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일부 크롭이며 샘플의 내용이 커미션의 전 내용은 아닙니다. 오랜만...이라고 하려했으나 3일 전에 글을 올렸더군요. 영 근래에 바쁘다보니 올리는 빈도가 뜸해진 거 같습니다. 그래도 포스타입에 종종 들러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제목인 침묵과 온정은 각 캐릭터들의 이름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낭만적이지요. 침묵 속 들어있는 온정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알아챈다면 어떤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온기를 깨달을 수 있는 거니까요. ...... 다음에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A의 손이 떨렸다. 요즘 들어 눈꺼풀과 함께 손의 떨림이 심해졌다..... 그리고 난시와 이명도. 그는 눈두덩이를 꾸욱꾸욱 누르며 한숨을 터트렸다. 왜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담. 집중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러면 B를 피해, 아니 정확히는 그를 생각하는 걸 멈추기 위해 랩실에 들어온 게 소용이 없잖아. 하긴 1학년한테 뭘 맡기겠어. 잡일이나, 실험일지나,  전부 그렇게 생산적인 활동은 아니지. ...B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으면 좋겠는데. 그러던 와중 휴대폰이 급하게 울렸다. 그간 자신을 피하던 B의 문자에 A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B를 생각하던 때에 B의 문자라니. (종일 실험을 하다가 인제야 한숨 돌리며 떠오른 것인데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졌다. 그는 빠르게 문자에 답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타를 고쳐가는 손길이 여간 정성스러운 게 아니었다.


[요즘 잘 지내?]

[그게 왜 궁금해?]


B의 한숨이 공중을 갈랐다. A에게 어떻게 문자를 할지, 자신이 왜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신경 쓴 적도 없었지만, 사람 자체에 절절맨 적은 (오히려 자신이 피한 적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이런 A의 태도는 꽤 뼈아팠다.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면서도 A, A만은 자신을 언제나 반겼으면 했다. B는 자조했다. 맙소사 B, 갈 데까지 갔구나. 이렇게 이기적인 줄은 몰랐는데.


[그냥, 근래에 잘 못 본 거 같아서.]


정말로 겨우 이런 문자에 내가 왜 기쁜 거야? A는 이런 B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뻐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이 관계는 애완견과 주인이지 친구도 뭣도 아니다. 그저, B는 자신에게 애정을 주는 사람이 떠나갈까 봐, 가끔 쓸모있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챙김이 분명했다.


[한번 만나자.]

[그래. 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부탁할 게 있었거든.]

[집에서 봐.]


A는 비참했다. 비참하고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지, 바라는 게 없다면 왜 날 찾았겠어. 끊임없는 자책이 그의 발끝에서 찰랑거렸다. 이 경멸감은 언젠가 나를 집어삼키겠지. 난 여기에 질식할지도 몰라. 거대한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검은 그 물들은 A의 발목을 덥썩 쥐고는 속삭였다.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난 너 없이도 잘 살았으니까, 삶을 살아가면 돼. 앞으로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A. B에겐 결코 닿지 못할 독백이 염불처럼 줄줄 흘렀다.



나를 피한 건 정작 너고, 이 정도로 거리를 좁힌 것도 너인데 왜 내가 힘들어야 해? 내가 네게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아니면 넌 그냥 내가 아무렇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으나 정작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A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너는 사람들 사이에 쌓여 있어서 모르겠지만. 그러는 거 아니야."


B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다. 이 관계를 정리하려는 나의 의도를 읽은 것 같다.


"응?"

"너는 똑똑하고 사람이 아무렇지 않은 거 같지. 싫다면 싫다고 말하라고."

"오해야. 난 네가 오히려..."

"아니 됐어. 방 아직 기간 많이 남았지. 그동안 잘 지내자."


뒤를 돌아서는 와중, 그가 내 팔목을 잡아 세웠다. 그는 피한 건 맞으나 결코 싫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가 피한 건 맞다는 말에서 모든 정신이 멈췄다. 피한 건 맞지만, 피한 건 맞지만, 피한 건 맞지만, ...... 잘못 되감은 테이프처럼 B의 목소리가 연신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가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잠시 들여다봤으나 곧장 눈을 돌렸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으니까. 나는 그가 불안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네 예외일 수는 없으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

"A....."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자마자 달리듯이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찰칵, 금속성 물질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중얼거림이 방안으로 퍼졌다. 내 안에 있던 마지막 저지선(B가 나를 피하고 있기보다는 그냥 보통 친구가 된 것이라는 등의 추측)이 꿰뚫리며 나는 완전히 무너질 거 같았다.


"괜찮아 A,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마저도 내게 괜찮다고 해주지 않는다면 정말로 괜찮지 않을 거 같았다. 비참하고 비참한 하루였다. 이렇게 되면 고등학교로, 데면데면한 사이로도 돌아가지 못하잖아. B. 웬만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네가 날 정말로 싫어하면, 난 어떻게 해야 돼?


"A."


어느새 B가 문밖에 서 있었다. 아마 내가 그의 손을 뿌리쳤을 때 곧장 나를 따라온 것 같다. 나는 그가 왜 나를 달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네 한 마디에 내가 무너지는 건 당연하잖아. 책임이라는 걸 무겁게 생각한다고 말했잖아. 그럼, 나를 무너뜨릴 거면, 넌 아무렇지 않아야지.


"사랑해. 사랑해 A."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왜 너는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나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진 않잖아. ... 네 고백이 진짜라면 어째서 난 네 고백을 듣고도 이렇게 비참한 거야? 그의 목소리가 문의 떨림을 타고 내게 계속해서 전해졌다.


"너를, 그냥 너를 끌어안고 싶었어. 지금도 네 뺨에 입을 맞추고 싶어. 이게 친구는 아니잖아... 같이 사는 너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너는 내가 그런 말을 들으면 너를 용서할 거 같지. 사람의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니까, 라면서 다른 사람에게 하듯 넘어갈 거 같지. ....아니. 난 아니야. 용서는 곧 체념이잖아. 나는 널 벌써 체념했는데 왜 네 사과를 받아줘야 해?


"넌,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작게,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들을 수 없도록. 네 고백 사이에 내 말이 묻히도록. 놀랍도록 거짓말에 능숙한 네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나는 나를 지키려 몇 번이고 그의 고백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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