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나라.上

김채원 김민주


"자, 오늘부터 팀별로 과제를 주겠다. 주제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이다."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학생들은 아우성을 퍼붓고, 탄식을 흘렸다. 그중 김민주도 포함돼 있었다. 교수는 갑작스러운 과제를 던져주고는 나 몰라라 하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교수가 나가는 순간,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과 욕 섞인 말들, 그리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민주는 고개를 저으며 짐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우리 교수님이지만 너무 즉흥적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언제 따라 나왔는지, 같은 동기인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민주는 유진의 말을 듣고는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별과제 누구랑 할 거야? 유진은 한참 말이 없는 민주에게 물었다. 민주는 잠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 내 생각에는 이번 과제는 그냥 말아먹으려고."

"야,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과제여도 말아먹는 건 아니지! 아, 국이랑 말아먹으면 괜찮을지도."


엉뚱한 말만 해대는 유진을 민주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진은 어느새 앞서 걸어가는 민주를 발견하고는 급히 쫓아가 말했다.


"정 같이 할 사람 없으면, 우리 팀이랑 하자."

"그새 정했어?"

"이런 건 빨리 해야 빨리 끝나지."


유진의 말이 맞아, 민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하는 거다? 응. 아싸. 그럼 팀원들한테 연락할게. 그래. 나 먼저 간다! 유진은 민주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저 멀리 걸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주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이라. 역시 쓸데없는 과제의 주제였다.


*


첫 팀 모임은 서로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나는 무슨 학번부터, 누구누구입니다 까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조로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모두 자기소개가 끝이 나고 잠깐에 정적이 흐를 때, 갑자기 유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차게 말했다.


"우리 첫 모임 기념 술이나 마시러 갈까요?"


유진의 물음에 모든 팀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민주는 그러지 못했다. 무슨 대낮부터 술이야. 그리고 네가 빨리 해야 빨리 끝난다며. 민주의 말에도 유진은 그냥저냥 넘어갔다. 그리고는 팀원들을 데리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들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민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놈의 말을 듣고 온 내가 병신이지."

"예쁜 얼굴로 욕하면 매력 없는데."


깜, 깜짝이야! 민주는 자리 맨 끝자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크게 움찔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가 확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누, 누구세요?"

"아, 아까 내 소개를 못 들은 건가? 좀 실망인데, 민주야."

"네?"

"나는 김채원이라고 해. 18학번이고."

"아."


민주는 자신을 채원이라고 소개한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탄식을 흘렸다. 분명 아까까지 없었는데. 민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채원을 바라보았다. 채원은 그런 민주를 가만히 바라보다 픽,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친하게 지내보자, 예쁜 후배님."


채원의 말에 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야. 너 김채원이라고 하는 선배 알아?"

"김채원...? 아, 채원 선배? 알지. 근데 왜?"


팀 과제 두 번째 모임 장소로 가능 도중, 갑자기 채원의 대해 묻는 민주에게 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냥 뭐... 민주가 말끝을 흐리자, 유진은 뭔가 있구나 하는 촉이 왔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관심 있어?"

"아니거든."


단호하게 되받아치는 민주 때문에 실망했는지, 유진은 작게 투덜거렸다. 그래서 그 선배는, 뭐하는 사람이야?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유진은 민주의 알 수 없는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뭐하는 사람이라거나 그런 거 없는데? 그냥 같은 과 선배야."

"아... 근데 난 왜 저번에 처음 봤지?"


민주의 물음에 유진은 진짜 모르겠냐고 말했다. 민주는 유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네가 주변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

"아."


어느샌가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민주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유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


그러니까 두 번째 만남 또한, 술파티로 이어졌다. 민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끌려온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보니까 술 못하는 거 같은데."

"으아, 깜짝이야!"


몇 번 잔을 기울이던 민주는, 갑자기 옆자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잔을 급히 내려놓고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채원이 웃으며 앉아있었다.


"무슨 귀신 들렸어요? 소리랑 인기척도 없이 언제..."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는 민주에 채원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말했다.


"내가 귀신 들린 게 아니라, 네가 둔한 걸지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무튼 너 술 못하지?"


채원의 물음에 민주는 맞는데도 괜히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채원은 민주의 말에 그러냐며 픽, 웃었다. 저절로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느낀 민주는 아까 놓았던 잔을 다시 들어 올려 곧장 입속으로 부어버렸다.


"이런... 천천히 마셔. 그러다 금방,"


쿵. 채원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민주는 탁자에 고개를 박았다. 쿵 하는 소리에 다들 떠들며 놀고 있던 팀원들이 고개를 돌려 탁자에 고개를 박고 있는 민주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그런 민주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민주에게 다가갔다.


"야, 김민주. 일어나 집 가자. 데려다줄게."


아무리 흔들어 깨워봐도 민주는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채원은 푹 꺼져있는 민주의 어깨를 붙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주소랑 비밀번호만 알려줘."

"헐. 선배가 왜요. 그냥 제가 할게요."

"너도 취한 거 같은데, 같이 가면 위험할 거 같아서. 취한 너보다는 안 취한 내가 데려다주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채원의 말에 유진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주를 바로 세우려는 채원을 도왔다.


"그럼 즐겁게 놀다가 조심히 들어가."

"네. 민주 잘 부탁드려요."

"응."


걱정 가득한 표정의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채원은 이내 몸을 돌려 택시를 잡아, 유진이 알려준 주소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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