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날 밤 여우는 꿈을 꿨다. 해준과 자신은 햇살 좋은 어느 오후, 나란히 손을 잡고 담장 아래를 걸었다. 뉘 집인지 모를 아흔아홉 칸의 기와집 담벼락에는 황홍색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있었다. 그의 발걸음에 자신의 발을 맞추면, 그가 웃으며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한낮인데도 까만 그의 눈동자에 별빛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우는 깨달았다. 사랑이구나. 이것의 이름이 사랑이었구나.


눈을 뜨자 여전히 좁고 어두운 방 한가운데 여우는 누워있었다. 싸늘한 기운에 몸을 돌려 앉는데, 그곳에 얌전히 잠들어 있어야 할 해준이 보이지 않았다. 버선발로 온 집안을 다 뒤지는 여우의 귓가에 어느 순간, 바람에 실린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기가 빠져나간 여우가 뛰기 시작했다. 노랫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숲으로 가는 그 길목이,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공자를……. 좋아하니까요.'


'차라리! 창귀가 되게 두지 그랬어!'


'그토록 선계에 가고 싶습니까.'


"이녁."


달리는 여우의 입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가 흘러나왔다. 혼잣말은 서서히 외침으로 변하더니 온 숲에 절규와 같은 이름이 크게 메아리쳤다.


"이녁!"





‘나는 이녁이 바라는 감정은 줄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족족 비수가 되어 제 가슴을 난도질하던 사내였다. 아흔아홉 명의 객에게 빚을 졌음에도 끝끝내 인간이 될 수는 없는 요물이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 미소에, 금빛 시선에, 눈부심에 홀려서는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줘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이었다며 자신을 위안하던 열다섯의 자신이 한심해, 해준은 꼬박 3년 동안 착실하게 스스로를 죽여가며 겨우 목숨만 연명한 상태였다.


그런 괴물 따위에게 마음의 한켠을 내어준 탓에, 어머니가 참변을 당하다니. 그 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물을 주지 않았더라면.


‘이녁. 괜찮다면 혹시 물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기억 속의 그는 여전히 찬란하고 아름다워 해준은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잊어서는 안 될 나의 과보. 처음부터 가지지 말아야 했던 감정의 인업.


그것이, 괴물에게 주려던 홍마노를 어머니가 머물던 안방에 신줏단지처럼 간직하고 있던 이유였다. 뼈에 새기고, 심장으로 욱여넣어 끊임없이 스스로 주지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틈을 노리고 쪼개진 마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고단함에 곁을 내어줄 것만 같았다. 새끼 괴물이 자랄수록 번뇌도 함께 몸집을 불렸다.


미워하려 했다.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있는 안방에서 홍마노와 연죽을 들여다보며 매일 밤 자신을 다그쳤다. 어린 모습에 속아, 괴물의 재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새끼 괴물은 포기를 모른 채, 아무리 밀어내고 모질게 대해도 끊임없이 돌아와 제 주위를 맴돌았다. 어쩌면 이조차도 괴물이 만든 계략의 일부일지 몰랐다. 본디, 인간의 마음을 현혹해 사리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데 탁월한 종자였으니.


감정과 감각에 이름을 붙일 줄도 모르는 주제에 새끼 괴물은 틈만 나면 제게 온기를 나눠 주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해준은 마당 한쪽에 붙박여있는 참극의 현장을 다시금 눈에 새겼다. 피 웅덩이로 스러진 어머니의 마지막이 꼬리처럼 따라붙어, 해준은 증오를 발판 삼아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새끼 괴물이 산호주를 이유 없이 제게 주고 싶다 했을 때도. 매일 밤 창귀로부터 저를 지킨답시고 뜬 눈으로 툇마루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소용없는 콧노래를 부를 때도. 고사리손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깨진 홍마노를 금 동아줄처럼 쥐고 있는 걸 보았을 때도. 해준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차라리 자결해버릴까. 생각을 안 해봤을 리 없다. 그러나 해준은 그대로 죽지조차 못했다. 여우가, 그 괴물이 아직 건재한 이상 해준에게는 죽음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어제, 새끼 괴물은 무언가를 계기로 하루아침 만에 3년 전의 악몽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하얗게 부서지는 미소, 금빛 실을 녹여 만든 눈빛, 자꾸만 다가오는 크고 따뜻한 손. 자신이 미친 걸까, 여우가 도술을 부린 것일까. 어느 쪽이든 해준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고.

내비치는 욕망 하나 없이, 노란 눈을 빛내던 새끼 괴물이 바라던 것은 이런 거였을까? 이렇듯 저를 방심하게 하다가 언젠가 감각을 깨우치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할 때, 제게 진정한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엉킨 실타래를 보듯 엉망진창인 머릿속이 산란했다, 구슬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오던 어머니의 피 냄새, 수십 대의 화살에 맞는 와중에도 자신을 바라보던 괴물의 눈, 그리고. 구슬 없이 그저, 입 맞춰주던 능소화를 닮은 첫사랑.


아직도 그 날들이 꿈에 나타난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다며 그의 품에 안긴다. 그는 다정히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더는 악몽을 꾸지 않을 거라며 속삭여준다.


그렇게 눈을 뜨면, 다시 지옥이었다. 그의 꿈을 꿀 때마다 축축한 절망이 곱절로 그를 짓눌러왔다.


'이녁. 왜 화를 내는 겁니까. 내게 도와달라 한 것은 이녁이지 않습니까.'


괴물의 말마따나,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탓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만 전부 끝내자. 이 고된 삶을 영위하기에 이젠 너무 지쳐버렸다. 남은 것은, 스스로 연옥의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세상 모든 이를 비탄에 빠지게 하는 노랫소리를 쫓아 해준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자신의 귀에는 항상 이 노래가 들렸다. 어쩌면 어머니보다도 훨씬 더 이전부터. 그때 진작 따라 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어머니는 살고, 자신은 창귀가 되어 여우를 만나는 일도 없었겠지. 능소화를 볼 때마다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도착한 곳은, 3년 전 여우와 숱하게 만나던 숲이었다. 노랫소리는 이제 코앞에서 울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슬픔으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창귀의 노래가 들리는 순간부터, 범에게 잡아먹힐 팔자라고 하던데, 돌아 돌아 너무 늦게 왔다.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노래 가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어디에서 들었을까,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가뿐해져, 해준의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지난 3년간, 저주와 같던 해준의 삶 속 겨우 맞이한 새벽이었다. 숲 속에 숨어 있던 범과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여우가 동시에 해준에게 뛰어들었다. 여우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면서 해준은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을 보면 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염치도 모르고.


"이녁! 안 돼! 안 돼! 안 돼!"


어디서 들어봤는지, 기억났다. 능소화 덩굴 무덤 주인이 썼다는 편지였다.


공자님이 읽어 줬는데......


범의 모가지가 그대로 몸과 함께 분리되었으나, 날카로운 짐승의 생니에 해준의 한쪽 팔이 삼켜지는 것이 먼저였다. 여우가 미친 사람처럼 범의 아가리를 마구잡이로 벌려, 해준의 짓씹힌 팔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억지로 범의 아가리를 벌리자 툭, 하고 너덜너덜해진 해준의 팔 한쪽이 땅 위를 뒹굴었다. 

어깨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피를 너무 흘려 눈앞이 핑 돌았다. 간신히 붙어있는 숨을 겨우 떼 해준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선계에 못 가겠네."

"이녁!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 가지마!“


괴물은 울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을 다 본다며 해준은 웃었다. 이제 되었다. 호환을 당해 숨이 끊어지면, 자신의 혼백은 삼생 윤회를 겪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될 것이다. 억울함도, 한도 없으니 자신은 새로운 창귀를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괴물 또한, 제게서 여우 구슬을 뺏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호환을 당했으니, 백번째 객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것과 다름없다. 절로 감겨오는 눈꺼풀과 가빠져 가는 숨이 그 증거였다. 백번째 객을 잃은 여우는 세상에 남겨져 평생 닿지 못할 선계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 테지. 이것으로 어머니를 위한 한풀이가 조금은, 되었을까. 불효자는 연옥으로 가고, 원수는 연옥과 같은 이생에서의 삶을 억겁 동안 살아내야 함으로써.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제발, 제발 가지 마! 이녁!"


해준의 눈이 감기고 그가 쥐고 있던 팔이 툭,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여우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피투성이가 된 어깨에, 떨어져 나간 해준의 팔을 붙이려 애썼다. 수차례의 시도에도, 팔은 맥없이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여우가 해준의 뺨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랑한단 말이야! 이녁! 내가 이녁을 사랑하고 있어! 선계고 진리통달이고 전부 포기할 테니까, 곁에, 곁에만 있어 줘. 제발.“


해준에게 화살을 맞으며 쓰러지던 날, 여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새까만 동공을 하고 있던 그의 뺨을 쓰다듬어주고 싶다고. 달래줘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슬퍼하는 걸까. 내가 잘못한 걸까. 이녁의 말대로 이녁의 어미가 창귀가 되든 말든, 그저 놔뒀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이녁은 평생 창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했을 테지. 

이까짓 화살로는 죽을 수도 없는 몸인데, 자신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활시위를 당기는 그가 안타까워, 여우는 해준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작금의 그가 바라는 것이 제 죽음이라면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국이었다. 빗발치는 화살 세례에 모로 쓰러진 그의 시야에 문득 이상한 것이 잡혔다.

대문 너머에서 집요한 시선으로 해준을 바라보고 있는 창귀였다. 분명 조금 전에, 제가 범의 숨통을 끊었는데 어째서 창귀가 멀쩡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여우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범이 아니었구나. 그저 그런 축생이 아니었구나. 잡귀를 부리는 탓에 어느 순간부터 요물이 되어버린 삿된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이대로 쉽게 포기할 종자가 아니란 뜻이기도 했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해준을 쫓아다닐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들리게 되는 그 어느 날, 흔적도 없이 해준을 삼키겠지.


감히. 어딜 감히. 나의 이녁에게 손을 대려고. 어림도 없지.


새로운 계책을 꾸리며 눈을 감는 와중에도, 여우는 깨닫지 못했다. 선계 생각따위, 멀어진지 오래인 것을.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새끼의 몸을 하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붉은 흙바닥 위에 웅크린 소년이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아이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옷자락을 당겨 드러난 눈의 까만 절망과 마주한 아이는 가슴이 작게 둥, 둥 울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아이는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놀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 표정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아이가 기억하는 사실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창귀로부터 그를 지켜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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