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못한 시화詩畵가 세상을 떠돌고,

취기에 잘난 듯 손을 놀려보느니.

 

논하지 못하고 화폭에 담지 못하는,

세상을 비추는 작은 호수 위에

여보란 듯 드리워진 노란 꽃잎.

 

하느적 날아가는 세월의 꿈속에서

이래저래 많은 소리들을 접으며,

탓하는 마음을 제비처럼 날려 보내며,

 

그저 무엇도 논하지 않고 그리지 않은 채,

노란 배 뜨인 작은 호수 위를

취선醉仙과 함께 노닐자꾸나.

 

 

 

 

 

1.

 

 

 

달콤한 향기가 흩어진다.

코끝을 아른아른하게 간질이는 향기에는 항시 느낄 수 없는 계절 특유의 정취가 어렸다.

찬바람이 들고 제비가 날개를 펼쳐 남하하는 시기. 푸른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한 꺼풀 옷을 갈아입듯 붉고 노랗게 물들고, 더불어 찬 기운과 함께 하얀 서리가 들고 높게 비행하는 바람의 날개가 날카로워지는 가을.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 강산이 변한다 하더라도 항상 이 때만 되면 단아한 향기로 피어나 지나는 바람의 정들을 붙잡는 꽃이 있다. 노랗게 핀 작은 감국甘菊은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시자이다.

저 예쁜 꽃들이 져버리면 시간은 잠들어버린 듯 적막한 세계로 돌변할 것이다. 깊고 깊은 한기의 눈꽃들이 지배하는 차가운 세계- 봄부터 길러온 모든 것들이 떠나고 잠드는 꿈의 세계로.

그리고….

 

 

“스승님, 일어나셨어요?”

쉽사리 떠지지 않는 시야 사이로 반짝이며 빛나는 금빛 머리칼이 보였다.

가을 햇살 아래 가녀리게 흩날리면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아주 작고 노란 꽃잎들의 향연처럼 아름다운 빛깔.

“…인예냐?”

“네, 스승님. 무슨 잠을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시는 거예요? 아침 준비되었으니 나와서 드세요.”

초록 눈동자가 살풋 웃는다.

예쁜 금발, 예쁜 여자아이. 뾰로통하고 새침하지만, 여기에 이렇게 웃고 있는 인예. 향기 속에 묻혀버린 듯 간지러워진 코끝이 찡하게 아팠다.

자, 봐. 저 예쁜 보석은 여기 이 자리에 있다.

아직 여기 있으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마음을 진정시키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인예 녀석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덩달아 웃었다.

아이고, 예뻐라. 역시 애들은 웃어야 예쁘다.

그나저나 서리 내리는 시기답게 아침 공기가 유달리 차갑구나. 서리의 정령이 나서기라도 한 것일까. 유달리 칼날 선 바람결이 매섭다. 어쩐지 몸도 찌뿌드드한 게 움직이기가 싫다.

훈훈하게 데워진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다고 버둥거리면 저 눈치 빠른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비예 놈은 뭐하고 있는 게냐?”

“오라버니야 장 보러 갔다 와서 식사 준비 중이죠.”

그래, 그 무심한 돌덩어리도 아직 그 자리에 있구나. 보석은 못 되어도 장아찌 누르는 돌 정도는 되니까 용서한다. 정말이지 어째서 내가 그 녀석을 키웠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물론 솜씨가 좋으니까 이것저것 다 더해서 접어놓지만.

“아참, 이건 오라버니가 장 보러 갔다가 얻어온 거래요.”

내밀어지는 가녀린 팔 안 한가득 안고 있는 것은 작은 빛무리 같은 감국甘菊들. 유달리 샛노랗고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작은 꽃 하나하나가 아침 햇살에 화사하게 빛났다.

“감국이 벌써 이렇게 피었구나.”

“물론이죠, 스승님. 이제 곧 구중절九重節인 걸요.”

인예는 웃으며 내 방 가운데 놓여있는 탁자 위의 꽃병에 감국을 꽂아두었다. 하나의 가지에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저 작은 국화들의 무리는 수없이 많은 해를 보내어도, 언제나 이 시기가 되면 꽃을 피웠다.

피지 않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 자연의 시간은 언제나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귀와 천을 구별하지 않으며 항상 공정한 손길로 모든 것들을 키우고 거두어가는 위대한 이이자. 경외를 바쳐도 모자람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그로 인해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정말 비예 오라버니는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이런 걸 어디서 얻어오는지 모르겠어요. 꽃집 여자들이 준다고 넙죽 받아오기라도 하나.”

투덜투덜 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꽃을 가다듬는 인예는 꽤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꽃 싫어하는 여자들이란 없지. 저렇게 작고 예쁘고, 향기 좋은 단아한 꽃을 누가 마다할까.

하지만 인예야, 네가 모르는 게 있구나.

저 감국은 꽃집에서도 팔지 않는 거란다. 숲으로 들로, 자기 좋을 대로 피는 꽃이라 사람들 손에 타는 걸 싫어해. 꽃을 파는 꽃집은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소국小菊들을 가져다 놓지. 저 단아한 감국은 산과 들에 무리 지어 꽃을 피우며 지나는 사람들을 반기면서 그저 손을 흔들 뿐이야.

그러고 보면 비예 녀석도 참 불쌍하군.

저거 끊으러 산으로 어디로 돌아다니느라 시간도 많이 들었을 텐데.

“얼른 나오세요, 스승님. 비예 오라버니가 장담할 정도로 맛있는 된장국이 준비되어 있어요. 오늘은 김이에요.”

“오냐, 알았다.”

탁.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인예의 뒷모습은 여전히 예쁘다. 그리고 저 인예를 맞이하는 돌땡이 녀석도, 말하기 닭살스러울 정도로 예쁘겠지.

변한 것은 없다.

단지 아침 공기는 차갑고, 늘어지는 게으름은 천장이 무너져도 일어나기 싫을 뿐.

그렇게 매년 겪는 가을이 다가왔다.

가만히 자리하고 있던 바람의 정이 이렇게 게으름 부리는 날 보고 웃는 듯 날개를 펼친다.

정체되어 있던 공기가 휘돌아 사방으로 흩어지고, 코끝에 다가온 것은 달콤하고 단아한 향내. 가만가만 그 자리에서 빙긋 웃고 있는 예쁜 황금빛 국화 한 다발.

“벌써 구중절인가….”

흘러가는 시간 따라 어김없이 다가온 날.

기분이 우울해지는 건 별수 없지 않나. 이런 기분을 저 어린 것들이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발 동동 구르며 걱정할 터이니 웃는 얼굴을 보여야겠구나.

그렇다고 해서 눈치채지 못할 녀석들은 아니지만 말이다.

얼른 밥이나 먹고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온 구중절을 맞이해야겠다.

들과 산에 무리 지어 핀 황금빛의 감국. 긴 목을 빼며 바람과 함께 너울진 춤을 출 구절초. 연보라색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데 모여 하늘을 바라보는 쑥부쟁이. 이 시기만 되면 일제히 피어나 눈을 끄는 아름다운 꽃들처럼.

해사한 웃음 지으며 국화향을 몰고 돌아올 이를 위해.

 

 

“오셨어요, 스승님.”

솜씨 좋게 이것저것 탁자 위에 늘어놓던 비예가 날 아는 척 한다. 하지만 그 표정만큼은 방금 막 만든 김치를 먹다가 엄청 큰 애벌레를 씹은 것 같다.

맛깔스럽게 음식 만드는 사람 표정이 저래서야, 원. 저러니까 내 저 녀석을 홀에 두지 않는 거다. 저 얼굴로 음식 먹는 사람 기분 나쁘게 해서 체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지리오?

“오늘은 된장국입니다. 스승님 때문에 멸칫국물은 내지 않고 다시마로 했어요.”

“수고했다. 맛있어 보이는구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예가 눈썹을 치켜떴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매서운 눈매로 나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헹, 하는 표정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마저 놓았다.

정말로 저놈이 맞으려고 저러나. 요즘 사춘기라고 반항하는 거여, 뭐여?

아니다. 저 녀석은 사춘기도 오기 전에 반항하던 놈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 와서 더 반항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저게 지금 뭐라고 중얼거리나.

그 자리에서 한마디만 더 늘어놓으면 확 입을 꼬집어 줄 테다.

“어서 앉아서 드세요. 스승님 때문에 저랑 인예도 지금까지 밥도 못 먹고 기다렸잖아요.”

말 돌리는 거 봐라, 놈. 눈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단정하게 상을 정리하고 있는 비예 녀석의 얼굴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항시 불만 넘치는 투덜이지만 입 다물고 있으면 누구든 한 번 눈을 줄 만큼 잘 생겼다. 생긴 것 하나만큼은 그랬다.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결이 좋은 갈색 머리카락. 고수머리인 인예가 한번은 부루퉁해져서 투덜거릴 정도로 길고 아름다운 빛깔의 생머리가 단정하게 묶여 찰랑거렸다.

하지만 말이다,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미간 찌푸리고 있으면 붙을 정도 다 떨어져 나간다는 거 모르냐?

“천장 안 무너져요. 어서 드세요.”

비예 녀석은 의자를 빼주고 나서 뚜벅뚜벅 걸어 부엌으로 가 버렸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런데 왜 나한테 화풀이야?

“오라버니 기분 안 좋은가 봐요. 이상하네, 아까 전까지는 괜찮았었는데.”

“내가 싫은가 보지.”

“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아니라고 손을 내저어주며 종종 비예 녀석의 뒤를 따르는 인예의 얼굴에는 약간 수심이 어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고 있지만 사실은 무척 슬퍼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표정이었다.

예전에도 저런 얼굴을 한 아이를 본 적이 있다.

“…….”

구중절이 다가오면 꼭 이런 기억들만 떠오른다.

슬픈 것도 아니고, 괴로운 것도 아닌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아픈 기억들. 흘러가는 세월 따라 강산이 변하고 풍파가 몰아쳐 세상이 뒤집어진다 하더라도, 저 산과 들에 어김없이 피는 조그마한 국화들처럼 언제나 한결 같은 것들.

“정말 가지가지 고생시키는군.”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일 뿐. 그런데도 남은 자는 그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버린 것도 아니고, 놓아준 것도 아닌데 그저 막연하게 가슴 한 구석에 구멍 뚫린 듯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네가 원한 거라면 정말로 뜻대로 된 거구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자그마한 황금빛 국화들이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 애절한 손짓은 슬프고 아련하게만 보였다.

가을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피어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내미는 손길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하염없이 서럽고, 하염없이 아팠다.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그렇다.

 

 

 

2.

 

 

초향初香은 소국.

눈을 사로잡는 노란 꽃잎과 아롱지며 흩어지는 진한 술 향기.

점점 진해지는 어둠 속으로 내려앉는 땅거미, 빛이 들지 않는 저녁. 아련하게 흩어지는 등불 사이로 비치는 조그마한 감국들이 내려앉은 땅의 정령과 함께 잠이 드는 깊고 깊은 시간.

오늘은 손님조차 받지 않는 구중절- 기문향의 몇 안 되는 월중 휴일이었다.

고요한 기문향에 깨어있는 것은 귀린과 더불어 수많은 등불들. 인예와 비예 녀석은 일찌감치 먼 꿈나라로 행차했다. 머리맡에 놓인 감국 때문에 아마도 잠은 잘 잘 거다. 그 단아한 향은 예로부터 잠이 들지 않는 밤에 사용하는 좋은 수면제였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일찍부터 잠이 온다고 비예와 인예 녀석은 투덜거렸다. 평소 때처럼 일하고 피곤한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잠이 온다나 뭐라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일찍 잠을 자는 것을 보면 녀석들은 확실히 둔한 모양이었다. 어째 의심할지도 모르는 거냐. 사람의 기본 조건이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있으면 그대로 물고 늘어져야 하거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랜만에 ‘내 손님’이 오는데, 녀석들이 깨어있으면 안 될 일이지.

화르륵 타오르는 귀린이 춤을 추었다. 마련된 술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그저 나란히 놓인 감국을 휘돌아 조용히 향로 위로 내려앉아 몽환연을 태웠다.

진향進香.

매년 돌아오는 자를 위한 나의 귀린이 마련한 작은 선물.

 

챠라랑…

 

청의 수문장이 손님을 맞이한다.

저 문을 통해 ‘이곳’으로 느릿하게 들어오는 이를.

“어서 오시게.”

불꽃처럼 화려한 빛을 발하는 수많은 국화를 품에 안은 이였다.

흐릿한 귀린에 비쳐 수없이 많은 음영을 그리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늦었습니다.”

“뭘,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걸.”

둥글게 휘어지며 웃는 푸른 눈. 매끈하게 뻗은 이마와 곧은 콧날. 단정한 선을 그리는 눈썹이 정말로 어울리는 청년. 정갈하게 묶인 연한 갈색 머리갈이 움직일 때마다 흩날렸다.

누군가와 아주 닮은 얼굴.

생긴 것과 성격으로 치자면 이쪽이 한 수 위지만, 그래도 닮았다. 아주 닮았다.

“여기….”

내밀어지는 것은 송이송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감국甘菊은 영원히 피어있을 것처럼 싱그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예쁘다. 천년만년 그 아름다운 빛을 영원히 이어갈 듯, 작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하지만 한번 내려진 생生은 언제고 사死로 돌아가야 하는 법. 영원불멸하게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생명은 지금 이 순간만 그렇게 보일 뿐. 생생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시간이 흐르면 곧 부스러져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시간을 이어가는 생명들은, 그 허용된 시간을 넘고 나면 언제나 그렇게 허무하다.

“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겠구나.”

“아닙니다.”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편린처럼, 하나 변함이 없이. 그래서는 안 될 일인데도.

“앉으시게.”

내 권유에 그는 조용히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등롱들의 마지막 춤사위 같은 불빛 사이로 비쳐드는 자리에 보이는 것은 희미한 연기를 흩뿌리는 연꽃 향로와 단아한 국화문양 백자 술병, 자그마한 술잔 둘.

조용하게 꽃잎을 펼치며 잠들어 있는 감국 한 다발.

그리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고요히 나를 바라보는 애처로울 정도로 푸른 눈이었다.

“구중절인데 마련한 것이라고는 이것뿐이군.”

“좋은데요.”

그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술잔에 술을 따라 놓고, 그 위에 노란 감국 잎을 떨어뜨렸다.

자그마한 술잔 위로 드리워진 것은 국화 꽃잎이 아니라 단아한 꽃향기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오랜 기억과 수많은 추억들이다.

저기 빛을 발하는 수많은 등롱들이 오랜 시간을 헤매다가 결국 기문향에 정착한 것처럼, 오랜 기억들도 시간 속에 내려앉아 이곳에 머무를 테지. 그리고 그렇게 내려앉은 기억들은 시간의 굴레를 따라 내가 여기 존재하는 한 그림처럼 예쁘게 남아있겠지.

그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한가 보구나.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맞부딪친 잔에 남아있는 것은 수많은 물결이었다. 거울처럼 드리워져 세상을 비추던 수면이 일그러지며 그 위에 떠있던 노란 국화배가 위태롭게 흐트러졌다.

마치 침묵을 지키며 술잔을 나누는 이 순간처럼.

“좋은 술입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고 공허한, 울음 같은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프다고 호소하면서도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고집스럽고 처연한 표정. 깊고 깊게 갈무리되어 신경 쓸 수 없는 고통 같은 감정들이 녹아난 눈동자.

정말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 제게 술을 권해주신 일이 기억납니다.”

“그래.”

“세상만사 모든 이 술잔 가득 채운 후에야 흘려보내야 하는 것. 작지만 큰 세계를 담고 있기에 능히 취선醉仙이 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지요.”

기억력도 좋구나.

나조차도 잊어버린 말들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잇는 걸 보면.

“저는 아직 어렸습니다. 이 작은 잔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달콤한 향에 취해 그저 빠져들고 말았지요.”

“…….”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련 없이 웃는구나.

세상 모든 아픔을 이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 자체로도 기쁘다는 듯 이율배반적으로 웃는 알 수 없는 푸른색의 눈.

이전에 내가 지켰던 아름다운 보석.

무척이나 소중했으나, 부주의하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희미한 등롱 불빛에 비쳐 흐트러지는 음영 사이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서럽게 울고 있다. 비록 눈물 따위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있으면서도. 영원불멸하게 보이는 반복이 깨어지길 바라며 위험한 도박을 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무겁게 이어지는 이 껄끄러운 침묵이 사실은 굉장히 가슴 아픈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은 많은데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 살얼음 같은 위태로운 침묵은 항상 그렇게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사람의 속을 태우는 무서운 화마火魔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시간이 흐르는 게 억울하다는 듯, 침묵을 깨며 이어지는 말은 예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지켜야했으나 지키지 못했던 그 푸른 눈동자는 귀린처럼 인광을 발하였다. 원하는 것을 얻겠다고 이야기하는 저 눈은, 오래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지 않느냐.”

“네, 이렇게 잔을 나누면서 말이지요.”

둥글게 휘어지며 살짝 내려앉는 푸른 눈동자.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려는 그 눈은 여전했다. 나를 떠나갈 때조차도 저렇게 냉정하면서도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볼 것을. 이 내 마음이 다하기 전, 그렇게 한번 용기를 내어볼 것을.”

아직 눈이 내릴 때가 아니건만, 하고픈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들이 엉켜들어 진눈깨비처럼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푸른 눈은 변하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천년만년 그 자리에 앉아 나를 응시할 것 같았던 아이가 느릿하게 일어서서 다가와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채앵…!

침묵은 내동댕이쳐진 술잔처럼 애처롭게 흐트러졌다.

달콤하지만 서러운 향들이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술 위로 흐트러진 국화꽃잎은 서럽다.

하얀 손은 가늘게 떨리며 내게 닿았다.

늘 무언가를 말하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감추려는 애쓰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어린 그 눈. 갈등은 깊고도 깊을 터이나 언제나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질문을 삼켜버린 그 연약한 선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언제나 내뱉었던 말을 또 다시 반복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마디는 저것뿐.

하지만 그 말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답에 대한 유일한 질문. 기억하는 것조차 아픈 기억들을 들쑤시며, 굳이 내게 묻는 것은 필사적이기 때문이리라.

창백한 손가락에 푸른 핏줄이 들어설 정도로 힘을 주며 그렇게 나를 붙잡는 데 필사적인 거냐. 언제나 곁에 다가오지 못하고 맴돌았으면서.

“기억하다마다. 네가 이곳에 처음 온 날, 고집부리며 화병 세 개를 깬 날, 나를 처음으로 ‘스승님’이라고 부른 날. 모두 다 기억한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네가 애처롭게 나를 부르며 내 곁을 떠나간 날까지 모두 다.

나를 바라보던 그 푸른 눈동자가 살풋 웃었다. 둥글게 눈매를 휘며 웃는 그 웃음은 자조적.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러나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웃는 그 눈은 그때와 똑같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지요. 그렇지요?”

그렇다고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가련한 목소리. 하지만 그 기대에 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손을 내밀어 애처로운 아이의 어깨를 짚어주었다.

많이 말랐지만 그래도 건장했던 청년은 과거의 길을 밟아 어느새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렸다.

처음 내가 데려왔던 그 작은 아이.

갸름한 얼굴과 짧게 잘린 갈색 머리칼.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커다란 푸른 눈동자.

왜 외면하냐며 책하고 탓하는 원망서린 눈동자.

내가 지켜야 했던 보석. 그러나 결국 부주의로 잃어버린 안타까운 내 아이야.

“모른다. 네가 말하지 않는 말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술 냄새에 취해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단아한 국화향과 어우러진 주향은 달콤하지만, 한편으로는 쓰디썼다. 과거의 기억은 뿌옇고 아름답게만 보이지만, 저변에 깔린 감정들은 하나같이 다 아프고 아팠다.

“…잔인하십니다.”

늘어진 어깨가 떨리고,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어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침묵으로 내려앉은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아이야. 내 작은 아이야.

내 손으로 감싸주기도 애처로운 내 아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잔인하십니다.”

아파하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던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답하는 말은 거짓말일 뿐이었다. 아무리 이기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넘지 않아야할 금기는 영원히 금기로 남아있어야 했다.

나는 기문향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할 자. 그런 내 곁에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버티기 위해 많은 이들이 나의 곁을 스쳐 지난다. 누구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것으로 끝. 내 곁에, 이 기문향에 절대로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

푸른 눈동자 가득 눈물이 흘러넘쳤다.

희미한 등롱에 비쳐드는 아이의 등은 가련했다. 서러운 눈물에 동조라도 하듯이 기문향의 등불들이 흔들렸다. 흐릿하게 어둠을 가르는 그들은 아이의 서러움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나를 탓하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 가련한 아이를 내가 울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책한다.

이때만은 절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정말이지, 언제나.

“미안하다.”

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거짓으로도 다정해야 할 그 한마디가 스스로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듣는 사람은 얼마나 나를 매정하게 생각할 것인가.

아이는 답이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이며 흐느끼듯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동조하기라도 하듯 푸르게 날아오른 귀린이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경직된 등과 가늘게 흐느끼는 목덜미를 쓰다듬어주고 다독여주었다.

나로서는 절대로 하지 못할, 그 수많은 위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잠에 빠져들기라도 하는 듯 아이는 깊은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픈 상처를 겨우겨우 다스렸다는 듯 가만히 기대어오는 아이의 이마는 차가운 귀린의 불빛에 비쳐 더 없이 환하게 빛났다.

영겁과 비교될만한 시간 동안 내 시야를 차지하고 있던 아이의 몸은 여전히 작고 가련했다. 하지만 귀린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안 된다는 듯 귀린은 아이의 몸을 완전히 휘감았다.

타오르는 듯 시리도록 차가운 불길에 휩싸인 아이의 몸은 일장춘몽의 아쉬운 기억처럼 사라졌다.

사라지는 아이가 남기는 작은 중얼거림.

아마도 이 굴레를 벗지 않는 한, 사라지며 아이가 남기는 한마디의 말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것을 못들은 척 외면하겠지.

 

 

 

 

여느 때처럼 사라져 버린 밤의 시간이 지니는 꿈.

아스라하게 꽃잎을 펼친 채 어둠 속으로 잠들어 가는 감국.

그에 스며들어 허공을 맴도는 술의 향기.

달빛에 아련하게 빛나는 국화문양 자기, 자그마한 술잔.

창공을 휘돌아 이제 내려앉은 바람의 정령의 애처로운 날갯짓. 희미하게 주변을 비추는 등롱들의 손짓, 귀린의 고요한 춤사위.

남은 것은 아련하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국화향뿐.

 

구중절의 밤은, 그렇게 새벽을 맞이하며 끝이 났다.

 

 

 

여담.

 

 

‘스승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없는 애정을 담고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달콤하다시피 한 그 목소리는, 마치 ‘사랑하는 이’를 부르듯 절절한 목소리로 한 단어를 반복해서 이었다.

뒤돌아보지 않는 이를 부르는 듯, 한 번만 보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그런데 대체 누구를 부르는 건가?

‘스승님.’

붙잡아야 한다는 마음과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뒤섞여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겁게 내려앉는 입을 벌려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뿐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은 깊게 가라앉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부르고 싶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기에 이 안타까운 마음을 다해 되뇌일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

‘스승님….’

 

 

 

불현듯이 밝아진 시야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늘 익숙하던 천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비예는 턱끝까지 막혔던 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또냐.”

왠지 탓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떠올랐을 수많은 감정들이 한 데 엉켜 심장이 죄어올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면 항상 기분이 나빴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므로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비예는 흐트러진 긴 머리칼을 한데 묶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바로 세안을 한 후 흐트러진 의복을 제대로 입고 밖으로 나온 비예는 부엌으로 향하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코끝을 스치는 국화향은 평소보다 진했다.

무슨 미련이 남은 건지 바람결에 흩어지지도 않는 그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향에 비예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구중절…이었나.”

짧은 기억을 되살린 비예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때가 되면 늘 펼쳐져 있는 정경을 확인하기 위한 힘든 걸음이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불끈 솟아나오려는 것을 애써 누른 비예는 불쾌하게 뛰는 심장을 누르며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년과 한 치의 변함없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아진 그는 단번에 잘생긴 눈썹을 휘어 올리며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단아하게 놓인 국화문양 백자는 비예의 스승님이 무척이나 아끼던 것이었고, 그것에 짝이 되는 두 개의 술잔 역시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 귀한 것이었다.

평소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았던 백자와 술잔은 지금 아무렇게나 자빠져 늘어져 있었다. 쏟아진 술이 옆에 놓인 감국에 스며들어 굉장히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향을 풍겼다.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가 검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제멋대로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하얀 도포에 검은 태가 둘러진 지극히 예식적이고 단아한 그 차림은 어지간해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중절에는 항상 그 옷차림을 하고 있으므로 비예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그다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비예는 손을 내밀어 약간은 가늘어 보이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곧 손을 거두었다.

왠지 여의찮았다.

항시 흐트러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그의, 있는 대로 구겨진 모습이란 몇 번을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승님. 일어나세요.”

“음….”

“일어나시라니깐요. 날도 추운데 이런 데서 잠이나 자고… 칠칠맞게.”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만큼 신경 쓰이게 마련이었다.

겉모습만큼은 그럴싸하고, 냉정함을 한 꺼풀 뒤집어쓰고, 모든 이에게 잘 단련된 미소를 짓는다고 하지만- 그 뒤로 가려진 모습들을 자주 봐왔다.

비예는 그의 스승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이런 모습들을 보지 않았으면 하고 빌고는 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일이라, 비예는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보고 의도하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을 하늘의 햇살처럼 피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온기.

청량하게 뺨을 스쳐가는 바람의 정령이 부르는 노랫소리.

무엇이든지 맑게 비쳐주는 호수 위의 어슴푸레한 그림자.

하지만 절대로 손 댈 수 없는 먼 곳의 존재.

손을 대기만 한다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신기루 같은 허무함.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이 사람은 비예에게 그런 존재였다.

“뭐가….”

그래서 묻고 싶었던 질문은 하나뿐.

“뭐가 그리 두려운 겁니까…?”

세 걸음.

가까운 듯하면서도 절대로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그 세 걸음을 지키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마음의 허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그리도 단호하게 선을 긋고 다가오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을 깨달은 후부터 점점 질린 비예는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떤 자그마한 것이라도 관여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가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을 가끔씩 보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자각한 이후로는 더더욱.

이것저것 다 따져보아도 비예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 완고한 결벽증도, 기분 나쁘게도 가끔씩 아련한 눈으로 바라봐 사람 착각하게 만들어 놓고 내치는 잔인함도, 그런 주제에 자잘한 것에까지 어쩔 수 없이 신경 쓰게 만드는 무방비함까지도.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승님-!!”

“으악!”

비예의 날카로운 외침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덩달아 지르고 만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뭐야, 뭐?! 무슨 일이야!”

“주무시려거든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술 마시다가 잠들고.”

퉁명스러운 목소리.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듯 비예는 그렇게 말을 잇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복수라도 하듯이.

검은 테두리를 두른 은회색의 눈동자가 일순 크게 떠졌다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 일순간의 변화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

“바보같이 이게 뭡니까, 칠칠맞게.”

무시하고 또 무시한다.

어차피 더 알려고 하면 상처 입는 것은 자신이므로.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은회색 눈동자는 가식적인 미소로 비예에게 답했다.

“한동안 안 맞고 살았더니 간이 부었구나, 비예야.”

“흐억…!”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입 놀리면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매타작한다, 너.”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던가. 티를 내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기에 언제나처럼 지금을 보낼 뿐이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어질러진 탁자 위를 치우려고 하는 비예의 손을 다른 손이 가만히 막아섰다.

“놔두렴, 내가 치우련다.”

“…네.”

술에 젖은 감국과 흐트러진 백자술병, 그리고 술잔을 챙기는 그의 손은 느릿하고 조용했다. 애처롭게 떨어진 감국의 꽃잎 하나하나 모두 다 품에 안고 고요히 일어서 문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비예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딸랑….

 

홍의 수문장이 그의 외출에 마중을 한다.

완연하게 떠오른 태양이 하늘을 가르고, 아직 국화향을 머금은 바람의 정령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구중절이 지난, 일상적인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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