에 대한 흥미가 불어났다. 어서 집에 데려가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 꼼지락대는 작은 손을 붙잡고 하나하나 이로 물어보고 싶다. 적당히 붙은 볼살도 당겨보고 싶고, 그래, 밥을 좀 먹여서 살도 찌워야겠고…. 그런 생각을 할 양이면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리암은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단 결론을 내버리고서, 싸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던진 뒤 노엘을 안은 채로 뒤 돌아 걸음을 옮겼다.


"신파극은 나중에 빚 다 갚거든 마저 찍어, 알았지? 원금 다 갚기 전까진 좆도 없는 거야."


냉정하게 뱉어진 한 마디에, 드디어 참지 못한 폴이 주먹을 들고 리암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 주먹이 리암에게 채 닿기도 전에 폴은 일수꾼들에게 제지당했다. 그래도 여전히 필사적인 폴을 향해 이번에는 노엘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 만다. 노엘은 폴이 저 험악한 사람들에게 맞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빚 대신 팔려가는 거나 당장 내일 돌아올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폭력에 벌벌 떨며 웅크리고 사는 거나 비참하기는 똑같았다. 그러니 똑같이 괴로울 바에야 가족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쪽이 좋겠더라고, 어린 나이에 노엘은 그 나름대로 생각했던 거다. 집 대문을 벗어나 낯선 차에 타면서도 노엘은 울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데려온 그의 팔을 붙잡고 궁금했던 것을 물을 뿐이었다.


"나, 팔 거야?"


겁도 없이 반말을 툭툭 던져대며 묻는 물음은, 그러나 썩 귀여운 질문이다. 리암은 무슨 헛소리를 하느냔 듯이 낄낄대며 대답했다.


"넌 팔아봐야 이자도 안 나와. 그냥 나랑 같이 가는 거야."


"왜?"


"왜는 무슨 왜야? 키워서 잡아 먹으려고 그러지."


딸꾹. 리암이 노엘을 발견한 이래로 처음, 노엘이 진심으로 겁을 먹은 눈치를 보였다. 담보로 팔려가니 뭐니 하는 말에도 좀처럼 겁먹지 않던 꼬마가, 의외로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뜸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아마 식인 마녀가 나오는 동화를 생각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그 마녀를 이 애는 상당히 무서워 한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조그만 입에서 튀어나온 딸꾹질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리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엘을 와락 끌어안은 다음, 이마며 볼에 키스를 잔뜩 퍼붓고 말았더랬다.



*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엘은 퍽 수완이 좋았다. 저 나이에 벌써 객관적인 득실을 따질 줄 아는 것 부터가 그 확실한 예였다. 차를 타고 리암의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도 노엘은 리암에게 약속을 꼭 지켜줄 것을 다시 다짐받았고, 증거가 필요하니 계약서부터 써 달라고 쫑알대는 과감한 행동을 해 리암을 두 번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어린애였던 노엘은 대체 왜 리암이 웃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한참 뒤에는 도착한 사무실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그저 조그맣게 움츠러들어만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일수꾼들의 사무실 출입을 쉬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사업체 특성 상 꺼름칙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내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살아서 주위 상황에 민감한 노엘로서는 더더욱 겁을 먹을 수 밖엔 없는 모양이었다. 그 탓에 노엘의 손은 리암의 옷자락 끝을 꽉 붙든 채 절대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고 조그만 몸 역시 리암 뒤로 바짝 숨어, 종국에는 리암의 다리 한 쪽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완전 고목나무에 매미같다.


"왜 그래? 괜찮아, 여기선 아무도 너 못 건드려."


"여기서 술 냄새 나. 우리 아…아빠는 이 냄새 날 때마다 무서워졌어."


무섭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 끝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싶었다. 리암은 그 순간 약간 기시감을 느끼고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까까지, 정신이 없었을 때는 몰랐지만, 노엘의 얇고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건 제대로 본 게 맞다면 분명 얼룩덜룩한 멍 자국들이었다.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어 잘 몰랐다. 하지만 팔뚝 중간까지 내려오는 반팔 그 조금 밑으로 시퍼렇게 보이는 것들은 분명 멍자국이 맞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서늘하게 싹 가시는 기분이다.


리암은 딱딱하게 굳혔던 표정을 애써 풀어내며, 제 다리에 답싹 매달려있던 노엘을 덥석 들어올려 제 품에 여몄다. 술 냄새가 어디서 나는가 싶었는데 누군가가 양주를 한 잔 하다 그걸 엎고 그대로 둔 것 같은 테이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좀 더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자면, 그 누군가는 불과 몇 시간 전의 리암, 본인인 것이다. 으윽, 병신같긴! 하기사 본사 로비 한 가운데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 수 있는 놈팽이가 사장인 리암밖엔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걸 떠올리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리암은 대체 여기서 술냄새를 나게 한 병신을 잡아다 족칠 생각마저 하고 있던 마당에야, 조금 머쓱할 밖에. 리암은 이제 술을 좀 줄여야겠다는, 앤디와 겜이 알았다간 식겁하고도 남을 획기적이고도 생산적인 생각을 하며,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양주병과 잔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지나가는 직원 하나를 잡고 쓰레기통을 통째로 갖다버리고 테이블까지 치워버리라고 말하고 나서야 좀 상황이 괜찮아졌다 싶었는지 노엘을 슬슬 토닥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을 맺을 문제가 아니었다. 노엘에게 든 저 멍자국이 단지 팔에만 국한된 것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 그러러면…. 리암은 제 사무실 옆 켠에 위치한 방이 있음을 떠올리고선 그 쪽을 향해 급하게 걸음을 틀었다. 어지간히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리암 탓에 사무실을 뎅겅 갈라 만든 그 방에는 웬만한 살림살이가 다 갖춰져 있었고, 심지어는 샤워실과 화장실도 딸려있었다. 사실 지금 당장 노엘의 꼴이 썩 좋지 않으니 씻긴다는 명목이라면 본인도 이해를 할 것이다. 어쩌면 싫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직접 봐야만 하겠다. 또 다시 지나가는 직원을 잡아세워 애한테 대충 맞을 만한 옷 좀 사오라며 카드를 넘긴 리암은, 여전히 좀 꼬물꼬물 움직여대는 노엘의 등을 토닥이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무실이 꼭대기층에 있는 탓에 일 분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도 그리 긴 시간처럼 느껴지지 않을만큼 리암은 조바심이 났다. 노엘의 상태가 정확히 제 예상대로라면, 씨발, 절대로 토마스 갤러거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아예 이 애의 양육권을 강짜로 빼앗아 올 생각까지 들었다. 성도 똑같으니 개명신청 할 필요도 없을텐데….


이제 혼자 걸을 수 있다며 칭얼대는 노엘의 말을 한 쪽 귀로 흘리며 리암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불청객이 있는 것 같다. 대체 언제 얘기를 들은 건지는 몰라도, 겜과 앤디가 쇼파에 앉아있는 꼴을 보며, 절대로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겠구나 어림짐작을 해 본다.


*


일단, 노엘은 신기해 했다. 사무실도 더럽게 넓은데, 거기 딱 하나 단촐하게 달랑 붙은 작은 문으로 사무실보다 두 배는 더 넓은 방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라고 신기해 하는 것 같았다. 하기사 저 같아도 저런 딱딱하기 짝이 없는 사무실 옆에 이런 가정집같은 방이 붙어있단 걸 알면 좀 놀라긴 하겠지만, 아무튼 노엘만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쪽에서 보자면 노엘은 딱 저 나잇대의 애가 맞긴 한데, 종종 튀어나오는 조숙한 행동을 보자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아무튼 리암은 아직까지는 노엘이 좋아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대충 그럴듯한 인형 쿠션 하나를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우선적으로, 지금 당장은 이 조그만 것보다도, 눈 앞에 앉아 당최 어이가 없단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앤디와 겜에게 그럴 듯한 해명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리암은 해명같은걸 하면서 살기엔 상당히 직설적인 성격인데다, 결정적으로 해명같은 거 안 해도 별 지장없이 잘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던진단 말이 돌직구였다. 아, 씨발, 귀엽잖아! 또 뭐?!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게다가 단말마의 그 외침을 들은 겜과 앤디도 차라리 이게 리암답지, 하고 납득을 하는 판에야 이것보다 더 우스운 상황이 있을까. 하지만 이자 안 받는다고 덥석 선언하고 온 문제는 쉬이 납득할 만한 게 아니지. 달리 묻지도 않았는데 냅다 변명부터 하고 보는 리암을 향해 겜이 한 차례 쏘아붙였다. 그래서, 저 쪼끄만 게 20만 파운드보다 가치가 있어보였단 말이야? 예외 만들면 피곤하다고 지랄지랄 한 게 누구였는데, 무슨 생각이야? 그리고 그 날카로운 지적 끝에, 옆에 앉은 앤디가 중얼거리기를, 생각을 했을 리가. 해서 앤디가 겜한테 얻어맞았다.


"으악, 겜! 왜요?!"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리암, 너 진짜 쟤가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데려온 거야?"


"나 설득할 생각 하지 마. 얜 죽어도 안 돌려보내. 그리고 얜 쪼끄만 게 아니라 노엘이야."


"뭐? 사장이란 게…."


"씨바아알! 사장이고 나발이고!"


쿠션을 끌어안은 노엘을 또 다시 리암이 끌어안았다. 그 기세가 이 때까지 겜이 보아 온 리암의 모습 중 가장 진지해서, 어쨌거나 저 조그만 애를 돌려보내는 건 무리라는 걸 예상은 하겠지만서도 리암이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외는 안 된다며 하도 윽박지르는 바람에 일수꾼들이 치르는 곤욕들은, 모조리 관리자인 겜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겜이 회계장부쪽을 맡고 앤디가 일수꾼들 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앤디는 단호한 성격이지만 어째서인지 소심한 구석이 없잖아 있어 그런 험상궂은 사람들을 대하는 걸 어렵게 여긴다. 하지만 겜은, 겉으로는 이 건물에서 가장 유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어딘가 냉정한 구석이 있어, 얼핏 보면 언밸런스 할 것 같은 그 직책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적임자였다. 하여튼 그런 탓에 일수꾼들의 불평은 겜이 다 듣는 건데, 정작 안 된다던 예외를 만들어버린 본인은 천연덕스레 그렇구나 하고 있으니 마냥 웃어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 역시 무섭게 눈치가 빠른 노엘로 인해 스르르 풀려버리고 만다.


이제까지 인형을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 이들의 대화를 듣고 상황을 대충 파악한 노엘은, 또다시 그 나이 답잖은 눈치를 발휘해 꾸물꾸물 리암의 품에서 벗어나 일어서는 것이었다. 갑자기 일어서는 노엘을 리암은 영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리암의 팔이 다시 노엘을 끌어당기기도 전에 노엘은 종종걸음으로 맞은편에 앉은 겜에게 다가가, 역시나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겜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 당긴다. 게다가 올려다 보는 눈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그렁그렁하지 않은가? 겜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본인도 모르게 가라앉히고 가만히 노엘이 하는 양을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 리암은 진정 저게 저 나잇대의 애가 맞는지 고민하는 중이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우리집에 돈 없어요… 더 늘어나면 안 된단 말이야. 안 떠들고 조용히 있을게요…, 겜?"


"…헉, 씨발. 존나 귀엽다."


"앤디, 입 단속 해."


겜, 하는 이름은, 먼젓번에 앤디가 소리치듯 부른 그 한 마디를 기억한 모양이다. 결국, 다른 짓을 하는 척 하면서 노엘은 겜과 리암의 대화에 쭉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방금 겜이 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다. 사실 기본적으로 겜은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애들이라고 하면, 징징대고, 졸라대고, 땡깡을 부려가며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 내는 작은 머저리들이란 게 겜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소음덩어리들은, 고요함과 평화를 사랑하는 겜에게는 천적과도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이 애는 대체 뭔가? 목소리도 그다지 크지 않고, 무엇보다도, 방금 알아차린 거지만… 상당히 얌전하다. 더불어 눈치도 썩 나쁘지 않아보였다. 이제까지 겜이 알아오던 흔한 아이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앳된 듯한 눈으로 올려다 보는 허여멀건 얼굴이 -겜은 절대 인정하긴 싫었지만 별 수 없단 걸 깨달았다-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겜은 어쩐지 이제서야 리암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고, 결국 아무리 설득해도 이 애를 보내버릴 수 없다는 것도 납득했다. 그래, 뭐, 사실 시끄럽고 성가실까 싶어 반대했던 거지 이런 애면 별로 거슬리지도 않을 테니까. 내 이름은 콜린 아처야. 겜은 별명인데… 그래, 넌 겜으로 불러도 돼.


겜은 여직 대답을 듣지 못해 간절한 눈으로 끙끙대는 노엘을 슬쩍 끌어안고 토닥이며 리암을 향해 눈썹만 까닥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리암은 당장 노엘을 이리 내 놓으라며 짜증을 부렸고, 앤디는 생전 겜이 애를 다 안아주는 모습을 본다며 낄낄 웃기 바쁘다. 하여튼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애를 맡기기엔 영 불안한 감이 있지만… 아무튼 리암이 데려왔으니 리암에게 안겨주어야 할테다.


겜은 의아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 보고 있는 노엘에게 슬며시 웃음을 지어주며, 노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들어올려 리암에게 건네주었다. 졸지에 달랑 들려 리암에게 건네진 노엘은, 그러나 기분이 썩 나쁜 것 같지가 않았다. 되레 공중에 살랑살랑 떠 다니니 재미마저 느끼는 모양으로, 노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리암만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씩 올리는 것이었다. 그래, 애는 애지. 벌써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모를 말을 중얼대며 리암이 노엘을 또다시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노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지켜보던 앤디는 리암이 대체 뭘 하는가 의아해 하는 눈치였지만, 겜은 워낙에 눈치가 빠른 덕에 금새 박수까지 짝짝 쳐주며 리암에게 동조한다. 와, 노엘, 비행기 타네! 그러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도 웬 애를 업어왔냐며 정색하던 사람같지가 않아 앤디가 사색이 되기도 했다. 내 애인이 이중인격자라니!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호통재라, 씨발.


"우, 으아… 리암, 무서워!"


"응? 재밌다고? 안 떨어트릴테니까 걱정하지 마."


리암이 노엘을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며 노엘을 안심시킨다. 앤디는 그런 리암의 모습을 보며 엄청난 위화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겜이고 리암이고 전부 이중인격이 있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 안면을 싹 바꿀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들의 이중인격에 안색을 굳히던 앤디도, 결국은 재밌다며 까르륵 넘어가는 웃음으로 샐샐대는 노엘의 모습에 눈꼬리를 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사 생각컨대 이제껏 리암이 주워온 것 중에서 노엘이 가장 나은 것 같았다.


"근데 얜 어디서 키우려고? 너네 집?"


"당분간은 여기 있게 하려고. 나야 어차피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데 뭐…."


심드렁히 대꾸하고선 계속해서 노엘을 비행기 태우던 리암도, 종내는 지친듯 슬그머니 노엘을 품에 안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어딜 가느냐 겜이 눈치를 주자 리암이 사무실에 딸린 쪽문으로 눈을 힐긋거렸다. 이제 이 둘도 대충 노엘에 대해서는 납득을 한 듯 싶고, 남은건 애시당초 생각하고 있었던 노엘의 목욕 뿐인 탓이었다. 게다가 빠르기도 무지 빠르지, 아까 옷 좀 사오라고 시켰던 직원도 벌써 올라와서는 사무실에 옷가방만 다섯 개를 두고 가는 것을 보아하니… 저 직원도 그 짧은 순간에 노엘에게 맛이 간 것 같다. 그렇잖고서야 처음 보는 애 주려고 옷을 저렇게나 많이 사올 필요가 없거든. 아무래도 요 조그만 게 생각 이상의 매력을 가진 모양이다, 리암은 어쩐지 좀 불안한 느낌이었다. 이딴 건 예쁜 딸 가진 아빠나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딘가 잘못돼도 통 잘못된 불안감이지만, 그 불안감에 전혀 위화감이 없단 게 문제였다. 사실 노엘을 보자면 여자애라고 해도 별로 의심이 가지 않을 외모기는 했다. 진짜 예쁘긴 하지, 근데, 토마스 그 새낀 이렇게 예쁜 애를 때릴 데가 어디있다고 때려놨는지 모르겠다. 뜬금없이 생각난 예의 그 폭력사건 탓에 리암은 다시금 짜증이 팍 치미는 것을 느끼며, 앤디가 아쉬워하건 말건 좆도 신경쓰지 않고 작은 쪽문을 통해 휑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사라지기 전에 겜에게 딱 한 마디를 남기기야 했지만.


"토마스 갤러거 있지? 그 새끼 좀 빨리 찾아 와. 런던에 없으면 영국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 내."


*


그리고 결국 리암의 예상이 맞았다. 노엘을 씻기면서, 리암은 세상에 이 작은 몸에 이렇게 많은 멍이 들 수나 있는가 하는 의문에까지 휩싸여야만 했었다. 정말, 그 조그만 몸에 때릴 데가 어디있다고 온통 시퍼렇게 푸르죽죽한 멍들이 들어차선…, 리암은 도통 티셔츠를 벗기 싫어하던 노엘을 십 분 이해하고도 남았다.


노엘을 온통 뒤덮은 멍들을 보고서 리암은 짜증과 분노에 이를 으득 물었더랬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목이나 팔을 피해 때린 용의주도함에는 살의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리암을 머리 끝까지 빡 돌게 한 건… 노엘의 등에 있던 칼자국이 선명한 흉터였다! 티셔츠를 벗고서 죽어도 등 만큼은 보여주지 않으려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치던 노엘에 수상함을 느낀 리암이, 수십 차례의 으름장과 회유를 거쳐 보이게 만든 노엘의 등에는, 정말, 웬만큼 스쳐서는 날 수 없는 게 분명한 칼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리암은 진짜 시야가 잠깐 나가버리고 말았었다. 억누르지 못한 살의가 스물스물 피어나는 통에 겁에 질린 노엘이 끙끙대서 다시 웃는 낯을 하긴 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통 화가 가라앉질 않는다. 이 조그만 거에 칼질까지 했다 그거지. 암만 생각해도 토마스 갤러거와의 재회가 썩 얌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동시에, 이 어린 나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견뎌야만 했을 노엘에의 안타까움이 참을 수 없이 밀려와, 리암은 뒤늦은 위로를 노엘에게 건네기도 했다.


사실 리암도 어릴 적엔 썩 곱게 클 수 없었었다. 지금은 멀쩡하게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아버지지만, 그 사람도 소싯적에는 실업 수당이나 타먹는 실패한 아버지였던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리암은 조그맣고 힘 없는 어린 애였기 때문에, 리암도 썩 순탄히 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리암은 여지껏 그 때의 일을 기억했다. 찬 바닥에 웅크려서, 아버지의 구둣발에 얻어맞으며 데굴데굴 굴렀던 끔찍한 기억 말이다. 이제 와서는 그냥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기억이지만, 그 때는 아니었다. 아마 지금의 노엘에게도 그렇지는 않을 거다. 리암은 조금 큰 듯한 새 티셔츠를 걸친 노엘의 머리를 두어 차례 쓰다듬더니 종내는 무릎을 꿇고 노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노엘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리암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마자 조금씩 벌겋고 축축하게 젖어가던 노엘의 눈가를 리암이 모를 리가 없다.


"아팠지?"


"별 거 아니야. 별로 아픈 것도 아니었어."


벌겋게 단 노엘의 눈가를 커다란 손가락이 한 차례 문질러 닦아내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노엘은 도통 리암과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바닥만 내려다 보는 시선이 어릴 때의 저를 보는 것 같아, 리암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어릴 때, 정확히는 이렇게 흠씬 두들겨 맞았을 때, 누군가 물어주길 바랐다. 많이 아팠어? 그러면 저 역시 노엘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을 테지만, 그 다음에 듣고 싶은 말 역시 생각하지 않은 건 아녔다. 리암은 노엘의 손을 붙잡고 다시금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 보다는 강요와 확신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아냐, 아팠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노엘의 눈썹이 움틀거렸다. 눈시울이 좀 더 빨개지는 순간에도 노엘은 고개를 휘휘 젓고선 부정할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리암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안 아팠다니까… 울지도 않았는데."


"그래, 눈물도 안 나게 아팠겠지. 병신같으니."


"……."


혀를 짓씹는 듯한 리암의 대답에 노엘은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는 듯했다. 아니, 실은 목이 턱턱 매여서 그럴 수가 없단 설명이 좀 더 적절한 것 같았다. 리암은 그제서야 슬그머니 마주해오는 노엘의 눈을 보며, 이제껏 통 보인 적이 없던 엄한 얼굴로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었다.


"너무 아팠어. 그치?"


"…아…으…"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깔렸다. 그리고 그 순간, 노엘은 이제껏 잘 참아오던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상한 사람이다. 이상한 사람이 자꾸 힘들었다고 말한다. 정말 괜찮았는데, 울면 엄마가 더 우니까 매번 꾹꾹 울음을 참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서…. 여지껏 꾹꾹 눌러놓고 있던 울음이 삽시간에 터져나왔다. 노엘은 가빠지는 숨을 억누를 겨를도 없이 서럽게 엉엉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벌써 몇 년이나 참아왔던 눈물은 한 번 터지자 기회를 잡기라도 한 듯 멈출 생각을 않았다. 그래, 사실 아팠다고 말하고 싶었으니까. 여기는 엄마가 없다. 울어도 괜찮아….



*


노엘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미리 각오하고 있었던 매서운 손찌검 같은 건 온데간데 없이, 웬 부드런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탓이었다. 부끄럽게도 아까 이 이상한 사람의 몇 마디 위로때문에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난 뒤로는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는데, 그런 제게 다시 등을 두드려주며 밥까지 챙겨준 걸 보면 이 사람도 처음 봤던 것보단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방금 졸리다고 했더니 침대까지 안아서 데려다 줬다. 혼자 걸을 수 있는데… 아까부터 몇 번이나 중얼거려도 들어주지 않아서 이제는 포기하긴 했지만, 아무튼 싫지는 않다. 지금 당장도 봐, 자고싶다고 했더니 품에 끌어안고 같이 누워서 자장가까지 불러주는걸. 노엘은 차라리 이 사람이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어렴풋 하는 중이다. 정말, 이런 건 엄마한테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다정함이어서, 대체 이 사람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고민을 하다가도 어느샌가는 그저 그 따뜻함에 흐붓하게 취해 샐샐거리는 줏대 없는 웃음만을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많이 피곤했냐? 하긴, 하룻동안 그 지랄을 했는데. 여기 불편하진 않아?"


"응. 덕분에요."


으응,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배배 꼬인 발음으로 웅얼대는 노엘의 머리를 커다란 손이 한번 더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기특하다는 듯 노엘을 칭찬하더니, 좀 더 많은 것들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음식은 입에 맞았고? 옷은 마음에 들어? 좋아하는 색이면 좋겠는데, 씨발, 그 여잔 무슨 생각으로 핑크색을 사 온거야. 하여튼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앞으로도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그렇게 움츠러들어 있지 마. 아무도 널 못 건드릴 거야. 장담할게. 리암은 안심하라고 다독이기라도 하듯 다시 노래를 허밍했다. 애초에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나보다. 그래서 노엘은 제 어깨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핑크색 후드티가 싫다는 말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따져보자면 지금 옷 투정할 처지도 아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도 이렇게 좋아하니까.


노엘은 이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오는 리암의 손길에 좀 익숙해진 채로 꿈뻑꿈뻑 눈만 감았다 떴다 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싶지만, 몰려오는 잠에 대한 욕심과 동시에 이 사람의 나른한 노랫소리를 좀 더 듣고싶은 욕심도 커져간다. 자장가랍시고 불러주는 게 I Am The Walrus라서 이 사람이 대충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실마리를 잡은 것 같기도 했다. 노엘은 웅얼웅얼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리암을 쳐다보았다. 가사 하나 틀리지 않는걸 보면 이 사람도 비틀즈 팬인가 보다. 대개 제 또래들은 비틀즈엔 영 관심이 없는 편이었던 탓에, 순간 얌전히 있어야겠단 마음은 싸그리 잊어버린 채 반가운 마음에 들떠 노엘이 신나게 물었다. 아저씨도 비틀즈 좋아? 꾸역꾸역 몰려오던 잠이 잠깐 한 발짝 가시는 기분이다. 그런데 노엘의 말을 들은 리암의 표정은 썩 좋질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면….


"아저씨? 넌 씨발, 내가 아저씨로 보여? 너 의외로 잔인하다."


"…그럼 뭐라고 불러?"


"그냥 리암이라고 해. 아까는 잘만 불렀잖아. 으으, 아저씨라니… 나도 한 물 갔구만."


진짜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어쩌면 진짜 상처받은 걸 수도 있다- 제 가슴께를 쥐어 뜯으며 리암이 끙끙대자, 그 나이답잖은 모습에 노엘이 키득키득 웃었다. 리암은 잘생겼으니까, 아저씨가 돼도 괜찮을 거야. 그러고선 샐쭉 간지러운 눈웃음을 치는데, 리암은 더 이상 제 입꼬리가 찢어지려는걸 막지 못했다. 거의 귀까지 걸리려는 입을 간신히 수습한 리암은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으으, 소리를 내고서 노엘을 끌어안고 뭉그적거렸다. 품에 안긴 노엘이 숨막힌다며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런 걸 가만히 놔두기엔 도무지 불가항력이다. 리암은 방금 전 아저씨 발언에 대한 충격같은 건 싹 잊어버리고서 마냥 좋다는 듯 노엘의 머리를 헤집었다. 게다가 비틀즈가 좋다니, 어린애 치곤 취향이 제법이다. 집에 쌓아뒀던 LP를 들고오면 썩 좋아할 것 같았다.


리암은 벌써부터 이 조그만 애가 감당도 못할 정도로 좋아지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써야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대체 노엘의 어디가 자꾸만 신경을 쓰게 만드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게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거였다. 이것저것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니. 이런 건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에 애를 갖고 나서야 느껴볼 것인줄로만 알았는데….


리암은 이제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 얌전히 안겨있는 노엘의 등을 통통 두드리며 낮게 속삭였다. 그럼, 비틀즈 말고 또 좋아하는 건? 일단 리암 혼자서 이제까지 알아낸 거라곤 노엘이 단걸 좋아한다는 거랑, 아무튼 핑크색 후드를 좋아하진 않는다는 거 두 개 뿐이었다. 핑크색 싫어하는 거야 사실 리암도 그랬으니 당연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차마 대놓고 싫다곤 말 못하고 끙끙대는 모습이 귀여워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본인은 싫다지만, 노엘이 저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리암은 썩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암더러 핑크색 후드 같은 걸 입으랬다간 뼈도 못 추릴 만큼 얻어 터질테지만, 그걸 노엘에게 입혀놓았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튼 핑크색은 핑크색인 거고, 리암이 의외로 놀랐던 건 노엘이 단 걸 좋아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저 나잇대 애들이 달달한 것들을 좋아하는 거야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닌데, 노엘이 좋아한다니 그게 좀 놀라운 거다. 그러니까 리암은, 처음으로 노엘에게서 발견한 어린애의 모습에 놀랐던 거였다. 그게 웬 헛소린가 싶겠지만 이건 진짜다. 하지만 그렇대서 더 놀라고 있을 이유도 없다. 저거야 사무실에 사탕 몇 박스 쌓아놓으면 되는 거니까. 아예 제과점 하나를 사 버릴까 잠깐 고민하던 리암은, 얼마 있잖아 무어라 웅얼거리기 시작하는 노엘에게 좀 더 가까이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보아하니 슬슬 잠기운을 이길 수 없는 눈치였다.


"비틀즈랑, 기타랑… 기타 치는거랑…, 자는 거. 나 졸린데…."


"그래, 자꾸 깨워서 미안해. 이제 자자."


노엘이 낑낑대며 리암에게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따뜻해서 기분이 좋은듯 샐쭉 웃는 모습이 귀여워 이마에 입술을 꾹 눌러주자, 노엘의 표정이 좀 울멍울멍히 변했다. 아까부터 그러더니…, 저 놈의 집구석에선 애한테 어지간히 매정하게 굴었던 모양이다. 애 엄마야 나름대로 돌보는 것 같기는 했지만, 대충 눈치를 봤을 때 그녀는 그렇게 다정다감한 어머니상은 아니었다. 형 쪽도 영 딱딱한 상인게 다정함을 기대하기는 글러먹었던게 분명하니, 아마 이런 건 생소한 경험일 거다. 지금까지야 모른 체 하고 있긴 했지만 노엘을 맨 처음 품에 안아들고 등을 토닥여 주었을 때 노엘의 그 확연한 표정변화는 아무리 눈치가 꽝인 리암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진짜 얼마나 애한테 각박하게 굴었으면 저 정도 스킨쉽에도 울먹이면서 좋아하는 건지. 빚을 다 갚으면 노엘을 돌려보내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리암은 점점 노엘을 돌려보내기가 싫어지고 있었다. 그 집구석에서 하는 것보다 내가 몇 배는 더 잘 해줄 수 있는데. 왜 돌려보내야 하는데. 꼭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아무래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보아하니 노엘도 슬슬 여기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참에 노엘이 확실히 여기를 집보다 더 좋아하게 만들어 줘야겠다. 그러면 혹시 몰라? 제 어미 앞에서 '집에 안 갈래요' 하는 기특한 소리를 할는지도. 그런 의미에서 리암은 내일 노엘을 데리고 기타나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거 양껏 사주고, 다정하게 굴어주는데 언제까지 집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별로 긴 기다림이 되지는 않을 성 싶었다.


노엘은 이제 깊은 잠에 들어 색색거리는 숨만 내뱉고 있는데, 그 작은 애를 내려다 보는 리암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많은 생각들을 담고 있었다. 정말 이 애가 좋아진 듯 하니 슬슬 진지하게 생각할 때였다. 노엘의 목까지 부들부들한 이불을 올려 덮어주며 리암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핸드폰 옆으로 덜그럭대며 부딪히는 권총에 잠깐 아차 하며 혀를 쯧쯧 차기도 한다. 애도 있는데 부주의하게, 씨발. 다소 익살스레 제 머리를 벅벅 뒤집듯 긁은 리암이 총을 베개 커버 안으로 깊숙히 쑥 집어 넣었다. 노엘은 똑똑한 것 같으니 이런 위험한 거 가지고 놀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기분상의 문제였다. 기실 총은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도 하니까. 그냥 잠금장치를 확실히 걸어놔야지 생각하며, 리암은 핸드폰 단축번호 하나를 꾹 눌러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표정이 좀 험악하지만, 노엘이 깨지 않게 노엘의 귀를 슬며시 손으로 덮어주는 행동을 보자면 그다지 위협적인 표정도 아녔다. 통화음은 몇 초를 더 뚜르르 울어대더니 순식간에 뚝 끊어졌다. 전화 너머로 어렴풋 앤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난 겜한테 걸었는데, 이 시간에 얘들은 왜 같이 있는거람. 어렴풋 짐작은 하겠지만서도 이해해주기 싫어, 리암은 이 오밤중에 왜 전화냐며 툴툴대는 겜에게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했을 뿐이다. 전화 너머로는 앤디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얼핏 들어보니 리암더러 짜증내고 있는 거다.


"변호사 준비하고, 토마스 갤러거 좀 빨리 잡아 와. 그리고 앤디더러 좀 닥치라 그래. 쟨 왜 이 시간에 너네 집에 있는건데?"


"Well… 나가 죽어, 리암."


*


그리고 다음 날 점심 무렵, 리암은 진짜 노엘을 데리고 기타 상점에 들르고 말았다. 외출을 한다기에 어딜 가는건가 궁금해하던 노엘은 악기 상점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지만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리암이 그걸 모르고 지나칠 사람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애써 어른스러운 체 침착하려는 노엘을 품 속에 답삭 안아들고서 리암이 대뜸 기타가 즐비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리암도 기타는 좀 배웠었는데,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아 일찌감치 관뒀던 거였다. 본인이 생각해도 저는 기타보단 노래가 체질이다. 하지만 그게 기타에 영 문외한이란 소리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기타 하면 뭐 어느 게 괜찮은지 알 만큼의 지식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리암은 여직 신기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노엘의 머리를 한 차례 헤집은 뒤, 노엘을 바닥에 내려주고, 대뜸 덥석 집어든 기타 하나를 노엘에게 안겨주었다. 기타가 거의 노엘의 반을 잡아먹을 듯한 크기인데도 노엘은 잘만 버티고 서 있었다. 앳된 얼굴에서 엿보이는 기쁨과 신기함이 리암의 속을 자꾸만 간지럽혔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그냥 첫 날 데려올 때 여길 들를 걸 그랬다. 아직 좀 얼떨떨한 얼굴로 리암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노엘을 향해, 리암은 눈썹을 까닥 올려뵈며 노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너한테 선물 주는 거야, 아무거나 한 번 쳐 봐. 기타 칠 줄 안다며?


잘 듣고 있을테니 비틀즈 노래라도 한 번 연주해 보라는 리암의 주문에 노엘은 좀 당황한 눈치였다. 게다가 더 난감한 게 무엇인가 하면… 기타를 거의 부둥켜 끌어안고 서 있는 노엘을 보고서 지나가는 점원이며 사람들의 시선도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단 것이었다.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 번씩 노엘을 쳐다보며 지나가는데, 저절로 지어지는 흐뭇한 웃음을 감출 수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리암은 공연히 그게 마음에 들질 않았다. 왜 남 애를 막 쳐다봐 싶은 생각이 울컥 치밀자, 저절로 짜증이 좀 나선 없는 신경질이 벌컥 일어나는 것이었다. 노엘은 이제 대놓고 밀려드는 시선에 쭈뼛대며 리암의 옷깃을 꽉 붙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웬 미친 짓인들 못해줄까 싶을 지경이다. 아니, 미친짓만 할까. 더 지랄맞은 짓도 한다. 리암은 지나가는 점원 하나를 붙들고, 주머니에 지갑도 없이 달랑 하나 넣어다니던 카드를 꺼내 그의 손에 쥐어준 뒤 매니저에게 갖다주라고 말했다. 거기에 진짜 미친 말도 좀 덧붙여서.


"여기 내가 살 테니까 지금 당장 매장 싹 비워. 씨발할 개미새끼 하나 안 남게 해. 나랑 얘 둘이서만 쓸 거야, 알았어? 나 장난하는 거 아냐."


리암의 말을 들은 점원은 이게 웬 미친놈인가 싶은 얼굴을 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제가 건네받은 카드가 유난히 시꺼멓단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니 이게 도저히 농담같이 들리진 않는 것 같았다. 블랙 아멕스면…… 오, 맙소사. 점원은 그제서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무실 어딘가에 있을 매니저를 향해 존나 뛰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리암은, 별 것 아닌걸로 저렇게 더듬더듬 당황하는 점원의 행동에 썩 답답한 얼굴이었지만, 사실 화들짝 놀란 게 점원 혼자만은 아니었다. 그래, 사실 옆에서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노엘도 황당함에 눈만 둥그렇게 뜨고 껌뻑껌뻑대는 것이다. 정작 일을 벌인 당사자인 리암은 언제쯤 매장이 비워지나 살피며 노엘을 안고있어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아무튼 좀 놀란 표정의 노엘을 보고 나서야 리암 역시 제가 좀 지랄맞게 굴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벌였고, 드디어 점원들이 나와 매장 안의 손님들을 슬금슬금 몰아내고 있는 데에야, 이제 와서 뭘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쩐지 사무실에 돌아가면 또 무슨 지랄을 한 거냐며 겜이 잔소리를 할 것 같으나 거기에 대한 대책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노엘 기타만 사고 나갈건데 뭐, 일단 매장을 사긴 샀으니 여길 겜에게 주면 될 것 같다. 겜도 악기 하나는 무지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충분히 먹혀들 거였다.


"이래도 되는 거야? 리암… 이건 좀…."


"응. 돈 많으면 이래도 돼. 이제 다 나갔으니까 기타 칠 수 있지?"


리암이 콧노래를 흥얼흥얼 흘리며 노엘을 쳐다보았다. 이젠 아예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턱을 괴고 노엘을 쳐다보는데, 문득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리암의 카드와 웬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와선 성가시게 군다. 아니, 성가시게 군다는 건 순전히 리암 시점에서 그런 거고, 어린 노엘이 볼 땐 저 불쌍한 사람은 갑자기 찾아든 비상사태에 헬쑥하니 놀란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노엘 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리암인 까닭에 그 매장 매니저가 받은 것은 얄팍한 명함 한 장이 다였다. 명함을 받고 황당하니 서 있는 모습이 정말 안타깝다. 하지만 곧장 던져지는 리암의 짜증어린 한 마디로 인해, 그는 더 이상 거기 서 있을수도 없게 되었더랬다. 거기로 전화하면 돼. 그러니까 씨발, 제발 좀 저리 가 있어! 애가 부끄럼 타잖아!


일찌감치 사무실로 모여든 점원들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매니저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는 모두에게 다행스럽게도, 얼마 있잖아 그 역시 점원들의 무리에 합류했고, 결국 매장엔 정말 리암과 노엘, 딱 둘만이 오롯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노엘은 진짜 말도 안 된단 표정이었다. 하지만 리암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능청스레 노엘을 재촉하기만 했다.


"난 존 레논 노래가 좋더라."


그래, 결국 노엘은 그 능청스런 리암을 이기지 못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 숨을 쉬고서, 리암과 마주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노엘이 연주하기 시작하는 건 존 레논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이다. 아무래도 어린애의 손 크기때문에 코드를 짚는데엔 좀 더듬거림이 있을 수 밖엔 없지만, 그것만 제외하고 보자면 노엘은 제법 능숙한 솜씨로 기타를 다루고 있었다. 좋아한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지. 리암은 이제 아예 실실 웃는 표정이 되어, 아예 노엘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노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 꿈뻑이는게 귀여워 노래를 멈추고 웃고 있자니 노엘도 슬그머니 연주를 멈추고 리암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노엘은 정말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리암, 혹시 가수에요?"


"아니. 사채업 하는데……."


어쩐지 예상 외로 열렬한 노엘의 반응에 이제는 되려 리암이 멋쩍어진 듯 뒷통수를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 빤히 너네 집에 돈 받으러 갔던 거 다 알면서 그래? 노래 잠깐 부른거 가지고 난리라며 노엘의 머리를 온통 헤집어놓아도 보지만 노엘은 전혀 아랑곳 않고 있었다. 오히려 좀 기대섞인 표정으로, 정말 리암이 가수이기를 바란단 것처럼 눈만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괜히 쑥쓰러워진 리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노엘을 데리고 매장 밖으로 이끌었다. 어차피 노엘은 저 기타가 맘에 든 것 같으니 다른걸 볼 필요는 없겠지, 사실은 한 시간은 더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알 게 뭔가 싶은 모양이다. 리암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노엘을 거의 끼다시피 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니, 사실 나가던 중간에, 나중에 일렉기타도 치고싶어 질 줄 누가 알까 싶어 깁슨의 체리색 기타 하나도 덥석 집어 나가긴 했다. 친절하게도 입구에 서 있는 점원에게 '이제 장사 해도 돼' 하는, 가게 매니저에게는 거의 축복같은 한 마디를 던진 것도 언급하도록 하자.


*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있던 노엘이 문득 물어왔다. 기타 비싸죠? 다 알아, 그거 얼마야?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이 예삿 일은 아닌 듯하여 묻는 것이었다. 막상 일을 겪을 땐 그저 황당하고 말았던 일이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이것도 다 갚아야 할 텐데 하는 순진한 걱정이 노엘을 덮쳐왔던 탓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곧장 돌아오는 리암의 대답은 애시당초 이게 빚은 아닐까 하며 불안해 했던 노엘의 걱정을 싹 날려버린다.


사이드 미러를 힐끔거리며 노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리암이 낄낄대며 웃었다. 알면? 나중에 갚아주게? 아서라, 넌 너네 집에 있는 빚만 해도 존나 지랄이야. 기타는 그냥 네가 얌전히 있어서 기특해 선물하는 거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노엘의 볼을 슬쩍 꼬집자, 노엘의 표정이 또 좀 뭉그러졌다. 볼이 쭉 잡아당겨져 발음이 줄줄 새는 와중에도, 그래, 가격은 꼭 알아야겠단 것이다. 리암은 어렴풋 노엘이 대답 듣는것을 포기하지 않겠단 마음을 먹고 있는걸 눈치챘다. 알아도 뭘 어쩌려고 그런담, 꼭 그런 생각이 들지만, 한 편으론 조마조마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대답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리암 갤러거도 존나 다 죽었지! 어디 험상궂은 마피아들과 마주쳐 사실을 불라며 협박을 당했을 때에도 뺀질뺀질한 태도로 모조리 무시했던 리암이다. 하지만 결국, 그 대담하던 놈도 노엘 앞에선 그냥 바보일 뿐이었다. 아는 건 모조리 술술 불고 만다. 찹쌀떡같은 노엘의 볼을 조금 더 조물딱대던 리암이 능청스레 대꾸하고선 핸들을 꺾었다. 이젠 밥을 뭘 먹일까 하는게 리암의 머릿속에 새로이 떠오른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어쿠스틱은 삼 파운드, 일렉은 이 파운드. 됐지?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뭐 좋아해?"


"……."


"응? 뭐 먹을래? 좋아하는 거 없어?"


"아무거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노엘의 표정이 딱 그렇다. 하지만 리암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정말이라며 못을 박아댔고, 어린 나이 탓에 경제적인 관념이 좀 부족했던 노엘은 그럼 그렇구나 하고, 좀 미심쩍어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수 밖엔 없었다. 오 파운드 정도야 집에 있는 저금통을 깨면 충분히 나올 양이었다. 폴 형이 빼먹지만 않았음 꼭 그럴 거였다. 노엘은 이제 차 시트에 가만히 몸을 폭 파묻고 리암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그러려고 했는데, 리암의 핸드폰이 방금 드르륵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울려서 화들짝 놀라 가만히 앉을 수는 없었더랬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리암은 그 모습을 보고 킥킥 웃어대며, 놀라진 말고 핸드폰만 좀 열어보라며 노엘을 다독였다. 괜히 놀림받는 기분에 입이 부루퉁 튀어나온 노엘이 리암더러 직접 열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꿍얼대려 했지만 곧 그가 운전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엘은 어리지만, 운전 중에 전화를 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노엘의 조그만 손이 핸드폰 플립을 열었고, 노엘의 손보다 조금 작은 액정에는 텍스트 메세지가 하나 들어와 있는게 보였다.


노엘은 이걸 리암에게 보여줄까 하다가, 그래도 운전 중인데 한눈 팔면 안 되겠지 싶어 직접 문자를 읽어주기로 한다. 잡아왔음, 변호사는 오늘 저녁 사무실에! 꼭 노래를 하듯이 흥얼대는 목소리로 노엘이 텍스트를 읽었다. 새가 짹짹대는 것 같은 목소리에 리암도 슬쩍 웃어뵈며 노엘이 방금 읽었던 것을 되씹어 보는데, 잡아왔다고? 대체 저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얼마 안 있어 제가 어젯 밤에 주문했던 사항 두 가지를 금방 기억해 내고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토마스 갤러거,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되겠구나. 순식간에 팍 굳어진 표정으로 앞을 빤히 주시하자니 신호등이 앞을 가로막는다. 시뻘건 빨간 불빛이 얼마 있잖아 보게 될 흥건한 무언가가 될 것 같다. 리암은 멈춰있는 차창 밖 풍경을 한껏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다. 그러나 꼭 인상이 험악해질 때에면 순식간에 표정을 스르르 풀어버리고, 또 얼마 뒤에는 애매한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차는 게, 그를 지켜보는 노엘로서는 영 영문을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리암을 관찰하던 노엘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리암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묻는 것이었다.


"리암,무슨 생각 해?"


아무리 생각해도 창 밖에는 저렇게 집중해서 쳐다볼만한 구경거리가 없는데. 제 셔츠 끝자락을 잡아당긴 작은 손을 내려다 본 리암이 심드렁하게 입꼬리만 슬쩍 올려서 웃었다. 너네 아빨 어떻게 죽여놓을지 생각좀 하고 있었어. 물론 생각한 대로 말했다간 노엘이 울어버릴 게 분명하니 직접적으로 얘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제 조금씩 조금씩 노엘을 제게 완전히 데려올 생각을 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은 도무지 어쩔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핸들을 쥔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만큼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있잖아 리암은 노엘이 제 무표정에 조금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억지로 표정을 풀어내야만 했다. 자그만 머리통을 손으로 완전히 덮어서 쓰다듬자면 보드라운 솜뭉치 하나를 손에 올려둔 기분이 들었다.


"너 언제 다 키워서 잡아먹을까 생각했지."


"헉…. 나 맛 어, 없어요!"


솜뭉치가 파르르 떨며 냅다 소리치자, 리암은 또 참지 못하고 노엘에게 키스하고 말았다.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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