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장 따님 카후 치노 선배를 비롯한 아르바이트 전력이 여행을 떠난 늦겨울. 어쩌다 그 2주 간 대타로 일하게 된 이곳, ‘래빗 하우스’는 생각 외로 바빴다. 특정 시간대에 막 몰리는 편은 아니지만―물론 점심∙저녁 시간대에 손님 수가 많이 늘어나기는 해도― 적은 손님이라도 매시간 꾸준히 자리를 채우기 때문에, 숨을 돌리는 여유의 빈도는 많아도 그 길이가 길진 않다. 아무래도 주 수요층이 주부나 프리랜서인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런 일종의 아트-프로페셔널들의 아지트로서 기능하게 될 수밖에 없을 만큼 ‘래빗 하우스’는 정말 매력적이다. 아늑하고 고풍스러우면서 젊은 생기까지 보유하게 된 데에는 인테리어나 입지와 같은 단순 요인 이상의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한쪽 벽면에 여러 장의 그림과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는 걸 보았다. 동심을 자극하는 파스텔화와 극사실적인 데생, 그리고 큐비즘에 입각한 실험적인 작품까지 한 군데 어우러진 데에서 그 센스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장의 선곡 센스 역시 그렇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책장에 꽂힌 수많은 레코드판. 그 대부분이 실제 매장에서 BGM으로 트는 재즈 레코드다. 주인장 아버지 대부터 모은 레코드라고 한다. 그 방대한 축적양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딱 잡아 말하기 힘든 힙스터적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나름대로 음악을 좋아해서 이 마을에 온 유학생으로서, 그 중 아는 레코드가 기껏 해봐야 《Kind of Blue》 같은 쿨 재즈 명반에 〈The Girl from Ipanema〉로 유명한 오렌지 색깔 그림이 감각적으로 배치된 최근에 고인이 된 후안 질베르토의 대표작 《Getz / Gilberto》 앨범 정도였다. 그래도 내 시프트에 선곡권을 일임해 주셔서, 이틀째부터는 평소에 궁금해했던 앨범들이나 커버가 신기한 앨범들을 이것저것 갈아 끼워 틀었다. 그 대부분은 귀에 안 익고 흘러갔는데, 사실 그게 카페 BGM으로서 적합하겠다. 완전 순수 배경음악으로서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앨범을 틀어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그건 말 그대로 너무 텅 비었다.

일한 지 3일차에 이 마을이 자랑하는 작가, 아오야마 블루마운틴 씨가 방문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정말 그녀의 정신은 뜬구름 위에서 노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나는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지만―좀더 정확히는,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저명한 창작자를 직접 목격하는 흥분은 주관이 내린 평가고 뭐고를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그래도 일하는 중이니까 섣불리 말 걸지 말아야지 하고 있는데, “못 보던 얼굴이네요~”하고, 어느새 카운터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티피 씨는 안 계시나보네요?”

“아마 여행에 따라 나가신 것 같아요.”

음식 업종에 동물을 들여도 되나 싶지만 아무튼 이곳의 마스코트 티피 씨. 분명 단순 암컷 뚱뚱한 토끼일 뿐인데, 둘 다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대상 경어체를 쓰게 도니다. 왜지.

“일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아요?”

앞으로 이 사람 팬이다.

“주방에 메뉴별로 만드는 법이 다 붙어 있어서요.”

“역시 치노 양은 언니를 내버려 둘 수가 없나보군요.”

웬 동문서답인가 싶다가, 호토 씨를 가리키는 것임을 몇 초 뒤에야 알아챘다.


원하던 학교에 어찌저찌 합격해 이 마을에 온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도 혼자서 여유를 가지고 싶을 때 여기를 단골로 찾았다. 같은 학교의 마야 선배와 메구미 선배가 여기 단골이었고, 주인장 따님이신 카후 치노 씨와도 친한 듯했다. 2주간 임시 알바가 필요하다는 말도 마야 선배를 통해 들었다. 키 차이 때문에 잘 닿지도 않는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렇게 됐으니까, 잘 부탁한다?”고 윙크 찡긋 날리고 금세 다른 어딘가로 튀어가는 마야 선배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아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온 열심을 다해 완수해야 한다. 아무튼 그런 부탁도 있었고, 애초에 많이 신세 지던 곳인지라, 그곳에 뭔가 보탬이라든지, 족적이라든지, 아무튼 뭔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적잖이 있었다.

물론 그런 소명은 식기 마련이고, 손님도 주인장도 없는 텅 빈 카페에서 나는 오넷 콜맨 리드 레코드에 당혹감을 느낄 뿐이었다. 솔직히 재즈에 지쳐갈 즈음이었다. 스포티파이로 푸샤 티의 새 앨범을 틀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심신의 안정을 추구해 찾아오신 손님이 그 정도까지 공격적인 플레이리스트를 허락할 것 같진 않다. 예전에 다른 카페에서 앤더슨 팩의 〈Celebration〉이 나온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딱히 팩의 대표곡도 아닌 걸 감안하면 점장이나 직원이 정말 훌륭한 디거라는 생각을 했다.

콜맨이 뒤죽박죽이 된 리듬 안에서 음계를 휘적거리는 사이, 나는 이를 대체할 음반을 찾으려 LP 콜렉션 선반으로 갔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웬 새하얗고 늘씬한 토끼 한 마리가 선반 위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것 아닌가.

음식 업종에서 길토끼를 들여보낸 것은 분명한 문제이므로 어서 내보내야 하지만, ‘래빗 하우스’라는 상호 때문인지 섣불리 그러기가 쉽지 않다. 아니, 그보다도 그 토끼 스스로가 마치 ‘음식 업종’ 규칙 따위에 얽매일 것 같지 않은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 인간-동물의 기성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영롱한 눈빛. 그 발치 아래는 지금껏 찾지 못했던 카세트 테이프 한 장이 있었다. 녹음일자로 보이는 숫자가 동글동글하게 마카로 적혀 있었다.

내가 어느새 테이프를 틀었던가.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음질 클리핑 소리도 거기서 들려오는 생동감을 막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그 상황 안에 존재했다.


연주석과 관객석에는 익숙한 듯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주인장을 비롯해 바 타임의 단골 군인이 악기를 들고 있었고, 주인장 따님과 매우 닮아 보이는 푸른 머리칼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학교 제복을 입은 아오야마 작가도 관객석에서 눈에 띄었다.

분위기는 어딘가 어수선했다. 보아하니 피아노 세션 하나가 빠진 듯했다. 두리번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무턱대고 손을 들어 피아노 세션에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당황할 줄 알았던 혹은 완만히 거절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다르게 그들은 적극 환영했다. 보컬리스트가 자기 쪽으로 손짓했다. 어정쩡하게 걸어 나가 다시금 관객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찰나, 그녀가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다란 천을 들고 나를 가렸다. 그러고서 짐살라비즈미즈미즈미즈므락깔라빔! 하고 주문을 외는 새 몸에 무언가 술수가 가해지더니, 천이 내려가자 환호성이 압도했다. 연미복으로 유니폼이 바뀌고, 그걸 반짝이며 바라보는 눈 중에는 내 어릴 적 앨범의 주인공도 있었다.

그때 그 전율. 그것은 일정 리듬과 블루스 노트의 약속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순간에 찾아오는 게 아닌가 짐작한다. 어쨌거나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고, 그 제약 속에서 자유로운 미를 추구해 나가는 거였구나. 어릴 적 ‘이’ 연주를 보고 꿈을 가졌고, 이에 향하는 과정에서 마법은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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