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거리는 소리가 단잠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아카아시는 꼬리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어 소음을 막아보려 했다. 저 멀리 들려오던 비명소리와 분주한 발걸음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아득했던 의식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휴식은 이제 끝났다. 아카아시는 눈꺼풀을 꿈뻑이며 몸을 비틀었다. 오래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니 근육과 뼈들이 자리를 제자리를 찾으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아직 깊은 밤인 듯했다. 아카아시는 실낱같이 흘러드는 달빛을 따라 엉금엉금 동굴 밖으로 기어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시체 타는 냄새와 공포가 뿜는 악취가 지독했다. 아카아시가 지내는 곳은 묘족들의 터전이었다. 그것이 고양이 묘(猫)족인지 토끼 묘(卯)족인지는 소리만 듣고 판단하기 일렀다. 거대한 바람을 타고 잿가루가 하늘을 떠다녔다. 아카아시는 크게 숨을 불어 제 몸에 쌓인 먼지와 공중에 흩날리는 재를 멀리 날렸다.

 

 아카아시의 거대한 뿔이 나뭇잎이 시들 듯 천천히 크기를 줄였고 유리알 같은 비늘도 피부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마침내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양을 갖춘 아카아시가 동굴 앞에 놓인 낡은 상자에서 옷을 꺼내 걸쳤다. 그러나 머리 위로 단단히 솟은 사슴의 것과도 비슷한 형태의 뿔과 스스로 빛을 내는 푸른 눈은 그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드러냈다.

 

 숲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다급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의 불청객 중 하나였다. 아카아시는 도포를 휘날리며 그곳으로 향했다. 작고 날쌘 뜀박질 소리와 두텁고 묵직한 여러 소리가 서로 뒤엉켜나고 있었다. 작은 아이와 그것을 쫓는 장성들 같았다. 아카아시는 가장 높고 잎이 무성한 나무 위로 자취를 감췄다.

 

 먼저 나타난 인영은 커다란 두 귀를 가진 묘(卯)족의 소년이었다. 몇 번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여기저기 찢겨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아이는 앞만 보고 냅다 달리고 있었다. 아직은 아이가 앞서고 있지만 성체가 다가오는 속도에 비하면 금세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뒤따르는 발소리는 다섯 내지 여섯. 자세한 사정까진 몰라도 전쟁 통에 아이 하나를 두고 여럿이 쫓고 있는 상황을 보니 아이는 높은 신분의 자제일 것으로 예상됐다.

 

 가늘게 눈을 뜨고 내려다보니 아이가 가는 방향으로는 두 개의 갈림길이 있었다. 하나는 절벽으로 향하는 쪽이었고 다른 하나는 숨을 곳 없는 너른 벌판 쪽이었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살 길은 둘 중 어느 곳도 없었다. 오랜 꿈을 꾸다 처음 본 광경이 어린 토끼의 비참한 죽음인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을 듯 했다. 아카아시는 갈림길로 향하는 작은 아이를 낚아채 나무 위로 올라앉았다.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음에도 너무 겁을 먹은 탓인지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놀란 숨을 멈췄다.

 

“소리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묘족 아이는 벌벌 떨며 금빛 눈을 굴렸다. 저를 쫓는 괴한과 한패인지 아니면 제 목숨을 지켜줄 구원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아이는 자신의 체력이 다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제 옷깃을 꼭 잡은 힘을 동의로 간주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제가 놓치지 않고 잡고 있을 테니 귀로 눈을 꼭 가리고 계십시오.”

 

 아이와 비슷한 환영 두 개를 만들어 낸 아카아시는 각각의 길로 그것을 보냈다. 그리고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힘껏 도약했다. 기껏 차려입은 옷은 조각조각 찢어져 숲 위로 흩뿌려졌다. 낡은 옷이니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공중으로 솟구친 아카아시는 마을과는 거리가 먼, 오래전 묵었던 보금자리를 향해 구름 속을 헤엄치며 날았다.

 

 마침내 콧속으로 불쾌한 악취들이 들어오지 않을 즈음에야 익숙한 기와집 하나가 눈에 보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싱그러운 풀냄새가 폐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아이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은 아카아시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숨겼다. 집안으로 들어가 옷을 차려입고 나올 때까지 아이는 얌전히 귀를 반으로 접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제 눈을 뜨셔도 좋습니다.”

 

 아카아시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가 손을 내렸다. 귀를 닫으라 시킨 것이 무색했다. 아무래도 묘족의 청각을 얕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붙잡지 않았으면 저 커다란 귀가 나가 떨어졌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아직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지만 힘껏 가슴을 편 아이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제가 지내던 곳입니다. 당신이 살던 곳과는 거리가 머니 아무리 토끼라 하여도 이곳의 소리까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입을 열자마자 하대하는 것을 보아 아이가 귀족의 자제인 것이 확실했다. 아카아시가 누군지 아는 순간 그 어떤 높은 신분이라도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들이 떠올랐지만 그는 그것을 굳이 어린 애에게 뽐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는 너는 누구지?”

 

 당돌한 말투에 아카아시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묘족 아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누군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들어보지 못한 성인데……. 나는 보쿠토 가의 차남 코타로라고 해.”

“아직도 보쿠토가문이 마을을 다스리는가보군요.”

 

 ‘아직도’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지 어린 보쿠토가 귀를 쫑긋거렸다.

 

“우리 마을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하긴, 이 먼 곳에 살고 있으니 그럴 만 해. 우리 마을은 8대 째 보쿠토 가문이 다스리고 있어.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왕이셔. 그치만…….”

“반란이 일어났겠지요.”

“…응.”

“그러면 지금 돌아간다 해도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울 겁니다.”

“아니야! 형이 꼭 찾으러 온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유모랑 같이 도망쳐서…….”

 

 보쿠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상황이 대충 그려졌다.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 보냈다는 말은 이미 왕은 살해되었음을 짐작케 했다. 반란을 일으킨 일당에게 쫓기게 되었고, 유모는 시간을 끌기 위해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냈을 것이다. 뒤쫓던 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유모 또한 이미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마을로 보내도 신분이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고 돌려보내자니 구해준 의미가 없어진다.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다.

 

 아직 밤이 깊었다. 해가 뜨려면 몇 시각은 지나야 하니 놀라고 지친 아이를 쉬게 하는 것이 우선인 듯 했다.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주는 사이 보쿠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기어코 뒤로 넘어가는 몸을 받쳐 깨지 않게 눕힌 아카아시는 여벌로 마련해둔 옷들 중 하나를 꺼내 갈아입혔다. 넉넉히 두 번은 접었지만 팔다리를 곱게 펴주니 손과 발이 겨우 끝만 보였다. 아무래도 괜한 일을 한 것 같았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만 봐드리겠습니다.”

 

 잠든 얼굴에 아카아시가 속삭였다. 아이가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돌봐주면 될 터이다. 토끼가 자라는 것은 금방이다. 아카아시가 겨울잠을 자는 동안 왕이 여섯 번 바뀌었다. 아마 눈 깜짝할 새에 아이는 청년이 될 것이다. 아카아시는 곤히 자는 아이의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닦고 또 닦았다.

 

* * *

 

 무리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종족과는 달리 제 먹을 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쯤부터 독립하는 용족에게 타인의 온기란 익숙지 않았다. 게다가 아카아시는 다른 형제들이 모두 보금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야 느지막이 알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어미는 반드시 알아야할 몇 가지 것들만 가르치고 먼저 둥지를 나섰다. 그 뒤로 세상 밖에 나와 알게 된 모든 것들은 아카아시 혼자 배우고 혼자 했다. 시간만이 그의 친구이자 선생이었다.

 

 정을 주었던 이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쉽게 늙고 병들어 죽었다. 생명의 덧없음을 깨달은 아카아시는 곁에 누구도 두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슬픔은 남겨진 자의 몫이었다. 모든 것이 바람에 스치는 낙엽과 같이 잠시 머물다가는 것처럼 인연도 그러하다 생각했을 때부터 홀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보쿠토는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은 아이였다. 나비를 잡겠다고 온종일 마당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쟁알쟁알 떠들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순식간에 엎어져 잠을 잤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들어 마루에 눕혔다.

 

어느 날 보쿠토가 물었다.

 

“아카아시는 언제 자?”

 

 보쿠토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앉은 아카아시는 초롱초롱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지. 문득 어린 날의 저도 그런 생기 가득한 표정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도 않았고 물어볼 이 하나 없었다.

 

“보쿠토 씨가 잠들면 그 때 잡니다.”

“자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저보다 먼저 주무시니까 그렇지요.”

“그럼 오늘은 같이 자면 안 돼?”

 

 보쿠토가 옆으로 이불을 걷어내고 팔을 뻗었다. 어리광이라 느껴졌지만 아직 부모의 품이 그리울 나이니 너그럽게 받아주기로 했다.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데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제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이리 품에 안고 재웠을까. 아마도 어미가 그랬듯 멀찍이 떨어져 잤을 것이다. 그래도 품안의 온기가 제법 따뜻하고 안락해서 아카아시는 작은 토끼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숨에서는 풀냄새가 났다. 솜털이 가시지 않은 뺨을 어루만지다 잔잔히 어깨를 토닥였고 아이가 걷어차는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조용히 자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아이였다. 어둠이 장막을 걷고 하늘이 푸르스름해졌다. 곧 아이가 깰 시간이다. 아카아시는 조심히 팔을 빼고 식사준비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보쿠토의 체온으로 데워진 옆구리가 뜨끈했다. 문득 돌아보니 자그맸던 아이는 어느새 소년이었다. 언젠가 돌려보내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 * *

 

“이리 공부를 싫어하시니 어찌 왕자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궁에 있던 스승님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그 분도 참 곤란하셨겠습니다.”

“쳇. 글자만 보면 잠이 온단 말이야……. 그냥 안 하면 안 돼?”

“안됩니다.”

“그러면 아카아시가 읽어줘. 그러면 안 졸릴지도 모르잖아.”


 보쿠토가 책을 돌려 아카아시 쪽으로 내밀었다. 하기 싫은 일은 아카아시에게 미루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도 공부는 꼭 시켜야했다. 나중에 마을로 돌려보냈을 때 누구 밑에서 천방지축으로 자랐냐는 말을 듣는다면 용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아카아시는 목을 가다듬고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한 장을 채 읽기도 전에 딴 생각을 하던 보쿠토가 웬일인지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아카아시 목소리 참 좋다.”


 예상치 못한 말에 아카아시는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왜? 더 읽어줘. 하고 보채기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쫑긋거리는 귀가 몹시 거슬렸다. 이런 멋쩍은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아카아시가 책 반 권을 읽을 때까지 보쿠토는 한 번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책을 덮자 공부라곤 치를 떨던 보쿠토가 아쉬운 기색을 비쳤다.

 

 

“다음에도 이렇게 읽어주면 공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소리 내서 직접 읽으셔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치만 나는 아카아시 목소리가 좋은걸…….”

“매 번 이렇게 하면 저도 힘듭니다.”

“그럼 내가 공부할 때마다 상을 줘.”

 

 제가 왜 그래야합니까? 아카아시는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수백 번은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데 상까지 주어야 한다니요.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大)자로 누웠다. 아카아시가 반응이 없자 발로 책상을 밀어내고는 시무룩하게 귀까지 늘어뜨렸다.

 

“저는 드릴만한 게 없습니다.”


 그 말에 보쿠토가 바람같이 몸을 일으켜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카아시에 대해 알고 싶어.”

“저에 대해서요?”

“말 안 해주잖아. 난 궁금한 게 많은데 알려주지도 않고……. 아카아시는 분명 나를 싫어하는 거지?”

“그랬으면 진작 산에 다시 갖다 버렸습니다.”

“너무해. 진짜 너무해.”


 아카아시는 다시 축 늘어진 보쿠토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그러고 보니 보쿠토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은 없었다. 보쿠토가 물어본 것은 대부분 가족에 대한 것들이라 물어봐도 답할 게 없었을 뿐이었다. 공부에 대한 상이 저에 대한 정보라면 아카아시도 딱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십니까?”

“알려줄 거야?”

“오늘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 날에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노력해 볼게. 오늘부터 대답해주는 거지?”

“물어보십시오.”

“아카아시는 어디서 살다 왔어?”

“이곳에 오기 바로 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북쪽에서 왔습니다.”

 

 랑(狼,늑대)족와 웅(熊,곰)족의 터전인 북쪽은 사나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아카아시는 사방이 얼음으로 덮여 눈이 시리게 빛나던 북쪽의 외진 얼음 동굴에서 백여 년을 지냈다. 그곳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꽃들은 피어났고 씨를 뿌리며 유산을 남겼다. 남서쪽으로 내려온 것은 딱히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다. 한 곳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용들의 습성이었다.

 

“거긴 추운데 사슴이 살 수 있어?”

“네?”

“응?”

 

 아무래도 조무래기 토끼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뿔을 올려다보며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보쿠토에게 제가 누군지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용 한 마리가 묘족의 터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은 널리 알려졌다 생각했는데. 아카아시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사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신가봅니다.”

“아닌데. 전에 산에서 본 적 있어.”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였다. 아무래도 다른 공부를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 * *

 

 마당 한편에서 보쿠토가 땀을 뻘뻘 흘리며 활촉을 깎고 있었다. 병아리 눈물만한 집중력을 가졌다 생각했는데 사냥에 있어서는 탁월한 집중력을 가진 보쿠토였다. 활을 가지고 숲에 들어갔다 하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꺾어온 꽃들을 그늘 아래에 널었다. 나무도 제법 잘 타는지 어디서 가져온 새알이나 벌레를 선물이라고 가져 오기에 꽃이 좋다고 둘러댄 뒤부터 보쿠토는 나갈 때마다 꽃을 한 다발 꺾어왔다. 이렇게 말려뒀다가 몸을 씻을 때 물에 띄우거나 갈아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는데 아이는 자꾸만 은혜를 갚으려고 했다.

 

 삼 일은 거뜬하게 쓸 수 있을 만큼의 화살을 만든 뒤에야 보쿠토가 몸을 씻었다. 차갑게 우린 녹차를 건네자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인중 위에 송글송글 맺힌 물기를 엄지로 닦아주었더니 보쿠토가 별안간 얼굴을 붉혔다. 아카아시가 생각하는 보쿠토는 아직 솜털이 보송한 어린 애일뿐인데 보쿠토는 스스로 제법 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흙 위에 나뒹굴고 다녀 더러워진 몸을 씻겨주었던 것이 셀 수 없이 많은데도 어느 순간부터 알몸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또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옷을 걸쳤는지 보쿠토의 목 뒤가 축축해보였다. 이것도 닦아주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아카아시는 마른 수건을 가져와 내밀었다.

 

“강에 갈까요?”

“물고기 먹고 싶어? 낚싯대 챙길까?”

“아니요. 오늘은 강에서 노을 지는 걸 보고 싶어서요.”

 

 너른 강물을 보고 있으면 꼭 저의 삶처럼 느껴졌다. 주변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여러 동물이 목을 축이거나 몸을 씻으러 오고 그 안에선 물고기가 떼를 지어 살지만 모두 스쳐지나가기만 한다. 잠시 머물다가는 작은 생명들을 지켜보기만 하는 강을 볼 때면 강도 외로움을 느낄까 물어보고 싶어졌다. 강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잔잔히 흐를 뿐이었다.

 

 너울거리는 강물 위로 보쿠토가 납작한 돌을 던졌다. 작은 돌은 물 위를 통통 뛰어 가다 퐁당 소리를 내며 빠졌다. 물수제비에 놀란 고기들이 혼비백산 주변으로 흩어졌다. 돌이 발을 딛을 때마다 만들어진 파동이 동그랗게 퍼져나가다 흐르는 물결을 따라 사라졌다. 던질만한 납작한 돌을 고르고 있는데 보쿠토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카아시! 나도 빨리 뛰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네?”

“아니, 봐봐. 이렇게 세게 스치듯이 던지면 돌도 물 위를 뛰잖아. 나도 이렇게 빨리 뛰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카아시가 말릴 새도 없이 보쿠토가 바지를 걷어붙이고 텀벙 뛰어들었다. 토끼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소금쟁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물 위를 걸을 수 없을 것이다. 허리 아래로 푹 잠긴 보쿠토가 다시 뒤로 물러나더니 힘차게 뛰어들었다. 커다란 몸이 뛰어들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아카아시가 서있는 곳까지 물이 튀겼다. 여름이라곤 하지만 해가 질 무렵엔 물이 찰 텐데 보쿠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얼굴에 튄 물을 소매로 닦으며 멀찍이 물러났다.

 

 물에 쫄딱 젖은 옷이 무거울 법도 한데 보쿠토는 지치지도 않았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이대로 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물이 찹니다. 이만 돌아가요. 감기 걸립니다.”

“아니야. 나 방금 살짝 물에 뜬 것 같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니깐!”

“무슨 헛소리를 하십니까. 물에 고꾸라지는 거 다 봤습니다.”

“그전에 살짝 뜬 거 못 봤어?”

“네.”


 멋쩍은지 헤헤 웃은 보쿠토가 다시 힘껏 뛰었다. 강에서 날밤을 샐 기세였다. 보쿠토는 한 번 시작하면 성에 찰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근성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헛짓거리를 많이 했다. 아무래도 도움을 주어야할 것 같다.

 

 아카아시는 물기 없는 곳에 옷을 벗어두고 원래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아카아시가 길게 숨을 내쉬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흔들었다. 갑자기 부는 바람에 고개를 돌린 보쿠토가 눈을 크게 떴다. 아카아시가 용이라는 걸 안 뒤부터 수시로 원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졸랐지만 못 들은 체 했었다. 보쿠토가 물을 털어내며 아카아시에게 뛰어왔다.

 

“아카아시!”

“타십시오.”

“응?”

“물 위를 걷고 싶으시다면 서요. 빨리 걷고 얼른 집에 가서 쉽시다.”

 

 올라타기 쉽게 웅크리자 보쿠토가 펄쩍 등위에 올라탔다. 보쿠토가 목을 단단히 끌어안자 아카아시는 강 위를 천천히 날았다. 이렇게 낮게 날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배가 물 위로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뒤에 매달린 보쿠토가 신이 났는지 우와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발톱으로 물 위를 톡톡 스치자 정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쿠토가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보쿠토와 있으면 바보 같은 짓에 자주 휘말렸다. 혼자 있었다면 평생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게 됐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유치하고 실없다고 생각해도 같이 하고 나면 웃음이 났다. 그렇게 달이 중천에 뜰 때까지 아카아시와 보쿠토는 물 위를 걸었다.

 


* * *

 

 유난히 바람이 거세게 부는 가을밤이었다. 심상치 않은 날씨에 산짐승들도 바람 들지 않는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한 여린 나뭇잎들은 손을 놓치고 휩쓸려 날아갔다. 문틀을 거세게 흔드는 소리에도 보쿠토는 곤히 자고 있었다. 잠버릇이 험한 탓에 이불은 치워두고 또 맨바닥에서 웅크리고 자는 보쿠토의 몸 위로 묵직한 솜이불을 덮어주었다.

 

 겨울에 보내면 얼어붙은 산길을 헤매다 얼어 죽을까봐 여름에 보내면 뙤약볕에 지쳐 쓰러질까봐 걱정돼 가장 춥고 가장 더운 계절은 피해서 보내자 마음먹었다. 봄에는 산과 들에 피어난 꽃과 겨울잠에서 깨어난 작은 동물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가을엔 나무마다 열린 열매들을 모으고 겨울을 지낼 땔감을 비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보면 한 해가 지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시간 가는 것에 둔했다. 문득 보니 보쿠토는 혼자서 수십 그루의 나무를 해오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힘만 셌다 뿐이지 스스로 거친 삶을 살아가기에 여리고 부족해 보였다. 옆에서 챙겨주다 보면 평생 어른이 되는 법이라곤 깨우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서로에게 꽤나 익숙해져있었다. 이렇게 계속 같이 사는 것도 제법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다가도 금세 나이가 들어 죽을 것을 떠올리면 얼른 돌려보내는 게 서로를 위해 나은 길이라는 판단이 섰다. 제 손으로 키워낸 생명이 죽는 슬픔은 회복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게 뻔했다.

 

 게다가 묘족의 터전에는 아직 전쟁의 불씨가 남아있었다. 원로들이 은밀히 사병을 모은다는 소문이 퍼졌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마음 깊이 뿌리를 내렸다. 거리는 삭막했고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9대 보쿠토가 마을을 다스렸지만 전에 있던 반란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힘없는 왕을 진심으로 모시는 이는 얼마 없었다. 강인한 육체만을 섬겼던 자들에게 그는 팔푼이에 불과했다. 이대로 두면 전쟁은 시간문제였다. 마음만 먹으면 왕좌에 오를 수 있다는 헛된 욕심에 원로들은 파를 나누어 역모를 작당하고 있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의 땅에 힘없고 죄 없는 백성들의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지도 모른다.

 

 가장 탐나는 자리는 가장 강한 자가 지켜야만 했다. 왕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위치라는 것을 권력에 눈이 먼 원로들에게 확인시켜줘야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마침내 코타로를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카아시는 차일피일 미루던 현실과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이불 아래에는 장성한 청년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 자랐어도 언제까지고 아이로 느껴질 것만 같았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걸까. 뭔지 모를 착잡한 심정에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 * *

 

 욕탕에 수건을 가져다 두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그대로 두면 물에 젖은 몸 위로 옷을 걸치고 돌아다녀 사방에 물을 흘려놓을 것이 뻔했다. 덜 닫힌 욕실 문틈 사이로 하얀 김과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욕조 안에 몸을 담근 보쿠토가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는 꽃잎을 잔뜩 띄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은 욕탕 가득 금목서 향이 떠다니고 있었다.

 

“수건 여기 둘 테니 물기 꼭 닦고 들어오십시오.”

“아카아시, 들어올래?”

 

 보쿠토가 지금보다 한 자(尺) 이상 작았을 무렵에나 같이 목욕을 했다. 흙바닥에 뒹굴어 꼬질 거리는 몸을 물에 담그고 씻기다보면 어느새 보쿠토는 욕조에 기대 꾸벅꾸벅 졸곤 했다. 보쿠토가 바구니 속에 담긴 꽃잎을 한 주먹 가득 목욕물 위로 뿌렸다. 어서 들어오라고 채근하는 손짓에 아카아시는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는 보쿠토를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떠나버릴까 아니면 자는 사이에 마을 앞에 가져다둘까 고민하기도 했다. 보쿠토라면 마을에 눌러앉기는커녕 산속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닐게 훤했다. 그러고도 충분할 성격이다. 오목하게 손을 모아 몸에 물을 끼얹자 보쿠토가 싱긋 웃으며 젖은 몸 위로 꽃잎을 붙였다.

 

“장난치지 마십시오.”

“왜~ 등 밀어줄까?”


 보쿠토의 등을 밀어준 적은 있어도 보쿠토가 등을 밀어준 적은 없었다. 가만히 등을 돌리자 보쿠토가 물에 적신 천으로 등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차라리 등을 돌리고 말을 하는 것이 편하겠다 싶었다.

 

“어릴 때 새를 키웠던 거 기억나십니까?”

“응. 기억나지. 아카아시가 엄청 싫어했잖아.”

“그야 잘 돌볼 거라 약속하셔놓곤 제가 다 키우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나도 벌레 잡아오고 그랬잖아.”

 

 나무에서 떨어져 둥지에 오르지 못하는 새를 보쿠토가 주워온 적이 있었다.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주고 작은 벌레를 먹어가며 키웠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스스로 나는 법까지 가르치고 숲으로 돌려보낸 새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보쿠토는 비슷한 새만 봤다하면 그 새일까 목을 빼고 살폈다. 어디선가 짝을 만나 잘 살고 있을 거라 말해주니 그제야 안심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다. 아카아시에게는 보쿠토가 그 새와 같았다. 잠시 돌봐주었지만 언젠가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존재였다.

 

“보쿠토씨도 이제 마을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 좋아.”


 며칠을 앓다 말한 것이 무색하게 쉬운 대답이었다. 불쑥 고개를 돌리자 눈을 마주친 보쿠토가 실실 웃는다.

 

“아카아시도 우리 마을을 좋아하게 될 거야.”

 

 보쿠토는 헤어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카아시가 눈썹을 찡그렸다. 생각했던 말을 모두 잊어버리게 하는 순진무구한 눈이었다.


“저는 가지 않습니다.”

“왜? 아카아시도 같이 가자!”

“저는 묘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카아시는 내가 귀찮은 거지? 그래서 내쫓으려고 하는 거지?”


 보쿠토가 서운한 듯 툴툴대며 콧김을 내뿜는다. 아카아시는 몸을 돌려 고쳐 앉고 단호하게 말했다.

 

“보쿠토 씨가 왕이 되어야 합니다. 곧 마을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뭐?”

“형님께선 그 때 전쟁으로 다리를 잃었고 허울뿐인 왕입니다. 원로들은 서로 왕이 되고자 전쟁을 일으킬 생각밖에 하지 않는데 여기서 혼자 평화롭게 사실 생각이십니까?”


 금세 심각해진 표정의 보쿠토가 뜨거운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지금 왕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가서 왕위를 물려받고 마을을 안정시키셔야 합니다. 형님께서도 당신을 찾고 있는데 모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꼭 나여야만 하는 거야? 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그렇게 믿다가는 마을이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돌아갈 곳이 어딘가에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자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두 손으로 보쿠토의 뺨을 붙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다리를 가진 묘족의 사람 아니십니까. 분명 하실 수 있습니다.”

“같이 가준다고 해줘.”

“데려다 드릴 순 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저는 묘족이 아닙니다. 다른 부족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됩니다. 질서를 흩트리는 일이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아카아시가 없으면 안 돼. 끼어들지 않고 그냥 옆에만 있으면 되잖아. 거기서도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우리 부족 사람들도 아카아시를 좋아할 거라고.”


 아카아시가 엄한 표정으로 물러나 앉았다. 보쿠토도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떼써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말하면 다 떼쓰는 거야?”

 

 보쿠토가 버럭 화를 냈다. 갑작스레 터진 큰 소리에 입을 다물자 귀를 축 늘어뜨린 보쿠토가 손을 잡아온다.

 

“나는 아카아시랑 같이 있고 싶어.”

“…안된다고 분명 말했습니다.”

“아카아시를 사랑하고 있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생각이 멈췄다.

 

“사랑하니까 함께하고 싶은 건데 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투박하지만 절절한 고백이었다. 보쿠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보쿠토를 얕잡아 봤을 수도 있다. 그저 제가 말을 하면 그대로 따라야한다는 오만한 사고방식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보쿠토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보쿠토가 갑작스런 고백에 얼어붙은 아카아시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센지 붙잡힌 팔이 얼얼했다.

 

“저는 용입니다. 다른 마을에 간섭했다간 질서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을 구했고……. 그건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구한 게 실수라고?”

“글쎄요. 실수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바로 잡기 위해선 당신을 돌려보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마을이 사라지게 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구했기 때문에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말을 할수록 붙잡힌 팔이 억죄어왔다. 뼈마디가 하얗게 될 때까지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보쿠토가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쏘아붙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아카아시는 불안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적을 견디지 못한 아카아시가 팔을 뿌리쳤다. 이만 잠자리를 정리해야겠다며 먼저 탕에서 나오자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런 대답은 아카아시의 예상 답안에 없었다.

 

 손아귀에 붙잡혔던 팔부터 시작해 전신에 이상야릇한 기운이 퍼졌다. 가슴이 얼얼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몸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부끄러워져 물기를 충분히 닦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옷을 걸치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왔다.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이미 정리된 이부자리를 매만져도 방망이질치는 심장이 도통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숨까지 가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목욕을 끝냈을 법도 한데 보쿠토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봐야 하나 고민하는 차에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 급히 자리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한 표정을 짓는 것이 곤욕스러웠다. 보쿠토는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잘 자라는 인사도 무시하고 이불 위에 몸을 누였다. 철저히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태도였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아카아시는 물끄러미 누운 등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워있던 보쿠토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지 이불을 걷어내고 아카아시에게 말을 걸었다.

 

“이리 와서 누워. 거기 앉아있지 말고.”

 

 어릴 때 빼고는 같이 누운 적이 없었다. 보쿠토도 아카아시가 잠을 자지 않는 다는 것을 안 뒤로부턴 곁에서 잠자리를 지키도록 내버려뒀었다. 같이 눕자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보쿠토가 성큼 다가와 아카아시를 번쩍 안아들었다.

 

“지금 뭐하시는…!”

“그냥 같이 눕고 싶은데 그것도 안 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보쿠토는 괜찮다는 말에도 하나밖에 없는 베개를 아카아시에게 양보했다. 같이 누워있는 것이 숨 막히게 어색했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이불을 타고 전해질 것만 같았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신경 쓰고 있는데 불쑥 말을 거는 보쿠토였다.

 

“화내서 미안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긴장이 풀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제가 기분 상할 말을 했습니다.”

“그치만 떼쓰는 거 아니야. 아카아시랑 평생 함께하고 싶어.”

 

 그렇게 살다가 저 혼자 남겨지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울컥 떠오르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영원한 이별이 주는 슬픔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슬픔도 깊을 것이 분명했다. 입을 떼려 하자 보쿠토가 급히 말을 막았다.

 

“대답 하지 마. 나는 거절당할 거 알고 말한 거야. 아카아시는 겁이 너무 많아.”

 

 그렇다. 아카아시는 겁이 많았다. 고요한 호수 위로 돌 하나가 갑자기 떨어진 듯 했다. 잔잔한 물결이 거칠게 출렁였다. 둘은 말없이 누워있었고 보쿠토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나도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넘실대는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아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이제 그만 하자고 되뇌었다. 이건 욕심일 뿐이라고 스쳐가는 것을 붙잡으려 해선 안 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했다.

 

 

* * *

 

 며칠이 지났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딱히 일상이 변하지는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던 중 먼저 그 일을 끄집어 낸 건 보쿠토였다. 밥을 먹다 말고 결심이 섰는지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보쿠토가 가져갈 짐이라곤 겨우 어릴 때 입었던 옷 하나 밖에 없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등에 태우고 산을 넘었다. 이제 산 하나만 더 지나면 마을이 코앞이다. 아카아시는 이만 땅으로 내려섰다.

 

“내가 왕이 되더라도 금방 다시 돌아올 거야. 집에 있을 거지?”

 

 내려온 보쿠토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보쿠토가 마을에 자리를 잡고나면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말해줘야 하는데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서 가세요.”

“내가 왕이 되려는 이유는 아카아시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마을이 정리되고 나면 다시 돌아올 거야.”


 문득 내게도 가족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를 나누고 함께 생활하는 무리만이 가족이라고 희미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린 이미 가족이야.”

 

 가방을 고쳐 맨 보쿠토가 언제 심각했냐는 듯 씨익 웃어보였다. 보쿠토는 실없는 소리는 했어도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떨어져 살면 가족이 될 수 없지 않나요?”

“한 번 가족이면 영원한 가족이지.”

“저는 가족 같은 거 가져본 적 없습니다.”

“내가 가족이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동안 그런 섭섭한 생각 했었던 거야?”

 

 아카아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가족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카아시가 내 반려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그럼 누구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겠지.”


 굳은 결심이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야. 아카아시는 생각이 많으니까 오래오래 고민하겠지. 그러다보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도 못하고 때를 놓칠 수도 있어. 천년을 살든 하루를 살든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이야. 마음이 원하는 걸 하자.”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한 번 안아 봐도 돼?”

“네?”

“이것도 생각해 볼 거야?”

 

 보쿠토가 팔을 뻗었다. 어서 이리 안기라는 몸짓이었다. 아카아시는 못이기는 척 목을 쭉 빼고 품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보쿠토가 몸을 떼어냈을 땐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울컥했다.

 

 어린 생명을 함부로 거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가지고 있어선 안됐는데……. 떠나보내려니 후회만 가득했다. 무사히 잘 있으라며 손을 흔든 보쿠토가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는 걸어가는 보쿠토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 아카아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 돌아온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없는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언제든 보쿠토가 돌아올 것만 같았다. 설령 그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그를 기다릴 것임을 예감했다. 보쿠토가 죽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이 떠나고 나서야 사랑을 깨달았다. 반려가 되어달라는 그 마음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그 말을 곱씹으며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빨리 흐르던 시간이 선명하고 느릿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기분은 절망스러웠지만 끔찍하게 황홀했다.

 

* * *

 

 마을로 돌아간 보쿠토 코타로는 무리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건강했던 형님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원로들은 갑자기 나타난 왕자를 경계했다. 눈이 부시게 화려한 옷을 걸치고 매끼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많은 음식을 대접 받았어도 기쁘지 않았다. 이곳이 원래 제 집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형님은 서둘러 왕좌를 넘겨주고자 했다. 사방에서 풍기는 질투의 냄새는 소름끼치도록 역겨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도 약속한 것이 있으니 참아야 했다.

 

 원로들은 보쿠토 코타로가 왕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회의에 불러다 세워놓고 왕이 될 재목인지 진이 빠질 정도로 한참을 토론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북쪽에서 온 용과 함께 지냈다 하니 비웃음만 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용이 실제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보쿠토를 시험했다. 두뇌와 신체를 평가하는 시험을 몇 번이고 통과했지만 트집 잡기 일쑤였다.

 

 마침내 원로들은 보쿠토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 용에게 가르침을 받은 증거를 가져오라 한 것이다. 충분히 시험을 치르지 않았느냐 주장했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고 떠들어댔다. 사실은 그가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이 아니냐며 모함하기에 이르자 보쿠토는 말도 안 되는 시험을 승낙했다. 원로들은 그가 ‘역린’을 가져온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보쿠토는 다시 길을 떠났다. 며칠에 걸쳐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을 즈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때 밤이 깊도록 아카아시 등에 타 날았던 강이 보였다. 그 날처럼 강 위로 둥그런 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보쿠토는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자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왕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이렇게 돌아온 자신을 아카아시가 반겨줄지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역린이 무엇인지 보쿠토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 아카아시에게 물었던 적이 있지만 웃음으로 대답을 피할 뿐이었다. 그냥 다 때려 치고 싶다고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카아시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벌써 왕이 되신 겁니까.”


 반가운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뒤를 보니 말간 얼굴의 아카아시가 있었다.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한껏 센 척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아카아시는 조용히 다가와 곁에 섰다.

 

“적응하기가 많이 힘드셨나봅니다.”

“아무도 내가 왕이 되는 걸 반기지 않는 것 같아.”

 

 아카아시는 시무룩한 보쿠토를 자리에 앉혔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느끼실 겁니다. 그건 왕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모두 나를 미워해.”


 시무룩한 보쿠토를 아카아시가 안쓰러운 미소로 쳐다봤다. 근처엔 토끼풀이 가득 자라있었다. 보쿠토는 토끼풀을 뜯어 모아 꽃다발을 만들고 아카아시에게 건넸다. 꽃을 보면 따다주던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카아시는 손에 꽃다발을 쥐고 옆에 붙어 앉았다.

 

“그들이 역린을 가져오라 하던가요.”


 아카아시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역린은 용의 턱 아래 거꾸로 난 비늘을 뜻하지요. 함부로 건드렸다간 용의 분노를 살 뿐입니다. 그들은 아마 당신이 죽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그런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참으로 바보 같은 자들입니다. 역린은 몸에 거꾸로 나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법. 역린을 가져간다 한들 이것이 처음부터 거꾸로 난 비늘인지 아닌지 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보쿠토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카아시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것이 귀한 것임을 알며 함부로 구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게 뭔데?”

“여의주입니다.”

“아카아시도 가지고 있어?”

“물론입니다.”

 

 놀란 것도 잠시 보쿠토가 걱정스런 눈을 했다. 소중한 것이라 했는데 쉽게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여의주는 용이 가진 신통한 힘의 원천이라 불립니다. 그래서 노리는 자가 아주 많지만 천리안을 가진 용이 그들을 만나줄 리가 없지요.”

“…….”

“제 여의주를 드리겠습니다. 가져가시면 당신이 왕이 될 재목이라는 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겁니다.”

“그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주 오래 살기 때문에 다시 만들면 됩니다.”

“아무튼 엄청 소중한 거잖아.”


 아카아시가 허벅지 위에 놓인 보쿠토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제게 당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꽃에 대한 보답입니다.”

“꽃이야 얼마든지 따다 줄 수 있지만 여의주는 그런 게 아니잖아.”

 

 걱정이 먼저 앞섰다.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제게 꽃을 주신 건 당신뿐이었습니다. 들판에 널린 게 꽃이라지만 제게 꽃을 좋아하냐 물어봐준 것도 당신뿐이었습니다. 같이 평생을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입니다. 하물며 작은 새조차 짝을 찾아 어울리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게 주어진 선물일지도 모르죠.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고 싶은 건 당연한 겁니다.”

“겨우 꽃다발일 뿐이잖아…….”

 

 왈칵 목이 메었다. 어느새 눈물도 그렁그렁 맺혔다. 못 본 사이에 아카아시가 달라져있었다. 아카아시가 어깨에 기대오자 가득 고였던 눈물이 땅에 떨어진다.

 

“겨우 꽃다발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게 그것은 당신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니 저도 제 일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못 받겠어. 그냥 여기 있을래…….”

“왕이 되어 돌아오면 반려가 되어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반려가 되려면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야지요.”

 

 보쿠토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아카아시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드는 불경한 생각을 아카아시가 알면 추접스럽다 욕할 것만 같아 홀로 삭였던 날들이 많았다. 세차게 뛰는 심장에 몸은 물론이거니와 혀까지 뜨거워졌다. 아카아시의 뒷목과 허리를 감싸 안고 입술 안으로 파고들자 부드러운 혀가 보쿠토를 반겼다. 번개를 맞은 듯 짜릿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귀가 멍하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혀를 옭아맸다 입술로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서로의 입술을 입술로 물다가 입천장을 살살 긁어주니 아카아시의 목 깊은 곳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애써 감춰왔던 욕망을 터트리고 나니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혀를 섞을수록 더욱 갈증이 났다. 어느새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눕히고 목과 귀까지 입술로 탐하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점점 아래로 가는 얼굴을 붙잡아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카아시가 적극적으로 혀를 섞어왔다. 아카아시의 혀를 잡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하는데 입 안으로 딱딱한 구슬이 불쑥 들어왔다. 불청객에 놀란 보쿠토가 뱉으려 하자 아카아시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는다.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입에 구슬을 물고 있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한참 모자랐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건 보쿠토뿐만이 아니었다.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보쿠토가 고개를 저으며 눈으로 말했지만 아카아시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몸을 일으켜 앉아 옷매무새를 정리한 아카아시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모습에 따라서 눈을 드니 하늘에 꽉 찬 달이 휘영청 떠있었다.

 

“만월입니다. 잡귀가 판을 치는 시기지요. 탐내는 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안전한 곳에 가기 전까지 입을 꼭 다무셔야할 겁니다.”

“우웅…….”

“입을 다물라 했습니다.”

 

 아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딱딱한 얼굴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귀를 늘어뜨렸지만 아카아시가 못 본 척 먼저 일어나 섰다. 보쿠토도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자 아카아시가 등을 떠민다.

 

“누가 쫓아와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을 향해 달리셔야 합니다. 보쿠토 씨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다리를 가지신 분이니 분명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벌써 보내려고 하니 서운하기만 했다.

 

“다시 올 때는 꼭 왕이 되어있을 거라 믿겠습니다.”


 숲을 향해 걸어가며 계속 뒤를 돌아보자 이제 그만 돌아보라는 듯 아카아시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입을 맞추고 싶다면 한시라도 빨리 왕이 되어야 했다. 보쿠토는 힘차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두웠던 하늘이 푸르게 변해있었다. 이슬 맺힌 풀숲을 헤치고 다닌 몸이 축축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여의주를 주고도 아카아시가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안 좋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여의주를 가지면 직감도 발달하는 듯 했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보쿠토는 숨을 헐떡였다. 아카아시가 제대로 집에 들어갔는지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여태까지 달려온 것보다 더 빠르게 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강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욱 세게 요동쳤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마침내 강에 도착했을 때 아까 있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용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고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감고 있던 아카아시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왜 벌써 오셨습니까…….”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여의주를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보쿠토는 입안에 든 것을 뱉어 아카아시 앞에 내려놨다. 영롱하게 빛났던 비늘들이 죽은 손톱처럼 까맣게 변해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얼른 다시… 돌아가십시오.”


 아카아시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다시 만들면 된다고 했던 것은 보쿠토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보쿠토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냐고 그깟 왕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울며 물어도 아카아시는 둔하게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아카아시의 커다랗고 푸른 눈에도 눈물이 그득 고였다. 얼굴 위로 여의주를 가져다 대자 아카아시는 필요 없다는 듯 밀어냈다. 목이 메여 쉽게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카아시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스스로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한들 제 마음을 깨달은 걸로도 기쁠 따름 입니다…….”

“안 돼… 그런 말 하지 마. 흐윽, 안 돼… 여기 있을 거라 했잖아. 응? 제발… 이거 다시 받아…….”


 터져 나오는 울음에 말을 잇지 못하고 보쿠토가 꺽꺽거렸다. 벙긋거리는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차마 듣기 어려운 듯 아카아시가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 아래로 물줄기가 이어졌다. 이미 꺼낸 여의주를 다시 삼킨다고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속삭이는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배어나왔다.

 

“너 없이… 흐흑, 나 혼자 어떻게 살아…!”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고… 그렇게 믿으면… 그리워도 참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많이 울었던 것도 희미해져 쥐어짜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그런 날이 온답니다.”

“어떻게 그래! 나는 못 하겠어……. 못 해 아카아시, 흑.”

 

 보쿠토가 받아들일 수 없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부디 행복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것이 사랑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마음 깊이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안 돼… 아카아시!”

 

 제발 죽지 말라고 절규해도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다시 태울 수는 없었다. 퍼석하게 말라비틀어진 비늘이 몸에서 툭툭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보쿠토가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떨어진 비늘을 제자리에 붙여보지만 손을 놓는 순간 죽은 비늘은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았다. 꺼져가는 생명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아카아시는 어쩔 줄 모르고 우는 보쿠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주 오랜 잠을 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쿠토가 죽은 비늘을 붙잡고 애쓰는 동안 아카아시가 영혼이 담긴 마지막 긴 숨을 내쉬었다. 은은하고 푸른 기운을 내던 눈동자도 탁해졌다. 시선은 보쿠토를 향해 있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는 어느 곳도 보고 있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힘없이 늘어졌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듣고 있어? 잠들면 안 돼… 일어나봐아- 응? 일어나아-”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아카아시는 미동하나 없다. 감지 못한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철렁 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아시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세상의 모든 짐을 육신에 내려놓고 안식처로 향한 것이다. 보쿠토가 악을 써도 대답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옷이 다 더러워졌다며 흙을 털어줄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 손에는 여전히 토끼풀 꽃다발이 쥐어져있었다. 처절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찬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몸을 파들파들 떨렸다.

 

 보쿠토는 여의주를 품에 넣고 죽은 연인에게 몸을 기댔다. 불을 삼킨 것 마냥 가슴 속이 뜨거웠다. 눈에서는 녹아내린 심장에서 뿜어내는 피가 흘렀다. 넘치는 슬픔을 막을 길이 없어 가슴을 쥐 뜯으며 꺽꺽댈 뿐이었다. 격한 울음에 숨이 차 헐떡였다.

 

 아카아시는 울며 떼쓸 때마다 울어도 소용없다며 엄하게 다그쳤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카아시는 훌쩍이는 보쿠토를 품에 안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었다.

 

 울어도 소용없는 거 아는데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 가르쳐줘, 아카아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 그렇게 물어도 아카아시는 대답하지 않는다. 우는 보쿠토의 등을 끌어 안아주는 손길도 없었다. 세상의 끝이 바로 이 곳이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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