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말하기를, 난 하고 싶은 거 못 하면 병나는 애라고 했다. 사실 축구 유학도 하나 있는 아들 떼어 놓기 싫어서 안 보내려고 하셨다. 안 된다니까 어린애가 끝까지 조르지는 못하고 혼자 시름시름 앓는 걸 보다 못해 결국 비행기 태우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승연아, 엄마는 진짜 너 병나는 줄 알았어. 다행이다 정말. 생방송 다음 날 엄마가 밥 먹으면서 그랬다. 맞아. 나 데뷔 못했으면 진짜 한참은 앓았을 거야... 솔직한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다. 이제 걱정마세요. 든든한 아들인 척도 좀 해보고.



딱 이틀을 쉬고 바로 합숙에 들어갔다. 애들은 다시 경연 준비하는 거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래도 다들 알고 있었다. 전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진지한 마음이라는 걸. 정말 눈 뜨면 숙소, 정신 차려보면 촬영장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 틈을 쪼개 빽빽이 들어찬 연습. 시간은 정해져 있고, 쏟아부을 노력에 한계는 없었다. 가끔 브이앱 켜는 시간이 쉬는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



“ 아, 형! 우석이 형이랑 짰죠? 둘이 편한 자리 앉으려고 편먹은 거야 맞죠? ”


“ 아니? 진짜 아니야. ”


“ 우석이 형 웃는 거 보니까 맞네! ”



브이앱 방송을 종료하자마자 민희가 역정을 냈다. 솔직히 우석이 많이 봐준 건 맞는데... 진짜 짠 건 아니거든? 솔직하게 말 했다가는 그게 둘이 작당 모의 한 거 아니면 뭐냐고 역공 맞을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나도 김우석이 내 옆자리 앉는다고 할 줄 몰랐어... 내가 반응이 없으니 이번에는 김우석 붙들고 열변을 토했다. 그거 보던 김우석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민희는 사기단으로 결론을 내고 나서야 따지는 걸 그만뒀다. 진짜 짠 거 아닌데... 우석아 너 왜 그렇게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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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석은 진짜 잘 잔다. 특히 차만 타면 5분 내로 잠드는 게 경이로울 정도였다. 뒷자리에서 도현이가 한결이랑 장난치다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도 쥐 죽은 듯이 잤다. 매니저 형이 갑자기 차선 변경하는 화물차에 놀라 급정거 했을 때도 안 깨길래 그때는 좀 놀랐다. 목베개도 꼭 자기 같은 걸 한다. 옷은 무채색으로 입고 다니면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은 되게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해.



“ 오늘은 왜 목베개 없어? ”


“ 그거 솜 터졌어... 너무 오래 썼나 봐. ”



오늘은 까먹고 안 가져왔나 했더니 솜이 터졌단다. 진짜 애착이었는지 좀 울상이었다. 아... 이제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그 핑크 딸기 목베개랑 똑같은 걸 찾아서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근데 사면 뭐라고 하고 줘... 내 거 사는 김에 샀다고 해야 하나. 한창 그런 고민을 하는데 툭. 김우석 머리가 어깨에 닿았다. 베개가 있으나 없으나 5분 컷이었다. 같은 향수인데도 체향이랑 섞여서 미묘하게 다른 향이 훅 끼쳤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결 좋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타이밍 좋게 랜덤 재생으로 설정해 놓은 플레이어가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와르르. 복잡한 생각이 단숨에 멎는다. 사랑을 속삭이는 멜로디가 귓가에서 둥둥 울렸다. 참을 수 없는 간질거림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기꺼이 무너져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이 서툴게 부풀어 올랐다.



“ 나 너한테 기대고 잤어? 미안해. 불편했겠다. ”


“ ...너 머리 작아서 하나도 안 무거웠어. ”


“ 아, 그게 뭐야... ”



어쩐 일로 도착 전에 깬 김우석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잔뜩 힘주고 있었던 어깨가 아직도 저릿한데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했다. 대답을 들은 김우석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살짝 찡긋하는 코끝까지 사랑스러워 보이면... 진짜 망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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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음악이 멎었다. 관절에 힘이 다 빠져서 아무렇게나 바닥에 엎어졌다. 안무 영상 녹화 중이었는데 하필 모자가 떨어져서 중간에 난리가 났다. 결국 은상이가 가장자리로 밀어줬는데 그거 보고 빵 터지는 바람에 호흡이 꼬이고 배로 더 힘들었다. 심장 소리가 쿵쿵. 머리에서도 울린다. 땀에 젖은 몸이 바닥에 달라붙는데 찝찝할 정신도 없다. 다 상황은 비슷한지 웃자고 장난도 안 치고 숨 고르는 소리만 났다. 반쯤 감은 눈 위로 그림자가 졌다.



“ 난 별로 안 어울리나? ”



저쪽 끝으로 밀려났던 모자를 언제 주워 왔는지 김우석이 그거 쓰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코앞에서 눈 깜빡이면서 그렇게 묻는데... 대답 대신 모자 앞코를 꾹 눌러버렸다. 사이즈가 좀 큰지 훌렁 얼굴이 다 가려진다.



“ 그렇게 보기도 싫을 만큼 안 어울려? ”


장난스러운 투정에,


“ 아, 아니? ”



너무 진지하게 대답했다. 낭패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얼굴에 모자 씌웠다고 어떻게 말해.



“ 넌 잘 어울려. ”



김우석이 얼굴 다 가리던 모자를 벗어서 다시 씌워줬다. 누워 있어서 머리 위에 얹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창 안무 연습할 때보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김우석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한지도 모르고 냉장고 앞에 가서 생수나 꺼낸다. 반쯤 기울어진 시야에 김우석이 가득 찼다. 양손에 생수를 가득 품고 폴폴 가볍게 뛰어온다. 아, 진짜 어떡하냐... 너무 좋아서 어이가 없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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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올까.. 했던 데뷔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컨디션 조절하라며 마지막 연습은 좀 일찍 끝났다. 매니저 형은 내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리허설하러 가야 하니 딴길로 새지 말라며 우리를 숙소에 넣어주고 갔다. 다들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승우 형한테만 조용히 작업실 청소 좀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사실 청소는 핑계였고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긴장해서 수백 번도 더 맞춰 본 안무를 틀리면 어쩌지. 하는 현실적인 고민에서부터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원론적인 걱정까지...



프로그램 시작하면서부터 방치하다시피 했더니 작업실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고작 몇 달 비웠다고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 퍽 낯설었다. 인생은 익숙했던 게 낯설어지고, 낯설었던 게 익숙해지는 일의 연속이라는 걸 실감한다. 건반을 닦아내고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비우면서 생각을 하나둘 털어냈다. 또 한참은 비워질 곳...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을 떠올렸다.



곡이 나올 듯 안 나와서 며칠 밤을 꼬박 새웠고, 하루가 멀다 하고 라이브 방송을 틀었고, 노래를 부르고 웃고 떠들고 또 울고... 그럼에도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에 한참 동안 먹먹했던 나날들.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머쓱한 기억을 곱씹으며 작업실 문을 잠갔다. 이제는 밖으로 나올 시간.



다들 잠들어 있을 거 같아 발소리를 줄였다. 조용히 거실에 들어오니 누가 안 자고 베란다에 서 있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김우석이다.



“ 이제 들어와? ”


“ 어, 안 자고 있었네. 늦었는데. ”


“ 그냥. 잠도 안 오고... 맥주 먹고 싶었는데 애들도 있고 내일 얼굴 부을까 봐 대신 이거. ”



김우석이 마시고 있던 하늘보리를 흔들어 보였다. 연갈색 보리차가 페트 속에서 잘게 찰랑거린다.



“ 네 것두 있어. 원 플러스 원이더라구. ”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하늘보리 두 병을 집어 들었을 김우석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 고마워. ”



또 그냥은 안 주지. 옆에 놓인 새 병을 들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손에 턱 꽂아준다. 이제 마셔. 산지 좀 됐는지 페트 표면이 미지근했다.



“ 실감 안 난다. 승연아 너도 그래? ”


“ 응. 좀 무섭기도 하고... ”



난간에 팔을 걸치고 밖을 보던 김우석이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달빛에 오목조목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그때, 의무실에서... 내가 너랑 데뷔하고 싶다고 했잖아. 말의 힘이라는 게 진짜 있나 보다 싶고... 아, 좀 오글거리나? ”



머쓱한지 웃어 보이는 김우석. 사실 안 괜찮다며 울음을 터뜨리던 김우석. 내가 다정하다고 말하던 김우석. 이제 같은 팀이라며 끌어 안아주던 김우석.



“ 좋아해. ”


“ 어? ”


“ 나 오글거리는 거 좋아한다고... ”


“ 거짓말하지 마. 너 완전 힙하잖아. 사진도 맨날 그렇게 찍어 올리면서... ”


“ 아, 그거는... ”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본심을 숨기는 변명은 어딘가 많이 모자랐다. 대답할 말을 잃고 우물쭈물하자 김우석이 손에 쥔 페트병을 톡톡 쳤다. 짠 하자. 아쉽지만 이걸로라도. 유리잔이 맞부딪히는 쨍한 소리 대신 퉁-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늘보리 건배는 처음 해봐. 진심으로 말했는데 김우석은 뭐가 그렇게 웃긴 지 고개를 젖혀가며 웃다가 퍼뜩 숨을 죽였다. 아, 애들 깨면 안 돼.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된다.



탁 트인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하나도 안 덥네. 가을 다 왔나 보다. 응. 작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이라도 놓칠세라 바로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많이 두렵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불안한 미래에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거. 그게 너라는 거.



단언컨대 내 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도전은 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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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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