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요소 주의. 유혈 묘사 주의. 암울한 요소 주의.

*어글리후드 2차 창작. 센 프라우드+엘사 브라이언트

*원작 대사와 장면 등을 살짝 가져왔으나, 조금 비틀어서 다른 점이 몇 개 있습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때 했어야만 했다. 정말 죽을 정도로 다쳐서 말하지 못할 정도로 쓰러져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다음이 있으니까- 라는 막연한 생각에 넘겨버렸던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말했어야만 했다. 그때 잠시만요, 라고 말을 먼저 꺼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런 쪽으로는 더럽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잡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쪽으로는 더럽게 솔직하지 못한 바보였기 때문에.


힘겨운 상대를 보내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내게 왜 거기서 누워 있냐고, 전혀 어울리지 않다면서 걸어온 그녀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항상 그 사람은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흐른 세월이 있으니 조금 늙은 것 같기도 하지만. 물론 지금 이 생각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마 말했다면 아직도 쌩쌩하잖아, 라며 배라도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어글리후드라는 걸 숨기다가 들켰을 적에 맞았던 그 통증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그날의 일들은 잊을 수가 없을 터였다. 그날의 기점으로 그녀와의 관계에서 많은 것이 변했으니까.

무슨 각성을 한 상태라 그런지 아까 전의 주교에게 당한 팔은 대부분 치유가 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몸에 기운이 넘쳐 흐르지는 않았다. 팔에서 입은 데미지가 온 몸이 나른한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식빵의 한 면에 잼을 고르게 바른 듯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계속 달려오기만 했지. 힘을 빼면 그대로 넘어질 것 같으니까. 그대로 주저앉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으니까 더 힘을 주어왔던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힘이 풀려 이대로 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다. 아니, 지금 이 땅바닥도 충분히 푹신하지 않나? 아, 콘크리트였지. 푹신할 리가 없는데 왜 이리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째서 시선은 점점 멀어져 가는 센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건지. 그녀의 이름을 한 두 번 불러보고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높게 떠있는 태양빛에 눈이 따가웠다. 결국 몇 번 눈을 깜박이다 왼쪽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저 진짜 괜찮을까요.'


센은 엇나갈 때마다 옆에서,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도 곁에서 살아있는 제일 오래 알고 지낸 가족이 아닌 사람은 그 사람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좋았으면서도 싫었다. 센은 엇나가려는 내 말을 들어주고 도와주었지만, 반대로 그녀는 한 번도 내게 제대로 솔직해진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짜증이 난 적은 없었다. 조금, 아주 조금 실망했을 뿐이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데는 마땅한 정의도, 명분도, 신념도 없어요. 저도 제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똑같이 이기적인 사람이면서 남들한테 피해만 주는 건 아닌지...'

 

이 녀석 완전 멀쩡했네! 로 시작해서 모든 걸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도 된다고 말해준 그녀가 고마웠다.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다고. 자신이 만난 제자들 중 가장 자랑스럽다고. 그렇게 말한 그녀는 예전에도 본 적 있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더는 보이지 않지만, 센이 걸어간 쪽을 바라보던 엘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무릎을 내리치며 걷기 시작했다. 그때가 센과 살아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전혀 모르고,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한 채.



*



몇 년 전의 기억이었다. 평소와 같은 평온한, 그러면서도 지루한 주말의 오후였다. 엘사는 요즘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고는 몇 달 째 못 보는 중이었다. 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집 근처 공원 벤치에 노숙자마냥 축 늘어져 앉아있었다. 간간히 지나가는 비둘기가 제 초코 아이스크림에 붙어있는 아몬드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금방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은 포즈였다. 손을 내저어서 내쫓으려 했건만 결국 달라붙어서 손을 쪼아 아이스크림을 놓치고 말았다. 겨우 발과 발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잡는 데 성공했지만 비둘기는 아이스크림의 아몬즈를 몇 개 챙겨서 날라가버렸다. 이제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에 들러붙은 비둘기 털. 비위생적이다. 결국 한숨을 쉬고는 아이스크림이 더 녹기 전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푸흡, 고작 비둘기한테 지금 진 거냐?"


익숙한 비웃음 소리.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벤치에 앉은 채로 뒤로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받은 사람은 바로 엘사가 제일 잘 아는 사람-센 프라우드였다.


"사실 맛 없어서 그만 먹을 생각이었는데."

"너 예전에도 좋아했잖아. 그 아이스크림."

"그런 적 없어."

"내기에서 이기고 뭐 사줄까 했을 때 말한 적도 있으면서."

"그야 센은 백수니까 돈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거고."

"거짓말"

"진짠데."

"거짓말."


센은 편의점에 다녀온 건지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편의점 로고가 찍혀있는 흰색 비닐봉지가 있었다. 그녀는 슬리퍼를 직직 끌고 걸어와서는 엘사 옆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봉지에서 새 담배를 꺼내서 뜯고는 한 개비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비닐 봉지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더니 엘사에게 건네주었다.


"백수한테 이런 거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는데요."

"백수라고 하지 마라."

"맞잖아요."

"곧 취직할거야."

"그래도 아직은 무직이면서."

"미성년자 주제."


센은 담배연기를 후- 하고 뱉고는 옆의 엘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엘사는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한 거야? 어이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까 오다가 봤는데. 죽은 고양이. 너도 봤어?"

"고양이를 봤어. 차에 치였을 지도. 왜 거기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센은 고양이 파?"

"에너지파도 아니고 고양이 파가 뭐야. 나는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

"역시 백수다운 대답."

"하나하나 그런 걸로 연결시키지 말아줄래?"


네게 말한다고 뭐가 되겠냐. 결국 먼저 포기한 센이 한숨을 쉬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내뱉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래. 센도 그렇게 생각해?"

"......무슨 질문이 그러냐."

"그야 센이 먼저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엘사는 센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표정의 그녀를 볼 때면 선뜻 말을 걸기 어려워졌다. 화가 난 것도, 짜증을 내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아닌 그런 표정.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네. 죽음은 살아 있다는 것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



*



갑자기 떠올랐다. 진짜 갑자기. 할 것도 없이 펼쳐둔 노트에 아무 생각 없이 적어둔 데우스 에피로네, 라는 글자를 본 순간. 옆에는 두 줄이 그어진 센 프라우드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여름의 어느 날 본인의 옆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하던 센의 모습과 표정과 그녀의 몸에서 나던 담배냄새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해. 죽음이란 건 납득할 이유가 있어야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합리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지. 그냥 일어나는 일일 뿐이야. 나도 언젠가 죽겠지.'


그때 본인은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의 자신은 주변 사람들의 목숨은 더 이상 잃지 않으리라 확신하던 그럴 때였으니. 그런 오만하던 때였으니까 아마 센은 적어도 머리가 전부 흰머리가 될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너는 강해.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거다. 언젠가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할 날이 올 거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건 괴로워. 그만큼 내 죽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괴로워. 난 둘 다 지킬 거야. 둘 다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난 절대 안 죽어.'



*



사람의 눈이 원래 정확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면 코앞에 있는 것도 보지를 못하고 마음이 약해지면 보고 싶은 대로만 보게 된다, 라고 말이다. 비슷하게 사람이 무언가에 사로잡히면 오감이 전부 이상해진다는 것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는 딱 그 상태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방송실에서 들려오는 자칭 어글리후드의 목소리를 죽은 사람이라 착각하고,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달리다가 창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명백히 그녀였다. 센 프라우드. 데우스 에피로네. 오랜 이웃이자 내게 많은 걸 알려주고-물론 학문적인 지식은 절대 아니다- 도와준 그녀. 내 어중간함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센이 사실 죽지 않았다. 살아있었다. 멀쩡하게 살아서 나타나선 멍하니 보고 있는 내게 뭘 그리 멍하니 보냐며 비웃음까지 날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몇 개월동안 안고 있던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그만큼 진하게 얽매여 있었구나. 그 사람에게.



*



'다들 이겨내기 위해 6년 동안 노력한 거니까. 너야말로 복수까지 끝냈으니 이제 완전히 극복할 때 되지 않았나. 네 친구도, 가족들도 네 덕에 이젠 편해졌을텐데. 정작 넌 그러질 못하는군.'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가짜라도 해도 이어져 있던 오른쪽 팔을 뜯어냈을 때도, 전에 목숨을 새로 받고 심은 오른쪽 눈을 뽑아서 던져주었을 때도 느껴진 통증 같은 건 별로 의미가 되지 못했다. 이미 살아가는 것 만으로도, 숨을 쉬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으니까.


자신의 과거의 기억은 마치 담괴와도 같았다. 담이 살가죽 속에 뭉쳐서 생긴 멍울과 같이, 겉으로 볼 때는 단순한 멍처럼 보일지라도 속에서는 곪아가는 그런 것이었다.


존재 만으로 같은 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야에게 부탁했던 것이었다. 나를 대신 어글리후드로써 처형해달라고. 나의 죽음 딱히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렇게 죽는 편이 깔끔하고 좋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팔다리가 잘려 피가 빠져나가는 것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을 쥐어짜는 통증과 공존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취미는 없었다.

불이 붙기 시작하고, 눈을 감은 무렵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눈앞의 시야가 바뀌었다. 눈앞에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천장.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들.


"왜... 나를 왜..."


나를 원망하기도 했던 목소리가 이제는 나에게 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울먹이면서 죽어가는 녀석이 하나. 내 치료를 옆에서 돕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난 아직도 네가 싫어. 근데 그게 죽을 정도로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살아간다는 걸 꼴사나운 일이다. 죽음을 이미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습게도 이 순간에, 통증에 입술을 꽈악 깨물고 있으면서도 한 사람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엘사는 지금쯤 잘 지내고 있으려나. 꿈이면 좋겠다고 몇 번 속으로 되새기던 센은 자신이 기절하길 바라며 한 눈을 꼬옥 감았다.



*



마치 본인이 한 번 죽기라도 한 듯, 무력감 당혹감 등 많은 감정들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뭘 보냐며 피식 웃었을 때와는 또 다른 얼굴.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냐며 걸어가다가 배를 한 대 세게 얻어맞았다. 그 외로 몇 대 더 맞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아픈 거 아니냐며 투덜거릴 생각이었다. 몸을 일으켜 엘사와 시선을 마주친 센은 그 자리에서 생각해둔 말들이 머릿속에서 전부 날라가버렸다.


"......? 왜 그런 표정을."

"좀 더 신중히 행동하라고,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고민했어요. 그렇지만 제가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똑똑한 것도 아니고... 이미 한 번 잃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고."

"......"

"그냥 결국 제멋대로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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