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ners in crime
1. [Noun] A criminal accomplice.
2. [Noun] (informal) A close associate.

 *20.07.20 수정

 

나른한 화요일 저녁.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어언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다. 하루 온종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둘은 서로와 떨어진 일 분 일초가 아까운 듯 굴었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마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붙어있으면서도 질리지 않는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웃음이 나왔다. 월요일에도 그랬고, 화요일에도 그랬고, 또 그 다음 주 화요일에도 그랬다.

벽에 걸린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케일은 소파에 앉아 카산드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각지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눈에 담았다. 카산드라도 케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뉴스를 들었다. 뻔한 내용이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질병의 발병률이 늘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사고가 났다. 매일 매일이 똑같았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소식들이 어제와 같은 앵커의 입을 빌려서 나오고 있었다.

‘바뀌는 건 옷밖에 없네.’

카산드라는 심드렁한 눈으로 TV를 바라봤다. 마침 뉴스에서는 반팔 셔츠를 입은 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인서트가 나오고 있었다. 벌써 반팔을 입은 사람이 있잖아? 카산드라의 생각이 샛길로 빠졌다. 내가 여름옷을 챙겨 와서 어디에 뒀더라. 케일은 옷을 챙겨왔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마 올 여름도 나랑 같이 보내겠지.

‘그렇다면 가을은?’

흐음. 카산드라는 길게 소리를 냈다. 그녀는 속으로 케일과 함께하는 사계절을 그렸다. 여름에는 함께 에어컨 아래에서 휴가지를 정하고, 가을에는 같이 캠핑을 가고, 겨울에는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는 대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봄에는 사방에 만개한 꽃을 보러 다니는 둘. 앞으로 맞이할 모든 순간에 케일이 함께 있는 게 어느새 당연해졌다. 카산드라는 문득 그의 미래에도 자신이 섞여 있을지 궁금해졌다.

“케일.”

“응?”

카산드라는 고개를 들어 제 연인을 올려다봤다. 정면을 향해있던 시선은 그녀가 부르자마자 바로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케일의 잿빛 눈동자 가득히 비치는 제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일부러 웃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카산드라는 환히 웃고 있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낯설다고 해서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뾰쪽 내밀었다. 케일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내민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는 눈을 살짝 접으며 카산드라에게 물었다.

“왜 불러요?”

“이제 슬슬 더워진다 싶어서. 그렇지 않아요?”

카산드라의 말에 케일은 어- 하고 말을 늘이며 몸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너무 붙어서 불편하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걸까. 카산드라에게는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케일은 카산드라가 뭐라고 말할 때면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인지 속에 다른 뜻을 담고 있는 말인지 구분하려 애썼다. 그는 카산드라의 눈치를 보다가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허공에 띄웠다. 흘끔대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카산드라의 파란 눈을 마주봤다.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에서는 어떠한 속내도 읽히지 않았다. 그는 카산드라의 눈에 비친 제 얼굴을 마주보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작은 반사면에 비친 케일은 어리숙한 모습으로 표정을 찡그렸다.

‘너무 어렵다니까.’

그는 카산드라의 모든 면을 사랑했지만, 가끔 이럴 때면 그녀의 철저함이 아쉬웠다. 내가 남도 아니고, 그래도 연인인데. 적어도 내 앞에서는 경계를 내려줄 수 있지 않나. 웬만한 비밀은 다 터놓은 사이면서. 케일은 있으나마나 한 불만을 삼키고는 카산드라에게 물었다.

“더워요? 조금 떨어져서 앉을까요?”

“응?”

카산드라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케일을 바라봤다. 어느새 허공에 떠있는 케일의 손, 불안하게 저를 흘끔대는 눈. 그녀가 이것들을 종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하하. 바람에 흔들리는 윈드 차임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이, 그런 말이 아니고-”

카산드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큭큭대다가 고개를 들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케일을 바라봤다. 케일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허공에 어정쩡하니 떠있는 손을 붙잡아 제 허리에 감았다. 케일은 더 꼭 붙어오는 카산드라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덥다는 소리는 아니었나? 그는 자유로운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거봐. 역시 어렵다니까.

“-벌써 여름이라고요.”

카산드라는 케일의 품에 고개를 가볍게 기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죠. 이제 6월이니까.”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시간 참 빠르네. 그것 말고 딱히 드는 생각은 없었다.

“여름이에요, 케일. 여름.”

카산드라는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름이 뭐 어쨌다는 건지. 케일은 방금 전과 똑같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여름에 뭔가 하기로 약속이라도 했던가.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바보같이 대답했다.

“알아요. 이제 여름이라며.”

카산드라는 몇 초간 말이 없었다. 이걸로 이야기는 끝인가. 케일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지나간 대화 속에 있었을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그가 희미한 힌트를 찾으려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카산드라는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그를 구경했다. 한참 후에, 그녀는 웃음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죠?”

“어-”

들켰다. 그는 작게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한차례 짤랑이는 웃음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케일은 카산드라가 왜 웃는지도 모르며 그녀를 따라 웃었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카산드라는 키득대며 케일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역시 귀엽다니까. 쪽.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다시 쪽. 케일의 볼은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까슬까슬했다. 카산드라는 옆으로 조금 떨어져서는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됐어요. 애써 머리 굴릴 필요 없어. 내가 당신이 눈치 없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이제는 그 어리숙한 면에 정이 들어 버렸다구요.”

“그런 거에 정 들 필요는 없는데.”

케일은 작게 툴툴댔다.

“내가 언제 당신을 필요해서 사랑했나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좋다는 소리니까 그냥 있어요.”

“알았어요.”

케일은 대답을 하고는 소파 위에 오도카니 놓인 손을 쳐다봤다. 떨어진 거리가, 그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아쉬웠는지 큼지막한 손이 얇은 손 위에 미끄러지듯 다가가 겹쳐졌다. 카산드라는 자연스럽게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손을 뒤집었다. 손가락이 서로 얽혀 단단한 깍지가 되었다. 카산드라는 공연히 맞잡은 손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케일의 왼손 약지는 비어있었다. 저 자리에 있던 반지를 못 본 지도 벌써 몇 주더라. 카산드라는 케일의 약지에 희미하게 남은 반지 자국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채 100일도 안 되는 시간이 10년을 넘는 시간을 덮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손가락에 진 흰 줄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카산드라는 입을 뾰쪽 내밀며 고민했다.

‘저걸 어쩌지... 어떻게 해야-’

“그래서, 여름이 왜요?”

케일의 말이 카산드라의 생각을 뚝 잘랐다. 그녀는 공상에서 빠져나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생각이 끊겨 불만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케일에게 화를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어서 카산드라는 그가 미처 불만을 알아채기도 전에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그냥. 벌써 계절이 바뀌었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해서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더라. 대충 늦겨울이던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덤덤한 말투가 그에게 대답했다. 케일은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질문을 툭 던졌다.

“렉시로 만난 걸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진짜 당신하고 만난 날?”

케일의 말에 카산드라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렉시 카터라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은 이런저런 기억들을 불러왔다. 개중에는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대개는 좋지 않은 것뿐이었다. 카산드라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가로젓고는 케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지나간 일을 곱씹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다.

“당신이 골라요. 당신이 누구랑 사랑에 빠졌을지가 궁금해지네.”

“지금 자기 자신을 질투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선택해요, 케일. 나야, 렉시야?”

카산드라가 장난기 어린 투로 말하자 케일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요. 나는 진지하게 묻는 거야.”

카산드라는 케일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말했다. 저도 제가 한 말이 웃기기는 했는지, 퉁명스러운 얼굴 위에서 스믈스믈 입 꼬리가 올라갔다. 케일은 깍지 낀 손을 들고는 카산드라의 손등에 길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카산드라 왓슨을 만난 날로 할게요. 당신이 내 택시에 탔던 그 날 말이에요.”

“뜨거웠던 첫날밤 말이에요?”

카산드라는 짓궂은 장난을 치며 물었다. 케일은 웃음을 터트렸다.

“응. 그 날.”

케일은 손등 위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요. 카산드라는 손을 제 쪽으로 홱 잡아당기며 그에게 핀잔을 줬다. 케일은 끝까지 손을 따라가며 장난스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의미 없는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졌다. 힘으로는 케일을 이길 수 없기도 하고, 내심 이렇게 사랑받는 게 즐거웠던 카산드라는 케일에게 승기를 내주었다.

“그러면... 그 때가 2월 24일. 맞나요?”

카산드라는 머리로 날짜를 세어보고는 물었다. 케일은 수염에 쓸려 붉어진 손등을 내려놓고는 같이 생각에 잠겼다. 그의 고개는 한참 후에 끄덕여졌다.

“응. 아마 그럴 걸요? 그날도 화요일이었는데.”

“어디 보자, 화요일... 화요일. 맞는 거 같네요.”

카산드라는 휴대전화에서 달력을 열고는 화면을 옆으로 슥슥 넘겼다. 케일은 몸을 기울여 조막만한 액정을 함께 바라봤다. 2월 24일, 화요일. 그 날부터 D-Day를 세자 99라는 숫자가 화면에 떡하니 나타났다.

“99일.”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 내어 숫자를 읽었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치고, 이유 모를 웃음이 새어나왔다. 타이밍 봐. 둘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날짜에 함께 즐거워했다. 한참을 웃은 뒤, 카산드라는 휴대폰을 옆으로 툭 던져놓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많은 생각이 담긴 한숨이었다.

“벌써 이렇게 됐네요. 시간 참 빠르다. 그쵸?”

“그러게요. 몇 분만 있으면 100일이 되는 거잖아. 내가 어쩌다가 당신이랑 이렇게 오래-”

케일이 장난어린 톤으로 말하자 카산드라는 그를 샐쭉 째려봤다.

“뭐야. 나랑 오래 만나는데 불만이라도 있어요?”

저를 향한 날선 눈빛 역시 가벼운 장난으로 뒤덮여 있어서 케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 보면 또 귀엽다니까.’

그는 카산드라의 목덜미에 파고들어 얼굴을 부볐다.

“아니. 불만일리가 없잖아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말을 할 때마다 목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서 카산드라는 목을 옆으로 쭉 늘였다. 케일은 카산드라가 멀어지는 만큼 달라붙으며 그녀의 옆에 얼굴을 바싹 붙였다.

“자기야. 지금 나 피하는 거예요?”

그는 웅얼거리듯이 속삭이고서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쪽. 카산드라의 턱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까슬까슬한 수염은 그 뒤로도 맨질맨질한 볼에 몇 차례고 닿았다 떨어졌다. 카산드라는 별 수 없다는 듯 케일을 흘긋 쳐다보고는 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맞잡은 손의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살살 쓸며 수줍게 말했다.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당신이 좋아서. 100이라는 수가 작은 수는 아니잖아요?”

“1주년도 아닌데, 뭘.”

“그래도. 나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데?”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내일은 주말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수요일일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날.”

무심한 말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빌려 나왔다. 카산드라는 으레 그런 식으로 몽글몽글하니 잡히는 분위기를 깨버리고는 했다. 그러길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같이 지낸지도 벌써 몇 달. 케일은 그런 카산드라에게 적응했고, 이제는 어떻게 틈에 파고들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과 함께인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날이에요.”

카산드라는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굳었다. 당황했다는 표시였다. 케일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고는 볼에 입을 맞췄다. 카산드라는 엉겨 붙는 케일을 떼어낼 생각도 않고 그의 무게가 저를 옆으로 기울이도록 가만히 놔뒀다. 얼굴에 열이 올라 괜스레 주변이 더웠다.

“가만 보면 당신...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도 곧잘 하더라. 젊었을 때 애인들 꽤나 울렸겠어요. 선수였겠는데.”

카산드라는 이미 감정을 들키고 난 뒤였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말을 붙였다. 케일은 카산드라의 말을 듣다가 애인‘들’이라는 말에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안 그랬어요.”

“거짓말. 그랬을 리가 없어.”

“내 말을 못 믿는 거예요?”

“말이 안 된다, 이거죠.”

허어. 케일은 불만 가득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방금 전까지 더운 것도 모르고 착 달라붙었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케일은 잡았던 손도 놓고 옆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실망이네요, 카산드라.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믿어주는데, 당신은 아니라니.”

퉁명스러움이 섞인 어조에 카산드라는 케일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면서 옆으로 다가갔다. 옛날 얘기를 하다보면 케일이 기분이 상하는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조심스레 케일의 기분을 살폈다. 케일은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는 배우를 꿈꿨던 사람답게 감쪽같이 연기했다. 카산드라는 그 연기를 믿었다. 사람은 어떻게 달래는 거더라. 그녀는 고민 끝에 손을 들어 멀쩡히 제자리에 있던 케일의 앞머리를 빗어 정리했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교였다. 케일은 제 이마에 닿는 손을 흘끔 보고는 시선을 카산드라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건... 당신이 어리숙해서 그런 거잖아요. 누가 누굴 더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걸?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솜사탕을 소금으로 만든다고 말해도 덥석 믿을 사람이에요.”

“그게 사과에요?”

“어... 아닌...거 같죠?”

카산드라는 옆으로 눈을 데구룩 굴리며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케일은 토라진 척을 더는 못 하겠는지, 다시 미소를 띠며 카산드라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나는 당신이 말하는 거라면 바다가 달다고 해도 믿을 거예요.”

“이거 봐!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애인이 없었을 수가 있어!”

카산드라는 새된 소리로 말하며 케일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아파요, 카산드라! 케일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카산드라를 흘겨봤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앞에 틀어둔 TV에서 자정을 맞아 뉴스를 끝낸다는 소리가 들렸다. 삐, 삐, 삐-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TV를 쳐다봤다.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6월 2일, 00시. 둘은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을 했다.

‘100일.’

카산드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케일이 특별한 날을 보내고 싶다고 한 게 내심 신경 쓰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날에 뭘 하더라.

“케일.”

“응?”

카산드라는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그를 불렀다. 그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카산드라를 바라봤다. 갑자기 푹 낮아진 목소리에 무슨 일이 있나,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케일 로즈먼드 멀리건.”

“갑자기 왜 그래요?”

“아까 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만난 지 딱 100일이 되는 날이잖아.”

“어... 그렇죠.”

“100일.”

카산드라는 다음에 올 말을 알아맞혀보라는 듯 표정으로 재촉했다. 케일은 기대에 찬 파란 눈을 마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데구룩 굴렸다. 맞추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공연히 손을 들어 볼을 긁적이며 머쓱함을 감췄다.

“...이 대화가 어디로 갈지 전혀 감이 안 잡히네요. 카산드라, 내가 눈치 없는 거... 알죠?”

케일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카산드라의 눈치를 봤다. 분위기를 잡겠답시고 정리한 카산드라의 표정은 케일의 말에 천천히 풀어지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아하하, 알죠. 알고말고. 그냥- 아직 청혼을 할 때는 아니지만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카산드라는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청혼? 케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연인을 바라봤다. 방금 청혼이라고 한 건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람. 얼떨떨함을 숨기지 않는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푸스스 웃으며 케일의 왼손을 찾아 쥐었다. 케일의 손은 제 손이 폭 담길 만큼 크고, 따뜻했다. 얇은 손가락이 그의 손끝을 가볍게 감쌌다. 카산드라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언뜻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케일을 바라봤다.

“사랑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살인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카산드라는 진지하게 고백했다. 케일은 잡힌 손을 꿈지럭대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불안한 웃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꼭...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요?”

“왜요?”

“그야, 당신이 말하면 진심인 거 같으니까...”

알잖아요. 케일은 웅얼거리며 말을 끝맺고는 카산드라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파란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농담처럼 말했다면 웃어넘길 텐데.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함이 무서워진 나머지 케일은 안절부절 못하는 투로 카산드라에게 물었다.

“장난이죠? 그냥 하는, 그러니까- 비유적 표현. 그런 거죠?”

“아니. 진심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야.”

“카산드라-”

케일은 항의하듯 소리를 길게 늘였다. 카산드라는 고개를 숙이고 잘게 웃었다. 역시 장난이죠? 그렇죠? 하고 묻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카산드라는 웃음 끝에 한숨을 쉬었다. 진지하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케일의 곁에서 웃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 계획은 보기 좋게 수포로 돌아갔다. 카산드라는 케일의 손을 고쳐 잡고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즐기기나 하자는 듯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입에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는 오직 나를 위해서만 죄를 지었지만-”

“또, 또 그렇게 말한다.”

“이제는 당신을 위해서도 지을 수 있어요.”

케일은 허, 실소를 터트렸다. 카산드라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대답을 재촉했다.

“당신은요, 케일? 당신은 어때요?”

“아니, 나는... 알잖아요.”

“같이 선을 넘자고는 안 해요. 내가 넘을 때 망을 봐주는 정도면 충분하거든요.”

“아니, 당신이 선을 안 넘는 경우는 없어요?”

케일은 헛웃음을 지으며 소리 높여 물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세상 그 누가 이 기이한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느낀 당혹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질문하는 목소리에 삑, 이상한 고음이 섞여 나왔다. 카산드라는 빙글빙글 속모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살다 보면 알 수 있겠죠.”

케일은 허탈한 표정으로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말리는 것도 포기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요, 케일. 카산드라는 속으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이상, 이런 나도 견뎌야만 하는 걸. 카산드라는 그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케일 로즈먼드 멀리건.”

케일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요, 카산드라 빈센트 왓슨?”

“Will you-”

카산드라는 케일의 손을 가볍게 들고는 왼손 약지 위에 남은 희미한 반지 자국 위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질 때, 그의 얼굴은 그녀의 입술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 be my partner in crime?”


“Of course. 당신이 없는 삶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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