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디네 후작가의 사교 파티에 가기까지 고작 이틀이 남았다.

동틀 무렵부터 일찌감치 일어난 사밀레이나가 마차에 실은 내용물을 점검하고 동행하는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시종장과 면담을 하고 있는데, 잠이 덜 깬 기색이 완연한 제이드가 비척비척 다가왔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 오늘만큼은 조금 편히 자라고 했건만, 굳이 일어나 사밀레이나의 곁에 서 있다가 함께 식당까지 내려왔다.


“조금 더 자도 된다고 했잖아.”

“누님께서도 어제 늦게 주무셨잖아요.”

“그건 어떻게 알았니?”

“서재에 책을 가져다 두러 가던 참에, 누님의 방 창문에 불빛이 비치는 걸 보았어요.”

“이렇게 피곤해서는 초상화가 잘 나오겠니?”

“눈 밑이 거뭇해진 것 정도는 가려 달라고 요청해도 괜찮지요, 누님?”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들은 응접실로 향했다. 사밀레이나는 제이드가 고른 새하얀 블라우스와 푸른 치마를 입었는데, 제이드는 그 블라우스의 목깃과 소매가 새하얀 꽃잎 같다며 유독 좋아했다.

사밀레이나가 시종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정리하는 사이에 제이드는 그녀가 고른 상아색 셔츠와 진한 밤색의 바지, 그리고 그 바지와 비슷한 색의 크라바트를 한 차림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사밀레이나의 요청대로 주근깨는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하긴. 잘 어울려. 자, 이것까지 달면 되겠다.”


소년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의 핀을 크라바트의 중앙에 매달아 고정한 사밀레이나가 먼저 의자에 가서 앉았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부드럽게 제 몸쪽으로 당겼으며, 무릎을 딱 붙이고 사선으로 뻗어낸 다리의 발등을 가볍게 폈다.

그들이 자세를 적당히 잡을 즈음 들어온 화가 두 명은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이더니 끙끙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무거운 화구를 정리해서 펼쳐 놓기 시작했다. 최대한 부드러운 분위기를 내었으면 좋겠다고 한 사밀레이나의 요청을 기억한 그들은 응접실의 무거운 커튼을 모두 걷어내고 오귀스트 남매가 쓰는 의자의 위치를 세 번이나 바꾸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지루했다. 제이드는 하품을 열 번도 넘게 하다가 기어이 조금씩 졸기 시작했다. 사밀레이나는 그런 동생을 꾸중하거나 부러 깨우지 않은 채 그저 두었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그 또래처럼 느껴져서 귀엽기도 했다.


“저…아가씨.”


사밀레이나 데인 드 오귀스트의 초상화를 담당한 젊은 화가가 콧잔등을 긁적거리다가 제 매부리코에 물감이 묻자 황급히 손을 떼었다.

올해로 스물일곱이라는 그 아가씨를 그리는 것은, 그가 여태껏 숱한 귀족 가문을 전전하며 얻어낸 그 어떤 일거리보다도 쉽고 보람찼다. 참을성 많고 우아한 아가씨는 아랫사람을 오만하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자세가 곧고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처연한 느낌이 묻어나는 외모는 아름답기까지 하였으니 화가의 입장에서는 이런 그림이라면 한 달에 열 장을 그리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정도였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녀에게서 묻어나는 겨울 같은 서늘함이었다. 마치 이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곳에 있는 것 같지 않은 기이한 인상이 사밀레이나에게 있었다. 햇빛을 머금은 회청색 머리카락과 도자기처럼 매끈한 흰 피부의 표현이 두드러진, 따스한 색감의 초상화에는 묻어나는 것이 사밀레이나에게는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고민하던 화가는 그게 무언지 힘겹게 깨달았다. 생동감이었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여인. 살짝 내리깐 회녹색 눈동자와 꾹 다물린 입술, 조금도 달싹이지 않는 손가락까지. 동생을 살피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숨을 쉬느라 어깨가 살짝씩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면 정말 그대로 그림이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지루해 보였으며 지쳐 보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일개 화가의 시선에서 보기에도 그랬다.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림에 잠시 집중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왜 그러지?”


화가는 보고 말았다.

졸던 것을 들켜 겸연쩍게 웃는 제이드를 바라보던 사밀레이나의 미소는 그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부드럽게 접힌 눈과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그 차가운 인상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제 동생과 마주 보며 천진하게 웃는 모습을 본 순간 화가는 얼음 덩어리처럼 쩍 얼어붙었다.

이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였다. 붓을 들어 입꼬리를 고치려던 그 순간, 그대로 잠시만 있어 달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사밀레이나의 미소가 사라져 버린 까닭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한숨에 실려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너무도 빠르다. 덧없이 흩어져 버린 미소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아침 해를 본 서리처럼 녹아 없어졌다. 눈을 깜박이는 그 짧은 찰나에 사밀레이나는 본래의 서늘한 얼굴로 돌아와 버렸다. 물에 녹지도 않는 두꺼운 물감을 몇 겹씩 겹쳐 바른 것처럼 견고한 무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림 한 장 따위로 그 사람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건 어떤 사람의 단 한 순간에 불과했다. 화가는 가장 완벽한 순간을 그리기 위해 살았다고 자신했다. 수많은 장면 중 가장 앞세우고 싶은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 그의 존재 의미라고.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자신할 수 없었다. 담을 수 없는 찬란함. 가둘 수 없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듯했다. 아주 잠깐, 신기루처럼 나타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꼭꼭 숨어 버린 그녀의 순간은 어떤 마법을 부려도 굳힐 수 없을 것 같았다.



약혼하기 전 무엇이 가장 해보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제이드 레 메인 오귀스트는 ‘소풍’을 가고 싶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대단한 것을 하지는 않아도 좋으니, 성 밖의 풍경을 보고 싶다고. 딱 하루만이라도 소년의 뒤를 따라다니는 가문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뜻이라는 것을 사밀레이나는 금방 알았다. 그러니 소년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종을 불러 채비를 하게 하는데 별안간 소년이 사밀레이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누님도 함께 갔으면 해요.”

“내가? 답답하지 않겠니?”

“왜 답답해요? 누님과 함께인걸요.”

“그러니까 나와….”

“예.”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사밀레이나에게 제이드가 활짝 웃어 보였다.


“저는 누님과 함께 가고 싶어요.”

“하루 정도는 괜찮으실 겁니다. 백작 어른께서도 아침에 돌아오셨으니까요.”


시종장이 냉큼 제이드의 편을 들었다. 불철주야 일에 매달려, 제이드가 조르지 않으면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던 그녀가 이 기회에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듬뿍 묻어났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안 돼. 오후에 상인이 오면 메인 홀에 달 새 샹들리에를….”

“제가 하겠습니다. 책자는 여기에 있으니, 세 개의 샹들리에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만 주시면 됩니다.”

“마구간을 넓히면 새 말을 들이기로 했는데 그건….”

“주인어른께서 마구간지기와 이야기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눈 뒤 그 말을 전하러 마구간에 갈 생각이고요.”

“제이드의 능력에 대한 공부는….”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다녀오시는 동안, 제가 책을 챙겨 두겠습니다. 아가씨께서 표시해 두셨던 부분을 양피지에 다 정리해서 적어둘게요. 맡겨만 주세요!”

“…….”


너무 제 일들을 잘해서 탓이다. 이마를 짚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하루는 아가씨께서도 성의 일은 걱정 마시고 다녀오시죠.”

“맞아요. 오늘 축제도 열린다나 봐요. 아가씨도, 도련님도 축제는 보신 적 없으시지요? 떠들썩하고 재밌답니다.”

“성 밖의 생활을 알아두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오귀스트 가문은 아직 다스리는 영지가 없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일입니다.”

“축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중요하다.”

“백작어른.”

“…아버지.”


친밀한 태도로 조잘거리던 시종과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보태던 시종장이 얼른 물러나며 예의를 갖추었다.


“시종장의 말이 옳다. 다녀오련.”

“정말이십니까?”

“그래. 제이드가 앞으로 얼마나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백작은 사뭇 다정한 시선으로 남매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그걸 바라보는 사밀레이나는 별안간 가슴 언저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약혼일 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말하지?


“오늘은 사밀레이나도 함께 다녀오도록 해라.”

“예…알겠습니다.”


그녀는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사실 그럴 이유가 없기도 했다. 제이드도 함께 있는 쪽이 좋다고 했고, 남은 일정은 오귀스트 가의 유능한 이들이 제 일처럼 나서서 처리할 것이며, 백작까지 거들지 않던가.

그렇게 두 사람의 외출이 결정되었다. 시종을 물린 뒤 함께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서는 내내 제이드는 어찌나 기쁜 얼굴이던지, 그 얼굴을 본 사밀레이나는 올해 본 제이드의 표정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축제가 열린 마을은 부산스럽고 떠들썩했다. 화사한 천을 조각조각 꿰매 만든 앞치마를 두른 소녀들이 바구니에 들어 있는 반짝이는 색종이며 꽃잎을 허공에 던져 날렸고, 길게 이어진 시장 골목에서는 온갖 음식과 과자를 만드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제이드의 눈은 커지다 못해 거의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반짝이는 비녀와 머리핀을 파는 좌판 앞에서 한참 고민하던 소년은 물망초 모양의 장식이 매달린 머리끈을 하나 사 와서는 사밀레이나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성을 드나드는 상인들이 소개하는 값비싼 장신구들과는 거리가 먼, 조악한 장식이었건만 사밀레이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머리를 묶었다.


 “저기 봐요, 누님. 무기도 파는 것 같아요!”


후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대장간 앞에는 가죽을 널찍하게 깔고 온갖 날붙이들을 늘어놓은 좌판이 있었다. 그 앞에 냉큼 쪼그려 앉은 제이드는 말끔하게 닦여 널찍한 부분에 얼굴도 비칠 정도로 번들거리는 칼을 들여다보았다.


“가끔은 무기를 하나쯤 다루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나쁘지 않지. 문제가 생겼을 때 몸을 지키기에 제격이니까. 배운다면 무엇을?”

“글쎄요…. 이거?”


소년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있는 검과 방패를 가리켰다. 한 쌍으로 나온 모양인지 검 손잡이와 방패 중앙의 날개 장식이 비슷했다. 방패는 제법 커서 제이드의 몸통만 했다. 휘두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근력이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사밀레이나는 그런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왜 이걸 골랐니?”

“근사하잖아요. 무기는 해친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방패는 그 반대니까요. 앞의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보다는 뒤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쪽이 저는 더 멋있어 보여요.”

“수호기사 말이구나.”


오귀스트 가문과 친분이 깊은 라노스 왕실의 직속 기사단은 전통적으로 검과 방패를 함께 쓰는 수호기사들로 구성되었다. 그 기사단을 보면 제이드가 기뻐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사밀레이나는 이어지는 제이드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누님께서는 어떤 게 가장 마음에 드세요?”

“음.”


길이도 종류도 다양한 검들이 그녀의 시야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가시처럼 얇고 뾰족한 레이피어, 그녀의 힘으로는 안간힘을 다해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바스타드 소드, 칼자루의 폭이 좁아서 길쭉한 쐐기처럼 보이는 비수, 초승달 모양처럼 부드럽게 굽어서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 도(刀)까지. 색도 모양도 다채로웠건만 어느 것 하나도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끌어당기는 것이 없었다.

제법 심드렁하게 그것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활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깎아 활대를 만들고, 끄트머리에 가죽 끈을 두툼하게 감은 활은 장식이라고는 없는 투박한 모양새였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튼튼하고 어딘가 멋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밀레이나는 활을 턱짓하며 말했다.


“나는 저게 마음에 드는구나. 잘 만들어졌어. 상인들이 성으로 가져오는 것들은 전부 활대에 힘이 없고 장식만 가득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그러고 보니 누님께서는 사냥도 하시지요. 활을 다루어 보신 적이 있다는 것을 깜박했네요.”

“잘 쏘는 편은 아니야. 연습을 많이 해야 해. 날짐승은 아직 엄두도 못 내지. 웬만한 것은 활보다는 덫으로 잡는 편이야.”

“그래도 대단한 걸요. 저는 사냥은 도무지…적성에 맞지 않아서요. 아, 아버지께 받은 용돈이 좀 남았는데…이걸 살까요? 이건 얼만가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치며 남매의 행색을 힐끔 훑어본 주인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루네 스무 닢은 주셔야겠소.”

“…….”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제이드조차 당황할 정도로 높은 금액이었다. 은화 스무 개를 달라니. 두 사람이 하루간 마을에서 모자람 없이 쓰라며 손 큰 백작이 준 돈이 30루네였다. 대장장이는 남매가 가져온 돈의 절반 이상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평민들의 웬만한 삶은 보통 루네를 쓸 것도 없이 동화인 리프 안에서 해결이 되었다. 그나마 이 대장장이가 솜씨가 좋고, 무기 자체가 워낙에 고가의 재료를 쓰는 일이 많으니 비싼 편이라 루네를 많이 쓴다고 해도,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활이 20루네인 것은 아무리 보아도 과했다.


“그건….”


사밀레이나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대장장이의 핀잔이 더 빨랐다.


“뭐요? 생긴 것이 반반하고 입은 꼴도 반지르르하니, 있는 집 분들이신 모양인데 원래 이 정도쯤 나가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건 좀 뭐요?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아가씨가 뭘 믿고 이게 싼 물건이라고 자신하는 거요? 안 살 거면 저리들 썩 비키시오! 장사에 방해만 되니까!”


반쯤 윽박지르다시피 하는 덩치에 이미 위축된 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쩔쩔매며 손바닥에 10루네짜리 은화 두 개를 들고 사밀레이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차게 식은 손을 꽉 쥐었다가 펴는 걸 두어 번 반복한 뒤에 용기를 냈다. 목적과 상하 관계가 뚜렷한 기사나 용병과는 대화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평민과 대화하는 일은 그녀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저…그러니까. 이 활은 그보다는 싼 물건일 것 같습니다.”

“허. 참, 나. 그래. 좋소. 귀하신 양반들에게 은화 스무 닢이 아까운 물건이다? 그럼 이 미천한 대장장이 따위가 만든 활을 얼마에 사고 싶은 거요?”

“…….”


사밀레이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20루네가 과한 것까지는 알아도, 그게 얼마나 과하며 본래 물건이 얼만큼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지까지 잘 알지는 못했다.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성 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지낸 귀족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가격을 잘못 부르면 대장장이가 더 화를 내겠지. 차라리 비싸게 주고 사는 게 나을까. 그럼 더 우습게 보지 않을까? 안 사는 게 나을까. 왼쪽 뺨에 따끔따끔할 만큼 꽂히는 제이드의 시선을 느끼며 사밀레이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들을 못마땅하게 쏘아보던 대장장이가 무어라 말을 보태려던 찰나였다.


“그건 가격을 올려 받은 이가 똑바로 말해야지. 원래 이건 얼마였다고. 그런데….”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후드를 쓴 남자가 단도를 몇 개 살펴보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덧붙였다.


“행색이 좋아 보이고 번듯하게 자란 이들 같으니, 이만큼은 더 받고 싶다고.”

“…….”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스무 루네는 좀.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어.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후드 안의 눈동자가 사밀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청년의 눈을 바라본 사밀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공이 좁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꼭 맹수의 눈을 본 것 같았다.


“얼른 해결하는 게 좋겠어. 나도 물건을 좀 사고 싶거든.”





글 :: 사나 (@sanawrite), plea00@naver.com
그림 :: 사윤 (@Sayun_0712), skysky4041@gmail.com

디자인 :: 장미 (@BeYour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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