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초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마왕이야기 회지에 여섯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유중혁의 어린 시절은 적당히 부유하고 평온했다. 그의 집안은 사랑이 가득 넘치는 다정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가족다운 따뜻함은 지니고 있었다. 유중혁의 부모는 온건하며 부드러웠고, 자식들에게 큰 강요를 하지 않았다. 유중혁은 부모와 호들갑을 떨며 애정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으며 그 성격 때문인지 조금 서먹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어쨌든 가정의 울타리가 단단했고 뒤늦게 태어난 동생이 유중혁과 매우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유중혁의 부모는, 자식에게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으며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하는 일도 하지 않는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유중혁이 워낙 자립심이 강한 성격이었고 그의 부모도 방목형 교육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가족의 톱니바퀴는 잘 맞아 들어갔다. 그들은 가끔 방학에 맞춰 남들이 하는 것처럼 가족여행을 가기도 했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삐걱대는 소리 하나 없이 미지근한 온도 아래에서 흔한 추억이 소복이 쌓여 올라갔다.

적당히 경제적 능력이 있던 부모는 유중혁의 유년시절을 원하는 대부분의 일을 하고 물건을 가질 수 있게 채워주었다. 유중혁은 그 모든 것에 만족했다. 프로게이머라는, 나이 든 세대들은 다소 싫어할 가능성이 큰 꿈에도 제법 어렵지 않게 매진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공부에도 성실했고 제법 나쁘지 않은 결과를 보였지만, 그래도 게임을 훨씬 더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을 가장 먼저 꼽으라면 하나의 게임 시리즈를 끝까지 클리어해 보는 것이었다. 중학생 유중혁은 피시방과 단과학원을 오가며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어느 주말 아침에 혼날 각오를 하고 부모에게 자신의 꿈을 말했다. 유중혁의 부모는 네가 원하는 일이 그거라면 하라고 하였다. 운이 좋았다. 고등학생이 된 유중혁은 꿈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여러 대회에 참가하고 소속사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위해서였다. 혼자 살아보고 싶기도 했다. 어린 미아는 오빠가 떠나가는 걸 아쉬워했지만, 지방에 있던 부모는 어린 유중혁에게도 독립을 흔쾌히 허락했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중혁도, 유미아도 자신들의 집에서 태어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이 가정에서 행복했고, 원하는 일과 공부를 마음껏 했다. 유미아는 몰라도, 유중혁은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매우 안정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유중혁은 그렇게 크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집을 떠나있어서였을까, 두 사람의 얼굴조차 잘 기억나질 않았다. 유중혁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쨌든 그들은 매우 훌륭한 부모였으므로, 유중혁은 그들이 천국에 갔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사후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도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사고였는데, 충돌 즉시 두 사람은 의식을 잃었을 거라는 게 경찰과 의사의 추측이었다. 고통 없이 갔을 거라는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어쩌면 그 죽음의 형태가 나름대로 어떤 안배된 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막대한 재산을 고스란히 유중혁과 유미아 남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고, 유중혁은 부모의 돈으로 어려움 없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굳이 서술하자면, 반에서의 인기인이었다. 유중혁과 친구들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다. 딱히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었으나, 호감을 주는 외모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유중혁은 어디로 가나 이목을 끌었다. 사람들은 유중혁을 좋아했으며, 매우 친절하게 굴었다. 그렇다고 세상이 유중혁한테 완벽히 상냥한 것만은 아니었다. 종종 유중혁은 그들의 속셈을 의아해했다. 사람들은 유중혁과 친해지려고 애를 쓰다가도 정작 유중혁이 손을 내밀면, 마치 게임의 규칙을 지키듯이 일정 선 이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치부를 공유하고 속된 이야기를 깔깔거리며 맘을 편히 터놓는 친구들이라기보단, 그냥 백화점 직원처럼 적당히 친절하고 잘 대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단짝이라고 부를 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유중혁에게 큰 외로움을 주진 않았다. 사람들의 호의는 따스했고, 유중혁은 늘, 외로울 때 적당히 불러내 술 한잔하자고 할만한 사람들 몇 명 정도는 알고 있었다. 깊은 이야기까진 하지 않아도, 유중혁을 위하여 상시 달려나올 준비가 된, 그런, 친한 이들.>


가끔,


유중혁은 가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그리 적당히 고립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는 행복하게,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때로는, 이런 식으로 삶을 굴러가게 하는 절대자에 대해서 원망하기도 했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의도로? 왜? 무엇을 원해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였는가? 유중혁은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투정을 부리기에는―부모가 일찍 사망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유중혁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프로게이머로서도 성공했고, 돈도 꽤 벌었으며, 인간관계도 적당히 좋았다. 여전히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없었지만, 한두 번의 연애도 했으며, 여동생도 부족함 없이 키울 만큼 지원해 줄 수 있었고, 몸에 큰 지병이 없었으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했다. 크게 트라우마라고 부를 만한 기억도 없었고 남들에게 술자리에서 털어놓을 만한 사건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오히려 더 자신을 만든 신을 의심하게 될 때가 있었다.

이 모든 인생에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게 유중혁이 주인공으로 나온 소설 제목이었다고 한다. 비록 원치 않게 들은 이야기였으며, 결과적으로 기분은 굉장히 상했지만, 결국 유중혁은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이 글 속의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기실 적당히 이루어진 자기 삶에 대해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그렇게까지 낯설 명제는 아니었다. 유중혁은 두 번의 회귀로 마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팔 두 다리를 비롯하여 상체고 하체고 목숨이고 내던져가며 유중혁을 기어이 엔딩까지 끌고 간 미친놈을 본 것도 빠른 수긍에 한몫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화를 낼까 내지 말까, 시나리오의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고민하였지만 포기했다. 동료들의 말처럼 그는 아주 우연히 그 소설을 본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고, 그 소설을 사랑한 죄로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결말까지 쉽게 가도록 도운 희생자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진심으로 ■■했다. 유중혁은 보아왔던 인상 깊은 영화나 책 속에서 주인공을 도울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김독자가 자신에게 했듯이 했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유중혁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난 이후, 이수경에게 김독자와 멸살법이 어떤 관계였는지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는 되었으나 여전히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아무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유중혁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준 사람은 없었다. 그 이야기를 언제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김독자와 유중혁의 관계를 두고 이야기할 때 대부분은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몇몇은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난 이후, 같이 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미묘한 거리는 쉽게 좁혀지질 않았다.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화가 난 부분들을 한 번도 제대로 다시 꺼내보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김독자가 항상 유중혁에게 어설픈 미소를 지으면서, 무슨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기계적으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논점은 피해버리는 탓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살았고, 건조하고 미적지근하게 지내면서도 서로를 아주 익숙해했고, 그러면서 때로는…서로가 아주 낯선 사람인 듯이 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키스를 했을 때라던지. 어느 비 오는 날 밤에 열에 달아서 서로의 옷을 벗기고 삽입 섹스를 했을 때라던지. 그냥 그런…동거를 하면서 으레 할 수도 있는, 저지를 수 있는 ‘사고’를 친 다음 날에는, 특히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했다. 김독자는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 것인지 연신 미안해, 몰랐어, 같은 말들을 달고 살았고, 유중혁은 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건지 연신 됐다, 말을 말자, 같은 성난 어조의 말들을 짓씹어내리며 이를 갈았다.

유중혁은 김독자와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랑인가? 그렇지만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동의해야 이루어지는 합의 하 관계였다. 김독자는 단 한 번도 유중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그보다 갑절 더 자주 하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그보다 오백 배 더 많이 했다. 김독자는 숨기는 게 많았고 최소한 자신의 감정이 절대 사랑만은 아니라는 듯 굴었다. 그 태도 앞에서 유중혁은 모든 것에 분이 치밀었다. 김독자가 아니라면, 자신이 가진 김독자에 대한 마음 역시 사랑이 아니어야만 했다. 유중혁은 그러기로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냥,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희생하려 했었던 김독자가 고마웠고, 조금 안타까웠고, 애처로웠고, 같이 있고 싶었고, 같이 살고 싶었고, 그냥…눈 안에 있었으면 싶은 거였다. 아마 김독자도, 사랑이 아니라도 그 정도 마음은 있을 것이니까, 그쯤이면 괜찮았다.

그렇게 하릴없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김독자는 언제부터인가 영문 모를 책들을 사기 시작했다.

[아동발달심리]처럼, 유아기에 일어난 사건이 성장 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들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새로운 취미를 찾거나 독특한 흥미를 갖고 진로를 다시 찾으려나 싶었다. 코인이 돈이 되어버리면서 그들에겐 남은 자산이 많았기에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김독자의 새 관심사를 좋은 변화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김독자는 자신의 물건을 내버리고, 나눠주고, 그 어떤 것에도 특별히 애착을 두지 않는 등,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죽어버릴 인간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을 비롯한 동료들 모두가 김독자의 그런 태도에 불안해했지만, 트집 잡을 수가 없었다. 더는 시나리오가 없었으니 김독자가 자신을 희생할 만한 건덕지도 방법도 없었다. 김독자가 자살의 별다른 징후를 보이거나 시도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김독자가 새로 산 책들을 열심히 읽으면서 무언가를 고민하고 메모하며 매진하기 시작했을 때,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내심 안심했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도전하는 걸 보니까 삶을 끝내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 유중혁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김독자는 방에 틀어박혀서 그런 책을 밤낮으로 읽고, 때로는 컴퓨터를 열심히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게임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항상 자신의 노트북을 썼고, 유중혁은 굳이 김독자의 노트북에 손댈 이유가 없어 놔뒀다. 무언가 열심히 하는 게 있겠거니, 있으니까 죽을 생각을 하지는 않겠거니 싶었다. 종종 김독자는 밤새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쓰다가 새벽에 피곤한 얼굴로 침실에 돌아와 잠을 청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은 편이 아닌 김독자의 생활 리듬이 자꾸 어그러지는 것은 조금 신경 쓰였다. 김독자는 시나리오가 끝난 이후 언제부터인가 자주 아픈 듯한 기색을 보였고, 작은 동네병원들에서는 한결같이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다. 김독자 본인 역시 한사코 자신은 아픈 부분이 없다고 했다. 특별히 원인도 증상도 없고 그저 아파 보이는 정도라면 그냥 김독자가 방에 틀어박혀 엉망으로 있는 게 문제일 것이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다시 한번 멀리 나가자고 해보기로 생각했다.

시나리오가 끝난 후 같이 살면서, 유중혁과 김독자는 같이 자주 돌아다녔다. 딱히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결結을 본 후의 세계에서 유중혁도 김독자도 별다른 직업이 없었고, 김독자는 정말 할 일이 없으면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이 나가자고 하면 나갔지만, 그때뿐이다. 김독자는 집 안에서 별다른 활동 없이 시간을 계속 죽이고만 있었다. 운동이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외출 권유를 거절하지는 않으니 유중혁은 운동 차원에서 김독자를 산으로 들로 바다로 끌고 다녔다. 드물게는 먼 곳도 간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가까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경복궁이나, 한강변이나, 남산의 전망대나, 어지간히 유명하고 적당히 기분 전환이 가능한 곳은 거의 다 가본 것 같았다. 한수영 등이 니네 또 데이트 가냐 같은 말을 장난스럽게 던질 때도 있었지만 유중혁은 철저히 무시했다. 둘의 외출은 별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있다간 정말 김독자에게 곰팡이가 필 것 같아서였을 뿐이었다. 가보고 싶기도 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딱히 유중혁이 같이 갈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아니 그래도 멸망하고 나서 겨우 재건해가는 세계인데 제대로 보아두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으니까, 겸사겸사 김독자를 데리고 다닐 뿐이었다.

김독자.

……어?

밤새 또 뭘 했는지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던 김독자를 깨우며, 유중혁이 말했다.

내일모레쯤 약속 있나?

당연히 없을 걸 알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김독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장도 없고 특별히 매일 생활 루틴이 잡혀 있지도 않은 김독자에게 일정이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당장 내일은 자꾸 몸이 불편해 보이는 김독자를 병원에 데려가는 날이었으니, 그 날 별다른 이상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다음 날엔 좀 멀리 나갈 생각이었다. 유중혁은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척 가벼운 말투로 툭 던졌다.

바다 보러 가자.

바다?

요새 너무 집 안에 박혀있었으니까.

김독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리를 꼬았다.

어디로 갈 건데?

딱 보아도 너무 멀거나 크게 관심이 없는 곧이면 가지 않을 기세였다. 유중혁은 전에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던 곳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을왕리.

을왕리?

어. 인천 근처다. 서울에서 멀지 않다.

유중혁이 검색해본 바, 서울에서 차를 타고 을왕리까지면 한 시간 반이면 간다. 막히지만 않는다면 가서 바다를 구경하고, 밥을 먹고 여유롭게 돌아올 수 있다. 다행히도, 수도권과 거리가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멸망 이후의 어떤 재난도 크게 겪지 않은 지역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번거롭지 않은 것을 좋아하고 간편한 외출을 선호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선택에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거기 저번에 갔잖아, 우리.

뜬금없는 말이 떨어졌다. 김독자는 굳이 갈 거면 갔던 데를 또 갈 필요가 있어? 차라리 갈 거면 다른 데를 가자, 동해라던지, 하는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유중혁은 잠시, 자신이 김독자랑 갔던 몇 안 되는 바다들도 까먹었나 기억을 뒤적여 보았지만, 정말 가본 적이 없었다.

김독자, 우리가 을왕리를 간 적이 있다고? 그런 적은…….

무슨 소리야, 두 달 전에,

김독자는 반박하려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 아니, 아니다. 그래. 을왕리 간 적 없지. 어. 중혁아, 음. 뭐, 거기 가도 되고. 다른 데 가도 돼. 난 상관없어. 내가 착각했나 보다. 우리 거기 간 적은 없어.

없던 위화감도 들게 만드는 태도였다.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는 김독자의 말에 잠시 인상을 쓰다가 팔짱을 꼈다.

네가 상관없다면, …모레 오전에 출발하겠다.

김독자가 뭐랑 착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달. 두 달이면 김독자랑 유중혁이 같이 살기 시작하던 초기였다. 그때 바다를 갔었던 적이 있었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무엇을 했는지 유중혁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딘가의 바다로 갔던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기억이 희미했다. 왜 얼마 안 된 시기의 기억이 안 나는지 유중혁이 당황하는 사이에 김독자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방으로 걸어 들어가며 답했다

그래, 거기 가자. 네가 좋아하는 데니까.

유중혁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두 달 전의 기억을 생각하다가 문득 김독자가 덧붙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유중혁은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김독자는 자러 들어간 방 안에서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있었고, 유중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김독자가 유중혁이 그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야, 요새 우리 비실이는 좀 어떠냐?

착신음만 듣고 전화기를 집어 들자 수화기를 통해 넘어오는 목소리가 맹랑했다. 아닌 밤중에 누가 전화를 하나 했더니, 한수영이었다. 유중혁은 식탁 앞에 앉아서 목소리를 낮췄다. 김독자가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문제는 없다.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보는 것도 여전한 것 같고.

여전히 밤 새?

가끔.

종종 동료들은 돌아가면서 유중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럴 거면 김독자에게 직접 전화를 하지 싶었지만, 김독자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유중혁뿐이었으니 아주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김독자에게 직접 연락을 하면 김독자는 항상 괜찮다는 말만 했으니까. 그리고, 김독자는 꼭 나중에 보자는 말엔 대답을 여간 하질 않았다. 한수영이 툴툴거렸다.

아니 아프다면서 밤은 왜 샌대. 걔 좀 이상해. 넌 애를 그렇게 놔둬도 되냐?

한수영의 말에 유중혁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김독자의 부모는 아니잖나.

…….

한수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으나 유중혁은 한수영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음을 알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한 건지 유중혁이 생각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따박따박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새끼야. 니네가 뭐 보증금이 없어 월세가 없어? 김독자는 뭐 이수경이랑 살지 못하는 법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아? 돈이 없어서 룸메이트 한 거야? 유중혁, 너 김독자랑 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유중혁은 한참을 침묵했다. 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군. 골치 아픈 문제였다. 유중혁은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의 일로 김독자에게 아직 조금은 화가 나 있었고, 김독자의 유중혁에 대한 모든 태도는 너무 미적지근했고, 모든 게…….

너 아직도 옛날 일 생각하냐?

지난 일이라고 잊어버리라는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소설 속의…….

아니, 등신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어이 짜증이 났는지 한수영은 따지듯 고함을 쳤다.

그래서 너 당장 니 눈앞의 김독자랑은 어쩔 건데!

…….

당장 어쩔거냐니, 뭘 어쩔거냐는 말인지 유중혁은 생각했다. 한수영이,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지점이 어떤 부분인지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규명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김독자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 대해 아는 게 단 하나도 없었고, 그들은 너무 오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너무 낯설어했다. 유중혁은 말을 돌렸다.

…무슨 일을 하는지, 노트북은 한번 확인해 보겠다.

이번에는 한수영이 한숨을 쉬었다.

됐다, 됐어. 대충 뭐 하는지는 알 것 같긴 하거든. 저번에 나한테도 얘기했었어.

얘기했다고?

소설 쓰는 법을 물어보던데.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던 유중혁은 발걸음을 멈췄다. 방 안에 김독자가 없었다. 또다.

김독자가 또 사라졌다. 쿵, 유중혁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허겁지겁 이불을 들쳤다.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김독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또였다. 시나리오가 사라진 이후, 유중혁과 동거하면서, 김독자는 마치 이 세계에 없는 사람처럼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김독자는 가출을 한다든지 외출을 하고 온다든지의 수준이 아니라, 마치 허깨비처럼 깜박깜박 없어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김독자는 있었던 방 안에서 없어졌다가, 없었던 방 안에서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유중혁은 자신이 자꾸 불안해서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독자가 아파 보이는 것도, 가끔씩 김독자의 손이나 다리가, 얼굴 한쪽이 사라져 보이는 것도 다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려 했었다. 유중혁은 불안하게 방을 뒤적이다가 거실로 나와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심호흡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김독자가 누워있었다.

유중혁은 풀릴 뻔한 다리를 다잡았다. 착각이었을 것이다. 시나리오는 명백하게 끝났고 더는 그들에게 일어날 비현실 같은 것은 없었다. 김독자는 이 세상에서 껌벅껌벅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 유중혁은 잠든 김독자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이마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따뜻한 살의 감촉이 분명하게 손끝에서 느껴져서, 그제야 유중혁은 안심하고 한 발짝 침대에서 멀어졌다.


유중혁은,

유중혁은 김독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김독자는 유중혁 인생에 좋은 동료긴 했지만, 그는 유중혁을 기만했고, 유중혁을 배신했고, 유중혁을 속이기도 했다. 김독자가 하려고 했던 모든 일이 유중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그 행동들은 너무 제멋대로에 이해되지가 않아서, 유중혁은 모든 기억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동기와 생각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할 때마다 두려웠고, 불안했으며, 김독자가 싫었다. 자신에게 불안감을 주는 김독자가 싫었다. 또 김독자로 인해서 가슴 아프길 원치 않았다. 제멋대로인 김독자가 제멋대로 하는 일에 대해서 그만큼이나 전전긍긍하게 될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았다. 김독자는 언제 자신을 저버리고 사라질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유중혁은,

유중혁은 김독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어야만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유중혁은 사라질 수도 있는 김독자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은 이럴 때마다 새삼 직시하게 된 감정을 원치 않았다. 김독자는 자신의 옆에 있어도 늘 이 현재에 없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게 뻔했다. 침대 위에서 잠든 채 가만히 호흡하는 김독자는 언뜻, 아무 일 없이 평온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너무나 불안정해서……. 유중혁은 김독자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옆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은 인간이었다. 섹스를 할 때면 그나마 조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김독자 본인이 현재를 사랑하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필사적으로 유중혁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진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때론 그것은…….

진심인데, 어떠한 다른 이유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유중혁은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문득, 협탁 근처에 고이 접혀있는 김독자의 노트북이 보였다.

소설 쓰는 법을 물어보던데.

한수영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김독자는 자신들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독자가 소설을 쓰고 있고, 김독자가 계속 사라지길 반복한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노트북을 켰다.

바탕화면에는 별다른 파일이 없었다. 휴지통과 내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전부였다. 세계가 한 번 멸망을 겪으며 괜찮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나 게임은 거의 다 망해 없다곤 하지만 매일 김독자가 붙잡고 매진하는 것 치곤 굉장히 심플한 놈이었다. 휴지통은 텅 비어 있었고, 내 컴퓨터에도 별다른 점 없이 C드라이브와 D드라이브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인터넷을 켜도 마찬가지였다. 시작 페이지조차 건드리지 않았는지 창을 바로 열면 하얀 화면만 보였다. 유중혁은, 커서를 옮겨 주소 표시줄에 갖다 대었다.

그때, 아무것도 뜨지 않던 빈 화면에 딱 하나, 주소 표시줄 바로 밑에, 바로가기가 떴다. 유중혁이 알지 못하는 주소였다. 그 사이트 외엔 들어가 본 적도 없는 것인지 다른 주소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유중혁은 그 주소를 클릭했고, 천천히 바뀌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웹 소설 플랫폼이었다. 자동 로그인이 되어있는지 우측 상단에는 이미 Log-In 표시 팝업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중혁은 눈앞에 뜨는 여태까지 쓴 글 목록의 단어들이 낯선 것 같아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 글의 제목들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글의 제목이고, 심지어는 그 뒤에 붙어있는 것이 자신이 너무 잘 아는 단어임을 알아버렸다. 유중혁은, Log-In 표시 옆에 있는 문구를 쳐다보았다.


[tls123님, 환영합니다.]


유중혁은 아연해졌다. 그리고는, ‘기억’해냈다. 을왕리는 유중혁이 가족들과 자주 가던 바다였다. 글 제목들만 봐도 유중혁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유중혁 (1)]


아니, 그건 이제 '기억'이 아니었다.






김독자는 꿈을 꾸었다. 유중혁이 끊임없이 죽어 회귀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아주 어린 시절의 김독자가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어린 김독자를 내려다보며, 어른의 김독자는 침묵했다.

부럽다.

뭐가 부러운데? 스물여덟인 김독자는 묻고 싶었으나 꿈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부럽다고 중얼거리는 어린 김독자를 한참 바라보던 김독자는 움찔했다. 어린 김독자가, 무미한 눈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김독자는 잠에서 깼다.

해도 뜨지 않아 사위가 어두웠다. 김독자는 왜 아침도 아닌데 벌써 깼는지 의아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서늘했고,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김독자는 상체를 일으키고 무심결에 근처의 협탁을 더듬거렸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떴다.

노트북이 없었다.

김독자는 덜컥 겁이 나 이불을 박차듯이 일어났다. 아직 약간 잠이 덜 깬 몸으로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닫힌 침실 문의 고리에 손을 대었다. 방 안 어디에도 유중혁은 없었다. 김독자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식탁에 등지고 앉은 유중혁과…그 앞에 전원이 켜진 노트북이었다.

김독자.

…….

김독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유중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지금까지 김독자가 들어본 유중혁의 목소리 중 단연코 제일 서늘한 목소리였다.

…네놈이었나?

김독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조용한 새벽 한 가운데에서 붕괴가 찾아오고 있었다. 유중혁이 한 발짝 다가오자, 김독자가 한 발짝 물러났다. 떨리는 숨소리가 교차했다.

네가, 그, 빌어먹을 이야기의 작가냐고 물었다.

김독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나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작아졌다.

아냐, 아냐 중혁아, 나는…….

그 순간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달려들었다. 김독자가 막을 새도 없이 유중혁의 손에 멱살이 틀어 잡히며, 김독자는 벽 쪽으로 쿵 밀렸다. 예기치 못하게 부딪친 등과 뒤통수가 얼얼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는 눈앞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내려다보는 유중혁의 표정이 더 고통스러웠다.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히는 상황 속에서 김독자는 실낱같은 목소리를 내어 간신이 말했다.

…나는 그거, 외전만 썼……컥!

외전‘만’?

유중혁의 목소리에 흉흉한 노기가 서렸다. 목에 가해지는 힘을 느끼며, 김독자는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붙잡힌 멱살에 새하얗게 질려가며, 호흡을 빼앗기며 버둥거리던 김독자는 유중혁이 손을 놓자마자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참을 목을 붙잡고 기침을 하던 김독자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중, 혁아,…….

그러나 유중혁은 더는 김독자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유중혁이 비명을 지르듯 추궁했다. 아니 그건 추궁도 아니었다.

누가 네 맘대로 내 인생을 조종하랬지?

그 모든 기억이,

적당히 따스하고 자유롭던 가정의 분위기와 부모와의 관계, 유중혁에게 상냥했던 친구들의 존재가 모두 김독자의 조작이었다. 김독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유중혁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김독자의 팔을 붙잡고 현관까지 내치자, 김독자는 붙잡힌 그대로 현관까지 쭉 떠밀렸다.

…나가라.

…….

지금 당장, 나가!

유중혁은 제가 더 상처받았다는 듯이 멀거니 서 있는 김독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허공에서 분노한 눈빛과 하얗게 마르고 눌어붙은 시선이 마주쳤다. 김독자는 그 순간 무엇을 예감했다. 아, 이제. 김독자는 한참을 유중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고요히, 중얼거렸다.

…알겠어.

그 순간, 그동안의 유중혁의 환각 증세가 그러했듯이 김독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나리오가 끝났을 당시, 김독자는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김독자가 익히 알고 있던 tls123의 메일 주소였다. 김독자는 유료화가 끝나고 멸살법 속의 사람들이 여전히 현실에 나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가 실재하는지 궁금했으나, 답장을 보내니 없는 메일주소라고 뜰 뿐이었다. 메일의 내용은 약오를 정도로 짧고 간결했다.

[독자님이 작성해주신 수정본은 잘 받았습니다. 지금껏 독자님이 멸살법을 보아 주시고 함께해주신 점을 잘 알고 있으며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바꿔주신 이야기들에 저는 매우 만족했으며 감사합니다.]

그 밑에는 짤막한 주소 한 줄과, tls123, 그리고 뭔지 모를 번호들이 적혀 있었다. 주소 역시 매우 낯이 익었다. 주소의 시작되는 부분은 김독자가 항상 멸살법을 보던 웹소설 플랫폼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설마? 김독자는 시나리오가 끝나고 인터넷 전산망이 복구되기 시작할 때 그 플랫폼에 몇 번이고 가보았지만, 오랫동안 서버 유지도 안 된 사이트는 접속조차 되질 않았다. 나중에 다른 경로로 시도해 보아도, 플랫폼의 다른 일부 페이지만 접속이 가능할 뿐이었으며 당연하다는 듯 멸살법은 거기 연재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알지도 못하는 소설을, 김독자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적힌 주소를 클릭하자, 아주 짧은 로딩 시간과 함께……화면에는, 멸살법이 연재되었던 페이지가 떠올랐다.

김독자는 여기저기를 클릭해 보았다. 다른 웹소설 연재 페이지는 뜨지 않았고, 랭킹 검색 같은 것도 단 하나도 동작하지 않았다. 멸살법의 내용은 김독자 컴퍼니를 포함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고, 유중혁은 3회차인 상태로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다고 완결에 묘사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유일하게 그 페이지에서 작동되는 것들은, 완결된 멸살법 글을 클릭해서 보는 것과,

[수정]

[글쓰기]

[삭제]

오로지 단 세 가지 버튼이었다. 김독자는 활성화된 글쓰기 버튼을 클릭하고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김독자는 단 한 번도 웹소설 연재 아이디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받았던 tls123 밑에 적힌 번호를 기억해냈다. 김독자는 처음 봤던 순간부터 그것을 외우고 있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김독자의 떨리는 마음과 상관없이 화면은 새하얗게 로딩 화면으로 바뀌다가…….

로그인되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다. 이미 쓰여 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김독자 컴퍼니의 이야기를 지우거나 바꾸고 싶진 않았다. 혹시나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김독자는 며칠간 고민하며 그 페이지에 접속하여 tls123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

김독자는 유중혁과 동거를 시작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랑 여느 때보다도 붙어있게 되었고, 비교적 많은 대화를 했다.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그들은 할 말이 없으면 옛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가 정말로 할 말이 없어서, 어느 날,

우리, 바다에 갈래?

그냥 훌쩍, 같이 나가보기로 했었다.

그날 유중혁이 나눴던 모든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김독자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계속해서 그 내용을 곱씹었다.

아직 바꾸고 싶은 건, 한 가지 있긴 했다.





김독자가 사라진 직후, 유중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독자가 문을 열고 나간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졌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급작스럽게 마주한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오르는 분노와 어찌할 수 없는 당황에 붙들린 채 유중혁은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고, 마른세수를 하고, 거실을 쿵쾅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다시 김독자의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유중혁은, 식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찬찬히 전원이 켜지는 걸 지켜보다가, 바탕화면이 뜨자마자 유중혁은 인터넷 버튼을 연타했다. 가야 할 주소는 정해져 있었다. 그 플랫폼.

유중혁은 가장 상단에 뜨는 글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글은 유중혁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있었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유중혁 (1)]

<유중혁의 어린 시절은 적당히 부유하고 평온했다. 그의 집안은 사랑이 가득 넘치는 다정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가족다운 따뜻함은 지니고 있었다. 유중혁의 부모는 온건하며 부드러웠고, 자식들에게 큰 강요를 하지 않았다.>

유중혁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서술이었다. 유중혁은 부모의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젠 그조차도 믿을 수 없었다. 기억한다 하더라도 김독자가 서술한 대로 기억했을 것이다. 유중혁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유중혁은 이를 악물고, 버튼을 눌렀다.

[삭제]

그 순간이었다.

<글이 정상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글이 삭제되었다는 메세지를 본 순간부터, 유중혁의 머릿속에 마치 오래된 꿈처럼, 어떤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중혁의 모든 이야기는 설정값이었다.


유중혁은, 그것에 대해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가 끝난 이후, 김독자와 그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가족들과의 이야기나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그렇게 아쉬워하진 않았다. 김독자는 그에 주제로 말하면서도 한 어절을 끝낼 때마다 유중혁의 눈치를 보았다. 바닷가의 바람이 참 스산했었다. 김독자는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김독자가 멸살법에 대해 알고 있고 유중혁을 기만한 부분이 문제였지 유중혁의 과거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은 김독자의 탓은 아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정해지지 않은 설정값이었고, 이야기의 원작자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그것에 대해 못내 미안해했다. 어쩌면 아쉬워하는 것도 같았다. 유중혁은 왜 나보다 네가 더 신경 쓰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유중혁이 대답하지 않자 김독자는 애꿎은 모래만 신발 끝으로 직직 문질렀다. 문지른 자국의 일부분이 밀려온 바닷물에 의해 잠깐 희미하게 흐트러지며 가라앉았다. 바다 위로 노랗고 붉게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노을에 비친 유중혁의 얼굴도, 김독자의 얼굴도 조금 붉었다.

중혁아, 너는……아쉽지 않아?

그때, 그 을왕리 바다에서, 김독자가 물었었다.

김독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꾸만 유중혁에게 캐물었다. 유중혁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질문인 걸 잘 알면서도 그랬다. 유중혁은 덤덤했다. 정말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김독자가 왜 미안해하고 슬퍼하는지, 머리로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깊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때 무슨 대답을 했었더라.

유중혁은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머리가 흐릿했다. 유중혁은 잠시, 왜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기억이 나기 시작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음 글을 읽기 시작했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유중혁 (2)]

이번에도 역시, 유중혁의 부모와 유중혁과의 관계 서술이 이어져 있었다.

[삭제]

아, 기억났다.

<글이 정상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중혁아, 너는…아쉽지 않아?

김독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유중혁은 생각하다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었다.

글쎄. 아쉬울 것도 없다. 나는 정말 내 부모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아마 그것이 네가 말한…설정값이라는 거겠지.

그럼 중혁아, 음, 네 부모님이 조금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그래서 기억한다면, 그래도 많이 사랑했겠지?

유중혁은 김독자가 왜 바꿀 수 없는 것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아니, 애초에 지나갈 수도 없는, 없던 일이었고), 그 일들은 유중혁의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끊임없이 그 비어버린 과거에 대한 유중혁의 심정이 궁금한 눈치였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왜?

어차피 잃을 부모니까. 없어질 거라면, 덜 사랑하는 사이였던 게 나았겠지.


<유중혁은 부모와 호들갑을 떨며 애정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으며 그 성격 때문인지 조금 서먹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유중혁은 자신의 답을 기억해내고 탄식을 내뱉었다. 목록에 있는 다음 글은,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유중혁 (3)]


유중혁의 학창시절과 친구관계에 대한 서술이었다.


[삭제]


<글이 정상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 그럼 중혁아, 친구는? 친구가 있었다면?

친구도 마찬가지일 것 같군. 어차피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친구를 잃었을 거고.


[삭제]


그 친구가 지구가 유료화 된 후에 내 동료가 될 만큼 강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보장된 게 아니라면, 마음만 아프겠지.

<글이 정상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어쩌면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중혁의 초연한 말을 김독자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유중혁을 좋아했으며, 매우 친절하게 굴었다.>

그 날, 바닷가에서 돌아온 김독자는 노트북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중혁은 단짝이라고 부를 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유중혁에게 큰 외로움을 주진 않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대답한 모든 것을 글에 반영했다. 유중혁에게 좋은 부모는 주되, 그들이 사망했을 때 유중혁이 지나친 슬픔을 느끼지 않게 관계는 적당히 메마르고 멀어 있도록 설정하였다.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이 부유하게 '설정'하였고, 유료화 이후에도 살아있을 동생 유미아와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설정’해 놓았다.

유중혁의 모든 과거는 설정값이었다, 그러니까,


김독자는 그 모든 설정값을 행복하게 바꿔 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김독자는 그렇게 했다.




유중혁은 처음에는 분노했으며,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계속해서 집안을 서성이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돌리던 사람들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유중혁에게 휴대용 티슈를 나누어주려고 했으나 금방 유중혁의 표정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멍청한 놈, 며칠이면 돌아와서 용서를 빌겠지, 하던 것이 이틀, 사흘, 나흘이 되자 유중혁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김독자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껌벅 환각처럼 사라져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 김독자니까, 돌아온 직후엔 자신의 분노에 대해 해명해야 할 일이 무서워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김독자가 정말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면?

닷새째, 유중혁은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 김독자를 본 사람 있나?

김독자가 유중혁과 멀쩡히 평온하게 잘 지내는 줄 알고 있었던 동료들은 야단법석을 떨며 뒤집어졌다. 며칠간 전화기는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긴긴 통화의 끝은 한결같이 ‘모른다’였다. 동료들 중 그 누구도 김독자를 본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마을의 CCTV에서조차, 김독자가 집 문밖을 나서는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그 날 24시간 하루종일, CCTV 어디에도 김독자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집 문밖으로 나선 적조차 없었다.

김독자는 현관문 앞에서 사라진 채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분노의 대상이 눈앞에 없으니 분노가 흐려지고 그 빈자리를 불안감이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분명 화가 난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사라지라는 말은 아니었다. 김독자가 써 올려놓았던 글은 모두 다 삭제했고, 유중혁은 ‘원래의’ 아무것도 없는 과거 설정값을 가진 본래의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김독자가 왜 그런 ‘설정값’을 만들어주려 했는지, 아주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여전히 근본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몰라도―유중혁은 김독자를 반 죽도록 때리고 용서를 빌면 다시 화를 내고만 싶었지 김독자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용서를 빌면 그에 대해 받아주지 않고 화를 내고 싶었지, 김독자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길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차라리 용서를 빌지 않았으면 않는 대로 화라도 낼 텐데,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마치, 그 모든 빈 과거들이 아쉽지만 그렇다고 만들어낼 필요는 없었듯이,

김독자도 사라질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김독자는 자신의 몸이 참 투명해지고 가벼워짐을 느꼈다. 목이 따끔따끔 타들어 가듯 어딘가가 사라졌다가 돌아오듯이 저릿하기를 반복했다. 김독자의 눈에도 자기 손발은 안 보이다가 보이기를 반복했다. 종종 유중혁이나 다른 사람이, 허깨비처럼 사라지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자신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 이유가, 자신이 유중혁에 대한 글을 씀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이미 현재로 와버린 유중혁의 과거를 바꾸는 일이 도대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독자는 글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김독자는 그 글만 다 쓰면 이제 정말로,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유중혁에게, 과거까지도 진정한 행복을 갖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흘, 김독자가 사라진 지 열흘째 되는 날.

유중혁은 녹초가 되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들리면 바로 연락 주겠다던 동료들은 연락의 ㅇ조차 보내질 않았다. 어느 누구도 김독자에 대해 들은 소식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유중혁은 집안에서 걸어 다녔지만, 심정은 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김독자에게 해명을 듣기는커녕 행방조차 찾지 못한 채 열흘이 지났다.

막막해진 유중혁은 김독자의 노트북을 켰다.

유중혁은 기어이 그 페이지에서 작동되는 모든 버튼을 일일이 눌러보기에 이르렀다. 수정. 글쓰기. 삭제.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페이지에 있는 글들이 유중혁의 과거에 영향을 미쳤음을 생각해보면, 기존의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본편을 지웠다가는 모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유중혁은 결국 [수정][삭제]는 누르지 못하고, [글쓰기] 버튼을 눌러 하염없이 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텍스트 커서는 자기 혼자서 깜박이고 있었고, 유중혁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침묵했다. 김독자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문득,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다. 글쓰기 창의 제목을 쓰는 곳 위에, 눈에 거슬리는 메뉴가 있었다.


[임시저장글]


유중혁은 긴가민가하며 마우스 커서를 목록에 올렸다. 커서는 클릭할 수 있는 모양으로 활성화되었다. 유중혁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펼쳐지는 글목록에 아득함을 느꼈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김독자 (1)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김독자 (2)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김독자 (3)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김독자 (4)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외전. 김독자 (5)

 .

.

.


수없이 많은 김독자가 거기 있었다. 김독자의 인생이 거기 있었다.

유중혁은 첫 글을 열어보았다.

수많은 낯선 문장이 눈 앞으로 흘러가면서, 유중혁은 어쩐지 그 모든 내용이 다른 방식으로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의 어린 시절은 적당히 부유하고 평온했다.

<김독자의 어린 시절은 항상 과하게 아프고 차가웠다. 김독자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부적절할 정도로 삭막했다. 드물게 이수경과 온기가 도는 시간을 가진 적도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허울 좋은 가장이 집에 돌아오면 금세 끝나버렸다. 온기의 흔적도 없이 메말라버린 차가운 사막 속에서 김독자는 종종 자기가 질식하고 있다고 여겼다. 아버지가 한차례 폭력을 행사하고 나면, 이수경은 김독자를 숨 막히도록 껴안았다. 김독자는 열기를 느꼈다. 이수경의 가슴. 김독자의 눈물로 젖었던 이수경의 가슴. 그 품속 열기가 얼굴을 감싸면서 젖은 소금기가 얼굴에 긁히면 뜨겁고 따가웠다.>

유중혁의 부모는, 자식에게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으며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하는 일도 하지 않는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김독자의 아비는 자식에게도 심심하면 손을 올렸다. 전례를 찾기 힘든 비상식인이었다. 이수경은 김독자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 모든 일을 숨죽이고 감내했고, 김독자는 옆에서 그저 숨을 죽였다. 김독자는 그저 죽고 싶었다.>

삐걱대는 소리 하나 없이 미지근한 온도 아래에서

흔한 추억이 소복이 쌓여 올라갔다.

<온 집안에서 모든 공포가 삐걱대며 뜨겁고 차갑게, 심장이 뛰었다가 등골이 서늘하게 식으며, 가정이라는 이름의 악몽이 켜켜이 부풀어 올랐다.>

적당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모는 유중혁의 유년 시절을 원하는 대부분의 일을 하고,

물건을 가질 수 있게 채워주었다. 유중혁은 그 모든 것에 만족했다.

<김독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일이 없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거나 실망해본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기에, 호불호의 윤곽조차 그릴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프로게이머라는, 나이 든 세대들은 다소 싫어할 가능성이 큰 꿈에도

제법 어렵지 않게 매진할 수 있었다.

<김독자에게는 매진할 꿈이 없었다. 김독자는 되고 싶은 게 없었고 그냥 빨리 어른이 되어서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그냥 빨리 어른이 되어 더 빨리 나이를 먹어 죽고 싶었다. 좋아하는 것을 꼽으라면 이름처럼 책을 읽어보는 일이었지만, 책만 읽는 직업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취미라기보단 세상과 단절될 수 있는 유일한 자기방어의 기제에 가까웠다. 중학생 김독자는 학교와 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책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책 속 세상으로라도 피해 보고 싶었다. 김독자에게는 꿈을 말할 부모라는 게 없었다. 김독자는 고등학생 때에도 장래희망을 써내라는 종이를 백지로 제출하였다. 어쭙잖은 반항심이 아니라 그냥 정말 꿈이 없어서였다. 어쩌다 가게 된 대학과 어쩌다 가게 된 회사도 좋아서 간 일은 아니고 그저…그냥 그게 좋아하던 소설 속에 나온 시스템과 비슷하게 상상해볼 수 있는 게임이라서, 정도였다.>

유중혁도, 유미아도 자신들의 집에 태어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이 가정에서 행복했고, 원하는 일과 공부를 마음껏 했다.

<김독자는 자주 자신이 다른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인생이 어땠을지 그려보곤 했다. 주변의 친구들은 자기들의 가정에서 매우 행복해 보였고, 원하는 종류의 일과 공부를 마음껏 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모두가 그렇지 않더라도 꽤 많은 이들은 부모와의 사이가 매우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직후, 어두워 보이는 친구의 표정을 보며 김독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친구의 표정이 단순히 우울하거나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고통스러워 보여서이었다. 친구는 자주 눈물을 보였으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리워할 수 있는 부모를 가졌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김독자는 자주 상상했다. 아니, 상상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김독자는 제 아비가 그립지 않았다. 아니, 그리웠다. 그러나 그립지 않았다. 그리워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김독자가 그리워하는 존재는 가끔 자신의 진짜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어디 꿈속 세계에 있는 ‘아버지’란 이데아 같았다. 대중 매체에서 그려지는 부성애가 가득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의지가 되는, 가족에게 손을 올리는 일이 없는 아버지.>

유중혁은 부모의 돈으로 어려움 없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아버지는 김독자에겐 있어 본 적이 없었고, 김독자에게 실제로 있었던 아비는 돈 한 푼 없이 오로지 폭력의 기억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김독자는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생활을 이어나갔다.>

유중혁은, 굳이 서술하자면, 반에서의 인기인이었다.

유중혁과 친구들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다.

<김독자는, 굳이 서술하자면, 반에서 왕따였다. 김독자는 대체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어떤 때는 김독자에 대한 소문이 지나치게 퍼져서, 어떤 때는 소문과 관계없이 그저 고립되는 일도 잦았다. 사람들은 항상 우울하고 책만 읽는 김독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퉁명스러웠다. 김독자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엇을 고민하고 배려해봤자 김독자를 좋아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사람들은 김독자를 무시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정작 신경끄지는 않고 부정적인 행동으로 괴롭히기를 반복했다. 마치 게임의 규칙을 지키듯, 눈에 거슬리면 게임을 끄고 더 이상 플레이하지 않으면 되는데, 굳이 꼭 상대를 죽여서 클리어해야겠다는 듯 김독자를 짓밟았다. 항상 적당히 냉랭하고 짓궂은 사람들. 김독자는 그냥, 그런 그들에게 익숙해졌다.>

그래도 그것이 유중혁에게 큰 외로움을 주진 않았다.

<김독자는 큰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김독자는 자신이 외로울 때 타인에게 연락하는 대신 그냥 핸드폰을 켜는 법을 배웠다. 알아주지도 않고 대답을 해 주지도 않지만, 항상 거기에 있어 주며 살아있는 그런,

그런 소설의,

김독자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주인공이 딱 하나 있었다.>




이야기는 가도 가도 끝나지 않았다. 김독자의 삶은 그 상태로 활자로 펼쳐진 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유중혁은 제 눈 앞에 펼쳐진 김독자의 인생에 현기증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유중혁이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리 없었던,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그 모든 이야기들.

유중혁은 한참 동안 모니터만을 노려보았다. 김독자의 삶을 읽어내려가면서 내려가는 스크롤 한 번 한 번이 마디마디마다 고통스러웠다. 억눌려 떠밀린 숨이 입가를 통해 탄식처럼 나오고, 다시 그 모든 불행이 눈을 통해 심장으로 되돌아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삶을 읽었다가, 멈추고, 읽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읽었다가, 다시 멈추고, 읽었다가…….

유중혁은 기어이 어느 한 부분에서 더 읽을 수 없어 멈췄다. 글 속에서 김독자는 열일곱 살이었고, 교실 구석에서 멸살법을 읽고 있다가 같은 반의 학생들에게 끌려나가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고, 살인자의 아들이라 조롱당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입술을 깨물고 움직이지 않는 텍스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김독자의 얼굴을 때리는 주먹도, 맞는 김독자도 화면 속에서 멈춰 있었다. 유중혁은 정말로 거기서 멈추면 안 될 일 같아서 이를 악물고 억지로 스크롤을 내렸다. 점심 종이 치자 무리는 허무하게 흩어졌고, 김독자는 학교 옥상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무언가에 붙잡혔다가 막 풀려난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생각해냈다.

김독자의 입장에서 등장인물이었던 자신은 지금 김독자의 현실에 나와 이렇게 남아 있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아니었던 김독자는…….


만약, 책 속의 이야기가 현실로 나와 현실이 되고,

그래서 그 모든 등장인물이 책 속에서 나와 현실의 인물이 된다면,

끝까지 그 사람들을 책 속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책 밖에 있었던 인물은,

어디로 가야 할까?



벼락같이 들이닥친 생각에 유중혁은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고 미친 듯이 스크롤을 내렸다. 임시 저장 글의 목록은 끝이 없이 이어지다가 기어이 마지막 글에서 멈췄다. 끊임없이 버퍼링 표시가 돌며, 글이 수정되고 저장되길 반복하고 있었다. 김독자가 그 이야기 속에 있었다. 유중혁은 모니터를 붙잡고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김독자, 거기서, 나와…!

<김독자는 가족도 사랑할 수 없었고, 사랑할 수 있는 친구나 연인도 없었지만,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딱 하나 있었다. 김독자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항상 같이 있어 준, 활자들의 집합, 그 이상. 계속해서 죽어 나가도 포기하지 않던, 친구 같던, 부모 같던, 자식 같던 존재. 그 인생의 유일한 동반자.

김독자는 종종 멸살법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김독자가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건 그 남자가 아니라 김독자였다. 김독자는 그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그를 돕는 일만을 생각했다. 자신을 돕는 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독자는 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으며,

김독자에게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그에게는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독자의 삶은, 과거는 아무도 다시 써 줄 수 없지만,

그의 삶은 소설이니 다시 쓸 수라도 있지 않은가.





익숙한 교정의 옥상이었다.

열일곱 살의 김독자는 옥상 주변을 두른 철망을 손으로 붙잡고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뛰어다니고, 몇몇은 삼삼오오 같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김독자는 오늘 급식을 굶었고 다음 교시에도 교실로 돌아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맞았던 왼뺨 안쪽이 피가 터져 쓰라렸다. 아픈 건 아무래도 괜찮았지만, 시선이 쏠리는 건 더욱 싫었다. 학교폭력이니 뭐니 명분만 있는 조사를 교무실에서 한참 받다가 다시 돌아가서 선생한테 꼰지르지 말라며 처맞는 것보단 그냥 수업을 빠지는 게 나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열일곱 살이 된 김독자는 열일곱 당시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분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없이 생각했으니까.

왜냐하면, 수없이 그 모든 기분을 되새겼으니까.

다른 일은 없었을까, 하면서.

행여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살 수 있진 않았을까,

만약 그런 살인사건이 없었다면, 그런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 뉴스가 9시 방송의 메인으로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인터넷에 신상이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그 밑에 자신을 알던 수많은 이들의 덧글이 자신의 언행이나 사는 지역에 대해 입방아를 찧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수많은 만약에를 머릿속에서 반복하면서 김독자는 끊임없이 그때의 기분을 상기했고 끊임없이 그때를 다시 시뮬레이션했다. 김독자는 자신이 생각으로써 상처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바꿀 수 없는 일을 생각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머리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를 멈출 수 없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다른 일이 있었더라면.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마음은 거기 머물러 있을 때가 누구나 있는 법이니까.

김독자는 멍하니 교정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지금 이 철망을 넘어 뛰어내려서 죽는다면, 아마 앞으로 남은 학창시절 2년 동안 비슷한 고통을 계속 겪을 일은 없어질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언젠가 나아지겠지, 언젠가 지금까지 불행했던 만큼 행복해지겠지, 그렇게 수도 없이 생각하며 버텼지만,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하고 유중혁을 살려낸 스물여덟의 김독자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불행한 것 같았다. 뭐가 좋은지 나쁜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김독자는 그것이 자신이 끊임없이 되새길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들 때문이라고 여겼다. 결국엔 그 과거가 있는 이상 김독자는 평생 행복할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망가져 버린 인간이 삶에 뭘 한다고 해서 고쳐질 리가 없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열일곱 살 즈음에 이미 더는 돌이킬 수도 없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일곱 살 때부터였을 수도 있다. 시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고, 어쨌든 김독자는 스물여덟까지 계속 불행했으니, 바꿀 수 없는 확고한 과거들이 있는 이상 미래에도 기대를 걸 마음은 없었다.

어쩌면, 미래에도 김독자는 계속 불행할 수밖에 없다.

김독자는 한참 철망을 잡고 절망을 생각했다. 손안에 단단히 붙잡힌,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 이걸 붙잡고 어디까지 기어 올라갈 수 있을지, 철망을 넘으면 선생들이 달려오고 신고가 되기 전까지 뛰어내릴 수 있을지 계산했다. 김독자는 그래도 아픈 건 싫었다. 금방 뛰어내려서 깔끔하게 죽을지 자신이 없었다. 혹시 잘못 떨어져서 혼수상태만 되고 죽지는 않아서 자살하기 더 어려운 몸으로 살게 되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생각이 계속 드는 걸 보면 역시 김독자는 뛰어내릴 자신은 없었다. 왤까. 이 삶엔 답이 없다는 걸 아는데. 계속 살아봤자 이 과거들을 갖고 행복해질 리 없다는 걸 신탁을 받은 사제처럼 확신하게 되는데도.

김독자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얼굴이 이상하게 흐릿해서, 김독자는 그가 누군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그를 친구라고 느꼈다.

친구.

친구, 내가 친구가 있었던가. 김독자는 생각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건 영혼이 느끼는 어떤 감각 같은 확신이었다. 이성으로는 열일곱의 김독자는 친구라는 걸 가져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김독자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꿈일지도 모른다. 꿈이니까 친구가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가 계속해서 텅 빈 흐릿한 얼굴로 김독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튀어나온 말은 뜬금없었다.

야, 내가 보는 소설에 주인공이 있는데, 이름이…유중혁이야.

김독자가 다른 사람에게 유중혁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인터넷 게시판의 글로도 김독자는 유중혁의 이야기를 자주 꺼냈고, 이수경에게 면회를 가서도 유중혁의 이야기를 했다.

걔는 있잖아,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어서, 자기 할 일을 하려다가 실패한 것 같으면, 다시 죽어서 끊임없이 다시 시도하는 거 있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꾸 안 되니까 열이 받아서, 뭐 하나만 잘못되어도 다시 죽고, 예측을 벗어나면 또 죽어버리고, 계속 자살하고, 그렇게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시도하고,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다시 도전하는 거야.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다시 계속 다시 하더라고. 근데 나는…….

유중혁이 어떤 사람이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유중혁이 회귀하면서 어떻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지, 그런 것들은 그래도 골백번은 더 말해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멸살법을 소개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말해왔다.

그러나 이 말은,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나는, 걔를, 이해한다?

나는 가끔 부럽기도 했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그게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나도 인생을 다시 살고 싶을 때가 너무 많았거든. 너무 막막하고,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아서…왜 그런 거 있잖아. 지금 인생을 다시 시작하면, 다시 쓰면, 다시 새롭게 도전하면 뭔가 될 것 같은 거 있잖아. 이번 생은 글러 먹었으니까 다시 다르게 살고 싶은 거. 근데 인생에는 그게 안 되니까 다들 못 하는 거일 뿐이잖아. 나나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고 해서 회귀해서 다시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근데 유중혁은 그게 된단 말이야. 중혁이는 있잖아, 그렇게 다시, 잘못된 과거를 다시 바꿔보고 싶어서 끊임없이 다시 회귀하는거야……. 나는 걔를…이해해.>

아니다.

나는 그게 아니었다.

[수정]

김독자는 한참을 하염없이 중얼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그 친구의 얼굴이 흐릿하지 않았다. 그 얼굴은 차츰 윤곽이 바뀌고 선명해져 가더니, 김독자가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어느새 거기엔 알아보지 못할 흐릿한 얼굴이 없었다. 김독자는 이제 그가 누군지 알았다.

아, 너구나, 중혁아.

마치 꿈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듯이 김독자는 태연히 말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표정이 여상했다.

그래 내가 꿈을 꾸는구나. 죽기 전에…꿈을 꾸는 거야. 김독자의 꿈.

…김독자.

중혁아, 혹시 내가 만들어준 게 행복하지 않았니.

김독자는 쓸쓸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게 네 맘에 들 줄 알았어.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김독자는 항상 그런 일을 자신에게 상상해 왔으니까, 자신에게는 할 수 없었지만, 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기에, 유중혁에게라도 할 수 있으면 해주고 싶었다.

중혁아, 나는…정말 내 삶을 다시 쓰고 싶었어…….

유중혁이 한 발짝, 또 한 발짝 김독자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다시 한번 유중혁의 얼굴이 흐려진다고 느꼈다. 이번엔 정말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김독자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서였다.

너는 바꿀 수 있잖아, 그러니까…중혁아 나는 너라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 너라도, 지금에도, 과거에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김독자는 한참 주절대면서 스스로가 무언가 변명을 하려 한다고 느꼈다. 비참했다. 속눈썹 사이로 물기가 계속 들러붙고 매달리고 있었다.

기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김독자가 꿈에도 그리던 일들이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으면 주고라도 싶었다. 김독자는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김독자는 기어이 흐느꼈다. 눈물 때문에 유중혁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턱 끝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다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도, 너도 뭔가 다시 해보고 싶어서 회귀했던 거잖아. 다시 과거를 바꾸고 싶어서…….

아니야, 김독자. 그게 아니다, 나는…….

뭐가 아닌데.

김독자의 입안에서 울음이 섞여 발음이 꼴사납게 뭉그러졌다. 김독자는 팔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해지고 튿어진 교복 소매로 빠르게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김독자는 거의 울다가, 잔기침하길 반복하면서, 기어이 숨 가쁘게 애원했다.

중혁아, 이젠, 네가, 내 삶, 좀, 수정, 해 줘.

김독자는 애원하고 있었다.

김독자.

그 어린 날,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인생에 숨 막히게 치여왔던 열일곱의 김독자가, 아니 스무 살의 김독자가, 스물다섯 살의 김독자가, 스물여덟 살의 김독자가, 그 모든 삶을 견뎌온 김독자가 기적이라는 이름의 회귀를,

혹은 포기를 구걸하고 있었다.

여기로 오지 말고. 여기는 글의 처음이 아니잖아. 여기로 오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제 네가 내…….

김독자, 정신 차려라.

김독자는 제 눈앞을 팔로 누르고 있었기에 언제 유중혁이 코앞까지 다가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억센 손아귀가 부드럽게 김독자의 팔을 잡아 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눈물범벅인 얼굴이 유중혁의 결연한 얼굴과 마주했다. 다시 유중혁의 화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굳은 얼굴과 대면하게 되자 김독자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새 줄기로 흘러내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머저리라고 자신을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중혁은, 입을 열고 다른 말을 했다.

지금 네 앞에 누가 있지?

김독자는 유중혁이 물어본 것이 자신이 예상하던 질문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래서 어떤 의도로 묻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기에 잠시간 눈만 깜박였다. 유중혁이 키가 작은 열일곱 살의 김독자에게 맞추어, 살짝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바라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유중혁.

그럼 내 앞엔 누가 있지?

…김, 독자.

유중혁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유중혁의 팔이, 김독자의 어깨를 둘러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포옹을 받는 김독자의 귓가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거면 됐다.

빌어먹을 과거를 바꾸는 일 따위 더는 필요 없다고.

맞닿은 몸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어떤 일에도 멈추지도 않았고, 기어이 다시 살아나서 삶을 살아간, 앞으로 끝없이 걸어간 회귀자의 심장이 김독자의 심장 바로 앞에서 뛰고 있었다. 차츰차츰, 퍼즐을 끼워 맞추듯이, 빨랐던 김독자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유중혁의 것을 따라 느려졌다. 같은 속도로 흉곽이 부풀어 올랐다 꺼지면서,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뛰고, 같은 속도로 호흡하면서, 유중혁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 회귀한 게 아니다.

그 모든 일들.

김독자가 눈으로 끊임없이 지켜봐 주었던, 멸살법 세계 속에서 유중혁이 끊임없이 회귀하며 지속했던 그 모든 도전들. 그 모든 삶들, 재도전들. 유중혁도 때로는 원망했다. 유중혁도 때로는 착각했다. 다시 하기 위해서, 다시 써 내려가기 위해서 죽음으로써 회귀하는 일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유중혁은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유중혁은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 회귀하던 게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중혁의 목적은 명백했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회귀한 거다.



그때까지 김독자는 제 두 발로 서 있었다. 유중혁이 힘을 주어 끌어당김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 자리는 열일곱의 교정 옥상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그 자리밖에 없다는 듯이, 두 발이 단단히 붙박여 있었다. 유중혁은, 한결 더 힘을 주어 김독자를 끌어안았다.

괜찮다, 다 괜찮아.

유중혁은 힘주어 말했다.


살자, 김독자.


그제야 기어이 김독자가 유중혁의 품 안에서 무너졌다. 절규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지듯 안겨 오는 김독자를 받아 안으며, 등을 토닥이며, 그 언젠가 지구로 돌아가자고 했던 말처럼, 유중혁이, 고요히 속삭였다.


현재로 돌아가자.





예상과는 다르게, 다행히도 ‘김독자 실종 사건’은 실없이 쉽게 끝났다. 며칠 만에 유중혁은 동료들에게, 김독자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자고 있다는 소식을 보냈다. 김독자가 어디 있다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아 사람들이 답답해했지만, 유중혁도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별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이후로 김독자는 두 번 다시 유중혁의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변화한 것 같았다.

동료들은 그게 무엇이라고 딱 집어 말하지 못했지만 그랬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가 조금 따뜻해진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유상아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김독자는 조금 멋쩍게, 붉어진 얼굴을 긁적이더니,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중혁이랑 같이 이것저것 해보기로 했어요.

듣자 하니 무슨 버킷 리스트를 하는 것 같았다.

그거 참 좋은 일이네요.

유상아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둘이 드디어 정식으로 사귀는 거예요?

누군가가 조용히 물었지만, 딱히 명백한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그들은 두 사람이 어디론가 여행을 갔다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독자 씨 여행 같은 거에 생전 관심 없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이현성이 묻자 김독자가 이어 대답했다.

어, 네……. 뭐, 하는 김에 이것저것 해 보려고 합니다.

대답하는 김독자의 모습이 어딘가 정돈되어 보여서 동료들은 안심했다.

그러고 보니 너, 무슨 글 쓴다고 하지 않았냐?

한수영이 물었다.

그냥 그만하려고, 그거 그냥……별거 아니었어. 일기 같은 거였거든.

김독자가 웃었다. 한수영은 새삼 김독자가 웃는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저 녀석이 웃어도 진심으로 웃는 건지,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아서 딱히 신뢰가 가질 않았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좀, 자연스러워 보였다. 행복한 건 아니더라도 제법 진심인.

그럼 이제 글 안 써?

한수영이 묻자 김독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


…글 말고, 앞으로 인생에 써야 할 게 좀 많아서.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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