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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지겨워.

다정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지루하다. 원래도 따분한 모임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한층 더. 지난밤 잠을 설친 탓일까.


“그나저나, 오늘의 주인공이 왜 이리 조용하지?”


독한 남자 스킨 냄새가 훅 풍긴다 싶었다. 어느새 옆자리로 옮겨온 박민철이 은근슬쩍 몸을 치댄다. 다정은 슬금슬금 어깨 위로 다가오는 손을 탁, 매섭게 쳐냈다.


“치워.”


부르지도 않은 자리에 나타났을 때부터 달갑지 않던 차였다. 다정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손을 툭툭 털어냈다.


“치우라니.”


박민철이 머쓱한 듯 웃었다. 다정에게 맞은 손등은 그새 벌겋게 부어 있다.


“사람 민망하게. 야,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사심이라도 품은 줄 알겠다.”

“그럼, 아니야?”


쫓겨나듯 일 년간 미국에 가 있던 다정이다. 태평양 너머, 그 먼 땅에서도 박민철이 떠들어댄 허풍쯤은 실시간으로 다정의 귀에 전해졌다.

뭐, 윤다정 자빠뜨리는 건 시간 문제라고?

웃기지도 않았다. 말이 말 같아야 화도 나지. 같잖아서 웃음만 났다. 여기저기 심어둔 눈과 귀만 해도 몇 갠데.

급기야 박민철 집에서 혼담을 넣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정은 윤 회장에게 당장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러곤 하나뿐인 손녀가 목매다는 꼴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지 않거든 당장 거절하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어차피 격 자체가 맞지 않은 집안인걸, 그냥 뒀으면 알아서 반려됐을 일이다. 무엇보다 윤 회장 자체가 아직 다정을 결혼시킬 마음이 없었다. 괜히 욱하는 성격으로 긁어 부스럼만 만든 셈이다. 그 날 이후 다정의 경호 인원은 두 배로 늘었다.

다정은 박민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야, 개, 개수작이라니.”

“같잖게.”

“야! 너…….”

“저리 떨어져. 냄새나.”


박민철의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만큼 벌게졌다. 다정은 성가신 벌레라도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씩씩대며 몇 마디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정은 늘 그렇듯 귓등으로도 담지 않았다. 원래 못난 놈일수록 이말 저말 주워섬기며 시끄럽게 구는 법이다. 이 확고한 편견은 틀릴 때보다 맞을 때가 더 많았다.

옆에서 모기처럼 울어대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한결 분위기가 나아진다. 다정은 느른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실내는 어둡다. 빛이라곤 테이블마다 놓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명이 전부였지만, 딱히 칙칙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얼굴을 바싹 붙인 채 연신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 아직은 좀 어색한 사이인 듯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붙어 앉은 예비 연인들. 재즈 연주곡 사이로 웅성웅성 섞여드는 말소리.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울리는 갖가지 소음들. 술이라곤 낮은 도수의 칵테일이 전부, 심지어 흡연 구역도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다정의 취향에선 한참 벗어난 곳이다. 아마 사촌 언니인 수진의 가게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올 일도 없었겠지.


“다정, 어디 가?”

“화장실.”


다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가로질렀다. 또각대는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울릴 때마다 은근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익숙한 일이었다.

흘끔대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정은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남자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익숙하다고 해서 그런 시선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어디는 예쁘네, 어디는 좀 별로네, 그림 감상하듯 품평이나 해대겠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두고.

다정은 그나마 재즈바 안에서 가장 밝은 곳, 화장실과 이어지는 통로에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열 시 이십 분. 제법 오랫동안 따분함을 견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고작 거기에 멈춰 있다. 

아. 오늘 밤도 길겠다.



* * *



“어…….”


여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는 문 바로 옆에 마련된 파우더룸에 서 있는 다정을 발견한 직후였다.


“여기 금연인데…….”

“알아요.”

“…….”

“그래서 불 안 붙였는데.”


여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다정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냥 물고만 있는 거예요.”

“아…….”


여자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말끔하게 묶은 머리칼이 찰랑인다. 다정은 물끄러미 여자를 보았다. 검은색 슬랙스에 굽 없는 로퍼, 하얀색 칠부 셔츠. 접은 소매 아래 보이는 손목뼈가 가늘다.


“흡연 구역 알려드릴까요?”

“아뇨.”

“…….”


또다. 그런 표정.


“……금연 중이라서.”


여자는 낮게 “아.” 중얼거린 뒤 세면대 쪽으로 향했다. 두꺼운 나무문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음악 소리가 야트막하다. 세면대 물소리가 연주곡 대신 화장실 내부를 채웠다. 여자는 벽에 매달린 물비누를 짜내어 꼼꼼하게 손을 문질렀다.


“저기.”


여자는 한 손에 페이퍼 타월을 꼭 쥔 채 다정 쪽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물고 있으면, 좀 나아요?”


다정은 대답 없이 빤히 여자를 마주 보았다. 시선이 길어지자, 하얀 얼굴 위로 조금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이런 질문 실례인가요?”

“아뇨.”


그 사이 귓불이 발그스름해졌다. 다정의 시선이 여자의 귀와 턱 언저리를 느릿하게 훑었다.


“둘 다 아니라구요. 담배도, 실례도.”

“……아.”


여자는 젖은 페이퍼 타월을 납작하게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공교롭게도, 두 시선은 출입문 앞에서 한 번 더 마주쳤다.

여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해왔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끝이 살짝 처진 눈꼬리가 보기 좋게 접힌다. 다정은 별말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음악 소리가 밀려든다. 다정은 담배를 뚝 분질러 휴지통에 버렸다.

돌아서 마주한 거울 속 얼굴엔 여전히 따분한 기색이 어려 있다. 문득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웃던 하얀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다정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거울에 비춰보았다. 완벽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파우더룸을 나선다. 들어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다.

어쩌면, 오늘 밤이 마냥 길지만은 않을 것도 같아서.



* * *



다시 나온 홀은 낯선 분위기였다. 실내를 채운 공기의 밀도가 높아졌다. 웅성거림은 잦아들었고, 시선들은 한 곳으로 향해 있다. 조명을 환히 밝혀 둔 중앙의 무대.

빠른 템포의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진다. 조금 전 마주했던 눈은 이제 반쯤 감긴 채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 위로 화려한 빛이 부서졌다.


“다정아.”


다가온 수진이 툭 어깨를 쳤다.


“여기서 뭐해?”

“……누구야?”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수진의 고개가 갸웃했다. 다정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피아니스트가 있다. 수진이 아아, 낮게 탄식했다.


“손기영 씨라고, 우리 직원. 한 달쯤 됐나.”

“피아니스트?”

“응, 재즈 피아니스트. 무명이긴 하지만.”


다정의 시선이 건반을 누비는 흰 손끝을 좇았다.


“……잘 치는 것 같은데.”

“실력은 좋아. 나 같은 막귀가 듣기에도 좋으니까. 상도 여러 번 탔었다더라.”

“근데 왜?”

“왜냐니?”

“무명이라며.”

“실력만 있다고 무조건 잘 되겠어?”

“그럼?”

“이게 따라줘야지.”


수진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맞댔다. 누가 보더라도 돈을 의미하는 제스처다. 다정은 흘끔 그 손을 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다정이 생일선물을 뭘 해줘야 할까? 생각은 해봤어?”


수진은 다정의 생일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고민에 빠졌다. YU의 금지옥엽 외동딸인 윤다정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있을 턱이 없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졌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텐데.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쥘 수 있는 까닭에, 다정은 오히려 물욕이 없는 편에 가까웠다. 당장 제 앞으로 된 개인 재산만 해도 1분 1초가 다르게 금액을 불려가는 실정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사이 첫 번째 연주가 끝났다. 박수 소리가 아담한 홀을 채운다.

다정은 그동안 무대에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니.”

“응?”

“받고 싶은 선물 정했어.”


변덕스럽게도, 다정이 활짝 웃었다.


“나, 쟤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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