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오른 보라는 자연스럽게 고운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그런 보라를 보며, 고운은 인상을 쓰고 매섭게 물었다.

 

 “굳이 여기 앉는 이유가 뭐야?”

 

 복잡한 속내를 달래려 애쓰던 고운은 다시금 흔들리는 머리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근육에 힘을 줘 눈을 겨우 뜬 고운을 보며, 보라는 옆자리에 올려둔 고운의 가방을 슬그머니 안으며 말했다. 

 

 “친구니까!”

 

 그리고 태연하게 궁둥이를 내리고는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만 좀 움직여….”

 

 이러다 토라도 할 것같이 어지러웠다. 보라가 버스에 올라서 여기까지 다가오는 몇 걸음 동안 버스가 파도 위의 배처럼 이리저리 기우뚱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멀미가 멎기도 전에 보라가 자꾸만 버스를 뒤흔든다. 

 

 “어? 너 아파?”

 “왜?”

 

 보라는 얼굴을 고운의 코앞까지 가져와 고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냥 잠시 머물다 갈 것이지…. 보라의 손은 고운의 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올려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담았다.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땀이겠지. 여름이니까….”

 “아닌데….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분장했잖아.”

 

 고운은 한숨마저 쉬었다. 그리고 이마에 머문 보라의 손을 힘주어 뿌리쳤다. 

 

 “아야!”

 

 보란 듯이 내쳐진 손을 품에 끌어다가 엄살 피우는 보라를 보고, 고운은 다시 한숨 쉬었다.

 

 “엄살은….”

 “진짜 아픈데….”

 

 히죽 웃는 보라의 입가에 번진 립스틱을 보며, 고운은 다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입술이나 좀….”

 

 그리고 보라의 입술만 보며, 엄지로 번진 립스틱을 지웠다. 그런 고운의 손길에 눈을 가만히 감고 자신을 맡긴 보라가 고운의 손이 멀어짐과 동시에 눈을 떴다. 마치 만우절 같았다. 꼭 그런 기분에, 멍청이가 되는 기분에 고운이 먼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아까 왜 웃었어?”

 “지금? 아니면 아까? 버스 타기 전인가? 그 아까의 아까야? 어디서?”

 

 말장난하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말을 늘어두는 보라를 보며, 고운은 한숨을 쉬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무대에서….”

 “아! 상 받으러 올라갔을 때? 아니면 그 전에?”

 “야! 너는 무슨 애가!”

 

 버럭 소리를 지른 고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몇몇이 몸을 돌려서 뒤를 살폈다. 고운은 앞쪽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더욱 낮췄다. 앞자리 등받이에 무릎이 닿은 지 오래고, 이제 고운은 거의 눕다시피 했다. 

 

 “알겠다.”

 

 그런 고운의 코끝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던 보라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하…. 왜 웃었냐고….”

 

 고운의 힘 빠진 질문 앞에서 보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냥, 좋아서.”

 “뭐가 좋아? 야, 너는 그렇게…. 아…. 내가 그렇게 한 거…. 괜찮아?”

 

 굳이 파고들지 않아도 될 텐데 애써 캐묻는 고운을 응시하던 보라가 말했다. 

 

 “응. 사랑이잖아.”

 “뭐?”

 

 다시 높아진 목소리. 앞에 앉은 실장이 ‘잠 좀 자자!’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보라마저 받아쳤을 것이다. 보라는 귀가 먹먹해졌는지 검지로 귓구멍을 살짝 막았다 떼며 말했다. 

 

 “소리 좀 그만 질러. 여기가 무대냐?”

 “사랑이라니?”

 “그러면 아니야? 연극이잖아.”

 

 고운은 세상이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닐까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무슨 말일까? 어떤 의미일까? 사랑한다는 말인가? 아닌가?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연극….”

 “응. 연극이었잖아. 나는 그래서 괜찮았어.”

 

 맑게 히죽 웃고 난 보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좀 쉬어.”

 “어디가?”

 “조오오오기. 앞에 자리 있길래.”

 

 고운은 보라를 선뜻 잡지 못했다. 무대 위, 엄지를 치워 입맞춤하던 고운은 어디 간 걸까? 무대 위에 남겨두고 온 것처럼 고운은 팔뚝이 시렸다. 보라가 조심스레 걸어가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고, 정수리만 보이는 아이가 보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

 

 탄식했다. 고운은 연지를 보며 웃는 보라의 옆모습을 확인하고, 할 말을 잃었다. 이 모든 복잡함은 자기만 가진 것 같았다. 보라에게 아까의 입맞춤은 그저 연극이었을 뿐이었을까? 고운은 다시 떠오르는 질문을 저 아래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학교에 도착한 버스는 교문 밖에 멈춰 섰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 고운은 반쯤 왔을 때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눈을 뜨니 시장기가 몰려왔는데, 눈을 뜬 고운의 가방 위에는 젤리 한 봉지가 올려져 있었다. 누가 두고 갔을지 너무 잘 알아서, 연지에게 내밀었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고는 뜯지 못한 채 주머니에 다시 넣은 젤리였다. 연지 옆으로 홀라당 가서 앉은 보라가 얄미움과 동시에 젤리가 든 비닐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여기저기 보여주던 보라가 귀여웠다. 잠들기 전에 본 마지막 모습이 팔을 위로 뻗어 젤리를 흔들던 보라의 모습이라 그럴까? 고운은 잠들어서도 보라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고운 앞에 아이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지도 교사는 이제 막 내려오는 고운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했다. 

 

 “얘들아, 우리 오늘 고기 먹으러 갈 건데…. 아까 너네 너무 흥분해서 못 들었을까 봐 다시 말할게. 밥 먹고 갈 사람 손 들어!”

 

 보라를 포함한 절반은 손을 들었고, 고운을 포함한 절반은 손을 들지 않았다. 보라는 손을 든 채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더니, 고운과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 가?’ 질문이 귀에 들리는 기분이 들자. 고운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 틈에 뒤섞여서 연신 고운이 선 곳을 돌아보는 보라를 알았지만, 고운은 데리러 오기로 한 어머니를 기다리기로 했다. 여름의 해는 길기도 길어서 이제 막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 해가 넘어가면 어둠이 내리고, 지금의 열기는 한풀 꺾일 것이다. 

 

 교문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고운의 어머니는 주로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고운이 나오면 언제나 어머니가 끌고 다니는 검은 세단이 교문에서 한 골목 떨어진 곳에 서 있고는 했다. ‘연극이 언니’라 불리는 금비를 만날 때, 그보다 더 전에도, 그 이전 사람도…. 이런 고운의 환경을 불편하게 여겼다. 고운이 자라며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은 그들이 보기에 답답해 보이는 행동들이었다. 어머니의 선택처럼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기숙형 사립 학교로 진학했다면, 고운은 보편적인 삶에서 더욱 동떨어졌을 것이다. 

 

 고운은 교문 앞에서 기다리라는 연락에도 발걸음을 자연스레 옮겼다. 비탈진 교문 앞보다 한 골목 아래의 작은 공터는 공용 주차장으로 쓰였고, 고운의 어머니처럼 딸을 데리러 온 이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고는 했다. 소문에는 학교 땅이라는데, 십몇 년을 그대로였던 것을 보면 맞는 말 같았다. 고운은 그곳으로 향하며, 보라가 아닌 금비를 떠올렸다. 

 

 어두운 밤, 가로등 빛에 의지해 함께 걸어 내려오면 금비는 자랑스럽다는 듯 좌우를 둘러보고는 했다. 고운은 검은 세단이나 아버지의 하얀 세단을 예상치 못한 순간, 의외의 곳에서 마주칠까 두리번거렸는데…. 이처럼 직전의 연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투성이였다. 

 

 고운에게는 자신이 다니던 사립 중학교와 다른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금비가 필요했고, 금비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잘생긴 트로피가 필요했다. 필요 때문에 시작된 만남이라는 공통점 외에 그 어떤 것도 같은 방향은 없었다. 고운의 외모는 변함이 없었기에 금비가 원하는 점은 날이 갈수록 견고해졌지만, 학교에 서서히 적응한 고운에게 금비는 그저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자와 연애는 처음이었고, 이마저도 금비의 끈질긴 구애 끝에 성사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쩐지 비밀스러워지는 관계. 그 중요해 보이는 관계에 굳이 금비를 끼워 넣고 싶지 않기도 했다.

 

 금비와 만나는 매 순간이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순간은 답답했다. 틈만 나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 들고, 고운의 맨살을 만져보려 시시때때로 타이밍만 노리던 금비. 헤어질 때는 자존심 때문에 고운을 사랑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저 외로워 만났다고, 학교에서 제일 반반했고, 반반한 애 중에 자신이 만나보지 못한 몇 안 되는 아이라 만났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던 금비였다. 그래서였을까? 고운의 연애 후기는 짤막한 한 줄 평에 그쳤다. 

 

 ‘시간은 잘 갔다.’

 

 비어있는 공터에 도착한 고운은 매미 소리가 잦아든 것을 느끼며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정확히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교문에서 이곳까지 오 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다섯 달은 족히 걸린 기분이었다. 불과 다섯 시간 전의 무대가 떠올랐다. 세 시간 전에 오른 버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도 떠올랐다. 

 

 연극이었다는 말. 

 

 불과 넉 달 전에 자신이 보라에게 했던 말이지만, 이토록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말일 줄이야. 흡사 멍이라도 든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딸.”

 

 창문을 내리며 팔을 내민 어머니를 따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고개를 든 고운을 보고, 고운의 어머니는 미간을 좁혔다. 

 

 “힘들었지?”

 

 내리막길을 내려가자마자 대로로 합류하는 구간에서 잠시 멈춘 고운의 어머니는 내내 입을 꾹 다문 고운을 보며 물었다. 고운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고운의 어머니는 들리지 않게 코로 숨을 ‘후’ 내쉬며 핸들을 돌렸다. 차가 대로에 오르고, 우회전, 직진하다 좌회전하고 다시 직진하면 나오는 구청. 구청을 마주하고 우측면에 있는 주택 단지. 익숙한 길을 차로 지나면서 고운은 보라를 떠올렸다. 하필 ‘힘들었지?’라는 질문을 들은 곳이 보라와 함께 갔던 분식집 앞이라 그랬을 것이다. 

 

 “엄마.”

 “응?”

 “우리 대상이야.”

 “그래? 그거 학생부에도 남지?”

 “응. 수상이니까….”

 

 고운은 수상의 소감보다 기록을 먼저 묻는 어머니를 보며, 다시 말했다. 

 

 “엄마, 나 배우 할까?”

 

 집 앞. 주차장으로 향하는 작은 문 앞에서 차를 세운 어머니는 오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의대 가서 배우 해.”

 “그냥 배우는? 연극영화과 이런 곳은?”

 

 어머니는 고운의 번져버린 눈 화장을 검지로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 

 

 “차고운, 네가 원하면….”

 

 뒷말을 아낀 어머니와 함께 보라가 ‘마당’이라 부른 곳을 가로질러 현관문 앞에 선 고운은 집에 아버지가 있는지를 물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웃었고, 모녀는 고요한 집으로 발을 옮겼다. 

 

 같은 시각. 보라는 회식 자리에서 지도 교사가 넘긴 ‘대상’ 상장을 받아서 들었다. 대표로 하나만 받은 상장은 학교 중앙 현관의 장식장에 큰 트로피와 함께 들어갈 것이다. 기념용으로 제작된 작은 프로피와 상장은 아마 다음 주 중에 학교로 전달될 것이다. 그 전에 대상의 영광을 느끼고 싶었던 아이들은 저마다 ‘대상’이라는 글자를 얼굴 옆에 두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보라도 한껏 웃어 보이며 사진을 찍었고,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대상을 받았다며 신이 난 보라에게 보라의 어머니가 한 질문은 고운의 어머니와 달랐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무대에서 긴장도 안 했고, 나 완전 연기 잘했어.”

 “잘했네. 보라야, 이따 집 들어오면 할 얘기 있거든? 언니 얘기인데…. 너무 늦기 전에 들어와. 오늘 피곤했을 텐데 밥 먹자마자 택시 타고 와. 응?”

 

 차분한 목소리. 보라는 혼나기 전과 비슷한 분위기의 목소리에 의문을 품었지만, 별일 아닐 거로 생각하고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고기도 혼자 이 인분을 먹고, 탄산음료도 잔뜩 마시고, 밥도 한 공기를 싹싹 비워낸 보라가 부른 배를 안고 들어간 집에서 들은 소식은…. 조금 다른 성격의 부른 배 이야기였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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