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하지만 주 된 내용은 가상의 내용입니다. 

(비스듬한 글씨는 일본어라고 생각해주세요)












순사들에게 완전히 둘러 쌓인 나재민을 보자마자 어떻게든 순사 손을 떨쳐내려고 몸부림쳤지만 술 취한 놈이 힘은 어찌나 센지 단단히 붙들린 손목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뒤로 이끌렸다.

 




"나재민!!"


"어떻게든 도망가요 어떻게든!!"




 

순사 두 명이 나재민의 양 팔을 결박하고는 그대로 그를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날 보며 도망가라고 소리치는 나재민때문에 순간 울컥해서 시야가 흐릿해졌고,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순사들의 구둣발에 차이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고운 얼굴에 상처가 생긴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하나 없이 곱고 예쁘기만 했던 얼굴이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왜, 대체 왜. 나재민이 왜 저런 취급을 받아야 해. 왜





"천박한 조센징새끼 주제에 누구 앞을 가로막아"


"그래도 얼굴은 반반하니 팔면 값은 꽤 쳐주겠어"





미친새끼들. 진짜 인간도 아닌 새끼들 같으니라고. 지옥불에 떨어져도 모자랄 새끼들


두 팔이 붙잡혀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재민을 걷어차면서도 순사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내뱉으며 낄낄거렸고 나는 날 붙잡고 있는 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이거 놔! 놓으라고 미친새끼야!!"





온 몸을 미친듯이 뒤틀고 흔들며 순사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다 발끝에 무언가가 밟힌 게 느껴졌다. 서둘러 고개를 숙여보니 발에 채인 뾰족한 돌 하나가 보인다. 저 돌이 뭐 얼마나 위험하겠냐만은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


온 힘을 다해 반항하는 나때문에 술 취한 순사가 다리를 휘청이는 그 순간, 있는 힘껏 몸을 숙여 돌을 손에 쥐고 그대로 순사의 뒤통수를 향해 이 악물고 내려쳤다.


술에 취한데다 갑자기 돌에 뒤통수를 쳐맞은 것 때문에 악 소릴 내며 온 몸을 휘청인 순사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는 그 때 잡힌 손목을 거칠게 털어내고 나재민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뻗은 손이 나재민에게 채 닿기도 전에 나재민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순사 중 하나가 날 향해 발을 뻗었다. 구둣발에 채여 바닥에 엎어진 내 앞으로 날 걷어찬 순사가 성큼성큼 다가왔고 그대로 커다란 손이 뺨을 스쳤다.


아...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진 고통에 본능적으로 왼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화끈거리는 열이 느껴지고 입안에선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살다살다 내가 이런 버러지같은 새끼한테 뺨을 쳐맞네

 




"조용히 따라가면 될 것을, 조센징은 참 멍청하단 말이야"

 




내 뺨을 때린 순사가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거침없이 손을 뻗었고 이내 머리카락이 순사 손에 잡혔다. 한 손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제 쪽으로 내 몸을 잡아당긴 순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열하게 웃는다. 

 




"아가씨!!"

 




바닥에 쓰러진 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부르는 나재민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지만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윽, 소리가 입술 새로 터져나왔다. 





"네가 얌전히 따라가야 저 놈이 살텐데"


"뭐라는거야 씨발..."


"네가 얌전히 우리 말을 들어야 저 놈이 산다는 소리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파들 중에서도 조선인들을 유독 더 탄압하고 핍박하던 순사들이 있었다고 배우긴 했지만 그런 친일파를 이렇게 눈 앞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날 보며 친절히 조선말로 대답하는 순사때문에 헛웃음이 터졌다. 매국노 주제에 지금 나재민을 걸고 거래를 하자는 건가? 이 새끼들은 정말이지 역겨운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여전히 내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을 보다가 말없이 순사를 응시하자 내가 제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한건지 단단히 틀어쥐었던 머리채를 놓는다. 그와 동시에 김도영이 사준 머리핀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순사는 보란듯이 머리핀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산산조각난 머리핀 위로 김도영과 정재현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리고 뒤이어 김정우와 이동혁 마지막으로 박지성까지 얼굴이 스쳤다. 너희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토록 서러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구나


고개를 돌리면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나재민이 있고 그 위로 김도영과 정재현이 차례대로 덧입혀졌다. 이대로 순사 손에 끌려갈 생각도 없고 나재민을 저대로 혼자 두고 도망갈 생각도 없다. 


이를 악물며 순사를 노려보자 날 보는 눈빛이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제가 강자라는 확신, 앞에 놓인 나를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보자마자 정재현이 보고싶었다. 한없이 날 다정하게 바라보던 그 두 눈이. 





"어때, 이제 좀 마음이 생겼나?"


"...매국노 새끼 주제에"

 




퉤- 낄낄거리며 역겹게도 웃는 얼굴 위로 침을 뱉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순사가 작게 욕지거리 같은 걸 짓씹더니 다시 손을 휘두르는 그 때, 탕- 탕- 돌연 총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들린 총소리에 순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간 순간,





"악!"





이를 악물고 순사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있는 힘껏 걷어찬 발길질에 순사가 바닥에 나뒹굴었고 쓰러진 순사를 지나쳐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낡은 몽둥이를 서둘러 손에 쥐었다.


누가 버린건지 뭔지는 몰라도 야구방망이를 쥐는 것처럼 몽둥이를 손에 들고 다리를 붙잡고 뒹구는 순사의 등을 거세게 내려쳤다. 머리를 맞는 것도 아니니 이런다고 죽지는 않겠지 싶어서 이 악물고 몇 대를 연달아 내려치자 나재민을 둘러싸고 있던 순사들이 단체로 내게 달려들었다. 


저들끼리 술 마시고 노느라 애초에 순찰이고 뭐고 생각이 없었는지 칼도 총도 없는 순사들은 맨 몸으로 내게 달려들었고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는 나때문에 당황한 순사들 머리 위로 갑자기 무언가가 촤르륵- 쏟아져내렸다. 

 




"악 뜨거! 뭐야!"


"아악!!"

 




무언가 방어할 틈도 없이 쏟아진 걸 그대로 맞은 순사들이 발작하듯 바닥에 뒹굴고 난리치기 시작한다. 한 눈에 봐도 김이 펄펄 나는 걸 보니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맞은 모양이다. 갑자기 어디서? 누가?


몽둥이를 든 채로 고개를 들자 건물 2층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게 보인다. 저기서 누가 뜨거운 물을 쏟아부었나? 조선인인가? 나랑 나재민을 도와준건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웬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나와 바닥에서 아직도 구르며 악 소리를 내고 있는 순사들 앞에 멈춰 서더니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뭐라 말을 한다. 


처음 내 손목을 붙잡았던 새끼의 이름이었는지 뒤통수에 핏자국을 남긴 순사가 제복 남자 앞에 서더니 경례를 하고 이내 쓰러져있던 순사들을 데리고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죄송합니다"


"그 쪽이 왜 사과를 합니까? 일제 옷을 입고 조선말하는 꼴 보는 것도 거북하니 비키시죠"

 




자연스럽게 조선말로 사과를 하는 모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저 한글을 잘 아는 일본놈인지 아니면 이 역시도 매국노일 뿐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내 알바는 아니라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바닥에 쓰러져 누운 나재민에게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끙끙대며 누워있는 나재민 옆에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이름을 불러봐도 감겨진 두 눈이 뜰 생각을 않는다. 

 




"재민씨! 정신차려요 재민씨!"


"으..."


"재민씨? 죽으면 안돼요 여기서!"


"죽긴 누가 죽습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느리게 눈을 뜬 나재민이 꽤나 고통스러운 지 눈을 찡그린다. 옷 소매로 얼굴에 번진 피를 조심스레 닦아내는데 눈가에 점점 열이 오른다.


고통스러워하는 나재민을 보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아서 입 안의 살을 잘근 깨물며 울음을 참는데 그 때 힘없이 들어올린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은 나재민이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울 겁니까"


"안, 울어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울어봤자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재민이 다쳤고 그를 치료부터 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순사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순사들의 상관으로 보이던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도 사라졌다. 남은 건 조선인들 뿐이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몇 몇 조선인들이 아무 말 없이 나와 나재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악의를 가지고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거리자 나재민이 괜찮다며 날 안심시키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는다. 상체를 일으키는 나재민을 부축하려 손을 뻗자 우리 앞에 다가온 사람들 중 젊은 여자가 날 보고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가 약방이니, 저기로 가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감사해하지 마세요"

 




내 눈을 피하며 말을 이어가던 여자가 먼저 몸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온 남자 두 명이 나재민을 부축하며 일어선다. 남자들에게 몸을 기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나재민을 멍하니 바라보다 산산조각한 머리핀을 줍고는 나재민을 따라 걸었다. 


얼굴에 잔뜩 상처를 달고 가는 나재민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못본 척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죄책감과 미안함 등이 섞인 감정을 알아차린 나는 그저 아무 말없이 약방 안으로 들어서야했다. 


모두가 피해자인데 피해자들끼리 부채감을 느껴야하는 이런 상황에 그저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진짜 이 시기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시기다.


나라를 잃는다는 게 얼마나 서러운 건지 또 한 번 느낀 나는 약방에 들어오자마자 환자처럼 눕혀지는 나재민을 보고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안 울겠다더니, 다 거짓이었습니까"


"사람이, 피떡, 이 됐는데, 눈물이, 안 나는 게 이상, 하지"


"...피떡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누가봐도 피떡인데 정작 본인은 듣기 싫은 지 눈썹을 찡긋거린다. 눈물을 쏟다말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한 나재민의 반응에 입술 새로 헛웃음이 터졌고 그 덕에 울음은 금방 사그러들었다. 


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지 보이지 않는 곳엔 상처가 더 많을텐데도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누워있는 나재민 옆으로 약방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젊은 여자가 같이 나타났다.


이 집 딸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그 때 허공에서 여자와 시선이 맞물렸고 그 순간 호텔에 있을 애들이 떠올랐다. 약속장소가 아닌 곳에 와 있다고 연락을 해줘야할텐데

 




"저 죄송한데 혹시 전화 있을까요?"


"아 네, 저기 있어요"

 




가게 입구 옆 탁자를 가리키는 손짓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재현이나 나재민 집에는 따로 전화가 없어서 바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 호텔은 아니니까.


애들이 아직 호텔에 있다면 전화로 얘기하면 될거고 만약 호텔에서 나왔다면 나재민만 여기에 두고 잠깐 주점에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며 전화기를 손에 쥐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호텔 번호가 뭐였지


김정우가 경청회 사람을 통해 받아온 편지에 호텔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는데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데 내 손이 아닌 길쭉한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다이얼을 돌렸다.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돌리자 치료를 받던 중이었는지 거즈 하나를 붙인 나재민이 어깨를 으쓱였고 이내 약방 주인이 마저 치료를 받아야한다며 덧붙이는 말이 들려왔다. 

 




"상처 덧날라. 가서 치료 받아요"


"아가씨야말로"


"저요?"


"입술, 흉이라도 지면 어찌합니까"

 




나재민의 손끝이 내 입술 끝을 향했고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던 그 때 건너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텔 직원인 듯한 목소리에 정재현을 찾자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침묵이 맴돌았다. 


여전히 내 옆에 서 있는 나재민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곤 뒤쪽을 가리키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 뒤로 걸어갔고 때마침 전화 건너편에서 정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재현입니다. 

 




"나야 재현아"


'여주? 갑자기 전화는 왜, 무슨 일 있는 것이야?'


"설명은 나중에. 나 지금 약방에 있어. 양장점 나와서 오른쪽으로 걷다보면 푸줏간 있는 골목길 근처"


'약방? 약방이라니 무슨,'


"일 마무리 잘 하고 와, 너무 걱정말고"


'여주야'


"재민씨랑 같이 기다릴게"

 




제대로 설명도 없이 대뜸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있다고 하니 꽤 답답한지 연신 한숨을 내쉬던 정재현이 이내 알겠다며 대답했고 그의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스마트폰을 쓴 이후로 이렇게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는 정말 아주 오랜만에 보는거라 끊어진 수화기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금 어색하게 내려놓고는 몸을 틀었다. 


정재현과 통화를 하는 사이 치료가 모두 끝이 났는지 얼굴 곳곳에 약을 바른 나재민이 상체를 반쯤 드러낸 채로 누워있다. 옆구리와 가슴팍에도 멍자국이 남아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나재민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옷을 다 벗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처 치료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옷을 반쯤 젖힌 것 뿐인데 괜히 민망하다. 상처를 본 거였는데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싶기도 해서 애써 약방 안을 둘러다보며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일 마무리 되셨답니까"


"그 얘기는 안 했어요.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니까"

 




내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던 나재민이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 상처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이내 두 눈을 감으며 으- 하는 소리를 내뱉었고 아파하는 나재민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를 살폈다.


어디가 아픈건지 얼마나 아픈건지 반사적으로 나오려던 질문은 입안에서 그대로 삼켜졌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뻔히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의 이마로 손을 뻗었고 땀과 피가 섞여 잔뜩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아가씨"


"네"


"미안합니다. 나때문에 괜히"


"그게 무슨, 재민씨때문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지 마요"


"권총이라도 챙길 걸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아가씨가 그 놈들 손에 상처입는 일은 없었을텐데"


"...그랬으면 순사들에게 재민씨가 잡혀갔겠죠"

 




감고 있던 두 눈을 느리게 뜬 나재민이 제 시야 가득 날 담는다. 오롯이 나만 담아내는 듯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자 아무 말 없이 날 보고만 있던 나재민의 손이 내 손등 위를 덮었다. 


자연스럽게 내 손을 감싸는 나재민때문에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경성에 떨어졌을 때, 그러니까 내가 이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재민과 나는 불편한 사이였다. 나재민은 날 미친 사람이라 여겼고 나는 그런 나재민이 불편했으니까.


경성에 머무는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나는 여기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이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연다. 


근데 이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결국 끝이 정해져있는데 이들이 내게 마음을 자꾸 여는 게 나는 더 마음이 아프고 무거워서, 

 




"아가씨가 봄 같다 했습니다."


"......"


"해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헌데 보다보니 진짜 봄 같아서,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겨울에도 끝자락이 있겠구나 봄이 오는구나 싶었습니다"


"......"


"...허나 이 겨울이 너무 가혹해서, 봄에겐 이 곳이 맞지 않겠구나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가만히 나재민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봄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아이들에게 들었고 그들이 말하는 봄이 뭘 뜻하는 지도 알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때때로 저들의 세상을 겨울이라 칭했고 저들이 원하는 독립을 봄이라 칭하곤 했다. 그건 남아있는 시나 글 등 여러 자료에서도 드러나는 욕망이었고, 아이들의 입을 타고 흐르는 봄이라는 말도 독립을 칭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온 날 말하는 거라는 것도, 독립한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다가 온 나를 봄이라 칭하는 것도 알고 있어서 나재민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게 이 곳이 맞지 않겠구나 생각했단다. 그러니까 나는 경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경성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나재민을 보며 무심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다 순간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아,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정적을 가르고 울려퍼진 작은 소리에 내 손을 덮고 있던 나재민의 손끝이 상처가 난 입술에 닿으려는 듯 다가왔고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


"......"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날 응시하는 나재민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돌리자 다시 내 손을 덮어온 나재민의 손이 이내 꽤 강한 힘을 주며 내 손을 잡아온다. 순간 느껴진 강한 힘에 놀라 그를 쳐다보자 날 빤히 바라보던 나재민이 두 눈을 감으며 짧게 숨을 뱉는다. 

 




"...헌데 자꾸 욕심이 납니다. 나는"

 




그리고 이내 힘을 뺀 나재민의 손이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말없이 나재민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는 것만 같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금세 조용해진 약방 안에서 나오자마자 긴 숨을 내뱉었다. 마음이 추를 매단 것 마냥 하염없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 가라앉을 게 없을 것 같았는데도 쉼없이 가라앉은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해서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바깥 바람을 쐬면 조금 나으려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벽에 혼자 기대 선 채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지우려 노력했다. 


돌아가야 한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가 있다하더라도 평생을 이 곳에 지내라는 건 아니었겠지. 정재현 앞에 내가 나타난 건, 그리고 내 앞에 정재현이 나타난 건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


만약 그 이유가 신의 장난이라하더라도, 결국 나는 돌아가야 하고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이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자꾸 미련이 남게 된다.


떠나야 하는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경성의 이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내 스스로라는 걸 알아서, 

 




"여주야"


"어찌 홀로 나와 있어"

 




숨이 찬 목소리들이 들림과 동시에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호텔에서부터 급히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정재현과 김도영이 눈 앞에 서 있다. 


걱정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날 바라보고 있는 둘을 보는데 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지 모르겠다. 날씨도 화창하고 단정하게 잘 차려입은 두 사람은 상처하나 없이 무사히 돌아왔는데 왜 나는 울고 싶은 지 모르겠다. 


말없이 저를 보기만 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정재현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서서 날 바라봤고 김도영은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그 순간 순사가 짓밟아 산산조각난 머리핀이 생각나서 순간 목이 메였다. 

 




"핀, 잃어버렸어?"


"...응. 미안해 도영아"


"다시 사면 될 것을 어찌 그리 미안해해, 그러지마 괜찮아"


"그래도 미안해..."


"무슨 일 있었지"


"...재민씨가 좀 다쳤어. 안에 있어"

 




내 말에 김도영과 정재현의 시선이 동시에 가게 안 쪽으로 향했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무슨 일이 생겼구나 확신한건지 김도영이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저가 더 아픈 듯한 표정을 하고서 내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래도 이리 무사해서 다행이다"


"...응"

 




김도영의 손길이 다정하게도 눈가를 쓸어내리다 멀어졌고 이내 그가 정재현의 어깨를 툭 치고는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약방 안으로 들어가는 김도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내 뺨에 닿아오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김도영이 그랬던 것처럼 본인이 더 아픈 얼굴을 하고 있는 정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약은?"


"아직..."


"...흉이라도 지면 어찌하려고"


"괜찮아, 별로 아프지도 않은 걸"


"누가, 네게 이런 상처를 남겼을까"


"......"


"...호텔에 함께 갈 것을 그랬다. 그랬다면 네가 이리 다치는 일은 없었을텐데"

 




맞은 탓에 잔뜩 부어올랐을 왼쪽 뺨을 가리려고 슬쩍 손을 드는데 내 손을 정재현이 먼저 맞잡았고, 오른쪽 뺨을 감싸고 있던 정재현의 손이 멀어진다. 


느리게 멀어지는 정재현의 손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와 다시 눈을 맞추자 정재현의 두 눈에 죄책감이 스친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죄책감을 느껴야 될 놈들은 따로 있는데 괜한 이들이 죄책감을 가지는 것 같아 속이 쓰리다. 

 




"죄 지은 놈들은 따로 있는데 왜 네가 그래, 너도 재민씨도 도영이도 다들 죄책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


"......"


"죄책감 말고, 그냥... 나 좀 안아주면 안 돼?"

 




내 말에 정재현이 말없이 두 눈을 깜빡이다 그대로 두 팔을 뻗어 날 끌어안았다. 어깨를 단단히 감싸안고 끌어안는 손길에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얼굴을 파묻었고 신호탄처럼 그대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흐으...너무, 무서웠, 는데... 재민이 죽을, 까봐,"


"...미안해. 미안하다 여주야,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나를 끌어안고 다독이는 손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젓는 내 뜻을 알아들었을까, 못 알아듣고 또 혼자 죄책감을 가지면 어떡하나, 정재현이 또 나한테 미안해하면 어떡하나 싶어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제 품에서 빠져나온 날 내려다보던 정재현의 손길이 눈가에 닿았고 그의 다정한 손끝이 눈물에 젖어간다. 제 손이 축축히 젖는데도 아랑곳 않고 연신 눈물을 닦아내는 정재현을 보다 걸러내지 못한 마음이 쏟아졌다. 

 




"보고싶었어, 재현아..."

 




차마 걸러내지 못하고 쏟아진 마음은 허공에 흩어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정재현은 말없이 날 제 품에 다시 끌어안았다.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연재를 여러개 하다보니 그냥 먼저 써지는 글부터 올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또 이 글이 먼저 왔고... 어떻게든 오늘 안에 올리겠다 마음먹었는데 겨우 세이프 했네요

독자님들 모두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겠고, 내일도 행복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 늘 감사드립니다 하트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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