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비밀이란다, 에그시


※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됩니다. 조금이지만 주의해주세요.

※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내용을 조금 바꾼 부분이 있어요. 뇌피셜 주의! 




#


차가운 물이 찰박이는 바닥에서 검붉은 물감이 울렁였다. 어두운 조명이 대리석 파편을 머금은 채 지직거리다 물이 튀자 작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터졌다.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던 인영은 여기저기 부러지고 더러워진 우산을 한 번 살펴보더니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우산은 작게 일어난 검은 불꽃에 휩싸여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 사이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연기가 올라오도록 조금 기다리면서 옷에 묻은 냄새와 흔적들마저 털어내었다. 정장에 묻은 물만 없다면 어디 오케스트라 공연이라도 가는 정중한 신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가 있는 방 안은 어두워 주변 사물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바닥에서 사람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멀쩡한 사람이 정장을 차려입고 빈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등을 돌려 어두운 방을 나가려던 해리가 민첩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바닥에 누운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조용해졌다. 이빨이 몽땅 부러졌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테지.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흡사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해리 하트의 표정엔 그 어떠한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쓰러져있는 사람을 동정하기에는 그와의 긍정적인 기억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면 모를까. 킹스맨은 구조를 위한 죽음 외의 불필요한 살상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를 놀리듯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기본적인 인류애를 지켜내기 위한 조항이긴 하지만, 그는 가끔 그 신념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었다. 

해리는 쏟아지는 햇빛에 적응하기 위해 문 앞에 서서 눈을 조금 오래 깜박여야 했다. 그리고는 정장 안쪽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어 둔 안경을 꺼냈다. 이 안에서 일어난 일을 숨기려는 건 아니지만, 딱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으니까. 멀린만이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빛에 익숙해지자 그는 발신자 제한 번호로 방금까지 그가 있던 위치 좌표를 찍어 킹스맨 고객센터 메뉴얼로 보냈다. 핸드폰 너머에서 안내원의 확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리는 급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짧게 통화를 끝마쳤다. 킹스맨 소유지에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조금 더 여유를 부려도 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그럴 수 없다.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 멀린에게.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




#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이자 본능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며 그 사랑을 위협하는 것들은 전부 배척하게 되어있으니까.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타인과의 싸움을 그치지 않는다. 다만 배척과 혐오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러기에 서로 주고받는 싸움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러운 거니까. 하지만 개중엔 일방적인 관계도 있다. 당하는 사람이 특별히 선하거나 약하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일방적인 폭력과 혐오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것에서 스스로 벗어나기가 힘든 관계. 에그시는 그런 관계에 유달리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어긋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괴롭히는 놈들도 그런 교묘한 습관을 잘 이용해먹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확실한 한 명이 있었다. 

딘 앤소니 베이커. 에그시의 엄마인 미쉘 언윈과 동거 중이고 주변에 항상 패거리를 데리고 다니는 전형적인 밑바닥 꼴통이다. 에그시를 랜슬롯 후보로 눈여겨본 뒤에 그에 대한 자료를 더 조사해보았는데, 더 찾아볼 것도 없이 해리가 파악한 그대로였다. 펍에서 본 그의 일행들 수준으로 봐서 그도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닌 듯했지만, 그렇다고 처리하기 쉬운 부분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그시가 직접 나서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엄마가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해리는 그와 에그시가 만난 후 딘이 집으로 돌아간 에그시를 윽박지르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을 들었다. 도청기 너머로 가장 먼저 들려온 그의 멱따는 목소리는 딘이 시뻘게진 채 에그시를 몰아붙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게 했다. 그는 함께 있던 사람의 이름을 토해내라며 윽박지르는 것을 반복했지만 에그시는 용케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딘이란 인간에 대한 반항심인지 해리에 대한 의리인지는 몰랐지만, 어찌되었든 입이 무거운 것이니 이유는 상관 없었다. 이윽고 쌩- 하는 소리와 함께 에그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칼을 들고 윽박지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만하면 됐어. 해리는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에그시를 놓으라고 또박또박 읊었다. 약자에게만 강한 놈들의 훌륭한 표본답게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도 바로 꼬리를 내렸다. 에그시가 넘어질 뻔하면서 잡동사니 몇 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급하게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집 안이 조금 깔끔해졌군. 아까의 비명을 토대로 보았을 때 에그시의 집 안에는 그의 어머니까지 있는 것 같았다. 해리는 정중히 부탁했다.


"언윈 부인,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헉 하며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잰 발걸음이 마루를 밟고 사라졌다. 뒤이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 방 안에 남은 사람은 단 한 명이 되었다.


"딘 앤소니 베이커. "


해리는 최대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었다. 


"마약에, 골목길 갱단에, 살인 미수까지. 바깥을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할 정도군. "


딘이 마치 사형장에 선 죄수처럼 벌벌 떨며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말의 자존심까지 버리지는 못했다.


"이 썩어빠진 쥐새끼 같은 놈아! 사내자식이면 숨어있지 말고 당당히 나와서 싸워!"

"당당함은 동등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나 허용되는 단어지. "

"뭐? 이-"


해리는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참고 들어줄 수 없었다. 신사의 정중함을 지킬 필요도 느낄 수 없었다. 


"당신같은 야비한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정말 역겹지만, 이쪽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라 생각해.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에 말로 경고를 해주니 말이야. "

"예의 좋아하시네. "


딘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댔다. 해리는 얼굴을 맞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더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 도청기를 귀에서 떼고 머릿속으로 잡생각을 정리한 다음 다시 꼈다. 딘이 도청기 너머에서 낮게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개새끼, 더러운 등의 짤막짤막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지만 해리는 애써 무시했다. 

 

"그쪽이 지킬 건 딱 하나야. 에그시 언윈 주위에 나타나지 말 것. 그 아이를 내버려 둬. "

"뭐, 머그시? 그 놈이 몸이라도 팔아서 당신 같은 사람을 고용한건가?"


매너, 매너, 매너. 해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입술을 반쯤 깨물었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끊지.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것도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에그시 앞에서 얼쩡거린다면 집에 널려있는 총구로 당신 숨통을 끊어줄 수도 있어. "

"내가 보이지도 않는 곳에 숨어서 말밖에 못하는 겁쟁이를 무서워할 것 같아!"


딘은 그답게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채 소리를 질러댔다. 해리는 대꾸할 가치도 없는 외침들을 뒤로 하고 도청기를 껐다. 확실하게 알아들었다고는 생각 안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이니 언젠가 또 나타날텐데,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좋을지 감이 서지 않았다.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지만 과연 딘이 그를 움직이게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해리는 머리가 조금 복잡한 상태로 에그시가 킹스맨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


해리는 에그시가 랜슬롯이 되기 위한 마지막 후보 시험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막 들은 참이었다. 멀린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그와 딘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멀린은 에그시가 아서 소유의 택시를 타고 도망쳤다는 정보도 알려주었다.


"해리, 저 놈은 우리 엄마를 때린 놈이라구요!"


에그시가 택시 좌석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지만 해리는 단호하게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차 유리를 사이에 두고 둘의 눈이 마주쳤지만, 에그시는 별다른 반발 없이 택시에서 내려 그의 집으로 순순히 들어왔다. 그러나 해리의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둘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리는 오늘따라 에그시가 유별나게 날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다 온 사람처럼, 누군가가 그를 함부로 대한 것처럼. 해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에그시의 몸 구석구석 어두운 흔적들을 잡아내었다.


"에그시. "


해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그시는 해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무언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해리가 갑자기 다가와 그가 숨기려 했던 상처를 드러내버리자 한 발 뒤로 물러나 그를 노려보았다. 


"언제 이런거지? 킹스맨 훈련 때 얻은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


에그시는 불안한 눈빛으로 해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신경쓸 거 없어요, 해리. 킹스맨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네 양아버지?"


에그시가 양아버지란 단어에 눈에 띄게 몸을 떨면서 역겨움을 표현했기에 해리가 단어를 정정했다.


"그 작자?  "

"예, 맞아요. 잘 아시네요! "


해리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에그시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해리가 한 발 늦은거죠, 뭐. 제가 좀 많이 맞긴 했지만 엄마를 때린 놈한테 본때는 보여줘야 했어요. 조금만 더 하면 어디 한 군데는 쥐어뜯을 수 있었는데. "

"바보같은 짓이었어, 에그시. "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에그시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킹스맨은 그런 사소한 복수를 하라고 널 훈련시킨 게 아니야. 너야말로 신경 쓸 필요 없었다. "


언뜻 보니 해리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에그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애정을 쏟았던 개를 눈앞에서 쏴 죽이라고 하더니, 공포탄이었다면서 쏘지 않는 자신을 얼간이처럼 여기고, 킹스맨에서 배운 걸 정당한 곳에 써먹지도 못하게 하다니. 


"알았어요. 앞으로 안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전 킹스맨 선발시험에서 떨어졌고, 배운 건 다 까먹게 되겠죠. 엄마랑 데이지랑 빌어먹을 그 작자랑 어떻게든 버티면서 살아볼게요, 됐죠?"


에그시는 말을 꺼내놓고 아차 하는 생각에 해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날 선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해리의 기분을 건드렸을 것 같았다. 그는 해리의 눈이 조금 슬프게 보인 건 애써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껏 해온 일들은 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의 생명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어. "


해리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쓸쓸하게 대답했다. 에그시는 그가 말을 생각없이 꺼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리도 항상 그의 아버지의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그에게 킹스맨의 기사가 될 기회를 주었고, 지금도 그의 옆에서 신경 써주고 있는 것일텐데. 갑작스레 솟아올랐던 화가 가라앉으면서 해리의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에그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과밖에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해리. "

"당연히 죄송해야지. "


해리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그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사과를 하고 싶은데 나오는 말이라곤 죄송해요, 이 한 단어밖에 없다는 것이 창피했다. 


"여기 꼼짝말고 있어. 돌아와서 보자. "


해리는 에그시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방을 나갔다. 그러더니 정장을 차려입은 채 킹스맨의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집을 나갔다. 에그시는 조용히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킹스맨은 불필요한 살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죽이지 않는다. 그들만의 신념과 믿음이라는 건 그만큼 역사가 길고 굳건했으니까. 대신 살상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것들이 더 효과적일 때가 많았다. 죽어버려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보단 죽음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며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랬기에 해리는 딘을 반쯤 죽여놓았다. 정중한 경고는 앞서 해두었으니 딘도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팔을 올려 위협을 가할 수 없도록 교묘하게 꺾어놓았고, 뛰어다닐 수 없도록 다리도 건드렸다. 놈의 역겨운 목소리도 듣기 싫었기에 이빨 몇 개도 부러뜨려 놓았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에그시를 괴롭혔으니까, 그 아이의 몸에 보기 흉한 상처들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건 누구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이 놈이 에그시 주변에 나타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산은 더러워졌기에 불에 태워버렸고, 정장도 불쾌한 냄새가 배어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멀린에게 미리 연락을 해 새로운 맞춤형 정장과 무기를 부탁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가는 길에 킹스맨에 들려 받아갈 생각이었다. 

킹스맨에서 옷을 받아 갈아입고 나자, 기다렸다는듯이 그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해리는 폰을 보지 않고도 에그시의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해리, 브런치 시간도 다 끝나가는데 어디 간거예요? 아직도 화 안 풀렸어요? 제가 죄송해요.]


사실 에그시가 미안해할 건 없었다. 아까 해리가 화가 나 있던 대상은 에그시가 아니라 그를 괴롭힌 놈이었으니까. 


[재료가 다 떨어져서 장 보고 가는 길이었다. 늦어서 미안. 대신 오늘은 마티니를 곁들인 포크 정식이야.]


그는 에그시가 딘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에그시는 그와의 인연을 끊은 채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 되는 거니까. 그건 해리가 에그시에게 주는 비밀 선물이었다. 

맥꾸리!!

Mcandchees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